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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53화 (53/130)

53화 새로운 개화 속성, 성력(聖力)

펜리가 이렇게 반가운 존재였나?

아니 정확하게 그녀보단 육포 주머니가 더 반가웠다.

육포 하나에 이리 행복해질 상황이 올 줄이야.

“넌 왜 먹어?”

“제 것 아닙니까?”

“이미 많이 먹었잖아. 나 굶을 때 키메라 배 속에서.”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니, 무서운 년이었다.

그나저나 주머니에 일주일 분량의 육포를 넣어놨는데, 절반 가까이 사라졌다.

그녀의 식탐을 욕하고 있는데,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틀이 다 지나갔어. 조금 있으면 삼 일째야.”

“…삼 일? 그렇게나 흘렀습니까?”

구덩이에 떨어진 후 예상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흘러있었다.

‘삼 일이면 좋든 나쁘든 입질이 와야 하는데?’

제단으로 오고 있는 두 개의 세력, 도르네프와 도미닉.

이들 중 도착한 이가 있다면 제단에도 어떤 변화가 있어야 했다.

‘아직은 조용하단 말이지.’

바깥 상황이 궁금해졌다.

내가 원하는 시나리오는 도르네프의 군대가 먼저 도착하는 것이었다. 그래야 잡혀 온 이들도 살 수 있고, 도미닉이 도착했을 때 함께 싸울 수 있었다.

‘반대로 도미닉이 먼저 도착한다면….’

그러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물론, 안전은 보장받을 수 있었다.

펜리 체이서의 개화 특성, 그림자 주술(Shadow Magic).

그 능력이라면 나와 샤르바딘 정도는 쉽사리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포기할 것들이 생긴다.

‘더 급한 건, 도미닉이 도착하기 전에 제단을 벗어나야 한다는 거지.’

펜리의 주술이 과연 결계 안에서도 통할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바깥으로 나갈 수 있습니까?”

“당장은 힘들어.”

“마법진 때문입니까?”

“맞아.”

“시간을 준다면요?”

펜리는 미간을 구기곤 잠시 고민에 빠졌다.

구덩이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해봤다. 하지만 그렇다 할 방도를 지금까지 찾지 못한 상황.

그녀는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확신할 수 없어.”

“그 정도입니까?”

“도미닉 따위가 만든 곳이 아니야. 예부터 존재했던 공간일 거야.”

“고대 시절의 결계 같은 겁니까?”

“확실해.”

“어떻게 확신합니까?”

“내 감각에 교란을 주는 뭔가가 있거든. 인간의 지식으로 나올 수 없어.”

출구는 물론, 목걸이의 위치를 느끼고도 방향을 잡지 못했다고 했다.

3일이 넘도록 그녀가 날 찾지 못한 이유였다.

결국,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건데.

그 전에 보험이 필요했다.

“뭐냐?”

내가 손을 내밀자, 펜리는 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잊으신 거 없습니까?”

“뭘?”

“눈앞에 샤르바딘 님을 대령하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생존한 채로.”

“…….”

조건부 거래.

난 펜리와의 약속을 완벽히 지켰으니, 대가를 당당히 요구할 수 있었다.

생명의 징표를 내놔!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선 당장이라도 받아놔야 했다.

그렇게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는데,

“억!”

내 얼굴에 연기를 후― 내뱉던 펜리가 내 허리춤에서 단검을 빼앗아 들었다. 날카로운 예기가 내 눈을 어지럽혔다.

“…무, 뭡니까?!”

“가만히 있어. 단검으로 확 찔러버리기 전에.”

설마, 날 죽이려고?

이 육포 같은 년이 설마…!

“응?”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그녀는 단검으로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베어낸 후 내 이마 중앙을 엄지로 꾹꾹 눌렀다.

도장을 찍듯 자신의 핏자국을 남긴 후 주문을 작게 읊조리자, 시원한 감각과 함께 핏방울이 이마 안쪽으로 빠르게 스며들었다.

“표식을 각인한 거야. 징표를 달라며?”

“두 번 하다간 심장 떨어지겠네요.”

“각인 효과를 불러오려면 날 떠올리면서 이름을 불러.”

“그럼 어떻게 됩니까?”

“도움을 줄 수도 있겠지?”

생명의 징표.

단 한 번, 목숨이 위급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그녀만의 맹약이었다. 이건 그림자 능력 중 하나인 그림자 표식을 이용한 것인데, 표식을 남긴 이의 흔적을 쫓는 추적술을 응용한 것이었다.

“대신 네놈 주변에 그림자가 선명하게 존재해야만 해.”

“그림자를 타고 온단 말입니까? 거리와 상관없이?”

“그랬다면 세상 놈들이 날 가만히 뒀을 리 없지. 제약이 존재해.”

“제약? 그 제약이 뭡니까?”

“알면 죽을 텐데, 듣고 죽을래?”

