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베네타의 군주, 도르네프
제단 주변이 미믹의 혈흔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 흔적이 짙어질수록 승리를 예감했지만, 내 표정은 점점 흙빛으로 변해갔다.
딱!
“…헉!”
멈칫하던 놈이 순간 입을 쩍 벌리더니 코앞에서 입을 매섭게 닫았다. 강렬한 빛에 다시 물러나긴 했지만, 조금 전 자칫 팔이 잘릴 뻔했다.
벼랑 끝에 몰린 미믹이 행동에 변화를 보인 것인데, 이때부턴 막는 데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정신이 돌아서 날 그대로 삼켜버리면 끝이었기 때문이다.
‘개 같은 난이도!’
펜리 체이서를 데리고 움직이는데도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이다.
도미닉은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이 지랄이라고?
차라리 학살자의 비위를 맞춰주고 그 밑으로 들어갈 걸 그랬다.
‘카멜에게 미래 내용을 툭툭 던져주고 가치를 증명하면 호의호식은 누워서 떡 먹기일 텐데.’
어쩌다 이리 사서 고생을 하게 됐는지 모르겠다.
시작부터 꼬였다고 해야 하나.
“뭐 해! 막아!”
“비, 빌어먹을! 시간 지났다고요!”
미믹을 붙잡고 늘어진 지 10분을 지나 15분에 다다르고 있었다.
펜리가 부탁했던 시간에서 5분이 더 지난 것이다. 전력으로 움직였던 내 마나와 체력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쿠, 쿨럭!”
호흡이 턱까지 차오르고,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후들거린다.
그럼에도 난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 미친 사람처럼 미믹의 발목을 붙잡아야 했다.
미믹이 통로로 도망치는 순간 절대 잡을 수 없다.
놓치면 끝이었고, 기다리는 건 굶주림이었다. 죽음과 직결되는 일이었기에 난 목숨을 걸고 미믹을 막아섰다.
오직 나밖에 할 수 없는 일.
‘망할 년아, 어떻게 좀 해봐!’
펜리를 보며 욕설을 퍼부었는데, 크게 가슴을 들썩이는 것을 보니, 그녀도 지친 듯 보였다.
펜리 체이서는 강하다.
다만, 상성이 최악이라고 해야 하나? 상대가 미믹이 아니라 대인전이었다면 펜리는 악마처럼 날아다녔을 것이다.
단시간에 승부가 나지 않는 상황.
먼저 지친 쪽이 패배하는 그림이었다.
다행인 건 지속적인 타격으로 미믹의 움직임도 눈에 띄게 느려졌다는 점이었다.
‘뒈져라, 쫌!’
성력의 부작용으로 모든 상처가 썩어가는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지만, 미믹은 틈만 나면 혀를 움직이며 이곳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진짜 맷집 하나는 미친 새끼였다.
‘한 방이 부족해.’
미믹의 내부까지 타격을 줄 강력한 한 방이 필요했다.
다만, 우리 쪽은 가지고 있는 카드를 전부 사용한 상황이라, 서로 눈치를 보며 다른 방도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추… 출.]
“…뭐?”
머릿속에 기분 나쁜 목소리가 울렸다.
아니, 목소리보단 의지에 가까웠다. 또 다른 의지가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출구를… 가라. 떠나라.]
움찔한 나는 자세를 잡고 가늘게 눈을 뜬 채 미믹을 노려봤다.
입을 벌린 채 나와 대치하고 있는 녀석.
목소리가 울린 순간 미믹의 움직임이 멈췄다.
놈이 내게 메시지를 보낸 건가?
펜리 또한 공격을 멈칫했는데, 샤르바딘도 움찔하는 것을 보니, 이 공간에 있는 전부에게 같은 메시지를 보낸 것 같았다.
출구를 만들어 준다고? 이게 무슨 뜻이지?
미믹의 메시지에 의문이 든 순간,
우우우웅!
“……!”
동굴의 풍경이 티비 화면 오류처럼 뒤틀리더니 대낮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동굴 천장에서 쏟아지는 빛이었다.
위를 올려다보며 셋 다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가 처음 내려왔던 구덩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믹이 스스로 결계를 풀었다.
지금까지 버티던 놈이 갑자기 왜?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특히, 펜리의 분위기.
기세가 줄어든다.
난 다급한 얼굴로 외쳤다.
“어서 공격해야 합니다!”
“…….”
내 외침에도 펜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샤르바딘과 구덩이 위를 번갈아 보더니 내게 시선을 보냈다.
굳이 싸울 필요가 있냐는 신호.
