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49화 (49/130)

49화 크리스탈 미믹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리에 서서 잠시 대기했다.

펜리가 내 앞에 나타나길 빌었는데, 시간이 흘러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빌어먹을, 왜 나쁜 가정은 늘 현실이 되냐고.’

환상 마법진을 떠올렸을 때부터 무작위 이동이 이뤄질 수 있겠단 판단이 들었다.

지금 시간이면 펜리가 진즉 들어왔을 시간인데, 지금껏 소식이 없는 것을 보니 그녀도 구덩이에 떨어지는 순간 제단 내부의 무작위 장소로 떨어진 것 같았다.

‘그럼, 먹이로 던져진 이들도 뿔뿔이 흩어졌다는 건데.’

며칠 전에 수백 명이 던져졌다고 했다.

그중 생존한 이들이 있다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몰살당하지 않았다는 가정하에.

‘구조 파악이 먼저라는 건가?’

소설에선 이곳을 복잡한 미로라고 표현했다.

‘제단을 먼저 찾아야 해.’

미아가 되지 않으려면 제단을 중심으로 움직여야 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앞뒤를 제외하곤 사방이 붉은 벽으로 막혀 있었다.

일방통행의 구조.

잠시 고민하던 나는 한 방향을 정하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까득― 까드득―

“…아, 시발.”

이동 중 부서지는 소리에 욕이 절로 나왔다. 밟는 곳마다 뼛조각투성이라 소리를 피해갈 수가 없었다.

기분도 더럽지만, 소리가 울릴 때마다 놈이 나타날까 봐 조마조마했다.

“상자 따위에게 겁먹어야 하는 상황이라니. 빌어먹을.”

본래 미믹(Mimic)이란 몬스터는 보물 상자로 위장해 다가오는 탐험가들을 잡아먹는 위장형 몬스터였다.

접근만 조심하면 위협적이지도, 별 볼 일도 없는 몬스터에 불과한데, 제단에 머무는 크리스탈 미믹은 달랐다.

‘고대의 힘을 먹어 치운 미믹이니까.’

미믹은 탐욕이 강해 물건이든 사람이든 모든 것을 게걸스레 먹어 치웠다. 그리고 오랜 시간 그것들을 소화하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크리스탈 미믹은 고대의 힘을 먹어 치운 데다, 수년간 도미닉이 갖다 바친 먹이를 포식했다.

진화에 진화를 거듭한 놈이기에 몬스터의 궤를 한참 벗어났다고 봐야 했다.

홀로 마주치는 상황에선 무조건 튀어야 하는 상황.

‘나보다 느려야 할 텐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통로에 한가득 쌓인 뼛조각을 보면 그럴 확률은 낮아 보였다.

과연 벗어날 수 있을지.

고개를 흔들며 통로를 한참 동안 걸었다.

뼈 부서지는 소리에 어느 정도 익숙해질 때쯤 새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쿵―

“……!”

바닥이 미세하게 울리는 소리였다. 바짝 엎드린 채 앞뒤를 쉴 새 없이 돌아봤다. 길게 뻗어 있는 일방통로, 애초에 숨는 건 불가능한 공간.

뭐라도 튀어나오면 주저 없이 반대쪽으로 튈 생각이었다.

쿵― 쿵― 쿵―

“…….”

하지만 소리만 몇 차례 울릴 뿐 주변에 변화는 없었다. 다시 조용해지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미치겠네.”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쿵쿵쿵 소리가 들릴 때마다 지축이 미약하게 울렸다. 분명 묵직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고, 이곳에 그럴만한 존재는 하나뿐이다.

설마 이 근처에서 놈이 돌아다니고 있는 건 아니겠지?

놈을 떠올리며 다시 귀를 기울였다.

다른 소리를 기대한 것이었다.

바로 비명 소리.

‘안 들려. 생각보다 멀리 있는 건가?’

비명이 들렸다면 생존자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었을 텐데. 아직은 확인이 힘들었다.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이라 소리가 막혔을 수도 있다.

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잠시 후, 눈앞에 두 개의 통로가 나타났다.

갈림길이다.

일단 갈림길 주변 벽을 빠르게 살폈는데, 수많은 글자와 그림이 빽빽이 새겨져 있었다.

마치 너저분한 낙서를 보는 기분이랄까.

누가 이런 낙서를 해둔 거지?

고민도 잠시, 갈림길 중 오른쪽 통로를 선택해 걷기 시작했다. 그 이후에도 똑같은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오른쪽 통로만 고집했다.

미로 형태라 나름 기준을 정한 것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붉은 통로.

걸어도 걸어도 똑같은 배경이 펼쳐졌다. 같은 공간을 계속 맴도는 느낌이었다.

이따금 들려오는 쿵쿵쿵 소리만이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알려줬다.

잠시 후, 눈앞에 또 다른 갈림길이 나타났을 때 난 자연스레 우측 통로로 걸어갔다.

