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63화 (63/130)

63화 주술 인형, 반다이크

우지끈―!

“…….”

키메라 한 마리가 날아와 딛고 서 있는 나무 기둥에 처박혔다.

나무가 부스스 내려앉자, 주변 나무 쪽으로 발을 박찼다. 높은 나뭇가지에 안착한 뒤 다시 전투를 내려다봤다.

“하, 징글징글하네.”

질린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풀 한 포기 없는 마른 대지는 키메라들로 득실득실 차 있었다.

연구실 입구인 절벽 틈새와 다소 떨어진 드넓은 공터.

붉은 괴물은 그 중심에서 포위당한 채 광기에 찬 육탄전을 펼치고 있었다. 그런데 죽이고 또 죽여도 키메라는 줄어드는 것보다 오히려 더 많아졌다.

“도대체 몇 마리나 데려온 거야?”

얼추 7~8천 정도로 예상했는데 아니었다.

전투 중에도 새로운 키메라 떼가 끝도 없이 나타났다.

라웁 숲 전역에 퍼트린 키메라들이 뒤늦게 도착해 합류한 것인데, 그 수가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

거대 키메라도 스무 마리 이상 눈에 띄었다.

‘견제했는데도 이 정도라고?’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도미닉의 전력을 살펴보니, 세운 계획이 이 자리까지 도달한 건 엄청난 행운이 따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약 도미닉의 군단이 하루만 더 일찍 도착해 연구실 전력과 합류했더라면?

‘도르네프도 나도 위험했다.’

아니 도르네프는 몰라도, 난 무조건 죽었다. 지금쯤 키메라 배 속에서 소화되고 있을지도.

단 하루 차이로 목숨을 부지했다는 것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전투를 지켜봤다.

“단시간에 끝날 것 같지 않네.”

전투의 흐름은 붉은 괴물의 일방적인 학살로 흘러가고 있었지만, 이건 전초전에 불과했다.

달려드는 키메라는 소형뿐이었고, 거대 키메라는 아직 움직이지도 않았다.

딱 봐도 괴물의 전력을 파악하기 위해 키메라들을 제물로 던지는 모습인데, 도미닉과 아레나가 움직여야 진짜 승부가 결정될 것이다.

‘이 근처에 숨어서 간을 보고 있겠지.’

두 사람의 위치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주변에 두 사람이 자리하고 있을 걸 생각하면 심장이 쫄리긴 한데, 관심사가 붉은 괴물에 집중되고 있는 이상, 내게 큰 위협은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도미닉이 반응하기 전까진 괜찮다는 뜻.

그렇다는 건,

“쥐새끼부터 찾아야겠지?”

펜리가 헤어지기 전에 내게 귀띔해준 내용이 있었다.

[인간들의 군대는 없었지만, 악취 나는 쥐새끼 한 마리가 숨어 있더라고.]

[악취 나는 쥐새끼?]

[쓸데없이 나 부르지 말라고 알려주는 거야.]

[그걸 왜 이제야 알려주는 겁니까?]

[쥐새끼가 우리 쪽엔 관심이 없는 것 같았거든.]

연구실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고, 우리에게 관심이 없는 존재.

‘그리고 부정한 기운을 품은 자.’

엘프에게 ‘악취’란 부정한 기운을 의미했다.

흑주술사일 확률이 높다는 건데, 그 힌트까지 주어지자 그 악취 나는 쥐새끼가 누구의 지시로 움직였는지 알 것 같았다.

‘학살자가 보낸 놈이겠지.’

학살자는 회귀자인 만큼 도미닉의 정보에 빠삭했다. 도미닉의 연구 일지를 확보하기 위해 쥐새끼를 보낸 것이 분명했다.

연구 일지는 내 손에 있으니 이미 실패한 임무지만, 난 쥐새끼를 먼저 사냥해야 했다.

‘눈앞의 상황이 카멜의 귀에 들어가면 곤란하거든.’

난 웅크린 채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콰앙―! 쾅― 콰아앙―!

야구공처럼 날아오는 키메라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무와 바위, 바닥에 매섭게 처박히며 뭉개지는 키메라들.

