33화 너 지금 실수하는 거야
“끄아악!”
“무, 뭐… 큭!”
사방에서 쏟아지는 화살에 용병들은 제대로 된 저항도 못 해보고 쓰러졌다.
둘은 죽고, 한 명은 피를 흘린 채 바닥을 기었다.
잠시 후, 갈대숲 사이에서 활을 멘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스락거리던 인기척들이 저들이었다.
새로 흘러들어 온 도적 떼였는데, 며칠 전부터 갈대숲 주변에 덫을 놓고 금품을 털거나 사람을 잡아갔다.
두목으로 보이는 자가 성큼성큼 모습을 드러냈다.
우람한 덩치를 지닌 녀석이었는데, 땅속에서 나온 여인을 보자 헤죽헤죽 웃으며 여인에게 달라붙어 아양을 떨었다.
서너 번 본 광경인데 저 물고 빠는 행동은 영 적응이 안 된단 말이지.
그나저나, 실험체 감옥에서 도적질이라.
내 눈에는 철창에 갇힌 실험용 쥐가 재롱을 떠는 것으로 보였다.
‘다 부질없는 짓이지.’
이곳 처지를 아직 몰라서 벌거숭이처럼 놀고 있는데, 조만간 사라질 녀석들이었다.
전처럼 무시하고 지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대화 소리가 내 발걸음을 잠시 세웠다.
“오! 이게 뭐야. 묵직한 금덩이잖아!”
“끄윽! 다, 다 드리겠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이 금덩이에 뭐라고 적혀 있는 거냐? 글 읽을 줄 아는 사람?”
“마르샤 가문이라고 적혀 있는뎁쇼?”
“마르샤? 대상인이잖아?”
“혹시 대상인의 직인 같은 거 아닐까요? 딱 봐도 금패 같은데.”
“직인? 그 귀한 게 왜 이 녀석 품에 있어. 가짜 아니야?”
“글쎄요. 금은 진짜 아닙니까?”
“맞아.”
금패를 살짝 물어본 두목이 고개를 끄덕이자, 도적들이 단검을 들고 용병에게 다가갔다.
주, 죽는다!
용병은 묻지 않아도 모든 것을 토설했다.
“저, 저희는 마르샤 대상인이 고용했던 용병들입니다! 그 물건은 죽은 대상인의 품에서 훔쳐 온 겁니다!”
“대상인이 죽어? 네깟 놈들이 어떻게?”
“저, 저희가 한 짓이 아닙니다.”
“그럼 누군데?”
“…블라이어가의 기사들.”
블라이어가(家)의 기사들.
학살자 가문의 기사란 소리에 내 몸은 본능처럼 움직였다. 난 갈대숲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카멜 블레이저의 소식이라.
이건 못 참지.
바스락― 바스락―!
거칠게 흔들리는 갈대의 움직임.
“누, 누구냐!?”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도적들이 다급히 몸을 틀고 시위를 당겼다.
난 양손에 단검을 움켜쥐었다. 마나를 머금은 단검이 미세하게 울어댔다.
“소, 쏴!!!”
갈대숲을 뚫고 나온 순간, 도적들이 시위를 놓았다. 매서운 기세로 화살 세례가 쏟아졌다. 입을 꽉 다문 나는 단검을 벼락같이 휘둘렀다.
카카카캉―!
“……!”
부서지고 튀어 오르는 화살 파편들.
화살을 튕겨낸 나는 파편 사이로 매섭게 돌진했다.
“고, 괴물!”
“…한 놈뿐이다! 공격해!”
칼 일행 앞에선 고작 2성뿐인 실력이다.
하지만,
‘도적들 앞에선 괴물이지.’
큰 도끼를 쳐들며 바락바락 외치는 두목이 보였다.
난 단검을 들어 올렸다.
아지트로 가기 전에 잠깐 볼일이 생겼다.
* * *
“끄아아악!”
“……으흑!”
스무 명의 도적 떼가 무너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도 예상했던 바였다.
