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생명의 징표
샛노란 달빛 아래, 전투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달빛이 강한 날이라 시야 확보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콰아앙!
크어어어어어―!!!
괴성과 함께 붉은 괴물의 머리가 쾅! 쾅! 터지더니 연신 휘청이며 밀려났다.
사체로 쌓아 올린 무덤 위로 가볍게 착지한 작은 존재.
아니, 작은 괴물.
아레나 후아튼이 공격을 시작했다.
주먹을 움켜쥔 아레나의 육신은 보랏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 주변에 도미닉이 책을 허공에 띄운 채 그녀에게 주문을 외우고 있었는데, 일종의 강화 버프처럼 보였다.
도미닉의 손짓 한 번에 거대 키메라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거대 키메라들은 붉은 괴물의 팔다리를 붙들고 늘어졌다. 십수 마리가 집요하게 들러붙으니 붉은 괴물의 덩치가 압도적이어도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봉쇄된 틈을 이용해 아레나가 괴물의 머리 위로 올라가 깍지를 끼고 매섭게 내리찍었다.
쾅! 쾅! 쾅―!
“……!”
폭탄이 터진 것 같았다.
붉은 괴물은 움찔움찔 몸을 떨며 울부짖었다.
머리를 이루던 붉은 혹은 움푹 파였고, 일부가 터지며 시뻘건 피를 쏟아냈다.
‘공격이 먹힌다?’
난 눈가를 가늘게 뜬 채 붉은 괴물을 자세히 살폈다.
불사자의 심장 때문인지 붉은 괴물의 상처는 빠르게 아물었지만, 상처투성이가 된 흔적은 남아 있었다. 키메라 떼와 사투를 빚으며 생긴 상처가 분명했다.
‘나와 펜리, 도르네프의 공격에는 작은 생채기조차 나지 않았어.’
그런데 키메라들의 공격, 특히 아레나의 공격에는 큰 대미지를 받은 모습이었다. 이유를 고민해보니 답은 의외로 쉽게 나왔다.
저들이 지닌 한 가지 공통점.
‘마석?’
마석을 동력 원천으로 움직이는 존재들.
마석의 기운만이 괴물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거라면?
전투를 지켜보면서 가설은 점점 확신으로 변해갔다.
오직 키메라만이 저 붉은 괴물을 사냥할 수 있었다. 새로운 사실을 깨닫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만약 괴물이 숲을 벗어나 바깥으로 나간다면 누가 막지?’
펜리나 도르네프 같은 강자도 괴물을 막아낼 수 없으니, 토바른 지역은 쑥대밭이 될 것이다.
눈앞의 재앙 덩어리를 몰라봤다니,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이번만큼은 스토리대로 흘러가야 해.’
설마 도미닉을 응원할 날이 올지 몰랐다.
물론, 큰 걱정은 들지 않았다.
이 전투는 무조건 도미닉이 이긴다.
긴장할 시기는 그 이후였다.
붉은 괴물이 쓰러진 직후 말이다.
카아아악―!!
도미닉의 손짓 한 번에 키메라들이 반응을 보였다.
지휘를 받는 키메라들은 마치 잘 훈련된 병사들 같았다.
거대 키메라를 중심으로 키메라 무리가 연계를 이루며 붉은 괴물을 강하게 압박해 나갔다. 그 틈으로 아레나가 치명타를 입혔는데, 그때마다 붉은 괴물은 휘청이며 비명을 질러댔다.
다만, 승부는 쉽사리 결착 나지 않았다.
미믹의 맷집을 보면 알듯이 불사자의 심장을 지닌 존재는 상처 회복이 빠르고 지치지 않았다.
붉은 괴물은 피투성이가 된 채 발광하며 도미닉에게 달려들었다. 키메라 떼를 부리는 존재를 눈치챈 듯 보였다.
키메라들은 온몸을 내던지며 도미닉을 보호했고, 아레나는 괴물을 죽이기 위해 움직였다.
오직 살의만 담긴 지독한 전투.
대지가 묽은 피로 샘물을 이루고, 숲은 저주받은 땅처럼 파괴되었다.
“후―”
그 광경에 잠시 압도되어 멍을 때리고 있던 나는 호흡을 고르곤 움직일 준비를 했다.
밤새 이어진 처절하고 기나긴 사투.
끝이 보이지 않던 전투에 변화가 생겼다.
붉은 괴물의 움직임이 시간이 지날수록 눈에 띄게 둔해졌다.
늘어나는 상처에 비해 회복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역시 다굴에는 장사 없는 건가?
조심스레 숲을 끼고 전장 주변을 돌았다.