마치 포탄 같아서 나도 여러 번 회피하며 움직인 상황이었다.

과연 나만 그럴까?

나뭇잎 사이에서 한동안 죽은 듯이 주변을 눈여겨봤다.

잠시 후, 쿠쿵―! 소리가 터지며 키메라들이 건너편 넝쿨 더미를 휩쓸자, 난 두 눈을 반짝였다.

검은 그림자가 순간 솟구쳤다 사라졌다.

‘찾았다.’

단검을 슬며시 움켜쥔 뒤 크룩스의 걸음걸이를 이용해 나무 위를 타고 걸었다.

나뭇가지 사이 밑으로 꿈틀대는 로브 자락이 시야에 잡혔다.

다시 넝쿨로 조용히 숨어든 녀석.

짙은 녹색 로브로 숲을 보호색 삼아 주변을 기웃거리고 있었는데, 절벽 틈새 쪽으로 향하는 듯 보였다.

기회를 봐서 연구실 쪽으로 진입하려는 모습.

‘움직이기 전에 정리해야겠네.’

난 쥐새끼의 바로 머리 위 나뭇가지에 기대어 잠시 대기했다. 은밀히 접근을 시도했는데,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상대는 흑주술사일 확률이 높았다.

암습에 취약하단 뜻이었고, 난 먹잇감을 포착한 맹수처럼 이빨을 숨긴 채 기회를 기다렸다.

잠시 후,

그어어어어어어―!

“……!”

붉은 괴물이 키메라들을 움켜잡고 몽둥이처럼 휘두르더니 이리저리 던지기 시작했다. 키메라로 키메라를 공격하는 것인데, 그 때문에 수백의 키메라들이 일시에 튕겨 나와 숲으로 떨어졌다.

재차 포탄처럼 날아오는 키메라들.

키메라들이 넝쿨 쪽으로 굴러떨어지자, 쥐새끼가 움직였다.

솟구친 검은 그림자.

‘지금!’

난 단검을 잡고 밑으로 몸을 던졌다.

“잡았다.”

내 목소리에 쥐새끼가 반응을 보였다.

허공에 뜬 놈이 고개를 쳐든 순간,

푹―!

인챈트를 덧댄 날카로운 단검이 놈의 이마를 깊숙이 찔렀다. 정확히 뇌를 관통한 공격이었다.

완벽한 암습.

“됐……!”

성공을 확신하며 쾌재를 외쳤는데, 불현듯 등골이 서늘해졌다.

단검이 안 뽑힌다?

난 주저 없이 단검을 놓고 몸을 비틀었다.

놈의 로브가 거칠게 펄럭였다. 지독한 바람과 함께 느껴지는 섬뜩한 살기.

난 본능적으로 왼팔을 들어 머리를 보호했다.

콰아아앙―!

“…커억!”

머릿속이 진탕되는 충격이다.

해머로 처맞은 것 같았다.

그대로 바닥에 처박혀 몇 바퀴를 굴렀다.

뇌진탕이 이런 느낌인가.

귀에서 삐― 소리가 울리며 어질어질했다. 다급히 고개를 털고 일어나려는데, 휘청이며 다시 쓰러졌다.

‘미친, 부러졌다….’

왼쪽 손목을 들어 올렸는데 축 늘어진 채 힘이 안 들어갔다.

손목에는 칼이 준 팔찌가 있었다.

폭탄 벌레 붐을 봉인시키는 마법 아이템 겸 가드로도 사용할 수 있는 방어구였다.

검도 튕겨내는 팔찌였는데, 손목이 충격으로 부러진 것이다.

‘시발, 인간 맞아?’

늘어진 왼팔을 놔두고 오른손으로 다급히 석궁을 집어 들었다.

머리가 뚫리고도 움직인다.

카멜, 이 새끼가 연구 일지의 가치가 가치인 만큼 진짜 괴물 새끼를 보냈다.

다급히 거리를 벌리고 석궁을 겨누었는데, 쥐새끼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놈이 일어나자 내 고개도 따라 올라갔다.

“쥐새끼치곤…… 더럽게 크네?”

크다.

