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39화 (39/130)

39화 베네타의 재앙, 아레나 후아튼

짝―!

두 뺨을 매섭게 때렸다.

얼얼함과 함께 몽롱했던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상황은?”

“여유가 있는 편이다.”

“코앞에서 키메라 소리가 들리는데?”

사방에서 괴성이 흘러나오고, 숲 전체가 흔들리는 것이 당장에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엘튼은 고개를 흔들었다.

“산채 쪽이 첫 번째다. 우린 그다음이야.”

산채는 가장 피해야 하는 장소라고 칼이 말했었다. 새로 유입된 이들을 미끼로 시간을 버는 장소라 했지?

엘튼의 말처럼 들려오던 괴성은 점점 멀어졌고, 숲의 움직임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잠시 후,

끄아아아악―!

산채 방향 멀찍이서 비명이 하나둘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키메라 군단의 수거 작업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자, 받아.”

엘튼은 내게 보랏빛 병을 건넸다.

베텔의 독이다. 이 독을 복용하고 쥐 죽은 듯 숨어 있으면 키메라의 눈을 피할 수 있다.

칼 일행에겐 목숨 줄 같은 물건.

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물건이었다.

‘사용할 일이 있을까?’

내겐 고대 문양의 힘이 있다.

키메라에게 잡혀갈 걱정은 없을 거란 뜻이며, 오히려 난 이 힘을 통해 키메라를 어떤 식으로 사냥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강해지기 위해선 보랏빛 마석이 더 필요했고, 그 마석을 지닌 키메라는 보통 키메라보다 훨씬 강력했다.

간을 보다가 사냥할만하다 느끼면 시도해볼 계획이었다. 그래서 혼자 움직이는 방향으로 생각을 정리해두었는데, 엘튼이 갑자기 함께하자며 곁에 머물렀다.

“난 숨을 생각이 없어.”

“상관없다.”

“혹시 칼의 명령이냐?”

“널 보호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역시, 엘튼 스스로 이런 판단을 내렸을 리 없지.

난 짧게 한숨을 내쉬곤 칼을 찾았다. 칼은 일행을 빠르게 모으고 있었다.

칼이 이곳을 아지트로 삼은 이유는 이곳에 숨을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칼은 현재 짐을 챙기고 있는데, 이쪽으론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불안했나 보네.’

나 홀로 탈출해버릴까 봐, 엘튼을 붙인 것이다. 아마 엘튼도 그에 대해서 언질을 받았을 거다.

“감시하라냐?”

“…….”

“너한테 말해봤자지.”

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칼에게 걸어갔다. 내가 다가가자 칼은 입맛을 다시곤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왜 왔는지 아는 눈치.

알면서도 붙인 게 분명했다.

신뢰를 보이려면 말보단 행동이지.

“이 팔찌를 벗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어떻게 되긴, 벌레가 죽지 않겠지.”

“다시 심장으로 이동한다거나, 터진다거나 그런 거 없습니까?”

칼이 고개를 끄덕이자, 난 팔찌를 풀어 칼에게 툭 던졌다. 얼떨결에 팔찌를 건네받은 칼은 살짝 벙찐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무슨 짓이야?”

“팔찌는 이따가 다시 받아 가겠습니다. 저번처럼 잊어먹지나 마세요.”

“…….”

힘겹게 칼과 신뢰를 쌓아놨는데, 그 인연을 포기하는 건 어리석은 선택이다. 탈출은 진짜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을 때나 고려할 일이었다.

칼은 말없이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내 행동에 생각이 많아진 표정이었다.

“한 번쯤 믿어보라니까요. 가보겠습니다. 머리털 안 보이게 잘 숨어 계세요.”

“엘튼을 데려가.”

“제가 뭘 할 줄 알고요.”

“이곳저곳 휘젓고 다니면서 도둑질이나 하겠지.”

“암살자 말고 돗자리나 까시죠. 돈 많이 버실 것 같은데.”

“딴소리 말고 데리고 다녀. 나한테 한번 믿어보라고 했지? 엘튼은 내게 그런 녀석이다.”

숨긴 능력을 엘튼에게 보여도 문제가 없을 거란 믿음이었다. 칼이 저렇게 믿을 정도면 입이 무거운 인물이란 소리겠지?

‘하긴 고지식한 성격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긴 하지.’

불꽃검 엘튼은 학살자도 탐을 냈던 인물이다. 하지만 학살자가 내민 그 어떤 유혹도 마다하고 끝까지 칼을 모시며 그 곁을 지켰다.

암살자보단 기사에 어울리는 인물.

데려갈까?

엘튼을 두고 잠시 고민했다.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잖아?’

