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51화 (51/130)

51화 도르네프의 반려, 샤르바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 장소가 제단이라는 사실을 눈치챘을 때, 크리스탈 미믹이 언제고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

눈앞에 쌓여 있는 마석 더미를 누가 만들었겠는가.

제단은 도미닉이 미믹을 처음 발견한 장소였고, 미믹에겐 둥지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이리 갑작스럽게 올 줄은….’

쿵쿵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기도 했고, 놈이 물러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방심하고 있었다.

타이밍도 주지 않고 갑작스럽게 돌아왔다고 해야 하나.

‘어디로 도망치지?’

웅덩이 바깥으로 나가는 건 틀렸으니, 일단 미믹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해 쌓인 마석 더미 뒤로 기어갔다.

‘빌어먹을, 피 웅덩이 위에서 각개전투를 하게 될 줄이야.’

놈이 날 인지했을까?

겉으로 드러난 미믹 외형은 거대한 보물 상자였다. 눈과 코가 없었고, 커다란 입과 이빨, 징그러운 혀가 생명체라 말할 수 있는 흔적의 전부였다.

시선을 살폈는데, 다행히 별다른 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놈의 입이 들썩거리자 핏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사냥을 한 흔적.

그 흔적을 통해 이곳에 아직 생존자가 있음을 파악했다.

‘체취? 진동? 오감을 이용해서 먹이를 찾는 건가?’

영화에서 보던 괴물들의 습성을 떠올리며 최대한 느리고 소리 나지 않게 웅덩이 사이를 기었다.

그렇게 시야를 벗어나 마석 더미 뒤쪽으로 우회했을 때였다.

“……!”

갑작스레 마주한 존재 때문에 기겁하며 입을 틀어막았다.

피를 한 사발 들이켰지만, 느낄 새도 없었다.

처음에는 죽은 시신인 줄 알았다.

그런데, 죽은 척하던 존재가 갑자기 고개를 살짝 들더니, 나와 눈을 마주쳤다.

나를 바라본 그 존재의 동공이 사시나무 떨리듯 흔들렸다.

“……아!”

‘안 돼!’

그녀의 입이 살짝 벌어지자, 난 다급히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엘프, 그것도 여자 엘프였다.

펜리였다면 두려운 눈동자로 날 볼 게 아니라 입을 막은 순간 내 손을 짐승처럼 물었을 것이다.

브라운 계열의 머리카락과 하얀 피부를 지닌 엘프.

핏물로 붉게 물들었지만, 태는 얼핏 보였다.

가만, 여자 엘프?

그 단어를 인지한 순간, 난 다급히 그녀의 머리 부분을 확인했다.

눈앞의 존재가 내가 찾던 그 여인이라면 ‘그것’이 있을 것이다.

도르네프가 그녀에게 선물로 건네준 베네타의 상징과도 같은 보석이 있다.

흑요석이 달린 머리 장신구.

샤르바딘의 유해 속에 발견됐던 물건.

그 흑요석이 눈앞의 엘프 머리에 달려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시발, 찾았다!

‘사, 샤르바딘!’

펜리가 그토록 찾던 여인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것도 살아있는 데다 미믹이 자리한 제단의 한가운데서 말이다.

예상치도 못했던 만남이었지만, 난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목에 걸린 목걸이를 그녀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펜리, 펜리.’

입 모양으로 한 이름을 반복적으로 알렸다.

샤르바딘은 푸른 장미 출신으로, 베네타와 펜리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는 중요한 인물이었다.

펜리가 일상처럼 차고 다니던 목걸이 정도는 알고 있지 않을까?

잠시 후, 내 입 모양과 목걸이를 확인한 그녀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두 눈을 깜빡이던 그녀는 곧 나를 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다행히 내 메시지가 통한 것 같았다.

두려움에 물들었던 그녀의 눈동자가 빠르게 진정되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아씨, 울면 곤란하다고.

쿵―

“……!”

그때 피 웅덩이 위로 거친 파동이 일었다.

미믹이 행동할 때 나는 소리.

바짝 엎드린 채 죽은 듯이 누웠다. 샤르바딘은 온몸을 웅크린 채 벌벌 떨었다. 미믹의 존재를 무척이나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별다른 변화가 없자 난 고개를 빼꼼 내밀어 미믹을 살폈다.

미믹이 거대한 몸체를 거칠게 털어내고 있었다.

후두두둑―

미믹이 몸을 털 때마다 몸체에 붙어 있는 돌들이 떨어져 나왔다.

붉은빛을 띤 돌.

생체 마석이었다.

크리스탈 미믹은 먹이를 먹고 그 보상으로 마석을 도미닉에게 제공했다.

도미닉과 미믹 간에 이어진 수년간의 거래.

그 일부를 직접 목격한 것이었다.

그리고,

으적―!

새로운 광경도 볼 수 있었다.

겹겹이 쌓인 붉은 마석 일부를 게걸스럽게 삼키고 으적으적 씹더니, 보랏빛 마석 하나를 툭 뱉어냈다.

‘보랏빛 마석이 저렇게 만들어지는 건가?’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업.