웅크리고 있을 땐 몰랐는데, 서서 보니 덩치가 보통 사람보다 머리 서너 개 정도 더 컸다.

2미터는 가볍게 넘을 것 같은데?

저 덩치가 주술사라고?

육체 하드웨어가 딱 봐도 무식한 기사잖아.

짧게 혀를 차며 욕설을 내뱉고 있는데, 놈이 두 팔을 벌린 채 매섭게 돌격해왔다.

저 손에 잡힌 순간 뒈진다.

민첩하게 뒤로 스텝을 밟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이 석궁은 크룩스 단장의 것으로 한 번 장전하면 세 발의 볼트를 속사할 수 있었다.

투투퉁―!

세 발의 볼트에는 관통을 극대화한 인챈트가 실려 있었다. 당연히 놈의 하체를 깔끔하게 관통했는데, 짓쳐 오는 속도가 전혀 줄지 않았다.

노리고 쏜 것인데, 안 먹힌다.

“빌어먹을! 대체 뭐 하는 새끼……!”

다급히 몸을 비틀어 주먹을 피했다.

콰아아앙―!

천으로 감긴 거대한 주먹이 바닥을 내리꽂자, 대지가 푹 파이며 흙먼지가 튀어 올랐다.

맞았으면 찰흙처럼 짓뭉개졌을 거다.

쿵쾅쿵쾅하는 심장을 부여잡고 놈의 시야 앞에 문양을 터트렸다.

번쩍―!

기습적인 눈 부심을 이용한 것인데, 예상치 못한 현상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빛에 노출된 놈의 천이 삽시간에 검게 물들더니 천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잠시 멈칫했을 뿐 주먹이 재차 날아오자 냉큼 머리를 숙이고 데굴데굴 굴렀다. 주먹에 맞은 나무가 뿌리째 뽑혀 나갔다.

시발, 주먹 한 방 한 방이 무슨 필살기도 아니고.

‘이 새끼 정체가 뭐야?!’

이를 악다문 나는 바닥을 밟고 튀어 오르며 단검을 투척했다. 이번엔 몸을 노리지 않았다.

내가 노린 건 펄럭이는 로브 자락.

단검이 로브를 휘감고 통과한 순간, 로브 자락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리고 드러난 눈앞의 상대.

어둠 속에 비친 쥐새끼의 모습에 난 헛웃음을 흘렸다.

“……주술 인형, 반다이크?”

처음 맞닥뜨린 상대였지만, 특징이 확실해서 마주한 순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전신을 두른 새하얀 천.

온몸 여기저기 새겨진 붉은 인주 자국.

그리고 날 노려보는 시뻘건 눈동자까지.

주술사 렌구아가 부리는 주술 인형이 분명했다. 즉, 렌구아 그 늙은이가 저 썩은 눈깔로 지금 나를 관찰하고 있다는 뜻도 됐다.

렌구아는 날 고문한 늙은이라 내 얼굴을 알고 있었다.

조심스레 입가를 매만지며 얼굴을 두른 천을 살짝 추켜올렸다.

기습에 실패할 것을 대비해 천으로 얼굴을 가렸는데 안 가렸으면 큰일 날 뻔했다.

몸을 더 사려야 했다.

주술 인형이 미친 멧돼지처럼 돌진해오자, 거리를 후다닥 벌리며 문양을 터트렸다.

역시나,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움찔―

천이 검게 물들 때는 잠시 멈칫하던 인형이 색이 복구되자 재차 돌격해왔다. 문양에 분명 거부 반응을 보였는데, 몸에 두른 천 조각이 문양의 힘을 상쇄시키는 것 같았다.

‘렌구아 정도의 짬밥이면 능력을 막아내는 수단도 있겠지.’

반다이크는 흑주술로 움직이는 주술 인형이다.

형체가 없으니 물리력도 안 먹힌다.

처음부터 공략 방법이 틀려먹었다.

‘팔이 완전히 맛이 갔네.’

한 손으로 장전은 무리라 석궁을 버리고 마지막 남은 단검을 움켜쥐었다. 고민한 것도 잠시, 단검에 새하얀 백광이 물들기 시작했다.