능력을 숨길 필요가 없다면 혼자보단 두 명이 키메라를 사냥하기 수월했다. 게다가 엘튼은 자신보다 더 강한 실력자.

안전도 보장받고, 힘도 빌릴 수 있는 믿음직한 조력자를 구하는 게 어디 쉬울까.

“알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칼은 미소를 짓곤 팔찌를 내게 다시 던졌다. 멀뚱히 그를 바라보자, 칼은 등을 돌리고 성큼 걸어갔다. 나름 멋져 보이는 퇴장이긴 한데 말이지.

난 그런 칼의 어깨를 다시 붙잡았다.

“왜?”

“제 가방이요.”

“…….”

주술사 도네콜린트를 죽이고 강탈한 가방은 뛰어난 충격 흡수와 방수, 내열 기능이 탑재된 마법 물품이었다.

칼이 유독 탐을 냈는데 살펴본다고 하더니, 지금껏 감감무소식이었다.

“가방이 나한테 있었나?”

“등에 메고 있으면서 그런 말씀 하시면 섭섭하죠.”

“큼!”

달라고 안 하면 끝까지 안 줄 생각이었나 보다.

보라색 마석은 주먹 크기라 보관하려면 가방이 필수였다. 난 가방을 뺏다시피 가져와서 안을 살폈다. 그러곤 칼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내 시선에 칼은 헛기침하곤 품에서 마녀의 목걸이와 마법 스크롤을 꺼냈다.

“도둑으로 전직하실 생각입니까?”

“신기한 물건들이라 잠깐 살펴본 것뿐이야.”

“…….”

“그 스크롤은 뭐에 쓰는 거지? 별다른 마력이 느껴지지 않던데.”

난 진회색 스크롤을 만지작거렸다.

찢는 순간, 나비 떼가 허공을 수놓는 축제용 환상 스크롤.

공격용으로는 1도 상관없는 관상용 마법이 담긴 것인데, 베네타의 마법 상점에서 구매하고 잠시 잊고 있었다.

“생존 물품이요.”

“뭐? 생존?”

“그런 게 있습니다.”

난 스크롤을 가방 안에 쑤셔 넣었다. 혹시나 해서 준비한 건데, 쓸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석궁을 등에 메고, 볼트 꾸러미를 허리춤에 찼다. 칼은 미련이 남은 듯 가방에 시선을 한 번 주고 등을 돌렸는데, 난 그 어깨를 다시 붙잡았다.

“…….”

칼이 말없이 노려보자 난 한 가지를 더 말했다. 이건 단순한 감이었다.

“붉은색 마석은 괜찮은데, 그 외의 것은 모두 제 겁니다.”

칼은 어이없는 눈빛으로 엘튼을 바라봤다. 엘튼이 억울한 듯 고개를 강하게 흔들었다.

칼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돗자리는 내가 아니라 네가 깔아야겠는데? 내가 그 소문에 관심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엘튼을 자꾸 붙여준다고 할 때부터요.”

“그 소문 말이야. 알려준 적이 없는데?”

“저도 귀가 있거든요? 여튼 그렇게 알고 가겠습니다.”

“자, 잠깐만!”

난 칼의 부름을 무시하고 반대편 숲으로 빠르게 달렸다. 뒤를 돌아보니 엘튼이 불만 어린 표정으로 따라붙었다.

시기상 소문이 퍼질 타이밍이기도 했고, 칼이 집요하게 엘튼을 붙이려고 해서 찔러봤는데, 역시나 칼이 생체 마석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학살자가 퍼트린 소문이 칼의 귀까지 들어갔다는 건, 마석에 관한 소문이 에토르에 퍼질 대로 퍼졌다는 뜻인데.’

―마나 각성에 엄청난 효능을 보이는 마나 촉매제.

악마의 보석.

이 소문으로 에토르는 지금 생체 마석 수집에 눈이 돌아간 상태일 것이다.

다만, 10명 중 7명 정도가 광인(狂人)으로 전락해 미쳐 날뛴다는 치명적인 내용이 빠져 있었다.

학살자가 심은 탐욕과 무지의 씨앗이 에토르 영지 내에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에토르에겐 몰락의 징조였다.

왼쪽 손목에 팔찌를 도로 차며 생각에 잠겼다.

‘에토르까지 숲에 진입하면 도미닉은 도주각을 잡을 거야.’

토바른의 3강.

블라이어, 에토르, 베네타의 3방위 압박은 아무리 도미닉이라도 버티기 어렵다.

‘도미닉이 키메라 군단을 한곳에 집결시키고, 계승자의 신전으로 시선을 돌리는 타이밍.’

그때가 내가 끼어들 최고의 타이밍이었다.