“즈, 증표를 준 사람한테 할 말입니까?!”

“그럼 묻지 말든가.”

“그럼 불렀는데 제약으로 못 오게 되면 어떡합니까?”

“뒈져야지.”

“생명의 징표라면서요?”

“내가 부르면 막 나타나는 램프의 요정인 줄 알아? 부르지 말고 직접 날 찾아와서 도움을 청하라는 말이야. 위치 알잖아?”

더 따지다간 들고 있는 단검에 죽을 것 같아서 한발 물러났다.

사실 생명의 징표를 받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녀가 말하지 않은 그 제약이란 조건.

‘난 알고 있거든.’

당연히 비밀로 해야 했다. 그 제약 조건은 그녀의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했으니까.

“천천히 씹어 먹어요.”

“…고마워요.”

새로 느낀 건데, 여긴 엘프도 육식을 하나 보다.

참 복스럽게 먹네.

샤르바딘의 몸 상태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

눈에 띄는 건 그녀의 목에 걸린 목걸이였다.

펜리가 내게 줬던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무슨 마법을 부렸는지 빠르게 기운을 회복하고 있었다.

엘프에게만 적용되는 효과라고 들었는데, 미리 알았다면 좋을 뻔했다.

샤르바딘이 천천히 배를 채우는 사이, 펜리와 나는 그동안의 일을 간략히 공유했다.

그 전에 난 통로 쪽을 잠시 둘러봤다.

“미믹과 교전한 거 아니었습니까?”

“미믹? 그놈을 미믹이라고 부를 수 있나? 이미 종을 넘어선 것 같던데.”

“오랜 시간 변이 과정을 겪은 것일 뿐, 본질은 같으니까요.”

“고루한 얘기는 집어치우고 묻고 싶은 게 뭐야?”

“미믹과 몇 번 부딪쳤습니까?”

“세 번.”

“제거는 무리였나 보네요.”

“이런 건 눈치가 빠르네.”

“미믹이 살아있으니까요.”

“불리하다 싶으면 바로 도망치는 영악한 놈이야. 쉽게 잡기 어려워.”

세 번 부딪쳤고, 세 번 모두 미믹이 먼저 도망쳤다.

강철 같은 내구성에 도망치는 속도가 무척 빨라서 잡을 수가 없다고 했다.

하긴, 놈이 더럽게 빠르긴 하지.

슬슬 본론으로 가볼까?

“사실 제단에서 탈출할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탈출 방법? 네가 어떻게?”

펜리의 물음에 난 도미닉의 연구 일지를 흔들었다. 책을 살핀 펜리는 미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유치한 장난질을 책에 해놨네? 어떻게 풀었지?”

“붉은 보석이 해답이더군요. 이곳을 뒹굴다가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흠, 그래서 방법은?”

“크리스탈 미믹을 제거하는 것.”

“크리스탈 미믹?”

“녀석의 이름 같습니다.”

난 크리스탈 미믹과 제단에 관해 알고 있는 정보를 그녀에게 모두 풀었다.

계획을 실행하려면 그녀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쿵―

“……!”

이놈도 양반은 아닌 모양이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통로 한 군데서 모습을 드러냈다.

웅덩이 한쪽에 철퍼덕 떨어진 미믹은 여느 때처럼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입가에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

어디서 또 누군가를 사냥하고 돌아온 모양이었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생존자들을 보셨습니까?”

“제법 마주쳤지. 지금까지 살아있을지 모르겠지만.”

“함께 움직일 생각은요?”

“저 괴물 새끼가 입 벌리고 돌격해오면 지키는 것이 무의미해. 반격이 고작이었거든. 추격하면 복잡한 길로 사라져 버리고.”

“이곳 무척 넓겠죠?”

“네가 알던 것 이상으로 이곳은 넓어. 그리고 복잡하지. 지리 파악은 포기해.”

답을 하는 펜리의 시선은 크리스탈 미믹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곰방대를 뻐끔뻐금 피우며 팔짱을 끼고 한동안 미믹의 행동을 살폈는데, 내가 알려준 정보를 확인하는 것처럼 보였다.

“겁나서 못 본 척하는 거 아니야?”

“…그럴 리가요.”

코앞에서 자신을 인지하지 못하는 미믹을 보자 생각이 많아진 표정이었다. 그 사이, 미믹이 다른 통로로 사라져 버렸다.

“진짜네. 인지를 못 해.”

“그래서 말인데, 괜찮습니까?”

“뭐가?”

“손톱이 붉어진다거나,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거나 부작용을 말하는 겁니다.”

“널 죽이고 싶긴 한데. 이것도 부작용인가?”

“…아닐 겁니다.”

곰방대를 털어낸 펜리는 마석 하나를 집어 들었다. 주변을 살핀 그녀가 다시 곰방대를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묘하게 거슬려. 영향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당신도 오랜 시간 노출되면 위험하다는 겁니까?”