보랏빛 마석은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난 미믹의 행동을 한동안 지켜봤다.

그리고 어느 정도 확신이 들었을 때 짧게 호흡을 내뱉고 천천히 일어났다.

내 행동에 샤르바딘이 다급히 내 손목을 붙잡고 고개를 흔들었지만, 그녀를 안심시키곤 마석 더미 앞으로 나왔다.

미믹 앞에 나를 완전히 노출시킨 것이다. 그리고 바짝 굳은 채 반응을 기다렸다.

나름 확신을 가지고 행동한 것이었다.

으적― 으적―

붉은 보석들을 삼키고 보랏빛 마석 소량을 뱉어내던 미믹이 어느 순간 몸을 틀더니 나를 마주 봤다.

저도 모르게 움켜쥐는 주먹.

솔직히 쫄린다.

그 순간, 미믹의 입이 쩍 벌어지더니 혓바닥이 튀어나왔다.

쿵―!

소리와 함께 미믹이 허공으로 쇄도했다.

“…….”

그대로 나를 지나쳐 통로 한 곳으로 사라지는 미믹을 한동안 지켜봤다.

“날 못 봤어.”

의문스러웠던 미믹의 행동 패턴들을 떠올려봤다.

이곳으로 발을 들이자 미믹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이유.

유독 이 장소의 시신들이 멀쩡했던 이유.

‘그리고 지금껏 샤르바딘이 이곳에서 살아남은 이유.’

여러 가지 의문을 묶어 생각하니, 붉은 마석이란 결론이 나왔다.

미믹에겐 눈이 없다.

그럼 어떻게 먹이를 찾아다니는 것일까.

방금 그걸 두 눈으로 확인했다.

붉은 마석이 쌓인 곳에선 미믹이 나를 인지하지 못했다.

난 마석을 양손으로 한 움큼 쥐었다.

그러곤 바깥쪽으로 힘차게 던졌다.

타타타타탁―

바닥에 떨어진 마석들이 소음을 내며 울렸다.

소리가 제법 컸는데, 미믹은 나타나지 않았다. 몇 차례 똑같은 행동을 반복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청각도 아니라면.’

미믹은 보고 듣고 냄새를 맡는 오감(五感)이 아니라, 특정 기운을 쫓아 먹이를 사냥하는 것 같았다.

이곳은 마석의 기운이 짙어 감지를 못하는 것이었고.

중요한 정보를 알아냈다.

등을 돌려 웅크린 채 숨어 있는 엘프에게 다가갔다.

일단 사실 확인부터.

“샤르바딘, 맞습니까?”

내 물음에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머문 지 얼마나 됐습니까?”

“모, 모르겠어요. 굉장히 긴 시간이었는데…….”

하긴, 이 공간에서 시간 개념을 확인하기란 쉽지 않았다.

얘기를 들어보니, 구덩이에 던져진 후 줄곧 이곳에 머물렀다고 했다.

그럼 최소 사흘 가까이 됐다는 건데.

‘이곳에서 사흘?’

마석 더미를 잠시 본 나는 샤르바딘을 살폈다. 광인이 되었어도 진즉 될 시간. 그럼에도 그녀는 멀쩡해 보였다.

의문이 든 순간, 그녀의 머리에 달린 흑요석이 반짝이는 것을 보며 나직이 탄성을 흘렸다.

‘아, 흑요석에 드워프의 축복이 걸려 있다고 했지?’

도르네프가 직접 세공한 흑요석은 검은 장미를 닮아 있었다.

그녀가 푸른 장미 출신이기에 마음을 담아 장미를 선물한 것이었다.

어떤 축복이 걸려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저 보석 덕에 그녀의 정신이 지금껏 유지됐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도 결국 미믹의 먹이로 희생된다.

‘탈출할 길이 보이지 않으니까.’

버티고 버티다가 탈출을 위해 제단을 벗어났을 것이고, 사냥당했을 것이다.

“호, 혹시 펜리 님이 오신 건가요?”

“네. 함께 왔습니다.”

“그럼 이곳에…!”

“곧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검은 장미의 주인, 펜리 체이서가 직접 왔다.

그 소식에 샤르바딘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졌다. 감정이 터지려는 것을 꿋꿋이 참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그녀가 무척 강한 여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도르네프의 마음을 훔친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건가?’

도르네프는 드워프의 영웅이다.

그런 존재의 마음을 단순한 미모로 뺏는 게 가능할까.

마석의 부작용과 상관없이 이 지옥 같은 공간에서 사흘을 버텨냈다.

어떤 마음으로 구조를 기다렸을까.

그리고 긴 시간 동안 그녀는 무엇을 먹고 버텼을까.

잠시 피 웅덩이를 바라본 후, 붉게 물든 그녀의 입가를 쓰윽 닦아냈다.

“펑펑 울어도 됩니다. 놈은 오지 않을 테니까.”

내 말에 봉인이 풀린 듯, 안도와 절망이 뒤섞인 표정은 곧 한 맺힌 울음으로 터져 나왔다.