다만, 의외인 건 도망치는 도적들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피를 흘리면서도 그들은 악착같이 싸웠다. 저번에 벌거벗겼던 도적 떼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뭐지, 이것들?
단순한 도적과 느낌이 달랐다.
겁을 줘서 내쫓으려고 했는데, 의도치 않게 손에 피를 많이 묻혔다.
습격자인 내가 잠시 당황했을 정도.
결국, 난 두목을 죽여야 했다.
푹―!
“크, 크룩!”
두목의 목에 박힌 단검을 거칠게 뽑아내며 물러났다.
피로 질척이는 바닥.
주변은 고통과 신음으로 가득했고, 도적들은 피투성이가 된 채 일어나지 못했다.
대부분 살려놨는데, 두목의 경우는 마나를 쓰는 노련한 놈이라 어쩔 수 없었다.
난 두목의 품을 뒤졌다.
붉은 포션.
전리품으로 회복 물약을 챙긴 뒤 베인 상처에 천천히 부었다.
워낙 매섭게 달라붙어서 팔과 다리에 자잘한 상처들이 생겼다.
시체 앞에서 상처 치료라니, 나도 이 세상 사람이 다 됐다.
죽은 두목 옆에서 벌벌 떨고 있는 여인이 보였다.
“저, 전 시키는 대로만 했어요! 정말이에요!”
“…….”
“사… 살려주세요!”
줄곧 도적 떼에게 잡혀 끌려다녔다는 기구한 이야기.
울고 불며 목숨을 구걸하는데, 난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봤다. 잠시 후, 난 주변을 둘러보곤 한 곳을 조용히 가리켰다.
“쭉 가면 큰 산채가 보일 거다. 가라.”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더는 이곳으로 오지 마.”
고개를 수차례 끄덕인 여인은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도망치듯 사라졌고, 그런 여인을 보며 고민하던 나는 생각을 털고 용병에게 시선을 돌렸다.
애초에 목적은 이 용병이 가진 정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다가가자, 용병은 새하얗게 질린 채 바닥을 박박 기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묻는 말에만 대답해. 그러면 살려준다.”
“네, 네!”
용병을 통해 블라이어 기사들의 정체를 파악했다.
마르샤 대상인의 저택을 습격하고 불태운 뒤 사라진 기사들.
인상착의를 들어보니, 리옹이 이끄는 카멜의 친위대들 같았다.
‘마르샤가 수집하던 아티팩트를 노린 거야.’
학살자가 잠들어 있는 고대 아티팩트 사냥에 나선 것이다. 이미 예상했던 내용이라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불탄 저택 위치를 들어보니, 내가 알려준 ‘그’의 교섭 장소와 멀지 않은 곳이었다.
‘손에 닿는 것들은 모조리 쓸어 담고 있겠지.’
학살자의 성격상 대부분 강탈로 이뤄질 것이고, 마르샤의 경우처럼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갔을 것이다.
난 그 횡액에서 살아남은 용병을 바라봤다.
“용케 살아남았네.”
“저, 전 숲으로 도망친 것밖에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러니까.”
라웁 숲 쪽으로 도망치다니 운이 좋은 놈이었다.
‘카멜이 라웁 숲 접근 금지령을 내렸을 테지.’
도미닉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기에 충돌을 피하려는 것이다.
도미닉이 날뛰기 시작했으니, 슬슬 학살자도 이에 맞춰서 일을 도모하려고 할 텐데.
내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허억!”
용병의 호흡이 갑자기 가빠지더니, 얼굴이 시꺼멓게 죽어갔다.
녀석의 운은 여기까지였다.
“크웩!”
가슴을 움켜잡더니 검은 피를 쏟아냈다. 스스로 목을 움켜잡고 몸을 꼬며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러댄다.
난 쓰게 웃으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역시, 쉽게 가긴 글렀나?
잠시 후, 몸을 뒤틀던 용병이 축 늘어졌다.
갑작스럽게 용병이 죽어버린 상황이지만, 난 침묵했다.
어째 싸한 느낌이 들더라니.
“깔깔깔깔!”
