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한 번쯤 믿어보시죠
“이상해.”
“뭐가 말입니까?”
“도미닉이 베네타 주변을 휘젓고 있다면 지금 흘러들어 오는 인간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이종들보다 인간들의 유입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고.”
“숲 전역을 키메라들이 휘젓고 있다고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라웁 숲 전역에 키메라가?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라웁 숲은 토바른 중심부에 자리한 거대한 숲이다. 토바른 3강 외에 수많은 영지가 라웁 숲 외곽에 자리하고 있는데, 지금 도미닉이 하는 짓은 한마디로,
“놈이 토바른 전체와 싸우겠다는 말과 같아. 이해돼?”
“키메라의 수를 정확히 아십니까?”
“수백 마리는 되겠지. 그래도 숲 전역을 누비기엔 터무니없이 적어.”
“이상하지 않습니까?”
“뭐가 말이지?”
“한 마법사가 그 많은 키메라를 제작하는 동안, 어째서 아무도 이를 눈치채지 못했을까요?”
“…….”
“이곳은 들어올 순 있어도 나갈 순 없습니다. 잡혀 온 후에야 키메라의 존재를 눈치챈다는 뜻이죠.”
“그게 키메라의 수와 무슨 상관이지?”
“만약 이런 곳이 한 군데가 아니라면?”
“…뭐?”
칼이 놀란 듯 벌떡 일어났다.
내가 말한 의도를 드디어 알아챈 것 같았다.
“이 같은 곳이 한 곳이 아니라고?”
“숲 전체, 도적들의 씨가 말랐다고 했죠? 근데 저번에 잡혀 온 도적들은 천도 안 되는 수였습니다.”
“…….”
“전역의 어중이떠중이 도적들을 다 합친다면 만 단위는 넘을 겁니다. 숲 전역의 도적 떼가 사라졌는데, 잡혀 온 숫자가 천 명도 안 된다는 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곳 말고 다른 곳으로 끌려갔다는 건가?”
“최소 다섯 군데 이상,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라웁 숲에는 실험체 감옥이 다섯 군데 이상 존재했다.
수거를 위해 들이닥친 키메라의 수보다 바깥에 다섯 배 이상의 키메라 군단이 더 있다는 뜻이고, 그 수라면 충분히 라웁 숲 전역을 커버할 수 있었다.
칼은 내 말에 망치를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 같은 장소가 또 존재한다고?
생각지 못했다.
‘작은 소문이라도 들렸을 법한데?’
다섯 군데 이상이라면 실종된 이들이 상당했을 텐데, 왜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지?
칼은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도적이야. 도적 떼를 눈가림으로 이용했어. 숲에 깔린 도적 소굴만 해도 엄청날 테니까. 소문이 나더라도 도적들의 짓으로 감춰진 거야.”
“그 도적 떼조차 현재는 모두 몰살당한 상태죠.”
“빌어먹을, 더는 숨지 않겠다는 뜻인가? 실력에 자신이 있는 거라고, 웬만한 전력으로는 자신을 잡을 수 없다고 판단했겠지. 네 말이 맞아. 그럼 지금 잡혀 온 이들의 수가 이해가 돼. 키메라가 그렇게 많았다고?”
“더 많을지도 모르죠.”
“…제길, 근데 왜 도미닉은 베네타로 간 거지? 이종과 관련이 있는 건가?”
난 속으로 깜짝 놀랐다.
나야 소설 내용을 본 것이니, 도미닉의 상황을 대략적으로 알고 있지만, 칼은 아니었다.
내가 준 힌트만으로 칼은 도미닉에 관한 퍼즐을 사실에 가까이 맞히고 있었다.
힌트를 주면 바로 알아채는 통찰력.
사람 보는 눈이 까다롭다는 학살자가 칼을 끝까지 곁에 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군이면 누구보다 든든하고, 적이면 무조건 죽여야 하는 상대.’
이 아저씨와 더 친해져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게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이었으니까.
“탈출 후에 기쁨이 아니라 목숨을 부지할 궁리부터 해야겠어. 네 말대로라면 숲 전체에 키메라들이 잔뜩 깔렸다는 뜻이니까.”
“아까 말했던 탈출은 뭡니까? 고민을 많이 하던 눈치였는데.”
“네 능력을 이용해 볼까 했지.”
“능력이요?”
“키메라에게 붙잡힌 후 탈출할 계획을 세워봤어. 네 능력 범위 안에선 키메라들을 떼어놓을 수 있을 테니까.”
