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69화 (69/130)

69화 내 능력을 믿을 뿐이다

찢어진 스크롤 사이로 공간을 삼키는 날갯짓 소리가 흘러나왔다.

파파파파파파파파팟―!

허공에 새하얀 장관이 펼쳐졌다.

흰빛으로 이뤄진 나비들이 주변 풍경을 빛내며 사방으로 날아올랐다.

가파른 절벽을 에워쌀 정도로 엄청난 수의 나비 떼가 소환됐다.

축제에서나 보던 아름답고 몽환적인 장면.

모든 것이 나비 떼에 삼켜졌다.

멈칫―

펜리를 몰아치던 아레나의 움직임이 느려지더니 무표정한 아레나의 동공이 빠르게 확장됐다.

눈동자에 가득 비친 흰나비 떼.

온몸이 흰나비에 둘러싸이자 그녀의 움직임이 돌처럼 굳었다.

죽음으로도 잊지 못한 트라우마가 불러온 찰나의 경직.

난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어지러운 나비 떼를 뚫고 아레나의 등 뒤로 왼팔을 뻗었다. 거칠게 그녀를 휘감고 품으로 잡아당겼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감촉, 생기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피부다.

“꼬맹아, 이만 끝내자.”

내 목소리에 아레나가 반응을 보였다.

감정이 말라비틀어진 눈동자로 날 응시한다.

클라크 대공에 의해, 부모에 의해 죽어서도 유린당한 작은 괴물.

불운한 그녀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한 가지뿐이다.

딸칵―

“고통은 없을 거야. 나만 더럽게 아프겠지.”

벗어 던진 팔찌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사람을 숙주로 신호에 맞춰 폭발하는 변태 같은 벌레, 붐(boom).

붐을 봉인한 팔찌를 여기서 풀게 될 줄이야.

‘이젠 못 먹어도 고다.’

도망치고 포기하기엔 너무 멀리 왔다. 그나마 다행인 건 생명 보험이 존재한다는 거다.

휘몰아치는 나비 떼 사이에서 펜리와 눈을 마주쳤다.

표정을 보니 내 돌발 행동에 아주 당황한 눈치였다.

네가 걜 왜 안고 지랄이야?

이런 눈빛인데, 그냥 어색한 미소로 답을 해줬다.

이번에도 잘 부탁해.

헛생각도 잠시, 지독한 고통에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으드득―!

경직이 서서히 풀리며 아레나가 휘감은 내 왼팔을 잡아 뜯으려고 했다.

뼈가 으스러지고 팔이 뽑힐 것 같은 고통을 참으며 난 붐을 깨우기 시작했다.

“…망할 년, 불쌍한 거 취소다.”

[팔은 날아가겠지만, 위력은 보증하지. 웬만한 녀석들은 다 죽을걸?]

붐(boom)으로부터 살아남은 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붐을 터트려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 물론, 조건이 필요했다.

‘정신 줄 놓치면 골로 간다.’

내 목표는 레토니칼스의 심장을 얻는 것이지, 아레나를 죽이는 게 아니었다.

부서진 그녀의 육체가 회복되기 전에 심장을 뽑아내야 한다.

그 후에는….

다음을 떠올리려는 순간, 손목에 잠들어 있던 붐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아레나 후아튼 – 불사자 레토니칼스의 분신체(97%)]

‘어, 어서!’

신경 다발이 가닥가닥 끊어지는 것 같다. 팔이 터져나갈 것 같은 두려움.

난 이를 까득 물곤 정신을 바짝 차렸다.

영문도 모른 채 떨어진 이 개같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여러 가지 능력을 얻었다.

그리고 그중 내가 가장 신뢰하고 의지하는 능력은 고대 문양도 성력도 신명 사냥꾼도 아니었다.

‘정신 방벽.’

소설 속 인물이 아닌 ‘진짜’ 나란 존재에게 부여된 특수 능력.

내 능력을 믿을 뿐이다.

[……98%]

[……99%]

“시, 시발.”