내가 인챈트 할 수 있는 속성은 두 가지다.

인챈트의 기본 속성인 관통.

그리고 최근에 얻게 된 고유 속성, 성력(聖力).

무질서를 바로잡는 힘.

성력은 정화(淨化)의 성격을 띤 고대 문양의 성질과 닮았다. 아니, 경험해 볼수록 결이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인의 고유 속성에 따라 각인된 문양의 능력이 달라진다면 세이렌의 비명이 다른 능력으로 변한 것도 설명이 되지.’

성력은 흑주술에게도 상성이 좋았다.

저 빌어먹을 천이 간접적으로 빛을 상쇄한다면 강제로 쑤셔 넣으면 된다.

반다이크가 자세를 낮추고 돌격해온 순간, 난 냅다 단검을 투척했다.

애초에 물리력을 보고 던진 것이 아니었다.

단검이 반다이크의 어깨에 푹― 박혀 들었다. 단검에 담긴 백광이 반다이크의 몸에 스르륵 스며들었다.

그리고,

크웨웨웨웨웩―!

반다이크에게 소름 끼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천이 검게 그을리더니 놈이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먹힌다!

난 이를 악물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세 걸음을 앞뒀을 때, 놈이 고개를 퍼뜩 쳐들곤 손을 빠르게 뻗어왔다.

그 손을 피해 허공으로 날아오른 나는 냅다 놈의 이마에 박힌 단검을 움켜쥐었다.

“뒈져―!!”

번쩍―!

성력을 단검에 쏟아부었다.

괴성이 터지며 반다이크의 이마가 눈 부시게 빛나기 시작했다.

반다이크를 두른 천이 검게 그을리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반다이크의 얼굴이 드러났는데, 소름 끼치게도 아무것도 없었다.

잠시 후, 천이 재 가루처럼 흩어지자, 대지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흙먼지만 휑하니 나뒹굴었다.

주술 인형을 소멸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크오오오오―!

“…진짜 어질어질하다.”

바닥에 대(大)자로 뻗어 쉬고 싶었는데, 주변 상황이 워낙 개 같아서 편히 쉴 수도 없었다.

비틀거리듯 일어나 장비들을 챙기고 가장 큰 나무 뒤로 피신했다. 가방에서 포션을 꺼내 응급처치에 들어갔다.

포션에 닿은 손목이 시큰거렸다.

통증이 찐하게 올라오자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렌구아, 이 망할 늙은이는 멀쩡하겠지?”

반다이크로 인해 내 존재가 렌구아에게 알려졌다. 그 말은 즉, 학살자도 곧 내 존재를 알게 된다는 뜻이고, 이건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얼굴은 못 봤을 테지만, 성력이 알려졌다.

성력은 혼돈과 파괴, 무질서에 천적인 능력.

그 삼박자를 모두 갖춘 주술사들의 둥지에겐 무척 위협적인 존재로 각인될 것이다.

설마, 더미로 뿌린 ‘그’까지 생각이 닿진 않겠지?

‘고유 능력을 하루빨리 확인해야 해.’

펜리가 그림자 속성을 갖고 그림자 주술을 부리듯, 나 또한 성력으로 고유 능력을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발동 조건이 워낙 까다로워서 확인이 힘들었다.

도미닉이라면 그 조건에 부합할 테니, 이참에 고유 능력을 확인해볼 생각이었다.

제대로 된 전투가 벌어지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기에 몸을 추스르며 시간을 보냈다.

주변이 완연한 어둠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광기는 여전했고, 숲이 뱉어내는 피비린내는 점점 짙어졌다.

이윽고, 그 광기가 절정으로 치달았을 때,

크어어어어어어어어어―!

붉은 괴물의 또 다른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소리가 전과 달랐다.

당황과 분노가 담겨 있다.

콰아앙―!

“……!”

큰 폭발음에 고개를 돌리니, 붉은 괴물이 바닥에 처박힌 채 쭉 밀려나는 광경이 펼쳐졌다.

처음으로 괴물이 당한 모습이 눈에 담겼다.

난 자리를 털고 빠르게 움직였다.

도미닉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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