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신명 사냥꾼
흐릿한 의식 속으로 펜리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목숨 줄이 간당간당해. 네가 뒈지는 건 나도 피하고 싶거든?”
“…쿨럭!”
“자살 구경시켜주려고 날 부르진 않았을 거고. 살 방법을 말해봐.”
“시, 심장을 손에 넣어야….”
“심장?”
펜리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사체들로 쌓아 올린 언덕 꼭대기.
그 위에 둥둥 떠 있는 심장이 이질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잠시 후, 심장 곁으로 작은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전까지 펜리를 고생시켰던 괴물 같은 년.
아레나 후아튼.
그녀의 손에 심장이 들려졌다.
“빌어먹을, 저 괴물과 또 싸우라고?”
펜리는 미간을 와락 구겼다.
아레나를 향한 도르네프의 경고는 거짓이 아니었다.
무시무시한 반사신경과 괴력.
더 위협적인 건 목숨을 도외시하는 반격이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저돌적으로 달려드니 대인전에 강한 펜리조차 긴장하기 일쑤였다.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부담스러운 상대란 뜻.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펜리는 주변을 둘러보며 이를 살짝 깨물었다.
상대는 이제 저 작은 괴물만이 아니었다.
크르르르르―
“간만에 살 떨리네.”
군집을 이룬 엄청난 수의 키메라들이 자신과 아레나 주변으로 빠르게 몰리고 있었다.
완벽한 고립.
펜리는 헛웃음을 삼키곤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키메라들까지 하나로 뭉친 상황에서 아레나까지 상대하는 건 개죽음이나 다름없었다.
‘녀석을 데리고 튀어야 하나?’
녀석의 상태를 보니, 높은 확률로 도시에 도착하기 전에 죽을 것 같았다.
그럼 징표의 페널티를 받게 되는데, 그 손해는 솔직히 어떤 것으로도 메꿀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싸워도 죽어.”
자신이 빠지면 이 녀석 혼자 남게 되는데, 결국 키메라들에게 죽을 거다.
뭘 선택해도 녀석의 죽음을 막을 수 없다면 살 확률이 높은 것을 선택해야 했다.
베네타에 도착할 때까지만 숨이 붙어 있으면 어떻게든 살릴 수 있다.
“목숨 줄이 질기길 빈다.”
판단을 내리고, 아서를 부축한 채 그림자 주술을 발동하려고 했다.
그런데,
“……?”
펜리의 표정이 당혹스럽게 변했다. 밑을 둘러보니 조금 전까지 보이던 그림자가 사라졌다.
그녀는 주변 환경이 미묘하게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닥에 깔린 사체들 사이에서 음울한 빛들이 흘러나왔는데, 그 빛무리가 서서히 짙어지며 그림자 생성을 막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펜리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아레나를 응시했다.
아니, 그녀가 한 짓이 아니다.
어느 정도 눈치만 있어도 그녀는 지시를 받은 인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럼 어떤 존재가 그녀를 움직이고, 지금의 상황을 만드는 것일까.
아마 저 심장일 것이다.
“도미닉은 죽었으니까.”
직접 도미닉의 시체를 조각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럼 심장에게 의지가 존재한다는 말인데,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순간, 아레나가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손에 쥔 심장을 천천히 입으로 가져간다.
“…아니지?”
펜리의 부정도 잠시, 아레나가 작은 입으로 심장을 꿀꺽 삼켰다.
두근―!
잠시 후, 그녀의 몸에서 붉은 파동과 함께 심장 박동 소리가 흘러나왔다.
메아리처럼 퍼지는 심장 소리가 주변을 가득 채웠다.
그 소리에 반응하듯 주변을 채우던 음울한 빛들이 하늘로 솟구치며 아레나에게 스며들었다.
아레나를 중심으로 붉게 물드는 빛무리.
무언가 벌어지고 있다.
꺼림칙한 느낌에 펜리는 아서를 둘러업고 고립의 빈틈을 찾았다. 키메라들이 미동 없이 아레나 쪽을 올려다보는 상황이라, 지금이 탈출의 적기라 판단했다.
“자, 잠시만….”
“뭐가 잠시만이야. 진짜 뒈지고 싶냐? 입 열 힘이 있으면 능력이나 펼쳐.”
“…….”
그 뒤로 말이 없어진 녀석은 아레나가 서 있는 방향으로 힘겹게 손을 뻗었다.
손바닥 위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백광.
정말 능력을 사용하려고?
