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육포 가져와!
크리스탈 미믹을 제거하고 제단을 무너트린 인물이 있다.
그 인물이 바로,
‘도미닉 후아튼, 그 미치광이 본인이지.’
이대로 시간이 흘러간다면 벌어질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당장은 아니었다.
실험체 감옥들을 폐쇄하면서 엄청난 실험체들이 끌려왔다.
그 수가 수천이 넘어갔다.
도미닉은 이들 전부를 마석이나 키메라 전력으로 바꾼 후 미믹에게 손을 뻗칠 것이다.
‘그 시간과 기회를 주면 안 돼.’
놔두면 도미닉의 전력이 두 배가량 증가한다. 잡혀 온 이들의 희생을 막으면서, 도미닉에게 큰 타격을 주려면 지금 미믹을 제거해야 했다.
‘문제는 미믹을 제거하는 과정이 자세히 나오지 않았단 말이지.’
소설에선 미믹의 제거 과정보단 미믹이 제거된 직후를 더 자세히 다뤘다.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연달아 터지는 이벤트, 백 개의 심장의 클라이맥스 부분으로 넘어가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카멜 블레이저의 비상과 베네타의 몰락.
내 목표는 클라이맥스가 일어나지 않게 막는 것이었다.
‘미믹은 쉽게 제거할 수 있는 괴물이 아니야. 분명 오래전부터 제거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을 거야.’
도미닉의 연구 일지.
그 방법이 이 책에 있는지 살피기 위해선 일단 책에 걸어둔 봉인 작업부터 풀어야 했다.
난 마석 더미로 눈을 돌렸다.
다행히 쉽사리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뭘 하시는 건가요?”
샤르바딘은 내 행동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붉은 돌들을 한 아름 안고 와서 단검 자루로 빻고 앉아 있으니 이상하게 보일만도 했다.
“괴물에 대해 더 알아보려고요.”
“괴물이요? 펜리 님이 오셨으니 곧 해결되지 않을까요?”
펜리의 실력에 대한 확고한 믿음.
그녀는 펜리가 곧 나타나 미믹을 없애줄 거라 믿고 있었다.
‘그게 가장 베스트이긴 하지.’
나야 코도 안 풀고 미믹을 제거할 수 있으니 가장 좋은 시나리오였다. 처음부터 펜리에게 그걸 기대하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미믹을 상대해보면서 펜리도 쉽지 않겠단 판단이 들었다.
‘펜리는 하이 엘프가 아니라 다크 엘프거든.’
마력의 축복을 타고난 하이 엘프는 마법으로 극강의 파괴력을 만들 수 있는 전투 마법사였다.
마법에 취약한 미믹을 죽일 수 있는 한 방이 있다는 뜻.
하지만 다크 엘프는 마력으로 육체 능력을 극대화하는 육체파였다. 지속력이 뛰어난 물리력을 자랑했지만, 절삭력 외엔 큰 한 방이 없어서 무식하게 단단한 미믹과는 상성이 안 좋았다.
펜리가 미믹에게 당할 것 같지 않았지만, 그녀의 공격이 통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야 했다.
“혹시 모르니까요.”
마석을 붉은 가루로 만든 후 양손으로 한 움큼 쥐었다. 이제 책에 뿌리기만 하면 되는데.
“저… 감사해요.”
“네?”
갑자기 샤르바딘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해왔다. 그녀를 바라보며 두 눈을 끔뻑이고 있자, 그녀가 어물쩍 고개를 돌리며 말을 꺼냈다.
조금 전 울음을 터트린 것이 부끄러웠던 모양.
“절 구하러 오신 거잖아요. 감사 인사가 늦은 것 같아서….”
“아, 괜찮습니다. 하하하….”
그녀의 생사에는 관심이 적었던 터라,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내 목적은 그녀보단 다른 것에 있었으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의 호감 어린 눈빛에 살짝 부담감이 올라왔는데, 그녀가 결심한 듯 날 올려다보며 입을 앙다물었다.
“이곳을 벗어나게 된다면 은인으로 생각할게요.”
“……은인?”
“네. 제 이름을 걸고요.”
엘프의 약속은 귀하다.
게다가 그 약속을 한 엘프가 도르네프의 반려라면 그 가치는 무궁무진했다.
어색한 웃음?
곧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그 마음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이걸 어떻게 거절해.
이럴 때 육포라도 있었으면 양심이라도 덜 찔렸을 텐데.
펜리 이 망할 년, 설마 육포를 다 먹은 건 아니겠지?
“혹시 도와드릴 게 있을까요?”
“쿵 소리가 크게 들리면 바로 알려주세요. 놈이 근처에 있다는 신호니까.”