난 비명이 터져 나오는 방향으로 더욱 박차를 가했다.

아직 그 타이밍이 도래하려면 시간이 남았다.

그 시간 안에,

‘3성에 올라야 해.’

어둠이 찾아온 밤.

드넓은 숲 그림자 사이로 나와 엘튼은 빠르게 스며들었다.

* * *

에토르에서 하루 남짓 거리에 있는 라웁 숲의 동남쪽 숲.

차르륵―

중년인은 책장을 부드럽게 넘겼다. 안경이 살짝 흘러내리자, 안경을 바로 세운 그는 다시 책에 집중했다.

숲 사이, 작은 바위에 편히 걸터앉아 독서하는 모습만 본다면, 산책 도중 여유를 즐기는 취미처럼 보였다.

하지만,

“고, 괴……! 끄아아악―!”

“사, 살려줘!”

비명이 가득한 숲에서 홀로 책을 읽으며 여유를 즐기는 모습은 눈앞의 참극과 큰 괴리감을 느끼게 했다.

콰작―! 콰자작―!

살점 뜯기는 소리.

핏방울이 안경에 튀자, 중년인은 두 눈을 깜빡이곤 안경을 벗었다. 안경을 로브 자락에 쓱쓱 닦으며 중년인, 아니 도미닉은 주변을 둘러봤다.

세상이 온통 붉다.

찢긴 살점과 흘러내린 핏물은 이 주변 숲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뚫리면 다 죽어! 다 죽는다고!”

“마, 막아!!!”

발악 섞인 처절한 외침.

도미닉의 시선은 소리가 난 곳에 닿았다.

키메라 군단에 빽빽이 포위된 대규모 용병단이 보였다. 키메라를 노리고 들어왔다가 역으로 포위된 자들. 쉴 새 없이 죽였는데도 대략 2백 정도가 살아남아 악착같이 저항했다.

“인간들의 생존 욕구인가?”

도미닉의 눈에 그들은 덫에 걸린 쥐새끼들처럼 보였다. 아니, 곧 실험체로 쓰일 실험쥐들인가?

하늘을 잠시 올려다본 그는 안경을 고쳐 쓰고 책에 다시금 집중했다. 정리되려면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았다.

콰아아앙―!!

갑자기 용병단 사이에서 폭음이 터져 나왔다. 용병들의 정신과 체력을 야금야금 빼앗던 키메라 일부가 바깥으로 튕겨 나와 도미닉 근처에 처박혔다.

“…….”

즉사한 키메라들의 상처를 확인한 도미닉은 천천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의 시선은 방금 전 폭음이 터진 곳에 닿아있었다. 포위망 일부가 누군가의 공격에 틈을 보였다.

그 틈 사이로 키메라 체액을 뒤집어쓴 용병 하나가 벼락같이 튀어나왔다.

포위망이 뚫렸다.

“타앗―!”

용병이 휘두른 검에 키메라들은 두부 썰리듯 잘려 나갔다.

검신을 타고 흘러나오는 붉은 아지랑이, 유형화된 오라.

“쥐새끼들 사이에 늑대가 있었나?”

4성 용병이 무리 안에 있었다.

“다, 단장님이 빠져나가셨다! 조금만 버텨!”

“저 미치광이만 죽이면 희망이 있다고!”

희망에 찬 용병들은 의지를 불태우며 버티기 시작했다. 그 사이, 용병 단장은 온몸에 아지랑이를 퍼트리며 도미닉을 향해 매섭게 쇄도했다.

도미닉을 노려보던 단장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검 자루를 까득 움켜잡았다.

“이 개자식! 다 말하면 살려준다고 했잖아!”

“살려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포위된 이들 중에 죽은 이가 있습니까?”

“우릴 지치게 한 뒤 어쩌려고!?”

“영생을 누리게 해드리겠습니다.”

“뭐, 영생?”

“키메라와 한 몸이 된다면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영원히.”

“미, 미친 새끼가!!!!”

의뢰주와 의뢰 목적을 말하면 살려주겠다고 한 약속은 결국 거짓말이었다.

용병은 마나를 터트리며 도미닉의 심장을 향해 검 끝을 내밀었다.

도미닉은 살짝 뒤로 물러서며 입술을 나직이 달싹였다.

“아레나.”

그 부름에 펑퍼짐한 로브를 걸친 인영이 도미닉 앞을 막아섰다.

늘어트린 양 로브 자락은 맨손이었고, 도미닉보다 작고 왜소했다.

살벌한 용병의 기세 앞에서 로브가 들춰지는 순간, 소녀가 얼굴을 비쳤다.

무표정의 소녀.

아레나 후아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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