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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54화 (54/130)

54화 크레이지 모드 발동이다

돌무덤처럼 쌓인 마석 더미가 빛을 머금고는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인챈트로 성력(聖力)을 마석에 씌우는 작업인데, 얼마 전부터 난 이 과정을 일정 간격마다 반복해왔다.

마석이 버틸 수 있을 정도의 미약한 성력만 부여한 탓에 시간이 지나면 금세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사냥을 마친 미믹이 돌아왔다.

으적―

미믹은 붉은 마석을 여러 차례 삼켰고, 보랏빛 마석을 하나씩 뱉어냈다.

그 광경을 반복적으로 바라보던 펜리가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처먹은 양이 상당한데, 언제쯤 반응이 나오는 거야?”

“모르겠습니다.”

“네놈 특성인데 왜 몰라. 특성 개화자가 됐을 때 깨달음을 얻었을 거 아니야.”

“얻었죠.”

“잊어버렸냐? 머리가 그렇게 나빠?”

아, 주둥이를 한 대 후려치고 싶은데, 무력이 깡패였다.

특성을 개화했을 때 성력(聖力)에 관한 지식을 자연스레 습득했다. 그러니, 지금처럼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는 거겠지.

하지만 내가 행하고 있는 작업은 인챈트와 성력을 동시에 작업하는 일이었다.

두 가지 능력을 응용하는 작업이었고, 테스트 또한 제단에서 마석을 가지고 처음 해본 것이었다.

‘연습할 기회가 너무 없었어.’

키메라 배 속에서 3성을 개화했다.

그땐 키메라가 죽을까 봐 섣불리 힘을 드러내지 못했다.

탈출했을 땐 살아남기 바빴고, 피 웅덩이에 도착한 뒤에야 특성을 연습할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속성의 강도를 올려보는 건?”

“그럼, 바로 알아챌 겁니다.”

성력이 강해지면 마석에 영향을 준다. 마석을 가지고 테스트해본 결과 미약하지만 지금 정도가 적당했다.

난 일지 내용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미믹 내부에 영향을 줄 정도로 성력이 누적되면 반응이 나타날 겁니다.”

“누적?”

“삼킨 것을 몸속에 저장한 후 천천히 소화시킨다고 적혀 있었거든요.”

“그대로 성력이 소멸해서 반응이 나타나지 않으면?”

“다른 수를 떠올려봐야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느 정도 계획에 확신이 있었다. 미믹의 소화 속도보다 누적되는 기운이 더 빠르면 부작용이 나타난다고 일지에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도미닉은 이 방법을 통해 체액으로 미믹을 마비시키고 제거했다.

그러니, 기다리면 원하는 반응이 나올 것이다.

반나절이 흘렀다.

“후…….”

쌓인 마석 더미에서 손을 떼자, 어지럼증이 올라왔다.

특성 발현에는 마나와 체력이 소모됐다. 반복적인 속성 부여로 피로감이 누적되고 있음을 느꼈다.

‘슬슬 효과가 나타나야 하는데.’

지금껏 미믹이 마석을 삼킨 횟수는 다섯 회, 그렇다 할 반응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성력이 놈에게 먹히지 않은 것일까.

‘아니, 분명 먹혀.’

마석과 미믹의 성질은 강약의 차이일 뿐 혼돈으로 동일했다.

미믹에게 타격을 줄 정도로 성력을 더 누적시켜야 한다는 말인데, 결국 시간이 더 필요했다.

문제는 시간을 오래 끌면 막상 전투 때 체력이 부칠 수 있었다.

시간이 더 흘렀다.

미믹이 마석을 삼킨 횟수가 다섯에서 열 번이 넘어갔을 때, 묵묵히 지켜보던 펜리가 나를 불렀다.

“미믹의 사냥 횟수가 줄어들고 있어. 느껴지지?”

“네.”

“먹잇감이 줄고 있는 거야. 보다시피 먹이가 있어야 미믹은 마석을 생산해. 놈은 일정량의 붉은 마석을 항시 남겨놓고 있어. 여기서 먹이가 사라지면 더는 마석을 삼키지 않을 거야. 어떡할래?”

미믹이 마석 흡입을 멈추면 성력의 누적이 멈춘다. 그럼 더는 계획을 진행시킬 수 없었다.

어떡하지?

더 기다려봐야 하나?

“굶은 지 하루 지났어. 시간을 끌수록 우린 점점 약해져. 먼저 치자.”

“생각해둔 바가 있습니까?”

“네가 미믹의 발목을 잡아준다면?”