그녀의 목적은 샤르바딘의 구출이지 미믹의 제거가 아니었다. 출구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굳이 미믹과 대치할 필요가 있을까.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졌다.
나 혼자서 미믹을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
“저 위에 어떤 위협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구덩이는 진짜야.”
“도미닉이 도착했다면……!”
“결계 밖이라면 큰 위험은 없어.”
그림자 주술이라면 어떤 위험이든 회피할 수 있다.
결계가 새장처럼 막고 있었는데, 벗어날 문을 미믹이 열어준 것이다.
어느새 크로우를 해제한 그녀는 천천히 샤르바딘에게 접근했다.
‘…망했다!’
잘되나 싶었더니, 역시나 변수가 발생했다.
미믹을 보니 분명 여유가 있어 보였다. 단순히 위협 때문에 우리를 보내주는 것일까. 의도가 있을 것 같은데, 의도와 별개로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미믹을 죽여야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는데.’
계승자의 시험을 시작하기 위한 장치.
그게 바로 미믹의 죽음이었다.
평범한 몬스터였던 미믹이 크리스탈 미믹으로 진화한 것은 미믹이 옛적에 삼킨 고대의 힘 덕분이었다.
고대의 힘, 불사자 레토니칼스의 권능.
미믹의 몸속에 잠들어 있는 고대의 힘이 깨어나는 순간 권능의 계승을 위한 시험이 시작된다.
그 시험은 전투와 관련되어 있었다.
‘어부지리 작전이 아니면 심장을 얻는 건 불가능해.’
이번 시험은 내 능력으로 절대 얻을 수 없었다.
주인공 카멜도 포기한 힘인데, 오죽할까.
본래 주인이었던 도미닉과 상잔시켜야 했다.
백 개의 심장.
그 힘을 얻기 위해 도미닉은 인간이길 포기하며 수년을 준비했다. 눈에 불을 켜고 시험에 달려들 것이 분명했다.
지금이 그 타이밍인데, 저년이 문제였다.
“펜리!”
“쓸데없는 곳에 힘 빼지 말고 너도 서둘러.”
샤르바딘을 부축한 펜리가 심드렁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구덩이 높이는 고작 5미터.
한 번의 도약으로 오를 수 있는 높이였다.
난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생명의 징표.
징표를 쓰고 내가 미믹에게 달려든다면 그녀도 미믹과 싸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펜리가 추후 내 행동에 반감을 드러내거나 의심을 품을 것이고,
‘아레나 후아튼을 대비할 카드도 사라지겠지.’
칼의 가르침대로라면 분위기상 포기하는 게 맞았다. 생존만 한다면 다른 기회가 또 찾아올 테니까.
샤르바딘의 생존에 만족해야 하나.
찰나의 갈등.
잠시 이마에서 손을 뗀 순간이었다.
구덩이 위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갑자기 환상이 보이는데?”
“네놈이 아니라 우리겠지. 내 눈에도 마님이 보이거든.”
“너도?… 그럼 우리가 보고 있는 분이 샤르바딘 님이 맞는 건가?”
“아까 전까지 분명 아무것도 없었는데?”
“함정 아니야? 여긴 마법사의 소굴이잖아.”
갑작스레 들려온 대화 소리에 고개를 들었는데, 구덩이 주변에서 머리를 빼꼼 내민 채 우리 쪽을 내려다보는 이들이 있었다.
두터운 목선, 풍성한 수염, 각자 쥐고 있는 거대한 둔기보다 작은 키까지.
“드워프…?”
내 입에서 그들의 존재가 작게 흘러나왔다.
대화 소리를 시작으로 구덩이 주변으로 고개를 내민 드워프들이 점차 많아졌다.
결계가 풀리면서 나타난 우리 모습에 하나같이 당황한 표정들인데, 시선이 모두 샤르바딘에게 향해 있었다.
다만, 함정을 경계하며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모습.
“나토네 경!!!”
그때 샤르바딘이 한 드워프의 얼굴을 알아보고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기사 나토네.
도르네프의 친위대를 이끄는 친위대장의 이름이었다.
그녀의 외침이 시발점이 됐다.
나토네가 불현듯 벌떡 일어나더니 둔기를 들고 구덩이 밑으로 뛰어내렸다.
“나, 나토네 님이 움직였다!”
“……정말 샤르바딘 님?”
“주, 주군께 알려라!!!!”
나토네의 움직임에 드워프들이 격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일부는 나토네를 따라 구덩이로 몸을 던졌고, 일부는 주군을 부르기 위해 움직였다.
