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붉은 혹
거대한 동체가 구덩이 위에서 추락했다.
“피, 피해!”
쿵―!!!
미믹은 피 웅덩이 중앙에 매섭게 내리꽂혔다. 처박힌 미믹은 움찔움찔할 뿐 움직이지 못했다.
몸체 절반 이상이 얼어붙어 있는 모습. 혹한의 망치에 맞은 흔적이었다.
크아아아아!!!
우렁찬 고함에 모두의 시선이 위를 향했다.
도르네프가 망치를 움켜쥔 채 구덩이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낙하 그리고 공격. 푸른빛의 망치가 미믹의 머리를 벼락처럼 강타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눈이 질끈 감길 정도의 폭음.
동굴이 흔들리며 차가운 공기가 훅 불어닥치자, 난 몸을 움츠렸다.
순간 입김이 드러날 정도로 온도가 차갑게 떨어졌다.
추락 지점을 바라보니 웅덩이가 살얼음처럼 얼어붙었다. 그 얼음 중앙에 비스듬히 자빠져 있는 미믹이 보였다.
상자 대가리가 움푹 찌그러진 흔적.
머리가 터진 것처럼 보였다.
그 머리를 짓밟고 서 있던 도르네프가 천천히 망치를 들어 올렸다.
분이 안 풀린 듯 섬뜩한 빛과 함께,
쾅! 콰앙! 쾅!
망치가 쉴 새 없이 미믹을 내리쳤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공격.
비명조차 들리지 않았다.
미믹은 혀를 내뺀 채 미동 없이 축 늘어졌다. 개고생하며 누적시킨 대미지가 도르네프에 의해 터지면서 숨이 끊어진 모습이었다.
부족했던 한 방을 채워준 존재. 그 존재는 미믹의 숨이 끊어졌음에도 망치질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더 매서워졌다.
광전사가 따로 없었다.
“감히, 감히 내 피앙세를! 크아악!”
“주, 주군!”
“그만하셔도!”
드워프들이 도르네프를 말리기 위해 황급히 움직였다.
성격 급한 군주로 통했는데, 딱 봐도 다혈질이라는 것을 알겠다.
상황이 정리되자, 난 샤르바딘에게 다가갔다. 펜리도 어느새 근처로 다가와 기다리고 있었다.
“저 난쟁이, 불똥 같은 건 여전하네.”
“덕분에 위기는 넘기지 않았습니까.”
“난쟁이들에게 잘 말해. 저 미믹은 우리 거야.”
워낙 희귀한 미믹이다 보니 뭔가 있을 거라 판단한 건가?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혼자 처먹겠다는 말은 안 했다.
‘이 여자, 헛다리 제대로 짚었네.’
미믹의 부산물을 얻고 싶은 모양인데, 그게 될지 모르겠다.
일단 미믹의 죽음 이후 상황을 나도 잘 알지 못하거든.
내가 아는 건 하나뿐이다.
오랜 시절 고대의 힘을 품고 살던 숙주가 죽었고, 곧 그 힘이 깨어나며 레토니칼스의 계승 시험이 시작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난 웅덩이 쪽으로 다가가 미믹의 시체를 조심스레 살폈다.
고대 문양을 쉽게 얻은 것처럼 혹시나 심장도 쉽사리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샤, 샤딘!!!!!”
“도네프!”
눈물겨운 해후가 펼쳐졌다.
서로의 애칭을 부르짖으며 종족을 넘어선 두 연인은 꼭 부둥켜안고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
죽음을 각오했던 샤르바딘도 이때만큼은 아이처럼 울었다.
그녀의 생존 과정은 그만큼 처절하고 힘겨웠다.
난 턱을 긁적이며 그 광경을 조용히 지켜봤다.
길쭉길쭉하고 아름다운 엘프가 자신의 허리보다 작은 드워프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 둘 주변에 모인 우락부락한 드워프들은 코를 훌쩍이고 있다.
참으로 언밸런스한 모습인데 난 그 모습에서 무척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상상만 해봤던 건데, 이런 광경을 실제로 보게 되네.”
가슴이 찌르르 울리는 기분 좋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샤르바딘과 도르네프의 해후는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에선 절대 볼 수 없었던 장면이었다.
샤르바딘이 생존했을 때의 스토리를 상상해보긴 했다. 그럼 토바른의 유혈 사태를 막을 수 있을 테니까.
새로운 스토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내 손에 그리고 내 선택에 의해.
이 간질간질한 감정을 더 느껴보고 싶었지만,
쩌저저적―!
“……어?”
웅덩이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내 눈동자는 서서히 커졌다.