키메라를 매개체로 마법진을 빠져나간 후 능력을 사용해 숲을 벗어나는 방법.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나도 알아.”
잡힌 일행이 다 같이 움직인다는 보장도 없었고, 정신 계열의 키메라나, 저번 슬라임처럼 특수한 놈에게 잡힌다면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그 무엇보다,
‘도미닉에게 내 능력이 노출되면 곤란해.’
키메라에게 천적이 될 수 있는 능력.
잘못 노출되면 최우선 제거 대상이 될 수 있다.
진짜 뭐 빠지게 도망만 다니다가 뒈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능력은 가장 결정적인 상황에서 써야 한다.
한 번에 심장을 꿰뚫는 날카로운 비수처럼 말이다.
단순히 도주용으로 노출하기엔 너무 아까웠다.
하지만, 칼이 말해준 방법이 전혀 쓸모없는 건 아니었다.
안 걸리면 그만이었다.
그 조건은 간단했다.
“혼자 탈출하는 건 가능하겠네요.”
“…….”
내 말에 칼은 잠시 침묵했다. 그도 느낀 것이다. 내가 탈출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칼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배신?’이라는 물음표가 머리 위로 그려졌는데, 난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 그렇게 의리 없는 놈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치고 뒤통수 안 치는 놈이 없었지.”
“험하게 사셨네요.”
“이 바닥이 아주 개똥 같아서 말이지. 괜히 말했어.”
하긴, 이 세상이 좀 팍팍해야지.
“한 번쯤 믿어보시죠.”
“이곳을 탈출한다면 믿어보지.”
“탈출할 수 있을 겁니다.”
고개는 끄덕였지만, 칼의 표정이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날 강제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난감해졌다고 판단했겠지.
‘탈출에 도움이 될 사건이 발생할 텐데. 그게 뭐지?’
저리 세상 다 산 노인처럼 탈출을 고민하고 있지만, 칼은 결국 이곳을 벗어나 에토르로 향한다. 지금 칼의 반응을 보니, 탈출에 대한 뚜렷한 방법이 없어 보였다. 스스로는 탈출이 힘들다고 판단했으니, 내 능력을 이용할 방법을 떠올린 것이겠지.
설마 탈출을 도와주는 조력자가 있었나?
아니면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사건?
의문을 품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디 가?”
“일주일 내내 누워 있었잖아요. 몸이 굳어서 풀어줄 겸, 갈대밭으로 갑니다.”
“오래 머물지는 마. 아무래도 곧 터질 것 같으니까.”
“이제 열흘 됐는데, 벌써요?”
“말했잖아. 흘러들어 오는 수가 심상치 않다고. 당장 키메라들이 들이닥쳐도 이상할 게 없어. 몰려오기 전에 대비해놔야 해.”
“알겠습니다.”
엘프가 나타나면 곧장 알려달라는 말을 남기고 난 아지트를 벗어났다.
해야 할 일과 생각해야 할 일이 생겼다.
정리가 좀 필요했다.
* * *
“헉. 헉. 헉….”
거친 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갈대들이 바람과 부딪히며 바스락거렸다. 듣기 좋은 소리라 땀이 식을 때까지 귀를 기울이며 잠시 호흡을 골랐다.
일주일 동안 누워있었더니,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몇 차례 더 움직이며 몸을 적응시켜놔야 할 것 같았다.
‘회사 다닐 땐 숨쉬기 운동이면 충분했는데.’
이런 철저한 몸 관리는 살기 위한 발악이라고 보면 된다.
생존 본능이 위대하긴 위대했다.
한숨을 내쉬곤 몸을 일으키며 단검을 움켜잡았다.
지이잉―!
마나에 반응하는 단검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붉은 보석은 이제 소용없을 것 같고.’
이곳에 오자마자 마석부터 흡수해보았다. 2성에 올랐으니, 더 많은 마석을 흡수할 수 있겠단 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기대한 대로 마석을 여럿 흡수했는데도 탈력감이 찾아오지 않았다. 해서 남은 붉은 보석을 모조리 부숴서 복용했는데, 황당하게도 내 기대는 와장창 깨져 버렸다.
그 많은 보석을 흡수했는데도 아무런 자극이 없었기 때문이다.
붉은 보석이 마나 촉매제로서의 역할을 전혀 못 하고 있었다.
‘분명 소설에선 2성까지 통했는데, 뭐가 문제지?’
고민은 길지 않았다.
마석에 문제가 없다면 결국 내 몸이 문제란 뜻이니까.
내 몸뚱이의 마나 감응력.
이젠 이 정도 촉매제론 턱도 없다는 거냐?