콰아아아아아아앙―!!!

온 세상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 * *

인적이 드문 으슥한 뒷골목.

카멜은 굳은 얼굴로 어두컴컴한 골목 사이를 거닐고 있었다. 곁을 지키는 이들은 기사 단장 리옹과 주술사 렌구아가 전부였다.

조용한 발자국 사이로 카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렌구아, 아직 멀었나?”

“곧 도착합니다. 그런데 어찌 그런 누추한 장소로…….”

“묻지 말고 안내해라.”

“알겠습니다.”

렌구아는 고개를 숙이곤 앞장을 섰다. 길잡이 역할을 맡았지만, 렌구아는 지금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멸로 인해 망가진 주술 인형의 기억을 복구하는 작업 중에 갑자기 끌려왔기 때문이다.

‘블라이어로 돌아가신다고 했는데, 어찌 다시 돌아오신 거지?’

자신의 주인은 잭과 하우엘 형제를 포섭하고 반강제로 끌려온 상단주들과 곡물 계약을 마무리한 후 곧장 에토르 영지를 떠났다.

자신은 에토르의 마석 작업을 마무리하기 위해 남았는데, 돌연 주군이 다시 돌아와 자신을 호출하더니 크룩스의 아지트로 안내하라는 것이 아닌가.

주인은 절대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었기에 그 이유가 궁금했다.

‘보고서에 어떤 내용이 적혀 있었길래….’

사건의 발단은 한 장의 보고서였다.

‘주술사들의 둥지’에서 보내온 것이니, 암살 조직 크룩스와 관련된 내용일 터였다.

평상시에는 자신에게 먼저 도착했을 보고서가 떠나는 주군께 긴급으로 전달됐다.

내용이 ‘특급’이란 의미.

주군이 극도로 경계하는 ‘그’의 흔적이 발견됐다면 오늘 길들인 잭과 하우엘 형제도 동행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냥개들은 블라이어로 먼저 보내진 상태. 그럼 ‘그’와는 상관없는 내용이란 예측이 나왔다.

질문을 통해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었지만, 주군의 표정이 무겁다 보니 눈치가 보였다.

렌구아는 일단 크룩스의 아지트로 주군을 안내하는 데 집중했다.

자신과 리옹만 대동하고 움직인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곳입니다.”

카멜 일행은 골목 구석에 있는 낡은 건물 앞에 섰다.

간판에는 정보 길드를 뜻하는 표식과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크룩스의 마스터가 머무는 비밀 아지트였다.

“마스터를 끌고 나올까요?”

렌구아는 큰 고민 없이 마스터를 언급했다.

주술사들의 둥지를 통해 이미 크룩스의 전력에 대해 알 만큼 알고 있었다.

자신이나 리옹, 둘 중 한 명만 움직여도 충분하다 판단했다.

하지만 그 물음에 카멜은 피식 웃더니 방향을 틀었다.

“내가 마스터 따위를 보려고 직접 나선 줄 아나?”

“…그럼?”

“근처에 볼일이 있다.”

카멜은 크룩스의 비밀 거점을 지나쳐 주변에 자리한 허름한 여관 앞에 멈춰 섰다.

카멜은 여관을 잠시 응시했다.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한달음에 이곳으로 달려온 이유.

특급으로 보내온 보고서에 적혀 있는 단 한 줄의 내용 때문이었다.

[크룩스를 찾아온 손님이 확인됐는데, 그 손님 이름이…….]

‘아케인이라니.’

크룩스에서 ‘그’의 흔적을 찾던 중 전혀 예상치 못했던 아케인이란 이름이 튀어나왔다.

이름만 같을 뿐 다른 사람일지도 모르지만, 이름을 알게 된 이상 무조건 확인이 필요했다.

1층에서 흘러나오는 흐릿한 불빛.

카멜은 불빛을 따라 여관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1층 식당에선 손님들이 식사와 술을 즐기고 있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그 작은 소란 사이로 젊은 귀공자가 검은 망토를 두른 채 입구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은 하나둘 침묵하기 시작했다.