혹한의 망치로 얼어붙었던 피 웅덩이가 빠르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동시에 미믹의 시체도 액체처럼 녹아내렸다.
시발, 뭔가 시작됐다.
* * *
“고맙다. 암고양이.”
“고마우면 의뢰비를 더 올려주든가. 고생을 제법 했거든.”
“숙고해보지.”
“짠돌이 난쟁이가 웬일로?”
펜리는 의외라는 눈빛으로 도르네프를 바라봤다. 만나면 항상 으르렁대는 사이였는데, 샤르바딘의 생존 때문인지 도르네프의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근데 저 인간은 누구지?”
도르네프는 괴물 시체 주변을 배회하는 인간을 가리켰다.
근처를 돌아다니며 단검으로 뭘 파고 있는 모습인데, 이종들로 이뤄진 파티에 유일한 인간이라 시선이 갔다.
“아, 저 녀석? 이 의뢰의 가장 큰 공헌자.”
“뭐?”
“도네프! 제 은인이에요!”
샤르바딘이 힘 있게 자신의 일을 간략히 설명했다.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인간을 바라보는 도르네프의 눈동자가 경계에서 호감으로 바뀌었다.
인간이 자신 쪽을 바라보며 손을 크게 흔들자, 도르네프는 허허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줬다.
샤르바딘을 구해준 은인.
이 정도 답례는…….
“시발! ㅈ같은! 아니 ㅈ됐어!”
“…원래 입이 저리 거친 친구인가?”
“아니. 뭔가 일이 터진 거지. 이곳에선 저 녀석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게 좋을 거야. 그래야 살아나가서 이쁜 마누라 궁둥이를 구경하지.”
“뭐? 그게 무슨…….”
“여, 여기요! 여기!! 어서!”
내 다급한 외침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찬물을 부었다. 내 부름에 펜리가 가장 먼저 도착해 가리킨 곳을 응시했다.
쩌저적―
얼음이 빠르게 녹더니, 피 웅덩이 위로 작은 혹 하나가 볼록 튀어나왔다.
붉은 혹 하나.
그 혹은 손가락 하나 크기였다가 급속도로 커지며 자라났다.
그 모습에 펜리의 눈가가 가늘어지더니 나를 바라봤다.
이게 뭐냐는 눈빛.
“뭔가 나오려는 것 같습니다. 웅덩이의 부피가 줄어들고 있어요.”
“…시체는? 시체는 어디 갔어?”
“웅덩이에 녹아서 없어졌습니다.”
“젠장. 헛고생했잖아.”
짜증 내는 펜리를 뒤로한 채 난 웅덩이를 살폈다.
피 웅덩이의 부피가 눈에 띄게 줄고 있었다.
반대로 붉은 혹은 점점 커졌다.
웅덩이의 핏물을 흡수하면서 자라나는 모습.
‘내 공격은 안 통해.’
자라나기 전에 내 모든 능력으로 공격해봤다. 인챈트, 성력, 문양의 능력을 써보며 단검을 찔러봤지만,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
지독히 단단하다는 표현보단 타격 자체가 안 들어갔다.
충격 자체를 튕겨낸다고 해야 하나.
‘펜리나 도르네프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눈앞의 존재를 제거하고 심장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게 가장 베스트였다.
“더 자라나기 전에 제거해야 합니다.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습니다.”
“이대로 걍 튀는 건?”
“도미닉이 이것을 가지고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음.”
내 말에 펜리가 크로우를 소환했다. 그녀의 크로우가 교차하며 자라나는 혹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도르네프와 드워프들이 나를 찾아왔다. 군주가 직접 감사의 인사를 건네려는 모습인데, 지금 인사 따위나 받고 헤헤거릴 때가 아니었다.
펜리의 공격도 별 효과가 없어 보였다.
“당장 제거해야 합니다!”
펜리가 혀를 차며 물러나자, 도르네프는 흔쾌히 혹한의 망치를 집어 들었다.
섬뜩하게 빛나는 냉기의 기운.
콰아아아아앙―!!!!
큰 폭음과 함께 웅덩이 주변이 다시 얼어붙으며 파괴됐다. 미믹마저 일격에 빈사로 만들어버린 파괴력이다.
혹한의 망치가 붉은 혹 위를 무식하게 때렸지만,
“…….”
붉은 혹은 잠시 얼어붙었다가 금세 꿀렁거리며 부피를 키워나갔다.
이젠 팔 크기까지 자라난 상황.
그 뒤로 다른 드워프들이 합세했지만, 자라나는 속도를 잠시 저지할 뿐, 큰 타격을 받는 모습이 아니었다. 물리력 자체가 통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제길, 미리 제거하는 건 불가능한 건가?’
