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도미닉 후아튼
“…응?”
황금에 취해 있던 펜리.
그런 그녀가 두 눈을 끔뻑이곤 주변을 둘러봤다. 눈앞에 수북이 쌓여 있던 금화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곁에 있던 도르네프는 어디 가고, 핏덩어리가 된 사체들만 눈에 밟혔다.
닳고 닳은 그녀조차 거부감이 드는 지옥 같은 풍경.
그러다 나를 발견하곤 미간을 좁혔는데, 온통 피로 물든 나를 보며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확인차 물었다.
“아니지?”
“맞을 겁니다.”
“실수로 날 부른 거라면….”
“그럴 리가요.”
“전혀 죽을 것처럼 안 보이는데?”
“죽은 다음에는 부를 수가 없잖아요. 자, 받아요.”
난 그녀에게 스크롤 하나를 던졌다.
흰나비 떼가 소환되는 환상 스크롤.
베네타의 마법 상점에서 구매한 것으로 아레나와 마주쳤을 때를 대비한 것이었다.
이 스크롤을 펜리에게 건넨 이유는 하나였다. 그녀의 상대가 아레나일 확률이 99.9%였으니까.
아레나는 흰나비에 지독한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었다. 괴물이 된 상태에서도 경직된 반응을 보일 정도로.
펜리라면 그 틈을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설명을 들은 그녀의 눈썹이 와락 구겨졌다. 왜 이딴 걸 주냐는 무언의 눈빛.
“위험하면 사용하시라고요.”
“뭔 개소리야?”
“곧 알게 될 겁니다.”
“……흠.”
나를 잠시 올려다본 펜리가 천천히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자, 난 그녀와 거리를 빠르게 벌렸다.
저 포즈가 누군가를 패려고 할 때의 동작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눈가를 가늘게 뜨며 물었다.
“어디 가?”
“그 스크롤 진짜 최악의 순간에만 쓰세요.”
“헛소리 그만하고 이리 오지?”
“아, 포션 있으면 빨리 던져주세요.”
“뭐?”
“저 죽기 전에요. 그럼!”
내가 후다닥 앞으로 달려 나가자, 그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내 머리채를 확 잡으려고 했지만, 내가 더 빨랐다.
“앞! 앞! 앞이요!”
“이게 진짜 죽으려고…….”
살짝 비켜선 내 몸뚱이 너머의 장면이 그녀의 눈동자에 담겼다.
땡그랑―
순간 손에 한가득 쥐어진 금화들이 우수수 굴러떨어졌다. 소중한 금화를 잠시 잊을 정도로 그녀에겐 당혹스런 장면이었다.
키에에에에엑―!
쿠아아악!
펜리는 두 눈을 몇 차례 깜빡이곤 현 상황을 이해하려고 했다.
“전부 미쳐 날뛰고 있네…?”
이 표현이 딱 맞았다.
전방의 한가운데, 엄청난 수의 키메라들이 서로를 향해 물어뜯고, 던지고, 뒤엉켜 굴러다니고 있었다.
혼돈 속의 전장.
휘말린 순간 갈가리 찢겨 죽을 것 같은 지옥의 구렁텅이 같았다.
문제는 그 구렁텅이 속으로 저 빌어먹을 녀석이 몸을 날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펜리는 다급히 손바닥을 살폈다.
“이…….”
손바닥에 징표의 문양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맹약이 발동됐다는 신호.
“이 미친 새끼가….”
펜리는 정신을 퍼뜩 차리곤 아서 뒤를 쫓기 시작했다.
생명의 징표를 사용한 녀석의 표정이 너무 평온하기도 했고, 솔직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일생일대 가장 많은 황금을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꿈에 부푼 것이 조금 전이었다.
그 타이밍에 자신을 소환하고 이렇게 엿을 먹인다고?
징표가 발동된 이상, 징표자가 눈앞에서 죽으면 엄청난 페널티를 받게 된다.
이젠 저 뒤통수가 원수처럼 보였다. 하지만 펜리는 살심보단 실리를 따졌다.
“빌어먹을 새끼, 받아!”
펜리는 품에서 병을 꺼내 힘껏 던졌다. 오직 그녀만 사용하는 특제 포션. 단검을 던져 등에 꽂고 싶었지만, 저놈은 이 자리에서 무조건 살아남아야 했다.
“감사!”
“뭔 감사야? 이 새끼가….”
포션 셔틀… 뭐시기를 외치며 다시 내달리는 녀석.
주술로 놈을 옭아맬까 고민했지만, 녀석은 이미 난장판 중심으로 들어가 버렸다.
키메라들의 시선이 녀석에게 쏠렸다. 이질적인 존재를 감지하곤 앞다투어 아가리를 쩍 벌린 채 아서를 노리기 시작했다.
번쩍―!
황금빛이 시야를 집어삼켰다.
눈 부신 빛을 마주 보며 펜리는 양손에 크로우를 소환했다.