그런데,

“…….”

수많은 낙서 중 눈에 띄는 표식에 미간을 잔뜩 좁혔다.

이건 한참 전에 내가 남겨둔 표식이었다.

곧장 바닥을 살피며 부서진 뼛조각의 흔적을 살폈다. 내가 밟았던 흔적들이 떠오르자, 나직이 신음을 흘리며 새긴 표식을 다시 응시했다.

[1]

착각이 아니었다.

‘처음 마주했던 갈림길이야.’

돌고 돌아 첫 번째 갈림길로 다시 돌아왔다. 똑같은 공간을 맴돌고 있다는 뜻.

“육포 주머니를 괜히 줬나?”

왠지 이곳에서 긴 시간을 헤맬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일단 이동을 멈춘 채 고민했다.

우측으로 다섯 번의 갈림길을 지나쳤을 때 다시 첫 번째 갈림길로 돌아왔다.

‘확인이 필요해.’

일단 표식을 남긴 우측 통로로 똑같이 걸어갔다. 다시 갈림길이 나타났을 때 난 우측 벽을 빠르게 확인했다.

[2]

‘있네.’

내가 남긴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으로 우측 길은 출구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이때부턴 표식이 된 통로를 피해 이동을 시작했다.

다른 통로를 선택하니, 새로운 갈림길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때마다 숫자로 새로운 표식을 남기며 걷고 또 걸었다.

같은 공간, 같은 움직임.

시간 감각이 사라진 공간에서 난 멈추지 않고 부지런히 걸었다.

변화는 없었다.

쿵쿵쿵 울리는 소리까지도.

반나절? 하루?

체감상 무척 오랜 시간을 걸었다고 느꼈을 때, 난 다시 갈림길과 마주했다.

“……시발.”

[21]

21번째 갈림길, 한참 전에 내가 표시해둔 것이었다. 오른쪽과 왼쪽 통로를 살피니 두 곳 모두 한 번 이상 지나갔다는 표식이 남겨져 있다. 순간 머리가 지끈 아파 왔다.

길을 잃었다.

복잡한 미로라더니 예상했던 것보다 더한 곳이었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봤다.

“애초에 길이 없는 거라면?”

미로에서 헤매다가 크리스탈 미믹에게 잡아먹히는 구조인 건가?

아니, 다른 공간으로 나가는 길은 분명 있었다.

난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이 목걸이는 키메라에게 먹히기 전에 펜리가 준 것으로, 위치 추적 마법이 걸려 있었다.

그녀가 제단 안에 들어왔다면 필히 날 찾아 움직였을 것이다.

같은 미로를 헤매다 보면 분명 한 번쯤 마주쳤을 시간인데, 여전히 그녀를 보지 못했다는 건 이곳이 아닌 다른 장소에 그녀가 떨어졌다는 말이 된다.

내가 놓치고 있는 게 뭘까?

고민을 하며 벽에 채워진 낙서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설마….’

낙서들을 살필수록 한 가지 확신이 들었다.

이 낙서들 전부 표식이었다.

이곳에 떨어진 이들이 나처럼 표식을 남기며 움직인 게 분명했다.

그 흔적이 바로 이 낙서였다.

‘그 결과가 이곳 바닥에 널브러진 뼛조각이라는 건데.’

이 방법은 실패한 방법이었다.

다른 방법을 선택해야 했다.

쿵―!

그때 신경에 거슬리는 익숙한 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잊을 만하면 귀를 두드리는 섬뜩한 소리.

“…어째 불안한데.”

전보다 소리가 점점 커지는 게 느껴졌다. 이젠 바닥에서 느껴지는 진동도 확연히 느껴질 정도.

놈이 나와 점점 가까워지는 거라면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펜리와 합류하기 전에 놈과 마주치면 죽을 확률이 높았으니까.

“뭐지? 뭘 놓친 거지?”

갈림길에 남겨진 흔적은 낙서가 유일하다.

난 빽빽이 새겨진 낙서들을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욕설을 뱉으며 이를 악물었다.

너무 많다.

갈림길도 많았고, 갈림길 벽들에 그려진 낙서들은 더 많았다.

이 낙서들을 일일이 확인하면서 이동하는 건 분명 한계가 있었다.

순간 울컥 올라오는 짜증에 오른손을 추켜들었다.

번쩍―

황금빛을 소환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이 지긋지긋한 붉은 풍경에서 벗어나고픈 마음뿐이었으니까.

더 보다간 미칠 것 같았거든.

황금빛 물결이 벽을 노랗게 물들였다.

“좀 살 것 같네.”

빛을 마주하자 흔들렸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잠시 멍하니 낙서들을 살피고 있는데,

“……응?”

내 눈에 한 가지 특이점이 포착됐다.

벽에 그려진 낙서 중에 유독 눈에 띄는 것이 보였다.