녀석이 뭔가를 본 듯 작게 읊조리더니, 이내 힘겹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사냥하겠다.”
“뭐?”
죽어가던 녀석이 갑자기 사냥 타령이라니, 무슨 헛소리인가 했는데,
우우우우우우웅―!!!!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펜리 주변으로 새하얀 아지랑이가 흘러나왔다.
아니, 아지랑이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었다.
그녀는 눈가를 좁히며 업혀 있는 아서를 바라봤다.
아서의 몸 위로 수백 개의 아지랑이가 뻗어 나오고 있었다. 아지랑이들은 더욱 짙어졌고, 이내 겹겹이 뭉치며 큰 물결을 이루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혼잣말처럼 던진 그 질문에,
“일단 내려주시죠.”
내가 대답했다.
* * *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
이 소설의 스토리를 대부분 알고 있지만, 늘 변수를 염두에 뒀다.
한두 번 당해봤어야지.
그런데 이번 건은 변수를 아득히 넘어버린 최악의 상황이 돼버렸다.
도미닉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는데, 보상이라 생각했던 심장에게 뒤통수를 맞은 상황이라니.
‘여기까진가?’
죽음을 인지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옅어진 의식 사이로 꿈틀거리는 감각을 느꼈다.
폐부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가 올라오는 듯했다.
익숙한 기운, 성력이었다.
성력이 말을 걸어왔다.
물론, 성력의 목소리가 실제로 들린 건 아니었다.
감각을 두들겨 전한다고 해야 하나?
성력이 한 존재를 의식하며 묻고 있었다.
‘저 존재’를 사냥할 거냐고.
사냥?
사냥이란 단어에 고유 능력이 떠올랐다.
저 존재, 아레나 후아튼이 사냥감이라고?
생각지 못한 대상이었지만, 죽음을 앞에 둔 상황에서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고, 몸에 신비한 변화가 찾아왔다.
“…신명 사냥꾼.”
각성한 고유 능력을 나직이 중얼거리며 몸의 변화를 살폈다.
정신이 또렷해지며, 축 늘어졌던 근육들이 새로운 자극에 꿈틀거렸다.
가쁜 호흡이 삽시간에 안정되었고, 온몸에 감각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힘겹게 눈꺼풀을 뜨니, 펜리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비가 풀렸네? 상처도 빠르게 아무는 중이고.”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펜리가 아니었다면 이미 몇 차례 죽고도 남았을 것이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는데,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배에 난 상처는 지금도 심각했지만, 출혈이 멈췄다. 혈색도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마비독이 풀리면서 특제 포션 효과가 돌고 있는 덕도 있지만, 포션 때문만이 아니었다.
‘모든 능력이 눈에 띄게 올라갔다.’
신체 능력, 마나량, 전투 감각, 회복 속도 등.
전투와 관련된 모든 능력이 뻥튀기된 듯 올라갔다.
지금이라면 한 단계 위인 4성과도 비벼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월적인 능력 강화.
사냥꾼으로 각성했을 때의 능력 중 하나였다.
“몸 상태는?”
“움직일 수 있습니다.”
“감사하다고 했지? 그럼 이제부터 내 말대로 해.”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내가 뭐라고 할 줄 알고?”
“길을 뚫으라 하시겠죠.”
“그래서 안 가겠다고?”
“못 가는 겁니다.”
포위 사이에서 틈을 찾던 펜리는 이내 멈칫하더니 사나운 눈빛으로 날 노려봤다.
“너, 지금 말도 안 되는 환경에서 날 부른 거 알고 있지? 여긴 네 급으로 올 곳이 아니었어.”
“당신이 없었으면 애초에 도전도 안 했을 겁니다.”
“미친놈. 이미 많이 봐줬어. 그러니 심장은 포기해.”
“눈치채셨습니까?”
“숨이 꼴깍 넘어가는데도 심장에서 눈을 떼지 못했으니까.”
“이젠 포기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일이 너무 커졌거든요.”
“뭐?”
“여기서 저걸 못 막으면 토바른 전체가 피로 물들 겁니다.”
난 아레나 후아튼을 올려다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레나의 머리 뒤에 후광처럼 검은 오오라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저 오오라는 오직 내 눈에만 보이는 현상이었다.
오오라 주변으로 몇 안 되는 문장들이 떠다녔는데, 고대 룬어로 보였다. 다만, 처음 보는 문자임에도 난 그 의미를 해석할 수 있었다.
신명 사냥꾼의 능력 중 하나.
신명을 볼 수 있는 사냥꾼의 개안(開眼).
