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47화 (47/130)

47화 엿이나 먹어라

나도 키메라 배 속에서 6일이나 있게 될 줄 몰랐다.

라웁 숲이 좀 넓어야지.

육포 주머니도 절반 정도 비운 상태였는데, 사흘 정도 굶으니, 밥맛 떨어지는 괴물 배 속 환경에서도 육포가 잘만 넘어갔다.

하지만 펜리의 경우에는,

꼬르르륵―

순간, 배 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난 아니다.

두 눈을 끔뻑이며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시발, 이게 왜 웃기지?

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웃는 순간 저년 손에 뒈질 것 같았다. 이빨을 보였다간 앞의 키메라처럼 심장을 움켜잡을지도.

“무, 뭐 좀 드릴까요?”

“…….”

위기를 넘기려고 가방에서 육포 주머니를 건넸는데, 최악의 선택이었다.

주머니에 담긴 육포를 본 순간 그녀의 표정에 헛웃음이 그려지더니 움켜쥔 곰방대가 부르르 떨렸다.

“혼자 처먹으니, 맛있니?”

퍽―

“쿠엑!”

시야가 샛노랗게 변했다.

난 복부를 움켜쥔 채 바닥에서 꿈틀댔다. 간이 뒤틀리는 통증이 뇌리를 뚫고 올라왔다. 곰방대가 아니라 무슨 해머에 처맞은 것 같았다.

“샤르바딘이 살아있길 기도해야 할 거야. 보름 동안 굶고 싶지 않다면.”

“……보름?”

넌 6일 굶었는데, 난 왜 보름이야?

그러면서 육포 주머니는 또 잘만 챙겼다.

피부만큼 속도 시커먼 년.

내가 배를 부여잡고 끙끙대는 동안, 그녀는 관리인의 손목을 자른 뒤 철문 앞에 섰다.

굳게 닫힌 철문에는 손잡이가 없었다. 대신 철문에 잘린 손을 닿게 하자, 쿵쿵 흔들리며 천천히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생체 방식으로 반응하는 문 같았다.

그녀도 들어올 때 그 모습을 본 모양.

열린 문 앞에서 그녀는 잠자코 서 있었다.

날 돌아봤는데, 뭐 하냐는 눈빛이었다.

시부랄, 그럼 패지나 말든가.

후들거리는 다리를 딛고 그녀 곁에 서자, 그녀는 곰방대를 내 몸 주변에 탁탁 털었다.

작게 읊조리듯 흘러나오는 주문.

“…….”

푸른빛이 몸에 스며드는 것을 보니, 저번에 썼던 위장 마법을 사용하려는 것 같았다.

위장 마법이 몸에 걸리면 키메라의 시야를 피할 수 있으니, 관리자들의 눈만 피하면 될 것이다.

“제단이 어디 있는지 안내해.”

“배 속에서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알겠습니까?”

“또 맞겠다고?”

“…생각 중입니다.”

“얼른 생각해.”

“지리 파악이라면 당신 특기 아닙니까? 나보다 당신이….”

“내 능력이 뭔지 알고.”

당연히 잘 알지.

그녀의 개화 특성인 그림자 능력은 일정 범위 내 존재하는 그림자들을 통해 순간 이동이 가능했다.

주변 지리를 파악하는 데 최고의 능력. 하지만 난 이것을 두고 말한 게 아니었다.

바로 엘프의 전매특허인 정령 소환을 말하는 것이었다.

5성에 이른 그녀라면 쓸만한 정령 한두 마리와는 계약을 맺었을 것이다.

“정령을 소환하면 제단쯤은 쉽게 찾지 않을까요?”

“이미 시도해봤지. 불가능해.”

“네?”

펜리는 설명 대신 벽 쪽으로 걸어갔다.

절벽 안의 공간은 특이하게도 온통 붉은 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처음 의식을 차렸을 때 온 공간이 붉게 보였던 것도 사방을 에워싼 이곳 벽의 색감 때문이었다.