샤르바딘이 나를 부둥켜안고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 * *

난 샤르바딘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소설에서도 희생당한 인물로 표현될 뿐, 알려진 내용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도르네프의 반려, 샤르바딘.

그녀의 존재감은 소설에서 미약한 편이지만, 그녀의 죽음으로 벌어진 사건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었다.

그녀와 관련된 스토리를 떠올려봤다.

반려의 죽음으로 원망에 사로잡힌 도르네프는 도미닉을 죽이는 데 성공하지만, 몰락에 가까운 타격을 입게 된다.

미래를 알고 있는 카멜이 그 기회를 놓칠 리 없다.

블라이어의 군대가 곧장 베네타를 공격해왔고, 도르네프는 그 전투에서 굴욕적인 패배와 함께 생을 마감하게 된다.

베네타의 몰락.

그 뒤로 펜리가 아지트를 옮기면서 도르네프의 유언을 따라 제단을 찾게 된다.

‘제단이 무너지면서 샤르바딘의 위치가 알려지니까.’

저 머리 장신구에도 위치 추적 마법이 걸려 있었다.

다만, 이곳에선 그 위치 추적 기능이 소용없었다.

구덩이 바깥과 이곳은 결계로 막힌 전혀 다른 공간이기 때문이다.

훗날 결계가 무너진 후에야 펜리는 폐허가 된 이곳에서 흑요석를 지닌 유해를 발견하고 샤르바딘의 죽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검은 장미를 닮은 저 흑요석 장신구는,

‘훗날 스페셜에 오른 펜리 체이서의 상징물이 되지.’

다크 로즈(Dark Rose).

훗날 펜리가 붙인 장신구의 이름이었다.

즉, 이 이야기는 샤르바딘의 죽음으로 시작된 메인 스토리였다.

그런 그녀가 내 앞에서 하소연하듯 조잘대고 있으니 신기했다.

내가 그녀의 운명을 바꾼 것일까.

아직 위기가 끝난 것은 아니니 판단하긴 이르지만, 그녀의 생존으로 스토리의 많은 것이 바뀔 것 같았다.

“이곳에서 죽은 이들이 당신의 호위대란 말입니까.”

“……네.”

샤르바딘은 슬픈 눈으로 쓰러진 이들을 바라봤다.

도르네프가 붙여준 친위대들로 그들은 죽는 순간까지 자신을 걱정했다.

“베네타 인근 마을에서 습격을 받았어요. 호위대 절반은 그 자리에서 죽고 남은 이들과 함께 잡혀 왔죠.”

범인은 작은 소녀라고 했다.

샤르바딘은 그 소녀를 떠올리며 두려운 듯 몸을 웅크렸다.

그 소녀의 두 손에 호위대 절반이 찢겨 죽었다고 했다.

괴력의 소녀라,

‘아레나 후아튼.’

그 여자가 분명했다.

라웁 숲을 지나치다 재수 없게 도미닉의 본대에 걸린 것 같았다.

그 후에 실험체 감옥을 거쳐 이곳까지 흘러들어 온 과정을 들었다.

“미믹과 싸우면서 이곳까지 왔다고요?”

그중 내가 크게 관심을 보인 건, 구덩이 밑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일부 호위대와 합류하게 되면서 함께 움직였는데, 미믹과 여러 번 전투를 벌이며 도망쳤다고 했다.

미믹과 전투가 가능했다고?

인챈트가 실린 단검마저 가볍게 튕기는 괴물이었다. 아무리 친위대라도 맨손으로 미믹에게 타격을 줄 수 없었을 텐데.

“친위 대장인 에비라트는 마법사였어요. 그가 말하는 것을 들었어요. 마력에는 고통을 느끼는 것 같다고요.”

“미믹이 마법 공격에 취약하다는 말입니까?”

“네. 하지만 죽일 순 없었어요.”

마법을 아무리 퍼부어도 고통만 줄 뿐 쓰러트릴 순 없다고 했다.

그리고 소통이 가능한 괴물이라고 했다. 마법사와는 어느 정도 의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는데, 교전 끝에 미믹과 잠시 소통한 에비라트가 피 웅덩이 쪽으로 일행을 이끌고 왔다고 했다.

“출구라고 했던 것 같아요. 근데 어느 순간부터 서로를 향해 공격하기 시작했어요. 에비라트도, 그를 따르던 전사들도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그녀를 제외한 친위대는 전부 광인이 되어 죽어버렸다.

미믹이란 놈, 제단의 힘을 알고 이용한 것이라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영악한 괴물일 수도 있겠다.

그녀를 통해 여러 가지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미믹에 관해 정보를 얻을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극악의 난이도라 어려울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미믹을 피부로 느껴보니 난이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미믹을 제거하는 게 쉽지 않겠어. 방법이 없을까?’

그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순간, 문득 한 가지 물건이 떠올랐다.

‘가만, 크리스탈 미믹에 대한 정보라면…….’

누가 가장 많이 알고 있을까?

‘도미닉 후아튼!’

그 이름을 떠올린 순간, 다급히 가방에서 한 권의 공책을 꺼냈다.

도미닉의 연구 일지.

여기에 해답이 있을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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