[아레나 후아튼 – 불사자 레토니칼스의 분신체(50%)]
[극한까지 개조된 키메라 육체]
[백(百) 개의 심장]
신명의 목록이 눈동자에 담겼다.
도미닉 대신 아레나가 신명의 주인이 되었다. 아니, 정확히 심장이 신명을 받았다는 게 정확했다.
지금 아레나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건 레토니칼스의 심장이었으니까.
도미닉은 레토니칼스의 심장을 통제할 고대 지식을 연구하고 익힌 악당이었다. 계승자의 조건을 갖춘 유일한 존재.
그 유일한 계승자가 죽어버렸으니, 심장이 폭주하며 스스로 존재를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이걸 잡을 수 있으려나?
순간, 룬어가 바뀌었다.
[아레나 후아튼 – 불사자 레토니칼스의 분신체(55%)]
‘55%?’
분신체의 완성도가 50%에서 55%로 순식간에 올라갔다.
아레나의 몸으로 빠르게 흡수되고 있는 음울한 빛무리가 보인다.
사체들의 빛무리인데, 죽은 키메라들 속에 남아 있는 마석의 힘을 뽑아 흡수하는 것 같았다.
분신체의 완성도가 100%가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절대 좋은 꼴 못 보겠지.’
분신체라지만, 그 대상이 무려 불사자 레토니칼스다. 악이든 선이든 계승자의 신기는 하나같이 절대자들과 인연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중 불사자는 악(惡) 그 자체로 알려진 존재.
전에 변이됐던 붉은 괴물과는 비교도 안 될 엄청난 재앙이 탄생할 수도 있었다.
무조건 막아야 했다.
퍽―
“……!”
내 투지를 읽은 것인지, 펜리가 내 뒷덜미를 기습적으로 후려쳤다.
기절한 뒤 끌고 갈 생각이었나 본데, 육체 능력이 올라가면서 충격을 버텨내자, 그녀가 살짝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맷집이 갑자기 세졌네?”
“도와준 김에 확실히 도와주시죠.”
“뭘 도와줘. 이미 살려준 횟수만 따져도 넌 몸 팔아서 나한테 돈 갚아야 해.”
역시나 씨알도 안 먹힌다.
[아레나 후아튼 – 불사자 레토니칼스의 분신체(60%)]
벌써 60%다.
올라가는 속도를 보니, 뻗대는 그녀를 설득하기엔 상황이 급박했다. 눈앞의 존재를 제거하려면 미완성 단계인 지금밖에 없었다.
역시 어쩔 수 없나?
“신세는 나중에 꼭 갚겠습니다.”
“안 갚아도…… 어디 가!”
그대로 키메라 떼 머리 위로 뛰어올랐다. 뒤를 돌아보니 역시나 욕설을 퍼부으며 쫓아오는 펜리가 보였다.
페널티를 받지 않으려면 날 살려서 데려가야 하니 죽을 맛일 거다.
오늘 사건을 계기로 학을 떼며 생명의 징표를 없앨지도 모르지.
“악당도 울고 갈 새끼! 나중에 죽여버릴 거야!”
“…….”
저 분노를 나중에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는 건 사치지.’
당장은 눈앞의 일에 집중해야 했다.
사방을 둘러봤다.
여길 봐도, 저길 봐도 새까맣게 모여든 키메라 떼뿐이다.
어느새 공터를 꽉 채워서 라웁 숲 너머까지 넘어갈 정도라, 검은 바다 위에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내 몸에서 흘러나오는 빛무리의 아지랑이 때문일까.
허공에 떠오르자, 수천수만의 눈깔들이 날 올려다봤다.
키에에엑!
카아아아악!
내 존재를 의식한 키메라들이 이빨을 드리우며 살기를 드러냈다.
그건 아레나도 마찬가지.
입술을 혀로 핥으며 노려보는데 날 먹잇감으로 인지한 것 같았다.
난 언덕 위에 우뚝 선 아레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고대 문양이 번뜩이며 반짝이기 시작했다. 문양에 응축된 기운이 전과 달랐다.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기운이 넘쳐흘렀다.
우우웅―!!
한계치까지 문양에 마나를 쏟아부으며 아레나를 향해 미소를 날렸다.
이를 드러낸 사나운 미소.
일단 목표가 정해지면 사냥을 시작해야 한다.
신명 사냥꾼.
“사냥감은 내가 아니라 네놈들이야.”
번쩍―!
나를 중심으로 황금빛 파동이 허공을 찢으며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