그녀가 벽을 툭툭 두드렸는데 단단한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곳 벽은 돌로 이뤄진 것 같지 않아. 살짝 물컹거리는 감촉이 느껴지거든.”

그녀의 말대로 벽을 확인해보니 벽이 아니라 끈적하고 질긴 피부를 보는 것 같았다.

이건 마치,

“엄청나게 큰 키메라 배 속에 들어온 느낌이네요.”

“닥쳐.”

“…….”

6일 동안 배 속에 머물렀던 경험이 그렇게 끔찍했나?

하여튼 이 벽에는 정령과 상극인 기운이 흐르고 있어서 정령을 소환할 수 없다는 설명이었다.

그녀가 전에 말했던 섭리를 거스르는 기운 말이다.

그럼 직접 움직이며 알아봐야 한다는 건데.

잠시 고민하던 나는 펜리를 바라봤다.

“이건 어떨까요?”

“말해봐.”

“으앗! 모, 목에 바람은 왜 불어요!”

이어지는 설명에 펜리는 고개를 끄덕이곤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툴툴대는 태도와 달리 내 의견에 반응하는 것이 나에 대한 믿음이 눈곱만큼은 쌓인 모양이었다.

결과가 좋게 이어지고 있으니 일단 믿고 움직이는 거겠지.

바깥으로 나온 우리는 조금 전 끌려왔던 방향으로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샤르바딘의 생사는 빨리 확인할수록 좋으니 서둘러야 했다.

그것 외에 급하게 움직여야 할 이유가 또 있었다.

‘도미닉이 조만간 도착할 거야.’

펜리를 겁탈하려던 관리인 중 한 명이 하는 말을 들었다.

도미닉은 전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귀환 중이었다.

도착 시기도 얼마 안 남은 상황.

서둘러 제단을 찾아 ‘그것’을 제거해야 했다.

난 제단에서 서식하는 그것을 떠올렸다.

그것은 메인이벤트, 백 개의 심장을 일으킨 진짜 원흉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의 도미닉을 탄생시킨 악당 생성자 말이다.

‘크리스탈 미믹(Crystal Mimic).’

관리인들조차 모르는 제단의 정보를 나는 잘 알고 있다. 물론, 소설의 내용이 세부적이지 않아 그 정보가 완벽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 장소의 ‘진짜 주인’은 크리스탈 미믹일지도.’

제단의 정체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만큼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도미닉이 키메라 군단을 몰고 오기 전에 무조건 크리스탈 미믹을 먼저 제거해야 한다는 것.

도미닉이 도착하면 시도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포위당한 채 잡혀 죽을지도.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었다.

‘제거할 수 있겠지? 혼자가 아니니까.’

난 펜리의 뒷모습을 잠시 응시했다.

내 무력을 대신할 카드.

아직까진 큰 문제 없이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 * *

드륵 드륵 드르륵―

일련의 수레들이 덜컹거리며 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수레는 스무 대 정도로 줄이 길었는데, 그 안에는 축 늘어진 인간과 이종들이 한가득 실려 있었다.

마치 시체 더미를 담아 옮기는 장면 같았다.

“네놈의 방법은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들어.”

“이보다 확실한 방법이 또 어딨다고요. 그리고 배 속보단 낫잖아요.”

“시끄러워.”

나와 펜리는 덜컹거리는 수레 밑바닥에 껌딱지처럼 착 달라붙어 있었다.

이종 대부분이 제단의 먹이로 끌려간다는 사실을 알아낸 나는 이종들을 한가득 실은 수레에 무임승차를 시도했다.

수레가 움직이는 동안, 펜리는 육포를 질겅질겅 씹어댔고, 난 밑바닥에서 주변을 계속 살폈다.

보이는 건 앞서 걸어가는 관리인 셋과 좀비처럼 비척거리며 따라오는 키메라 무리의 하체뿐이었다.

실린 실험체의 수만큼 붙은 키메라들도 엄청났다.