“알겠어요!”
엘프는 청각이 뛰어나니 믿고 맡길 만했다.
입술을 꾹 다문 그녀는 두 눈을 감고 두 귀를 쫑긋거렸다.
표정이 제법 진지했는데, 무척 귀엽게 느껴졌다.
‘확실히 이쁘긴 하네.’
긴 시간 씻지 못하고 피를 뒤집어쓴 몰골이 이 정도라면 작정하고 꾸미면 살 떨릴 것 같았다.
진짜 외모 하나로 도르네프의 마음을 훔친 거 아니야?
‘뭔 쓸데없는 생각을….’
잡생각을 털어내고 책에 집중했다.
첫 장을 펼치고 그 백지 위에 붉은 가루를 조금씩 붓기 시작했다.
잠시 후, 백지 위로 붉은 가루가 빠르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주군! 봉인 해제에는 생체 마석이 열쇠였습니다!]
주술사들의 둥지, 장로 렌구아가 카멜에게 연구 일지의 봉인을 풀며 했던 말이었다.
우웅―!
책 겉표지에 붉은빛이 감돌길 잠시, 백지 위로 글자들이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첫 장에 떠오른 글귀에는 비탄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복수를 위해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했다. 그날을 절대 잊을 수 없다. 베르센 클라크! 대공이라 불리는 그 악마 같은 자가 내 딸에게 한 짓은…….]
펜리가 태운 첫 장에 적힌 글귀라, 중간에 내용이 잘려 버렸다.
연구 일지는 도미닉이 일기 형식으로 적은 듯 보였다.
눈살을 찌푸리며 다음 장을 넘기려고 하는데,
“가, 가까이 왔어요!”
샤르바딘이 다급히 미믹의 접근을 알려왔다.
쿵―
소리가 들린 순간, 어느새 미믹이 피 웅덩이 중앙으로 내려앉았다.
우리는 다급히 웅덩이 구석으로 물러났다.
그어어어어어―
덩치는 25톤 트럭만 한 게 더럽게 빨랐다. 게다가 강철 같은 내구성까지.
확실히 까다로운 상대였다.
사냥을 마친 것인지 미믹은 재차 마석을 털어낸 후 보랏빛 마석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사라졌다.
쿵―
한 번.
쿵―
두 번.
쿵― 쿵― 쿵―
그리고 세 번, 네 번, 다섯 번.
일정한 간격을 두고 미믹의 똑같은 행동이 반복됐다. 미믹은 마치 본능이 아닌 지시를 받고 일하는 것처럼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우리 근처로 다가오는 것 외에 특별한 움직임이 없다면 안심해도 될 것 같습니다.”
“저, 정말 괜찮을까요?”
“절 믿으셔도 됩니다. 이곳은 안전합니다.”
마석의 기운에 대항할 방법이 있다는 조건하에 제단은 미믹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장소였다.
미믹으로부터 도망칠 능력이 없다면 제단을 벗어나 통로로 향하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샤르바딘의 말대로라면 굳이 펜리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겠지.’
미믹은 영악하게도 사냥이 버겁다고 느끼는 존재들을 제단으로 유인하는 듯 보였다.
펜리 같은 괴물은 미믹에게 버거운 정도가 아니라 목숨마저 위협하는 강자였다.
그녀라면 무조건 제단 쪽으로 흘러들어 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목걸이의 위치를 감지했다면 더 빨리 올 수도 있을 테고.’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바깥이 아니라 같은 결계 장소라면 목걸이에 걸린 위치 마법을 감지할 수 있을지 몰랐다.
즉, 이제부터 버티는 것이 내 일이었다.
‘지루할 틈은 없겠네.’
난 주변을 둘러보며 쓰게 웃었다.
피 웅덩이, 끔찍한 시체들 그리고 음울한 분위기의 마석 더미까지.
악몽보다 더 끔찍한 환경 속에서 때아닌 독서를 하게 생겼다.
혼자가 아닌 게 어디냐.
“배고프죠? 조금만 참으세요.”
조만간 육포를 가져간 년이 찾아올 것이다. 그 전에 미믹을 없앨 방법을 찾아야 했다.
짧게 한숨을 내쉬며 연구 일지에 집중했다.
* * *
태양도 달도 없는 꽉 막힌 공간에서 시간의 흐름을 알기란 힘들었다.
하지만 제단에서 하루 이상의 시간이 지났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꼬르륵―
“…….”
배고파.
뱃가죽이 들러붙는 느낌이다.
이 정도 상태면 하루가 아니라 이틀, 사흘은 굶어야 하는 거 아니야?
“이건 생각지 못했는데.”
펜리라면 제단을 금세 찾아올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보다 훨씬 늦어지고 있었다.