욕설을 내뱉으며 빛 사이에서 아서의 흔적을 쫓았다.
멈추지 않고 더욱 속도를 붙여 전장의 중심부로 내달리는 녀석이 보인다. 그 끝에 도미닉이 있었다.
모든 과정을 살핀 펜리가 헛웃음을 흘리곤 크로우를 빠르게 교차했다.
“뒤통수 제대로 맞았네.”
목숨이 경각에 달려서 징표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목적을 가지고 징표를 사용했던 것이었다. 설마,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징표를 요구한 것이었나?
‘말도 안 되지.’
첫 만남부터 지금 상황까지 예측하고 움직였다는 건데, 그건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할아비가 와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목적이 뭔지 모르겠지만, 이번 한 번만 당해준다.’
눈앞의 목적을 위해 하나뿐인 징표를 사용한 녀석이다.
방해했다간 무슨 헛짓거리를 할지 모르니, 당장은 도와주는 척 달래다가 살려서 데려가는 게 맞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검게 물들었다.
그림자 주술의 발동 신호.
펜리의 몸이 그녀의 그림자 속으로 빠르게 스며들었다.
아서를 향해 짓쳐오는 섬뜩한 살기가 느껴진다. 엄청난 속도로 주먹을 내지르는 작은 괴물.
도르네프가 몇 차례 긴장하며 경고했던 아레나 후아튼이 분명했다.
저대로 두면 무조건 죽는다.
펜리는 그대로 그림자를 타고 징표자, 아서 클레이튼의 뒤를 순식간에 잡았다.
교차한 크로우를 때리는 매서운 주먹.
쾅―!
거친 폭발이 아서를 중심으로 터져 나왔다.
* * *
“…헉!”
눈앞이 번쩍이며 큰 폭음이 터졌다. 거친 바람에 머리카락이 볼썽사납게 흔들렸다.
멈춰 선 작은 주먹.
세 뼘 거리에서 교차한 크로우에 막혔다.
‘미, 미친, 언제?!’
머리가 부서질 뻔했다는 사실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키메라들은 접근하다가도 빛에 노출된 순간 비명을 지르며 물러나는데, 저 작은 괴물은 퍼트린 빛에 반응도 없이 엄청난 속도로 돌진해 왔다.
아니,
치이이익―
빛에 피부가 그을리고 있음에도 별 상관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소녀의 무표정이 저렇게 무서워도 돼?
‘골로 갈 뻔했네.’
역시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
계획의 마지막 퍼즐.
시선을 돌리니, 펜리가 굳은 얼굴로 아레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주먹에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넌 오늘 내가 무조건 살린다. 대신 나중에 내 손으로 죽여버릴 거야.”
“…하하하.”
미운털이 제대로 박힌 것 같지?
의도한 대로 펜리 앞에서 일단 질렀는데 다행히 먹혀들었다.
후환은 별로 두렵지 않았다.
‘욕심쟁이 엘프의 화를 풀어줄 방법이야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거든.’
눈빛만 교환한 채 난 펜리와 거리를 벌렸다.
등을 돌리고 전력으로 언덕을 오르려는데, 섬뜩한 살기가 느껴졌다.
아레나가 내 뒤를 잡기 위해 재차 움직이려는 모습이다. 날 제거하라 지시받은 모양인데, 난 무시하고 달렸다.
펜리가 무조건 살려준다고 했으니 어떻게든 살려줄 거다.
“어딜!”
바닥이 어둡게 물들더니 수십 개의 그림자 손들이 아레나를 옭아맸다. 움직임을 봉쇄한 후 펜리가 크로우를 겨누며 달려들었다.
“네가 그렇게 세다며? 난쟁이 말이 사실인지 어디 볼까?”
“…….”
콰앙―! 쾅!
귀가 터질 것 같은 폭음이 연달아 귀를 때렸다.
두 사람이 제대로 붙은 모양인데,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난 도미닉이 있는 방향을 올려다보며 내달렸다.
피와 살점으로 올려진 거대한 언덕 위에는 도미닉 외에 짙은 존재감을 흘리는 레토니칼스의 심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도미닉은 그 심장에 접근하기 위해 언덕을 오르는 중이었다.
그 앞길을 방해하기 위해 뒤엉켜 싸우는 키메라들이 보인다.
천천히 심장과 거리를 좁히는 도미닉.
그 광경을 끝으로 난 언덕 초입 앞에 멈춰 섰다.
후―
길게 호흡을 내뱉으며 거친 숨을 갈무리했다. 고개를 들고 언덕을 향해 손을 뻗었다.
도미닉의 뒷모습이 보인다.
손만 뻗으면 놈에게 닿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저 너머의 심장까지도.
‘드디어 여기까지 왔다.’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처음 라웁 숲에 떨어져 감옥에 갇혔을 때만 해도 생존만 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학살자도 포기한 힘, 레토니칼스의 심장.