싸우면 이길 수 있냐는 물음에 그녀는 코웃음을 치며 귀찮게 도망치지 왜 싸우냐고 했다.

내가 증표를 얻으려는 이유였다.

이 엘프는 효율을 너무 따져서, 전투에 쉽사리 끼지 않거든.

통로는 무척이나 길었다.

수레 전부가 제단으로 향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통로 군데군데 철문이 여럿 존재했는데, 그곳에 잠시 들러 수레 일부를 남겨두고 오길 반복했다.

각 철문 안쪽을 둘러볼 때마다 나는 치를 떨었다.

‘이런 개새끼들!’

관리인들이 ‘재료방’이라 언급했던 공간은 잡아 온 이들의 신체를 훼손하는 참혹한 도축장의 풍경이었고, ‘보관실’은 인간, 이종 그리고 몬스터들의 신체가 크고 작은 병에 담겨 있었다.

그리고 소형 키메라를 제작하는 공간도 존재했는데, 제작 과정은 관리인들의 손에 의해 이뤄졌다.

대화를 엿들어보니, 주인으로 통하는 도미닉은 중요한 키메라 제작에만 참여하는 것 같았다.

그럼, 지금껏 만난 엄청난 수의 키메라들이 모두 저놈들의 손에서 탄생했다는 건데.

이 정보는 소설에도 나오지 않았던 것이라, 또 한 번 소설에 너무 의존해선 안 된다는 확신이 생겼다.

의문도 들었다.

관리인이라 불리는 저들은 누굴까.

어떤 이유로 이 끔찍한 곳에 흘러들어 와 도미닉을 돕고 있는 거지?

저들은 과연 희생자일까. 가해자일까.

의문에 대한 답은 최종 도착지, 제단에 거의 다다랐을 때 밝혀졌다.

“쳇, 오늘 재료방은 내가 맡았어야 했는데.”

“뭐가 또 불만인데?”

“어린 것들이 이번에 많이 잡혀 왔잖아. 작은 것들은 자르는 맛이 기가 막히다고.”

“물량이 많아서 기회는 충분히 있어. 내일은 너와 나 차례잖아.”

“클클클, 그렇긴 하지. 역시 이곳은 천국이란 말이야. 주인님 말만 잘 들으면 살인이든 뭐든 다 할 수 있잖아.”

“도적 시절보다 이곳이 훨씬 재밌긴 하지. 상상하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으니까. 생명 연장까지도.”

서로의 신체를 가리키며 낄낄대는데 역겨워서 토할 것 같았다.

과거 라웁 숲을 주름잡던 도적들인 것 같았다.

하나같이 살인을 통해 욕구를 푸는 사이코패스 같은 놈들.

철저한 가해자로 답이 나온 순간, 난 고개를 돌려 펜리를 바라봤다.

“슬슬 움직이시죠?”

“…….”

그녀는 별다른 말 없이 허공에 섬뜩한 크로우를 소환했다.

훼손된 엘프들의 신체들이 병에 담긴 것을 본 후부터 그녀는 말수가 급격히 줄었다.

“계획은?”

“다 죽이시면 됩니다.”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방법을 말했네.”

수레 밑에서 나온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도착한 제단 입구.

철문이 열리는 것을 굳이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

“누, 누구냐!?”

관리인 하나가 나를 발견하곤 소리쳤다.

나를 손가락질한 저들의 괴물 같은 손을 넌지시 바라봤다.

문을 여는 데 저 손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너희들을 손질할 사람.”

펜리가 수레 뒤쪽으로 튀어 나간 순간, 난 선두에 선 관리자들 사이로 빠르게 파고들었다.

상대는 모두 셋.

셋 사이에 기습적으로 자리를 잡고 전방위로 단검을 벼락처럼 찔러 넣었다.

푹. 푹. 푹.

목, 심장, 명치.

셋의 급소를 정확히 파고든 공격.

“…컥!”

“건방진…!”

한 방에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치명상이 분명한데, 관리인들은 즉시 반격해왔다.