낙서 대부분이 내가 소환한 빛에 노랗게 물들었는데, 오직 하나의 그림만이 황금빛을 밀어내며 붉게 번뜩였다.

붉은 벽 위에서라면 절대 알아보지 못했을 작은 변화였다.

게다가 익숙한 그림이다.

“불타오르는 심장.”

도미닉의 연구 일지에 그려진 문양이 분명했다. 이곳 제단과 도미닉의 힘이 관련되어 있다는 증거. 난 그림이 그려진 통로를 올려다봤다.

왼쪽인가?

고민은 짧았다.

판단이 내려진 순간 난 그림이 새겨진 통로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쿵―!

소리가 더더욱 가까워졌다.

내 발걸음은 본능적으로 빨라졌다. 아니,

“헉. 헉. 헉….”

언젠가부터 난 다급히 뛰기 시작했다. 본능이 지금 위험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또 다른 갈림길이 나타나자,

번쩍―!

난 낙서벽 앞에 빛을 소환해 그림을 찾았다.

불타오르는 심장은 어디 있지?

‘오른쪽!’

역시나 있다.

이 그림이 이곳을 벗어나는 이정표라면? 판단이 서자, 전력 질주를 시작했다.

아껴둔 마나를 끌어올렸고, 내 신형은 점차 빨라졌다.

쿵! 쿵!

“……시발!”

제대로 가고 있다는 증거일까.

소리의 간격이 점차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게다가 울릴 때마다 이젠 통로 바닥이 거칠게 꿀렁거렸다. 지독히 무거운 존재가 나를 향해 움직이고 있는 듯한 느낌.

놈이 날 인지한 건가?

오른쪽, 왼쪽, 왼쪽, 오른쪽.

난 그림이 표시된 통로 방향으로 미친 듯이 달렸다.

대략 십여 차례, 그림이 가리킨 통로를 지나쳤을 때, 갑자기 공간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통로 너비가 두 배는 넓어지고, 뼛조각이 없는 잘 닦인 길이 펼쳐졌다.

통로 너머 처음 보는 빛이 나를 반겼다.

미로를 빠져나온 건가? 출구?

확신이 들었을 때,

그어어어어어―!

“……!”

쇠 긁는 섬뜩한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다급히 뒤를 돌아봤다. 이미 지나쳐왔던 길목은 붉은 통로와 흐릿한 어둠만 자리했다.

그 어둠이 무언가에 꿀렁이는 순간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쿵―!

“큭!”

뭔가 온다!

충격이 터지고 바닥 진동이 부르르 느껴지자, 난 이를 악물곤 다급히 문양의 빛을 터트렸다.

번쩍―

그아아아아아악―!!!!

눈앞의 광경에 두 눈이 찢어질 듯 떠졌다.

“시, 시발!!”

언제 코앞까지 놈이 왔는지 모르겠다.

불과 다섯 걸음 거리.

입을 쩍 벌린 거대한 입이 내 코앞까지 짓쳐와 있었다.

수백 개의 뾰족한 이빨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지독한 악취가 훅 올라왔다.

빛에 격하게 거부 반응을 보이며 주춤 물러나는 모습.

빛이 아니었다면 쿵! 소리를 듣는 순간 잡아먹혔을 것이다.

정체를 드러낸 괴물의 모습은 한눈에 담기지 않았다.

통로를 꽉 채운 거대한 크기.

아니, 쩍 벌어진 입밖에 안 보인다.

쿵!

그 입이 굳게 닫힌 순간 거대한 상자와 마주했다.

25톤 덤프트럭과 마주한 느낌.

어두운 색을 띠었고, 표면에 빛나는 돌들이 빽빽이 박혀 있었다.

크리스탈 미믹.

놈이다.

상자 형태를 띤 거대한 괴수 모습인데, 팔다리가 없다. 어떻게 움직이는 거지?

의문이 든 순간 상자의 입이 쩍 벌어지더니 거대한 혀가 기습적으로 튀어나왔다. 혀가 바닥을 깊게 누르고 튕긴 순간,

쿵―!

고막이 터질 것 같은 충격음이 터졌다.

그 진동에 휘청거릴 정도.

거친 바람이 얼굴을 때리자, 난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다급히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재차 문양을 쓸 여유조차 없는 상황.

바로 엎드린 선택이 날 살렸다. 피하거나, 부딪치려고 했다면 저 입에 그대로 삼켜졌을 것이다.

거대한 그림자가 내 머리카락을 쓸며 스쳐 지나갔다.

“아아악!”

왼쪽 어깨 살점이 뭉텅이로 잘려나갔다.

쿠우웅―!

바닥에 떨어진 크리스탈 미믹이 앞으로 쿵쿵 굴렀다.

지금까지 들렸던 쿵쿵 소리의 정체가 저거였나.

놈의 사냥 방식을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비명이 들리지 않았던 이유도.’

비명이 터질 틈도 없었던 거다.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잡아먹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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