뒤쪽에서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경박한 웃음이었는데, 조금 전 겁먹고 도망친 여인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찢어진 옷 대신 검정 로브를 걸치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왜 돌아왔지?”
“더는 눈치 볼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죽은 용병처럼 내게도 무슨 꼼수를 부린 모양인데, 맞나?”
“눈치가 빠르네. 곧 내게 살려달라고 빌게 될 거야.”
“그건 뭐지? 나랑 인형 놀이 하자는 건 아닐 테고.”
그녀의 손에는 작은 인형이 두 개 들려 있었는데, 하나는 갈가리 찢겨 있었다.
여인은 기분 좋게 웃으며 잔혹하게 죽은 용병과 찢긴 인형을 가리켰다.
“어때? 다음은 네 차례인데.”
“흑주술사였나?”
“흥! 알아도 이미 늦었어.”
내가 단검을 들어 올리자, 여인은 남은 인형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순간, 내 몸을 옥죄는 감각이 느껴졌다. 역시나, 그 이질적인 기운이 흑주술과 관련되어 있던 거였나?
주술을 걸려면 매개체가 필요하다. 그 매개체는,
“도적들의 무기에 저주를 걸어놨구나.”
“알아도 이미 늦었어. 주술이 완성됐거든.”
“저 도적들도 세뇌한 건가? 어쩐지 너무 겁대가리가 없더라.”
“멍청한 건지, 겁이 없는 건지, 상황 파악이 전혀 안 되나 보지?”
“…….”
“기회를 줄게. 넌 저 쓰레기들보다 쓸만할 것 같거든.”
“기회?”
그녀는 작은 나무 상자에서 작은 벌레를 꺼냈다.
꿈틀거리는 벌레.
시발, 갑자기 기분이 더러워졌다.
“먹어. 그럼 목숨은 살려주지.”
“…너 지금 실수하는 거야. 내가 벌레 먹인 놈들에겐 악감정이 아주 많거든.”
“죽고 싶나 봐?”
“아줌마는 내 취향이 아니라서 말이지.”
그녀의 입가가 비틀렸다.
인형을 움켜잡은 여인의 손이 검게 물들었다.
그 순간 내 몸속에 있던 이질적인 기운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저주의 기운.
그 기운이 내 몸을 지배하기 위해 꿈틀대자, 난 고대 문양을 개방했다.
처음 도적들의 무기에 상처를 입었을 때, 이질적인 기운이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물론, 큰 걱정은 들지 않았다.
이것보다 더 끈적하고 더러운 마석의 기운을 흡수하다 보니, 문양의 사용 방법에 감이 오기 시작했거든.
난 문양의 힘을 한 단어로 정의했다.
정화(淨化).
손등에서 황금빛이 쏟아진 순간, 날뛰던 기운이 짓눌리더니 삽시간에 사라졌다.
“끼아아악!”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인형을 떨어트렸다. 피를 울컥 토해내며 비틀대는데, 주술이 깨진 반발력에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내가 천천히 다가가자, 그녀는 두려운 듯 물러났다.
“바, 방금 그거 뭐지? 대체 뭘 한 거냐!?”
처음 떨면서 그녀가 살려달라 빌었을 때, 겁먹은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때 느꼈다. 이년 뭔가 있구나.
“연기 연습 좀 더 해야겠어.”
“벌레 주제에!”
그녀의 두 눈이 붉게 물들었다.
도적들처럼 날 세뇌하려는 주술이 펼쳐졌다.
눈빛을 마주한 순간, 진득한 두통이 느껴졌다.
이거 어디선가 많이 당해봤던 건데.
카멜의 감옥에서 흑주술사들에게 둘러싸였던 악몽이 떠오르자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서서 대치한 것도 잠시, 여인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질리며 일그러졌다.
반대로 내 표정은 여유롭게 풀렸다.
정신 압박이 렌구아보다 훨씬 약했다. 계속 내 정신을 압박하려고 한다면 그 결과가 불 보듯 뻔해서 그녀를 제지하려고 빠르게 움직였다.