“그래.”

“얼마나 버틸 수 있습니까?”

“굶어 죽는 게 더 빠를걸?”

펜리가 텅 빈 육포 주머니를 흔들었다.

부작용을 걱정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하긴 5성급 정신 방벽이 평범할 리 없지.

그런데 언제 다 먹었지?

샤르바딘을 내려다보자, 오물오물하던 그녀가 어색하게 웃었다.

뭐라 할 수도 없고.

확실히 시간은 우리가 아니라 미믹의 편이었다.

아무리 강해도 굶으면 답이 없었으니까.

“저 상자 괴물을 죽여야 출구가 나온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결국, 제거해야 한다는 말이네.”

“기습으로 죽일 수 있겠습니까? 이곳이라면 가능할 것 같은데.”

“통짜 쇳덩이 같은 놈이라 내 무기로 단시간에 죽이는 건 불가능해. 놈의 움직임을 누군가 잡아준다면 해볼만한데…….”

“얼마나요.”

“반나절 정도?”

반나절? 이 엘프가 미쳤나.

그녀가 날 보며 눈을 흘기자, 난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반나절이 아니라 1분도 빡세 보였다.

대신,

“얼마 전부터 작업해둔 게 있습니다.”

“작업?”

“도미닉의 연구 일지에 미믹에 대한 사냥법이 적혀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방법은 지금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방법인데.”

“키메라 체액.”

붉은 보석에 키메라 체액을 묻혀 마비시킨 후 사냥하는 방법이 일지에 적혀 있었다.

보랏빛 마석 생성에 붉은 마석을 삼키는 행위를 이용한 것인데, 우리에겐 키메라 체액 같은 마비독이 수중에 없었다.

“그런데 무슨 작업을 해놨다는 거지? 체액이 없다면서?”

“체액은 아니지만, 대체할 만한 것이 있거든요.”

“대체할 만한 것?”

펜리의 물음에 난 대답 대신 마석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눈을 살며시 감고 꿈틀대는 힘을 방출했다.

우웅―

미약한 진동과 함께 마석에 백광(白光)이 씌워지기 시작했다.

샤르바딘은 그 빛을 한눈에 알아봤다. 일지를 읽는 데 한나절 빠져있던 사람이 돌연히 마석을 붙들고 이것저것을 하던 것을 봤기 때문이다.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져.’

그래서 그가 빛을 소환할 때 곁에 바짝 붙어 빛을 감상하기도 했다.

펜리는 가늘게 눈을 뜬 채 마석을 둘러싼 빛을 살폈다.

‘속성인가?’

그녀는 눈앞의 빛에 속성이 깃들었음을 눈치챘다. 속성을 띤 빛에는 성질이 존재한다.

흐릿한 기운을 지녔지만 어디든 물들 수 있는 자신의 속성과 달리, 눈앞의 빛은 무척 곧고 단단했다.

‘그리고 안정감이 놀랍도록 강해.’

부술 수 없는 벽과 마주한 기분이다.

무질서인 혼돈과는 상극인 힘이었다.

“이게 뭐지?”

“제 속성입니다.”

“설마 개화 특성?”

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1성은 새싹, 2성은 꽃봉오리, 3성은 ‘개화’로 표현됐다.

마나 유저의 일생(一生)이 특성과 무특성으로 갈리는 단계.

이 중 선택받은 소수만 ‘특성 개화자’로 각성한다.

칼의 위기 직감력.

엘튼의 불꽃검.

펜리의 그림자 주술처럼 나 또한 특성 개화자로서 새로운 속성을 각성했다. 그리고 인챈터로서 난 그 속성을 다른 사물에 심어놓을 수 있게 됐다.

“마석에 제 속성을 심어놨습니다. 미믹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절해놨는데, 그 기운이 미믹의 내부를 천천히 갉아먹겠죠.”

“갉아먹는다고? 속성이 뭔데?”

미믹에게 악영향을 끼칠 정도라면 사(四)대 속성처럼 일반적인 속성은 아닐 것이다.

난 짧게 숨을 내쉬곤 기운을 끌어올렸다.

우웅―

마석에 깃든 빛무리가 번뜩이더니 눈부시게 빛나기 시작했다.

“……!”

붉었던 마석의 색이 서서히 옅어졌다. 부르르 떨리는 것이 마치 비명을 지르는 듯 보였다.

마석이 평범한 돌로 변했을 때, 펜리는 미간을 좁힌 채 나를 바라봤다. 살짝 놀란 듯 보였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마석에 깃든 무질서한 기운을 바로잡은 것뿐입니다.”

“바로잡았다고?”

“네.”

무질서한 것들을 바로잡는 힘.

깨달음을 통해 난 내 속성을 이렇게 정의했다.

성력(聖力)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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