역시, 괴물이라는 건가.

부웅―! 붕!

무시무시한 파공성이 귀 끝에 스쳤다.

저 괴물 같은 팔에 맞는다면 어디든 뼈가 부러질 것 같았다. 신체 능력이 인간의 것보다 월등하고, 지능이 있어서 일반 키메라 여럿을 합친 것보다 월등히 강력했다.

거대와 소형의 중간 정도 무력이라고 해야 하나.

전이라면 다소 버거웠을지도 모른다.

살짝 물러난 뒤 문양의 빛을 터트렸다.

번쩍―

“……큭! 눈이!”

갑작스러운 눈 부심에 셋 다 눈을 가리며 비틀거렸는데 고통스러운 기색은 없었다.

문양의 빛이 통하지 않았다.

마석이 깃든 키메라에게만 통하는 것 같았다.

천천히 놈들을 향해 단검을 추켜올렸다.

‘어디 보자.’

몸 안에 깃든 충만한 마나가 휘돌기 시작했다.

지옥 같았던 6일을 통해 키메라 배 속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지만, 키메라가 죽을까 봐 섣불리 확인하지 못했던 힘이 있다.

난 그 힘을 그대로 개방했다.

우우웅―!

단검이 찬란한 빛으로 번뜩였다.

무기 속성을 강화해주는 인챈트.

단검에 실린 마나 농도는 그 어느 때보다 짙고 무거웠다.

고통을 견디고 견디며 보랏빛 마석을 모조리 복용했고 결국 다 먹어 치웠다.

그 보상이 바로 이 빛무리다.

3성 마력이 깃든 인챈트.

번뜩이는 검날이 공간을 가르며 송곳처럼 뻗어 나갔다.

퍼억!

“끄아아악!”

“…컥!”

일격에 두 놈의 몸통을 무참히 꿰뚫었다. 움찔하는 두 놈의 반응이 끝나기도 전에 난 그대로 놈들을 반으로 갈라버렸다.

피를 뒤집어썼다.

턱 밑으로 흐르는 핏방울을 닦아내고 시선을 돌렸을 때, 남은 놈이 기겁하며 도망치고 있었다.

총알처럼 튀어 나간 내 손이 놈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는 그대로 단검을 목덜미에 찔러 넣었다.

“커, 커억! 살려…!”

“지랄하네.”

으득―

잡은 머리를 우악스럽게 꺾으며 단검을 비틀자, 머리가 뎅겅 분리됐다.

목 없는 인형처럼 쓰러지는 놈.

관리인들을 모두 정리한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수레를 따라오던 키메라들이 고깃덩어리처럼 너부러져 있었다.

수레 주변에서 펜리가 크로우를 휘두르며 키메라들을 썰고 있었다.

키에에엑!

크아악!

그녀의 크로우에 닿은 순간 키메라들은 종잇장처럼 잘려나갔다.

고양이처럼 가볍고 날카로운 공격.

압도적인 무력이지만, 수가 너무 많았다.

여러 장소를 방문하면서 키메라가 줄었다지만, 그래도 수백 마리에 달했다.

짧게 호흡을 내쉰 나는 단검을 움켜잡고 앞으로 쇄도했다.

그녀를 그대로 지나쳐 키메라 무리 속으로 거칠게 파고들었다.

발톱, 이빨이 사방에서 거칠게 짓쳐 왔다.

순간 그녀와 시선을 교환했다.

눈썹을 찌푸리는 게 미쳤냐고 말하는 것 같았다.

‘보험이 있어서 말이지.’

수백의 키메라 안에 파고든 순간, 키메라 무리가 날 포위하고 쏟아져 들어왔다.

무시무시한 압박감.

온몸이 갈가리 찢기는 느낌이다.

그 압박감에 답을 하듯,

난 씨익 웃으며 오른손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엿이나 먹어라.”

가운뎃손가락을 편 순간,

번쩍――――――!

황금빛이 통로를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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