“괜찮아요.”
문제는 샤르바딘의 몸 상태다.
오랜 굶주림과 갈증이 그녀의 몸을 망가트리고 있었다.
나를 만날 때부터 상태가 좋아 보이진 않았는데, 지금은 부축 없이는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 보였다.
그녀도 자신의 몸 상태를 알고 있는지 불안한 표정을 보였다.
“…먼저 펜리 님을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아뇨. 이곳에서 벗어나면 큰일 납니다.”
“하지만 펜리 님이 위험하신 상황이라면….”
펜리가 위험하다라.
그녀가 미믹에게 잡아먹힐 확률은?
‘와이번 알에서 드래곤이 태어날 확률이겠지.’
미믹의 공격이 강력하긴 하지만, 단조로운 공격으로는 그녀를 잡을 수 없다.
절대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란 소리다.
“그럴 리가요. 차라리…….”
[혼자 처먹으니, 맛있니?]
[샤르바딘이 살아있길 기도해야 할 거야. 보름 동안 굶고 싶지 않다면.]
그 일에 앙금을 품고 날 굶기려고 뭉그적뭉그적 움직이는 것이 더 확률이 높았다.
독사 같은 년이니 절대 방심하면 안 됐다.
“……저.”
나를 부르는 그녀의 숨이 무척 가빠 보였다.
한계였다.
고작 하루 굶주린 나와 달리 그녀는 오랜 시간 공포와 굶주림 그리고 갈증과 싸웠다.
역시나, 그녀의 시선이 피 웅덩이로 향했다.
갈등 어린 표정.
눈앞의 피로 고통을 해결하고픈 갈망이 커 보였다.
“마셔봤습니까?”
“도망치다가 의도치 않게…….”
내 물음에 샤르바딘은 쓰게 웃었다.
나도 의도치 않게 피를 마셔봤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피를 마시게 하면 힘이 난다고 했던가. 실제로 당장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내가 그녀라면 살기 위해서라도 마시면서 버텼을 것이다.
“그 후로 입에 댄 적은 없어요. 함께 온 이들이 웅덩이에 묻혀 있거든요.”
“아….”
“근데 전 꼭 살아남아야 해요. 저를 위해 죽은 이들과 약속했거든요. 어떻게든 벗어나 그들의 희생을 알려야 해요.”
난 그녀를 말없이 바라봤다.
피 웅덩이에는 그녀를 위해 희생한 자들의 흔적도 남아 있었다.
그 흔적조차 마시면서 버티고자 하는 그녀의 마음을 나는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하는 그녀의 처절한 생존 과정은 소설에 없었다.
‘그리고 그 끔찍했던 죽음까지도.’
실제로 경험해보니 알겠다.
현실과 소설의 체감은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을.
입술을 꽉 깨문 그녀가 피 웅덩이로 손을 가져갔다.
말려야 하나?
하지만 이대로는 당장 죽을 것 같은데.
고민하던 그때였다.
콰앙―!
“……!”
통로 사이로 묵직한 충격음이 들려왔다.
서너 번의 충격음이 들리고,
그어어어어어어―!
미믹의 소리마저 통로를 뚫고 이곳까지 들려왔다.
지금껏 들려왔던 미믹의 소리와 달랐다. 고통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미믹에게 큰 변화가 발생한 것 같았다.
미믹의 행동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존재?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맛없는 거 먹으면 탈 납니다.”
“……아.”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그녀 앞에 미소를 비춘 나는 호흡을 길게 들이쉬곤 매섭게 내뱉었다.
“망할 년! 육포 가져와!”
내 목소리가 제단 전체에 쩌렁쩌렁 울렸다.
미친 짓 같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외침이 터진 순간, 수많은 통로 중 한 곳에서 거친 바람이 불어왔다.
잠시 후, 뒷덜미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방금 뭐라고 했냐?”
어째 섬뜩한데 미치도록 반가웠다.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분명 육포 머시기 미친년이라고 들었는데?”
“미친년이라고는 안 했는데요?”
“…….”
“무, 뭐가 됐든 목소리를 듣고 찾아오신 거 아닙니까?”
“맞아.”
뒤를 천천히 돌아봤다.
암고양이가 털을 삐쭉 세운 것처럼 까탈스럽게 서 있는 한 여인.
손에 들린 곰방대.
곰방대를 뻐끔대며 그녀가 날 바라봤다.
“용케 버텼네? 그리고….”
내 얼굴에 연기를 후 뱉어낸 그녀의 시선이 샤르바딘을 향하자 부드럽게 풀렸다.
“용케 살린 것 같고.”
펜리 체이서.
그녀가 우리를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