넝쿨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미니 붉은 괴물을 한눈에 담을 정도까지 다다랐다.
도미닉의 옆모습이 어렴풋이 보일 정도.
잠시 거리를 재던 나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엎드렸다. 엉망이 된 넝쿨을 헤집고 전장 중심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도미닉과의 거리는 대략 300미터 정도.
머릿속에 그린 계획을 시뮬레이션해 봤다.
내가 노리는 건 완벽한 기습이다.
이 거리에선 힘들다.
더 접근해야 했다.
난 엄폐물을 찾아 피로 흥건한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우욱!”
지독한 피비린내만 참는다면 엄폐물들은 차고 넘쳤다.
대지를 가득 메운 키메라들의 사체.
크고 작은 언덕처럼 너부러진 처참한 사체들 사이를 엉금엉금 기어갔다.
철퍽― 철퍽―
‘…미치겠네.’
온몸이 삽시간에 붉게 물들고, 닿은 곳마다 누구 것인지 모르는 살점이 짓이겨졌다.
미끌미끌하고 질척거리는 감촉.
지옥의 풍경을 떠올리라면 눈앞의 장면을 떠올리면 될 것 같았다.
250미터.
200미터.
그리고 150미터.
이때부턴 더는 나아가지 않고 몸을 웅크린 채 상황을 살폈다.
크아아앙―!
크오오오!
“귀 떨어지겠네.”
귀를 틀어막고 사체 사이로 몸을 파묻었다.
이 이상 접근하면 전투에 휩쓸릴 위험이 있었다.
반다이크에게 당한 왼쪽 손목을 천천히 돌려봤다. 아려오는 통증이 느껴졌지만,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을 보니 부러진 상처는 치료된 듯 보였다.
‘벌레가 살짝 걱정되긴 한데.’
충격에 혹여나 터져버릴까 봐 걱정이 됐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몸속에 넣고 다니는 불안감이 이런 건가?
이 벌레 새끼도 얼른 치워버려야 하는데.
투덜거리며 가방을 뒤졌는데 포션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전 전투로 다 써버린 것이다.
병이 있었는데 꺼내 보니 텅 비어 있었다.
빈 병을 보며 요정의 눈물을 떠올렸다.
좀 남겨뒀으면 진짜 든든했을 텐데, 수천 명의 생사가 걸린 일이라 아낄 상황이 아니었다.
‘이따가 포션 셔틀(?)을 부르면 되니까.’
가방에서 단검과 석궁을 꺼내 정비한 후 도미닉에게 집중했다.
안경을 고쳐 쓰는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점잖아 보이는 학자풍의 외관, 영락없이 학교 선생님의 이미지인데 이따금 미소 짓는 표정을 볼 때마다 섬뜩함이 올라왔다.
붉은 괴물을 향한 눈동자에 짙은 광기가 느껴졌다.
그 앞에 둥둥 떠오른 큼지막한 책.
그 책에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난 단검을 양손에 움켜쥐고 타이밍을 쟀다.
하늘을 바라보니 달빛이 옅어지고 숲이 만든 지평선으로 붉은 색감이 서서히 올라왔다.
밤샘 전투의 끝을 알리듯 동이 트기 시작한다.
시뻘건 태양이 피로 물든 전장을 비췄다.
그 눈 부심 때문일까.
“……!”
쿵―!
주변을 매섭게 휩쓸던 붉은 괴물이 발을 헛디디며 나자빠졌다.
곧장 일어나려고 했지만 허우적거릴 뿐 계속 손발을 헛디디며 엎어졌다. 바닥에 쌓인 사체들과 흥건한 핏물이 이를 방해하는 것 같았다.
도미닉은 눈앞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키에에엑!
카아아악!!!!
키메라들이 개미 떼처럼 괴물의 몸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키메라들이 노리는 건 오직 하나.
불타오르는 심장이었다.
거대, 소형 가릴 것 없이 모든 키메라가 가슴 쪽을 향해 이빨을 들이밀자, 붉은 괴물의 가슴에 달린 거대한 입이 쩍 벌어지며 방어에 나섰다.
콰작― 콰자작―!
거대한 입이 아작아작 씹힐 때마다 키메라들이 허공에서 찢겨나갔다.
도미닉은 멈추지 않았다.
키메라들을 계속해서 입으로 쏟아부었다.
삼키고 뱉고, 삼키고 뱉고.
벌어진 입으로 백 마리, 천 마리가 미친 듯이 파고들었다.
그우우우우―!
가슴에 달린 입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안에 든 키메라가 너무 많아 뱉어내지도, 씹지도 못했다. 입마저 무력화됐을 때, 아레나가 움직였다.
