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50화 (50/130)

50화 피의 제단

“제길!”

한순간의 판단이 목숨을 좌지우지했다.

새로운 공간으로 통하는 길목을 막고 있는 위압적인 미믹의 동체.

크다.

이대로 등을 돌려 도망갈까?

‘아니, 죽어.’

본능은 등을 돌리고 도망치라 외치고 있지만, 그 순간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다. 좁은 통로에서 놈을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결국, 정면 돌파뿐인데.’

저 괴물을 뚫어야 했다.

뒷모습을 드러낸 채 미동 없이 서 있는 미믹이 보인다.

으적―

뜯어간 내 살점을 음미하는 것인지, 재수 없게 씹는 소리가 들렸다.

난 그대로 인챈트를 실어 단검을 투척했다.

워낙에 큰 덩치라 정확도는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카앙―!

우스울 정도로 단검이 가볍게 튕겨 나왔다.

몸체가 통짜 쇠보다 단단해 보였다.

그래도 충격은 있었는지 미믹이 육중한 몸을 틀었는데, 난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미믹을 향해 슬라이딩을 시도했다.

반대편 공간으로 통하는 틈새!

이 기회를 놓치면 끝이었다.

“……큭!”

아슬아슬하게 구석 벽을 스치며 미믹을 통과했다. 뜯어먹힌 어깨 때문인지 지나온 바닥이 핏물로 흥건했다.

출혈로 어지럼증이 올라왔지만, 스프링처럼 몸을 튕겨 앞으로 미친 듯이 질주했다.

좁은 통로는 미믹의 사냥터나 다름없는 곳.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

‘조금만 더!’

통로 너머 새로운 풍경이 드러나는 찰나였다.

쿵―!

“……이익!”

섬뜩한 소리와 함께 바닥이 출렁댔다. 또 온다! 다급히 등을 돌려 손을 뻗었다.

움직이는 데 마나를 모조리 퍼붓는 상황이라, 마나가 아슬아슬했다.

번쩍―!

“……!”

황금빛이 터졌을 때, 불결한 숨결이 머리카락을 훅 쓸고 지나갔다.

소름 돋는다. 시발.

‘무, 뭐가 이렇게 빨라!’

다시 다섯 걸음 앞.

미믹이 코앞에서 입을 쩍 벌린 채 멈춰있었다.

피하고 자시고가 없었다.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오는데 그 속도가 무시무시했다.

게다가 통로를 꽉 채운 저 빌어먹을 입을 보니 등골이 서늘했다.

그아아아악―!

이번에도 문양이 날 살렸다.

빛에 노출된 순간, 놈의 혀가 튀어나오더니 훌쩍 물러났다.

스릅!

“그 입 다물어! 새꺄!”

거리를 벌린 미믹은 재차 입을 벌리며, 미끄럼틀처럼 긴 혀로 바닥을 쓸었다.

마나 부족으로 숨이 턱 막혔지만, 문양을 계속 유지해야 했다.

빛을 수거한 순간, 저 혀를 이용해 튀어나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아까는 운이 좋아서 살점으로 끝났지. 두 번의 행운을 바라기에는 솔직히 피할 자신이 없었다.

잠시간 빛을 유지하는데도 팔다리가 마약 중독자처럼 바들바들 떨렸다.

마나를 한계 이상 사용한 부작용이 슬슬 나타나고 있었다.

3성에 올라 문양의 힘이 강해진 점은 좋은데, 가성비가 안 좋았다.

턱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

난 조금씩 조금씩 출구를 향해 뒷걸음질 쳤다.

“…으!”

마나 고갈로 온몸이 비명을 지르려는 찰나, 출구를 벗어났다.

확 트인 공간.

그대로 입구를 벗어나 우측으로 몸을 던졌다. 혀를 날름거리던 미믹이 시야에서 사라진 순간,

쿵―!

미믹이 움직였다!

허겁지겁 일어나 그대로 달렸다.

놈이 어디로 떨어졌지? 공격 타이밍을 보고 움직이면 늦는다.

그 전에 움직여야……!

뒤를 홱 돌아봤을 때, 내 걸음은 점차 느려졌다.

“……뭐?”

미믹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이동하는 소리를 들었다.

날 쫓아온 게 아니었나?

한동안 미믹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놈을 처음 마주했던 통로 안쪽을 조심스레 들여다봤다.

휑한 공간만 보였다.

내 쪽이 아니라 반대편으로 물러난 것 같았다.