기사급 드워프들의 등장.
그 모습에 한 가지 가정이 스쳐 지나갔다.
도르네프의 군대가 도미닉보다 이곳에 먼저 도착했다. 그리고 이 근처에서 도르네프가 샤르바딘을 찾고 있다.
고민할 것도 없었다.
“괴물이 샤르바딘 님을 잡아먹으려고 합니다!!!!”
목청껏 외친 나는 단검에 기운을 담아 미믹에게 던졌다. 전과 달리 단검은 미믹의 몸체에 살짝 박혔다가 튕겨 나갔다.
성력으로 강철 피부가 약해지면서 타격이 들어간 것이다.
그아아아아악―!
고통에 미믹이 다시 성난 황소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샤르바딘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자, 드워프들의 얼굴이 흥분으로 붉어졌다.
“감히…! 고철 덩어리 따위가!”
“죽여!!!”
“으아아아아!”
단단하게 무장된 드워프 기사들은 바닥에 내려선 순간 미믹을 향해 일제히 돌격하기 시작했다.
둔기들이 매섭게 휘둘러졌다.
콰앙―! 쾅! 쾅쾅!
거대한 폭음이 울렸다.
드워프들이 미믹을 포위하고 몸체를 후드려 패기 시작했다. 묵직한 공격 세례에 미믹은 고통으로 몸부림쳤다.
둔기 공격에는 먹히는 모습.
죽음의 공포를 느낀 것인지, 미믹이 발광하기 시작하자, 드워프들은 일제히 방패를 꺼내 들었다.
카앙―! 캉!
“……컥!”
“큭!”
충격음과 함께 일부 드워프가 미믹의 공격을 맞고 바닥에 처박혔다. 미믹의 이빨은 날카롭고 매서웠지만, 드워프제 갑옷과 방패를 일격에 파괴할 정도는 아니었다. 드워프들은 다시 벌떡 일어나 미믹에게 성나게 돌격했다.
“하여튼 약았다니까.”
상황이 유리하게 펼쳐지자, 펜리는 나를 쏘아본 뒤 앞으로 나섰다.
그 모습에 난 혀를 찼다.
“망할 년. 이제 나서네.”
승리 시 지분을 주장하기 위해 사냥에 동참하려는 게 분명했다. 이런 쪽으로 머리가 비상한 엘프였으니까.
‘그나저나 진짜 징글징글하네.’
펜리가 그림자 주술로 미믹의 움직임을 둔화시키고, 기사급 드워프 열댓 명이 둔기로 미친 듯이 때리고 있는데도 미믹은 버텨냈다.
‘불사자의 힘 때문인가.’
레토니칼스의 권능 일부를 흡수했다면 지금의 맷집이 이해가 됐다.
불사자는 죽지 않는 자를 뜻했으니까.
하지만 미믹은 불사자가 아니었다.
[계약자…… 계약자……!]
미믹의 의지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의지에 두려움과 고통, 다급함이 깃들어 있다.
계약자?
미믹이 누군가를 부르고 있다.
“…시발, 그런 거였냐?”
도미닉에게 구조 요청을 하기 위해 결계를 해제한 것이 분명했다.
그럼 지금 상황을 도미닉이 알게 됐다는 건데.
일이 급하게 됐다.
당장 크리스탈 미믹을 제거하고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그아아아아아아악!
“피, 피해!”
“……미친!”
미믹의 거대한 동체가 허공을 날았다. 혀를 이용해 몸체를 띄워 구덩이 바깥으로 벗어나려는 모습.
다급히 문양을 소환했지만, 미믹은 빠르게 빛을 피해 솟구쳤다.
“아, 안 돼!”
통로가 아닌 바깥으로 튄다고?
이건 예상치 못한 움직임이었다.
미믹을 한 번 놓치면 잡기 어렵다.
모두가 닭 쫓던 개처럼 구덩이로 솟구치는 미믹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구덩이 위에서 한 드워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차가운 눈빛으로 솟구치는 미믹을 내려다보던 드워프가 거대한 둔기를 천천히 추켜올렸다.
푸른색을 띤 거대한 망치.
그 망치의 겉면이 빠르게 얼어붙으며 서리가 끼기 시작했다.
“호, 혹한의 망치!”
난 한눈에 그 망치를 알아봤다.
아니, 모두가 알아봤다.
샤르바딘이 울먹이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도르네프!”
베네타의 군주.
“놈!!!!!”
콰아아아앙―!
도르네프가 막 구덩이 바깥으로 올라온 미믹을 혹한의 망치로 내리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