“반나절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10분, 그 정도만 잡아봐.”

“그 정도면 충분합니까?”

떨떠름한 내 물음에 펜리는 입맛을 다시곤 양손을 살며시 모았다.

은은한 구체가 그녀의 손안에 뭉치기 시작했다.

“전력을 드러낸다면 가능할지도?”

“전력이요?”

“확신은 못 해. 저놈이랑 난 상성이 너무 안 좋거든.”

“처음부터 전력으로 싸우지 그랬습니까?”

“너 같으면 타인 앞에 전력을 드러내고 싶겠냐?”

“징표를 지닌 저라면 괜찮지 않을까요?”

“지랄하네.”

그때였다.

…! 그, 그아아아아아아!

“…뭐!?”

막 사냥을 하고 돌아온 미믹이 몸을 털고 있다가 괴성을 질러댔다.

거대한 몸체가 부르르 떨렸다. 한동안 조용히 몸을 떨던 미믹은 돌연 난동을 부리며 혓바닥을 미친 듯이 휘두르기 시작했다.

콰앙―! 쾅―!

“까아아아악!”

“미, 미친!”

난 다급히 샤르바딘을 업고 웅덩이 바깥으로 물러났다.

크고 단단한 혀에 휩쓸린 것들이 부서지고 찢어졌다.

마석 파편이 허공에 튀어 오르고, 웅덩이에 고인 핏물이 동굴 전체를 적시며 붉은 풍경을 만들어냈다.

그 중앙에서 미친 듯이 몸부림치는 미믹.

자신의 영역을 스스로 파괴하고 있다.

동시에 미믹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새하얀 빛.

빛을 본 순간 확신했다.

성력이 미믹의 내부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신호가 왔습니다!”

“엥? 전력을 다해야 하나?”

“장난해요! 당연하죠!”

펜리의 전력?

그림자 주술을 공개하는 것을 꺼린 모양인데, 그건 그녀의 판단 미스였다. 내 계획은 처음부터 그녀의 전력을 염두에 두고 짜인 것이기 때문이다.

“잠시 뒤로 물러나 있어요!”

샤르바딘을 구석으로 밀어낸 나는 다급히 오른쪽 소매를 걷었다.

손목에 각인된 신비한 문양이 점멸하며 빛나기 시작했다.

쿵― 쿵―!

미믹이 웅덩이를 벗어나려는 듯 혀로 바닥을 힘껏 찍었다.

도망치기 전에 잡아야 한다!

펜리는 미믹 쪽으로 몸을 튕기며 소환한 구체를 위쪽으로 날렸다.

“움직임을 막아!”

허공에 두둥실 뜬 구체는 그녀의 머리카락 색을 닮았다.

샛노란 빛.

마치 작은 태양을 보는 듯했다.

그 빛이 피로 물든 땅을 환하게 비추며 그림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큰 그림자는,

쿵―!

미믹의 그림자였다.

그림자와 함께 미믹이 사라진 순간, 난 그 방향으로 몸을 던졌다.

“시, 시발!”

이곳의 내 모토가 살아남는 것인데, 살아남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크레이지 모드 발동이다.

* * *

번쩍―!

그아아아아악―

동굴에서 눈 부신 빛이 터지자, 미믹의 괴성이 터져 나왔다.

황금빛을 피해 미믹이 격한 반응을 보이며 물러나는 장면.

직진밖에 못 하는 불도저가 다급히 물러나는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졌다.

“미친놈…….”

펜리는 미믹을 막아선 사내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아서 클레이튼.

자신도 나름 토바른 지역에서 뒤가 없는 미친 엘프로 통하는데, 저놈은 더한 미친놈이었다.

‘발목을 저렇게 잡는 거였어?’

미믹이 도주할 경우 발목을 잡아둘 자신이 있다고 했다.

자신이 내뱉은 말에 단 한 번의 실수도 없던 녀석이었다.

오히려 기대 이상으로 해줬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믿음을 가지고 지켜봤다.

그런데,

“목숨을 여벌로 가지고 다니나.”

미믹의 이동 경로를 몸뚱이로 막아서는 놈이라니.

녀석이 소환한 황금빛에 미믹이 거부감을 보인다고 하지만, 입을 쩍 벌린 채 질주해오는 미믹 코앞으로 손을 내미는 행위는 보통 담력으로 할 수 없는 짓이었다.

아니, 보통은 마주 보는 순간 오줌을 지렸을지도.

“으아악!”

“미친놈 맞네.”

한 번 더 빛이 터졌을 때, 펜리는 황금빛에 의문이 생겼다.