백 개의 심장 이벤트는 애초에 도전이 불가능한 챕터라 생각했다.
하지만 칼 일행을 만나고, 문양의 힘을 각성하면서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피어올랐고, 펜리와 인연이 닿으면서 해볼 만한 도박으로 바뀌었다.
운도 무척 따랐다고 생각했다.
‘여기까진 내 예상대로 흘러갔어.’
붉은 괴물은 예상대로 도미닉에게 제거당했고, 심장은 마지막까지 큰 혼란을 불러왔다.
키메라 떼는 고대 문양으로, 아레나 후아튼은 펜리를 소환해 견제했다.
이제 마지막.
팔다리가 떨어진 도미닉이 남았다.
‘도미닉은 내가 맡는다.’
도미닉이 심장에 닿기 전에 그를 제거해야 했다.
다른 이들은 절대 도미닉을 죽일 수 없었다.
도미닉을 제거할 방법을 아는 이는 오직 자신뿐. 학살자조차 알지 못하는 도미닉의 약점을 파고들어야 했다.
소설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의 메인 악당 중 하나, 도미닉 후아튼.
이길 수 있으려나.
솔직히 두렵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냐.”
소설 속 엑스트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면 이곳까지 오지도 않았다.
소설의 끝은 파멸로 정해져 있고, 그 세상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결국 대가를 지불하고 강해져야 했다.
고유 능력을 잠시 떠올린 나는 도미닉을 올려다봤다.
끔찍한 몰골로 겹겹이 쌓인 사체들이 보인다. 도미닉까지 이어진 사체 언덕, 그 위를 잠시 올려다본 나는 사체들을 짓밟고 질주하기 시작했다.
내가 접근하자, 키메라들이 달려들었다.
번쩍―
문양을 소환하며 몸 상태를 빠르게 체크했다. 부러진 손목이 살짝 불편한 것 빼곤 움직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키메라들이 주춤 물러나자, 그 사이를 거침없이 뚫고 올라갔다.
거리가 삽시간에 좁혀지자 도미닉의 시선이 느껴졌다.
키메라로 막을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오르는 것을 멈추고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도미닉의 반응에 난 접근을 멈추고 거리를 살짝 벌렸다. 그러곤 도미닉을 응시하며 능력 발현을 기다렸다.
“…….”
“…….”
잠시간의 침묵.
나는 눈썹을 찡그리곤 욕설을 내뱉었다. 눈을 수차례 깜빡이고, 비벼봐도 내가 기대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빌어먹을, 한 번쯤은 쉽게 가면 안 되냐?’
내 고유 능력.
예상대로라면 도미닉과 마주한 순간 능력이 발현되어야 하는데,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분명 신명(神名)의 주인이 됐을 텐데?’
신명(神名)의 주인.
악이든 선이든 세상에 변화를 불러올 운명을 타고난 자들.
내 고유 능력은 그런 신명의 주인들과 마주쳤을 때 조건부로 발현된다.
내 능력이 잘못됐을 리 없으니, 결론은 하나였다.
‘도미닉이 신명을 얻지 못했다?’
붉은 괴물을 쓰러트리는 과정에서 도미닉은 신명을 받게 되는데, 그 신명이 바로 ‘백(百) 개의 심장’이었다.
근데 얻지 못했다는 건, 내 개입으로 운명이 틀어졌다는 뜻이었다. 이러면 고유 능력 없이 내가 가진 힘으로 도미닉을 제거해야 하는데,
‘충분히 가능해.’
판단이 선 순간 단검을 겨누고 질주를 시작했다.
3성의 마나를 모조리 태우며 전력을 뽑아냈다.
도미닉과의 거리, 30미터.
키에에엑!
거대 키메라 두 마리가 사납게 다가왔다. 다른 키메라들과 달리 몸에서 보랏빛이 흘러나왔는데, 황금빛을 뚫고 날 공격해 왔다.
저 보랏빛으로 문양의 빛을 상쇄시킨 건가?
거대 키메라 두 마리라면 무척 버거운 상대였지만, 전면전이 아니라 회피가 목적이라면 할 만했다.
콰앙―! 쾅! 쾅!
울퉁불퉁한 언덕 사이를 재빠르게 움직이며 그들의 공격을 피해냈다. 굳이 내가 싸울 필요 없이 시간만 끌면 되었다.
군단의 분열로 저들을 견제할 이들이 차고 넘쳤기 때문이다.
역시나, 주변 키메라들이 몰려와 얽혀들면서 두 키메라를 맹렬히 물어뜯기 시작했다.
나를 공격하고 싶어도, 붙들려서 다가오지 못하는 상황.
난 그들 사이를 잽싸게 뚫고 나왔다.
10미터.
도미닉의 표정이 선명히 보일 정도까지 접근했다.
도미닉과 1:1 상황이 만들어졌다.
“미치광이!”
내 외침에 도미닉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난 도미닉을 향해 단검을 투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