‘어째서 돌아간 거지?’

미믹의 행동에 의문이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난 힘없이 벽에 기댄 채 주저앉았다.

온몸에 힘이 없었다.

영문을 모르겠지만, 일단 위기는 넘긴 것 같았다.

“크….”

벽에 상처가 쓸리자 통증이 올라왔다. 욱신욱신하는 상처를 살피니 뼈가 드러날 정도로 어깻죽지가 파여 있었다.

이렇게 깊었다고?

다급한 상황이라 상처를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했다.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네.’

이빨에 스친 게 이 정도였다. 물렸다면 팔이 통째로 사라졌을 것이다.

칼이 챙겨준 포션이 떠오르자, 다급히 가방에서 포션을 꺼내 어깨에 부었다.

따끔한 고통에 눈살을 찌푸리며 앉아 있는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긴장감이 풀리니, 짙은 탈력감이 몰려왔다.

“역시 육포 주머니를 주면 안 됐어.”

펜리, 이 망할 년.

생명 보험으로 곁에 착 달라붙어 왔는데, 막상 필요할 땐 곁에 없었다.

몇 차례 욕을 더 퍼붓고는 헥헥거리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탈탈 털린 상황.

상처에 붓고 남은 포션을 마시니, 기운이 서서히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이제 좀 살 것 같다.

이대로 눈을 감고 자고 싶었다.

쿵―!

“…….”

어디선가 울리는 오싹한 소리가 들려왔다.

난 비틀거리며 힘없이 일어났다.

이젠 저 쿵 소리의 의미를 잘 안다.

통로에서 헤매는 동안에도 쿵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미믹이 주변을 쉬지 않고 돌아다니고 있다는 신호고, 그 이유는 먹이 사냥일 것이다.

즉, 이곳도 안심할 수 없는 장소였다.

비웃기라도 하듯 돌아와서 날 낼름 삼킬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나마 안심이 되는 건 이 장소가 좁은 통로가 아니라 확 트인 장소라는 점이었다.

난 주변부터 천천히 둘러봤다.

오래된 동굴 형태의 공간.

동굴은 축구장을 떠올릴 만큼 넓었다.

동굴 곳곳에는 통로들이 뚫려 있었다. 조금 전 내가 빠져나온 통로와 같은 크기다.

십여 개 정도 됐는데, 마치 이곳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연결된 구조처럼 보였다.

‘설마 여기인가?’

한 곳을 떠올리며 걷기 시작했다.

통로 말고 눈에 띄는 장소를 발견했는데, 동굴 한가운데에 고여있는 웅덩이의 존재였다.

‘웅덩이.’

난 웅덩이 쪽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웅덩이를 보자 더 확신이 생겼다.

징그러운 벽으로 둘러싸인 동굴의 풍경은 온통 붉었다.

그래서 웅덩이도 붉게 비쳐 보였다.

지난 며칠간 물을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보통 웅덩이를 발견했다면 짙은 목마름부터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웅덩이에 가까워질수록 목마름은커녕 갈증이 싹 사라졌다.

“이곳이 제단…….”

내가 상상했던 그 제단이 맞았다.

내용대로 제단의 외형은 아주 엿 같았다.

눈앞에서 본 웅덩이는 멀리서 본 붉은 색감보다 더욱 짙었다.

비릿한 냄새도 맡아졌다.

피 웅덩이.

놀이터 크기의 웅덩이는 전부 핏물로 이뤄져 있었다. 그리고, 그 웅덩이 안에 작은 무덤처럼 자리한 돌무덤들이 보였다.

쌓인 돌들은 공간보다 더 짙은 핏빛을 흘리며 섬뜩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난 저 돌들을 한눈에 알아봤다.

제단의 상징이라 불리는 것들.

‘생체 마석.’

도미닉의 힘이라 할 수 있는 키메라들의 동력 원천이 이곳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수백 개는 될 것 같았다.

아니, 더 많을지도.

“으….”

여러 개의 돌무덤을 마주 보고 있는데 갑작스레 머리가 지끈 아파 왔다.

처음에는 마나 고갈로 생긴 후유증인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고, 코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빈속인데도 구토감이 올라오자, 결국, 난 바닥에 신물을 게워냈다.

‘이 고통…… 어째 익숙한데.’

키메라 배 속에서 무려 6일에 걸쳐 마석 가루를 흡수했다. 그때마다 자신을 매일같이 괴롭혔던 증상이 있었다.

광인 전조 현상.