공격을 무시하고 붉은 혹이 내 키만큼 커지자, 펜리와 도르네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심각성을 인지한 것 같았다.
“……이거, 정체가 뭐야?”
“미믹을 진화시킨 힘 같은데, 다른 형태로 나오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네 선택은?”
“당장 벗어나야 합니다.”
“인간, 이거 위험한 건가?”
도르네프의 물음에 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뭐 해? 이 녀석 말 못 들었어? 어서 움직여.”
내 의견에 펜리가 힘을 실어줬다.
내가 도미닉의 연구 일지를 완벽히 숙지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인정한 것이다.
이럴 땐 저 성격이 마음에 든단 말이지.
빠르게 판단을 내린 나는 가방을 단단히 갈무리했다.
전보다 훨씬 묵직해진 탓에 신경을 써야 했다.
‘챙길 수 있을 때 챙겨야지.’
주변을 돌아다니며 보랏빛 마석을 가방에 모조리 쑤셔 넣었다.
특별히 쓸데가 있다기보단, 귀중한 자원이기에 챙겨놓은 것이었다.
가방끈을 움켜잡은 후 거칠게 발을 굴렀다.
구덩이 깊이는 깊지 않았기에 손쉽게 나올 수 있었다.
구덩이를 벗어난 즉시 곧장 입구 쪽으로 달렸다.
다른 이들도 군말 없이 내 뒤를 따랐다.
“…엉?”
입구를 나온 순간 색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원래는 이종들을 끌고 온 마차가 가득 실린 풍경이었는데, 그 자리를 드워프들이 꽉 채우고 있었다.
도르네프가 이끌고 온 병력이었는데, 펜리가 말했던 것보다 그 수가 훨씬 많았다.
펜리가 바삐 움직이는 드워프들을 둘러보며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무식하게도 끌고 왔네. 얼마나 데리고 온 거야?”
“2천.”
“2천? 정예병 전체를 끌고 온 거야?”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주변에 너부러진 키메라 시체들.
관리인들도 모조리 드워프의 맹공에 무너진 모습이었다.
서 있는 키메라를 보기 힘들 정도로 정리가 이미 끝난 상황.
드워프들은 동굴 곳곳을 돌아다니며 잡혀 온 이들을 바깥으로 빼내고 있었다.
샤르바딘을 찾기 위해 주변을 샅샅이 뒤지며 구출 작업도 진행했던 것인데, 좋은 선택이었다. 그 덕에 구출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었으니까.
“나토네, 작업을 끝내라. 서둘러 물러난다.”
“알겠습니다.”
도르네프의 지시가 떨어지자, 나토네가 드워프들을 한곳에 모으기 시작했다.
우리는 한발 앞서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통로를 내달리며 급한 것부터 떠올렸다.
‘문제는 도미닉인데.’
도미닉의 현재 위치가 무척 중요했다.
의문이 들기도 했다.
지금쯤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 의문을 풀어줄 이가 다행히 이곳에 있었다.
난 앞서 달리는 도르네프의 곁으로 바짝 다가갔다.
호의적인 눈빛.
이럴 땐 샤르바딘의 은인 신분인 게 다행이었다. 굳이 질문에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으니 말이다.
“나가는 길을 알고 계십니까?”
“땅굴에서 길 찾는 건 드워프 전문이지. 이미 지도도 만들어놨어.”
드워프들의 움직임에는 주저가 없었다. 마치 이곳 길을 훤히 꿰뚫은 것처럼 움직였다.
벗어나는 건 드워프들에게 맡기면 될 것 같았다.
난 중요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곳까지 오시면서 도미닉의 군대와 맞닥뜨린 적 있으십니까?”
“부딪칠 뻔했지.”
“언제입니까?”
“이틀 전이네. 그 미치광이 군단과 이동 방향이 겹쳐서 선택해야만 했지. 길게 우회를 해서 돌아가거나, 기다렸다가 그 뒤를 쫓거나.”
펜리의 예측처럼 도르네프는 도미닉의 군단을 피해 움직이려고 했다.
아레나 후아튼의 존재가 부담스러웠겠지.
“우회하신 겁니까?”
“아니. 우회했다면 지금도 이곳에 도착하지 못했어. 우린 우회하지도, 기다리지도 않았지.”
“…그럼.”
“그대로 지나쳤어. 갑자기 나타난 대규모의 군대가 미치광이의 군단을 공격하기 시작했거든. 그사이에 키메라 군단을 가로질렀지.”
“네? 누구의 군대이기에.”
“블라이어를 중심으로 한 에토르 연합군.”
“……!”
블라이어 가문.
카멜 블레이저가 움직였다는 소식에 난 순간 멈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