내 행동에 조급함을 느낀 걸까.
그녀가 결국 모든 힘을 개방했다.
“주, 죽어!!!!!!”
퍼억―!
그녀의 머리가 터져버렸다.
몸체만 남은 시신은 곧 축 늘어졌다.
난 죽은 여인을 잠시 응시했다.
정신 방벽.
타인의 정신을 지배하고 조롱하려는 흑주술사들에겐 천적 같은 능력이었다.
빌어먹을, 물어볼 게 있었는데.
“하…….”
난 짙게 한숨을 내쉬곤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두려움에 흠칫 떠는 도적들이 보인다.
그녀가 죽자, 세뇌가 풀리면서 제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개 같은 년. 그냥 가지 왜 돌아와서.’
머리 없는 그녀에게 원망을 쏟아내던 나는 단검을 움켜잡고 도적들에게 걸어갔다.
칼 바스타인에게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특히, 피의 기준.
이곳에서 내 힘을 본 자들을 살려둘 순 없다.
내 생존과 직결된 일이었으니까.
* * *
“늦었네?”
“일이 좀 있었습니다.”
“많이도 죽였어.”
“어떻게 알았습니까?”
“피 냄새가 짙어서.”
“피 냄새?”
칼의 말에 몸 냄새를 킁킁 맡아봤다. 물가에서 씻고 온 상태인데도, 칼은 정확하게 피 냄새를 맡았다.
개코인 건가?
아니면 위기 감별사의 능력?
난 조금 전 벌어진 일을 칼에게 간략히 전했다.
“실력 있는 흑주술사는 아니었던 모양이야. 이딴 곳에 흘러들어 와서 인간 사냥이나 할 정도면. 이름도 몰라?”
“아, 그게…….”
뭘 물어볼 틈을 줬어야지. 그렇다고 정신 방벽에 대해 말해줄 수는 없으니 어색하게 머리만 긁적였다.
칼은 내가 건넨 황금패를 살펴보고 있었다.
“마르샤가의 직인이 맞아. 욕심 많은 돼지였는데, 이렇게 골로 가버렸네.”
“마르샤 대상인을 아십니까?”
“암살 의뢰를 몇 번 받은 적이 있어. 골동품 수집에 광적인 늙은이였지.”
불행하게도 그 골동품 중에 카멜이 눈독 들인 물건이 있었다.
카멜 블레이저의 상징과도 같은 물건.
‘용아(龍牙)의 망토.’
카리스마형 군주인 녀석의 존재감을 더욱 부각시켜주는 아티팩트였다.
우선순위로 강탈할 아티팩트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범인이 블라이어의 성주라고? 네가 말했던 암살 대상?”
“네.”
“주변 귀족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텐데. 마르샤가 보호비로 뿌린 돈이 제법 많거든.”
귀족들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쏠렸을 때를 노렸을 것이다.
지금쯤 도미닉이 풀어놓은 키메라 군단에 정신이 없을 테니까.
직인을 내게 건네며 칼은 입맛을 다셨다.
“바깥도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모양인데?”
“키메라들의 습격을 기회로 보는 이들이 나타난 거죠.”
정확히 이들이 아니고 학살자의 독식이라고 봐야 했다. 이 사건을 통해 가장 큰 이득을 챙기는 인물이니까.
“엮일 일 없는 블라이어 성주 따윈 신경 쓰지 말고, 일에 집중하자고.”
“뭐, 그러죠.”
“저리 가. 피 냄새 때문에 어지러우니까.”
“수십 년 경력의 암살자가 할 말은 아니네요.”
난 자리로 돌아왔다.
들판에 누워 잠시 생각에 잠겼다.
칼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학살자와 엮일 일이 없다고?
‘아주 제대로 엮여있지.’
칼은 자신의 미래를 모르니 하는 말이다. 알았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조만간 학살자가 움직일 거야.’
이건 챕터1 주인공인 학살자의 세력 성장에 엄청난 도움을 주는 메인이벤트, ‘백(百) 개의 심장’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