몸이 기억하는 고통.

그래서 해결책도 잘 알고 있었다.

우웅―

손등에 새겨진 문양이 미약하게 울어댔다.

오롯이 내 몸에만 문양의 힘을 집중시킨 것인데, 마석 복용으로 3성을 이루면서 자연스레 숙달된 기술이었다.

증상이 씻은 듯이 사라지자 추측은 곧 확신으로 변했다.

‘마석의 부작용 맞네.’

복용도 안 했는데 갑자기 왜?

원인은 눈앞의 저 마석 더미밖에 없었다.

‘마석이 대량 쌓인 장소에선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영향을 받는 건가?’

펜리가 말하길 마석에선 섭리를 거스르는 기운이 흘러나온다고 했다.

소량이라면 그 기운이 미약할 테지만, 엄청난 개수가 한곳에 쌓여 있다면 기운이 짙게 흘러나올 터였다.

그럼, 이 동굴로는 생명체가 접근하기 힘들었다.

‘설마 미믹이 물러난 것도?’

이 사실을 알고 다른 먹이에 관심을 돌렸을 수도 있다. 아니 이것으로는 이유가 부족한가? 하지만 이것과 관련되어 있을 것 같았다.

난 피 웅덩이를 자세히 바라봤다.

백 개의 심장을 탄생시킨 시발점.

이 제단에서 미치광이 도미닉이 탄생했다.

눈에 띄는 것을 두 가지 발견했는데, 한 가지는 웅덩이 안에 드문드문 굴러다니는 보랏빛 마석이었다.

붉은 것에 비해 극소량이었는데, 느껴지는 존재감은 붉은 것들을 집어삼킬 정도로 강력했다,

처음에는 보랏빛 마석의 정체를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곳에 함께 굴러다니는 것을 보며 감이 왔다.

‘아레나의 임시 동력 원천이었나?’

도미닉이 이따금 아레나에게 먹였던 동력 원천이 이 보랏빛 마석 같았다.

그리고 그 마석들 곁에 쓰러져 있는 자들이 보였다.

당장 눈에 띄는 것만 열 명 정도 되었는데 모두 온전한 몰골이라 웅덩이 안으로 조심스레 발을 담갔다.

웅덩이의 깊이는 얕았다.

발목을 담글 수준 정도?

첨벙, 첨벙, 웅덩이를 가로질러 핏물에 묻혀 있는 이들을 조심스레 뒤집었다.

하얗게 뒤집힌 눈동자.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

인간은 없었다.

모두 드워프나 엘프, 사자나 늑대인간으로 이뤄진 이종들이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상태를 보니 미믹에게 당한 것 같진 않고, 왜 이곳에 전부 방치되어있는 거지?

의문에 미간을 좁히며 일어나려는데, 순간 죽은 드워프의 손톱을 보곤 멈칫했다.

‘붉다?’

손톱이 붉었다.

마석의 부작용, 광인(狂人)의 중독 현상이었다.

다시 이종들의 몸을 살펴보니 자잘한 자상이 가득했다.

서로를 향해 할퀴고 물어뜯은 상처였다. 그리고 하나같이 붉은 손톱이었다.

이 장소에 발을 들이면 마석의 기운에 오염되어 광인으로 변하는 건가?

한 가지 의문이 풀리자, 또 다른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미믹은 왜 이들을 놔둔 걸까?’

시체를 이리 놔두는 놈이 아니었다. 지금껏 온전한 시체를 찾기 힘들었다. 통로에 죄다 깔린 건 뼛조각뿐이었는데, 웅덩이에서 죽은 이들만 온전히 시체 형태였다.

‘이 주변에 확인된 시신만 서른 구, 그런데 미믹이 건드렸던 흔적은 없어.’

심장이 간질간질했다.

뭔가 중요한 이유가 있을 것 같은 느낌.

잠시 비릿함을 잊고 그 이유에 빠져들었다. 순간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곤 마석 더미를 응시했다.

“…설마!?”

그때였다.

쿵―!

“……헉!”

뒤쪽에서 오싹한 소리가 들려왔다.

심지어 피부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시선을 천천히 돌린 순간,

피 웅덩이가 어둠으로 물들었다.

‘시, 시발!’

난 그대로 시체 곁에 코를 박고 누웠다. 토할 것 같은 비릿한 맛과 냄새, 끔찍한 감촉이 온몸을 적셨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쿵―

크리스탈 미믹이 마석 더미 위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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