녀석의 손목에 새겨진 신비한 문양.

키메라에게 극악인 능력이라 들었는데, 눈앞의 미믹에게도 통했다.

섭리를 거스르는 기운과 상극인 기운이 분명했다.

지켜본 것만 세 가지 능력을 보였다. 하나 갖기도 힘든 능력들을 고작 3성이 지니고 있었다.

‘신기한 놈이란 말이지.’

생명의 징표까지 준 녀석이니, 이번 임무가 끝난다면 길드 차원에서 관심을 가져볼 생각이었다.

“무, 뭐 해요! 쫄았습니까?!”

“건방지기도 하고.”

펜리는 눈을 빛내며 양손에 먹빛의 크로우를 소환했다.

이젠 자신의 차례였다.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검게 물든 순간,

꿀렁―

미믹의 그림자가 물감처럼 출렁대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림자에서 검은 손들이 쏟아져 올라왔다.

펜리의 그림자 주술이 펼쳐졌다.

* * *

“으아악!”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쩍 벌린 입이 악취와 함께 코앞까지 훅 왔다가 물러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면 이 비명이 절로 이해가 된다.

“헉, 헉, 헉.”

몇 차례 막아선 지금,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황금빛을 소환하면 미믹은 정신없이 물러났다.

날 그대로 삼키고 지나갈 수 있었지만, 미믹은 황금빛을 마주한 순간 삼키는 것을 극히 경계했다.

독이 든 음식을 보는 것 같달까.

본능적으로 삼키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안쪽에서 터트리면 쓰러트릴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미믹도 키메라와 같이 문양에 상극인 반응을 보였다.

거대 키메라처럼 내부에서 빛을 노출시키면 쓰러트릴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쩍 벌린 입에 달린 수백 개의 이빨을 본 순간 그 생각이 쏙 들어갔다.

먹힌 순간, 삼켜지는 게 아니라 갈가리 찢겨 걸레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쿵― 쿵― 쿵―

미믹은 우리의 존재를 인지했지만, 마석의 기운 때문인지, 우리 위치를 제대로 감지를 못 하고 있었다.

그래서 도주를 시도했는데, 그 움직임이 성난 황소 같아서 나만 죽어 나갔다.

미믹을 중심으로 작은 원을 그리며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그동안 미믹의 행동 패턴을 꾸준히 살피고 연구했다.

놈의 이동에는 혀가 필요했고, 오직 혀를 통한 직선 이동만 가능했다.

혀를 튕기기 전에 놈의 정면에 서야 한다는 뜻. 당연히 시간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 시간을 메워주는 게 바로 펜리였다.

“서둘러!”

미믹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수십 개의 손이 미믹의 동체와 혀를 붙잡고 늘어졌다.

미믹이 미친 듯이 몸부림치며 그림자들을 털어냈다. 그리고 혀를 이용해 육체를 튕겼을 땐 그 정면에 내가 있었다.

번쩍―!

그아아아아아악!

미믹이 황금빛을 피해 물러나면 펜리의 공격이 쏟아졌다.

그그그그극―! 그극!

인상이 절로 구겨지는 철판 긁는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펜리의 크로우가 미믹의 피부를 찢는 소리였다.

허공에 든 신기루처럼 두 개의 크로우가 벼락처럼 움직였다.

미믹의 그림자를 통해 순간이동을 하는 듯한 움직임.

그녀의 공격은 마치 귀신같았다.

엄청난 공격 속도와 순발력.

눈 깜짝할 사이에 미믹의 신체에 할퀸 흔적이 가득 메워졌다.

미믹의 피부는 강철처럼 단단해서 큰 타격을 줄 수 없었지만, 성력이 내부에서 분탕질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끄아아아아아악!

“먹힌다!”

처음으로 미믹의 입에서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할퀸 흔적에 미믹의 혈흔이 미세하게 물들기 시작했다.

심할 때는 피부 조각이 뭉텅이로 떨어졌고, 상처가 벌어지면서 핏물이 쏟아지기도 했다.

성력의 부작용이 만들어낸 육체 약화.

치명타는 아니지만, 대미지가 지속적으로 누적되면서 큰 타격을 받는 모습이었다.

이대로 시간을 끈다면 충분히 해볼 만한 상황이 된 것이다.

이제 시간은 우리 편이었다.

다만,

“으아악! 시발!”

번쩍―

크아아아아악!

순간순간 쩍 벌어진 미믹의 입을 구경하는 내 입장에선 공포 특집이 따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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