그때부터 난 붉은 보석에 미련을 버리고 다른 것에 집중했다.
‘보랏빛 보석은 통하려나?’
샘플로 하나가 있으니, 복용해 보면 효과를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전에 몸을 풀어서 몸 컨디션을 최고로 올려놓을 생각이었다.
저번에 제거한 도적들의 시신 때문인지, 접근하는 존재가 없었다.
눈치 볼 필요 없이 난 마나를 개방하고 갈대숲 공터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땀이 온몸을 적시고 몸이 만족스럽게 풀렸을 때, 난 품에서 보랏빛 보석을 꺼냈다.
붉은 것보다 순도 높은 기운을 지닌 생체 마석.
난 이것에 기대를 걸었다.
푸읍!
입에서 터져 나오는 핏물을 애써 삼켰다.
보랏빛 보석을 빻아 소량을 입에 털어 넣고 벌어진 일이었다. 손으로 양어깨를 꽉 움켜잡고 있었는데, 손톱이 파고들면서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커커커컥!”
결국, 난 피를 한 움큼 쏟아냈다.
쌍코피도 주르륵 흘러나왔다.
어깨에 파인 상처를 의식도 못 할 만큼 고통스러웠다. 신경독에 당한 것처럼 온몸의 신경이 가닥가닥 끊어지는 것 같았다.
‘…시발!’
욕이 절로 새어 나왔다.
붉은 보석은 보랏빛 보석에 비하면 순한 양이었다.
이놈은 흡사 본능에 미친 짐승 같았다.
복용한 순간부터 이성이 흐릿해지고, 마나가 온몸을 갈가리 찢을 것처럼 미쳐 날뛰기 시작하는데, 정신 방벽과 정화 능력이 아니었다면 미치거나, 온몸이 터져서 죽었을 것이다.
이건 인간이 복용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진짜 오늘만큼은 내 능력에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영원할 것 같았던 고통이 사라졌다.
난 질질 흘린 침을 닦을 생각도 못 하고 바닥에 멍하니 엎드려 있었다.
탈력감은 무슨, 전기 고문을 한 시간 정도 받는 것 같았다.
피카츄의 백만 볼트 공격이 이런 맛일까.
“효, 효과는 죽이는데…….”
전보다 진득해진 기운.
몸 안에 휘도는 마나가 제법 거세다.
3성으로 가는 희망을 보긴 했는데, 이 끔찍한 고통을 또 감내해야 한다는 사실에 신음이 절로 나왔다.
남은 양을 보니, 서너 번은 더 가능할 것 같은데.
이것으론 부족하겠지?
쉽게 얻는 것에는 대가가 있다는 건가.
또 복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린 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곤 가루 주머니를 챙겼다.
“……하.”
아지트로 돌아온 나는 한숨과 함께 자리에 철퍼덕 누웠다.
탈력감보다 더 지독한 무력감이 나를 찾아왔다.
보라색 보석을 복용한 후유증.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는데, 지금은 그냥 쉬고 싶었다.
두 눈을 감은 순간, 내 의식은 저편으로 날아갔다.
* * *
“이봐.”
“…….”
“어서 일어나라.”
머리를 세차게 두드리는 감각에 겨우 잠에서 깼다. 부스스 눈을 뜨니, 시퍼런 단검이 내 머리를 겨누고 있었다.
설마 그걸로 때린 거야?
난 눈살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복면을 썼지만, 호리호리한 체구.
한눈에 단검의 주인을 알아볼 수 있었다.
불꽃검 엘튼이었다.
“깨우는 방법 좀 바꾸지? 머리에 구멍 나겠어.”
“몸에 문제 있나? 못 일어나던데.”
“내가?”
“이번에도 안 일어나면 머리에 구멍을 내려고 했다.”
“…….”
이 녀석이라면 진짜 그렇게 했을 거 같은데.
난 한숨을 내쉬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몸을 살피니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다.
약간 피로감이 느껴지는 정도?
마석의 효과는 확실한데, 생각보다 피로감이 심한 모양이었다.
“내가 얼마나 잤지?”
“반나절 정도.”
“머리에 구멍을 낼 정도로 급한 일이 뭔데?”
엘튼은 대답 대신 단검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처음에는 뭔가 싶었는데, 흠칫하곤 청각에 집중했다.
으어― 으어― 으어―
아지트 숲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괴상한 괴음.
듣기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저번에 천여 명의 도적들을 한순간에 쓸어간 재앙의 소리였으니 당연했다.
“……설마.”
내가 엘튼을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키메라들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