푹―!
“……!”
입 안에 뭉쳐진 키메라들 속으로 아레나가 비집고 들어갔다.
잠시 후, 붉은 괴물이 고통으로 몸부림쳤다.
거대한 입이 어느 순간 벌어지기 시작했고, 속에 든 키메라들이 바닥으로 우수수 쏟아졌다. 그럼에도 입은 더욱 크게 벌어졌다. 아니 찢어졌다.
결국,
크아아악―!
입이 걸레짝처럼 찢어져 버렸다.
그 안에서 피를 뒤집어쓴 작은 소녀가 심장을 움켜쥔 채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보석을 닮은 아름다운 심장.
그 심장과 연결된 핏줄을 툭툭 뜯어내자,
쿠웅―
붉은 괴물은 끈 떨어진 인형처럼 축 늘어졌다.
심장을 빼앗기자, 붉은 괴물의 피부가 빠르게 부패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몸체는 순식간에 진물이 되어 녹아서 없어졌다.
아레나는 높다란 시체 언덕 꼭대기에서 몸을 일으켰다.
새벽녘에 떠오른 태양 아래, 심장을 움켜쥐고 있는 어린 소녀.
기괴하면서 섬뜩한 장면이었다.
그 모습에 도미닉의 입가가 쭉 찢어졌다.
드디어 손에 넣었다!
도미닉이 책을 덮고 언덕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우우우웅―!
“……!”
대기가 짙게 떨리기 시작했다.
도미닉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저 높이 심장이 울고 있다.
동시에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핏빛.
그 빛이 아레나를 붉게 물들이자, 그녀가 심장을 삼키기 위해 천천히 입을 벌렸다.
도미닉은 다급히 책을 펼쳐 들었다.
“아, 안 돼!”
처음으로 도미닉의 목소리에 당황이 깃들었다.
도미닉이 주문을 외우자, 아레나의 몸이 핏빛과 보랏빛으로 물들며 물감처럼 섞이다가 흩어지길 반복했다. 두 빛이 서로를 공격하며 힘겨루기를 하는 모습.
심장을 입으로 가져간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잠시 후, 책과 씨름하던 도미닉이 입술을 깨물곤 외쳤다.
“버려!”
아레나는 움찔하며 심장을 놓쳤다.
심장은 떨어지지 않고, 허공에 두둥 떠올랐다. 그 모습을 뒤로한 채 아레나는 황급히 도미닉 곁으로 돌아왔다.
도미닉은 당혹스런 표정으로 허공에 뜬 심장을 살폈다.
조금 전 아레나를 조종하려고 했던 것처럼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주변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 빛은 자신이 사용한 보랏빛과 비슷한 기운을 담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책의 능력은 미믹에게 얻은 것이니, 그 본질의 힘은 저 심장의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설마.”
움찔움찔―
핏빛에 노출된 키메라들이 멈칫멈칫하며 도미닉의 지시를 거부했다. 잠시 후 하나둘 도미닉을 향해 몸을 돌리곤 이빨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통제권 일부를 심장에게 빼앗겼다.
예상치 못한 반격에 책을 움켜쥔 도미닉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악!
크웨웨웨!
키메라 군단이 절반으로 쪼개졌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이빨을 들이밀며 공격을 시작했다.
거대 키메라들도 마찬가지.
통제권을 사이에 둔 도미닉과 심장 사이에 혼돈의 전투가 시작됐다.
“왔다.”
그 모습에 난 고개를 끄덕이곤 주변을 살폈다.
키메라 군단에게 엄청난 피해를 안겨준 혼란이 극에 달했던 시기.
‘그리고 도미닉을 제거할 유일한 타이밍.’
타이밍이 만들어지자, 난 눈을 살며시 감고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시원한 감촉이 느껴진다.
이마에 주술 문양이 떠오르더니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다.
펜리 체이서가 남긴 맹약의 낙인.
생명의 징표.
난 주저 없이 징표의 힘을 발현시키고 펜리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자신을 떠올리며 이름을 부르라고 했지?
어떤 이미지가 나으려나?
이 여자의 이미지라면…… 이거밖에 없지.
“펜리 체이서.”
이름을 읊조린 순간, 새벽 햇살에 비춘 내 그림자가 꿀렁이더니 검은 신형을 토해냈다.
나타난 검은 신형을 내려다보며 난 헛웃음을 흘렸다.
“기가 막히게 딱 맞네.”
내가 떠올렸던 그녀의 이미지.
시시덕거리며 황금을 세고 있는 펜리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