바라보는 것만 해도 가슴을 옥죄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시선조차 마주 보기 힘들었다.

뒤이어 리옹마저 나타나자 사람들은 눈치를 보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날카로운 인상의 푸른 갑주의 기사.

뒷골목에서 기사와 엮이면 죽는다는 격언대로 움직인 것인데, 사실 기사보단 저 귀공자의 존재감 탓이 더 컸다.

더 있다간 질식해 죽을 것만 같았다.

새파랗게 질린 여관 주인만 자리를 지키는 가운데, 카멜의 시선이 식당 한 곳에 머물렀다.

모두가 떠난 테이블에 홀로 앉아 있는 이, 허름한 로브를 걸친 그는 등을 보인 채 테이블에 올려진 술잔을 조용히 기울이고 있었다.

카멜 일행의 등장에도 별다른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저자에 대해 알고 있나?”

카멜의 물음에 주인은 화들짝 놀라곤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푸, 푼돈을 받고 점을 봐주는 점성술사입니다.”

“이름을 알고 있나?”

“그게…… 모, 모릅니다! 자신을 그저 점성술사라고만 소개해서….”

“얼마나 머물렀지?”

“석 달 정도…? 그 이상일 수도 있습니다. 건너편 건물에도 자주 오갔던 터라….”

카멜은 주인에게 점성술사에 대한 여러 가지 것들을 자세히 물었다. 주군의 태도에 리옹과 렌구아는 의문이 들었다.

점성술사를 직접 잡아다가 물어보면 될 것을 굳이 주인에게 묻는 이유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카멜은 점성술사에게 다가간 뒤 테이블 위에 금화 한 닢을 올려놨다.

“점괘를 보고 싶은데.”

“보다시피 영업을 끝내고 한잔 마시는 중입니다.”

“금화가 부족한가?”

“술에 취하면 점괘가 잘 안 맞아서 말이죠. 낼 아침에 다시 찾아오십시오.”

사내의 태도에 카멜은 눈을 반짝였다. 용아의 망토를 걸쳤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반응이다. 되려 사내의 무시에 리옹이 발끈하며 앞으로 나서려고 하자 카멜이 이를 저지했다.

카멜은 테이블 반대편에 앉은 뒤 황금 주머니를 그 앞에 올려놨다. 보기만 해도 엄청난 양의 금화가 담긴 주머니였다.

“그럼 점괘 대신 얼굴 구경이나 하고 가지. 구경값이다.”

“남자를 좋아하는 관상은 아닌 듯한데….”

“어떡할 거지?”

“단순한 흥밋거리치곤 대가가 지나치군요. 당신이 찾는 사람이 아니면 절 죽일 생각입니까?”

남은 잔을 비운 사내가 리옹을 바라보며 묻자, 카멜은 그 빈 잔에 술을 채우며 피식 웃었다.

“죽여? ‘계시(啓示)’를 받드는 존재를 적으로 삼을 만큼 내가 멍청해 보이나?”

“…….”

카멜의 말에 아케인은 술잔을 받아 조용히 들이켰다. 별다른 반응이 없는 모습이다. 오히려 경악한 사람은 곁에 있던 렌구아였다.

아케인? 그 아케인이라고?

계시를 통해 신명(神名)의 신비에 가장 밀접하게 다가간 인물.

오르도르 숲의 마녀와 함께 절대 적으로 두면 안 되는 인물로 꼽히는 이였다.

‘아케인이 왜 크룩스 같은 하찮은 조직의 손님으로….’

그것도 진짜 이름을 드러내고 말이다.

의문이 들었지만, 답을 굳이 고민하지 않았다.

아케인은 계시를 받고 움직이는 인물이다. 계시의 뜻을 한낱 인간 따위가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

“이상하군요. 이름을 드러내도 저를 찾아올 귀한 인연은 점괘에 없었는데.”

“내가 별것 아니라는 건가?”

“흠, 그럴 리가요. 그래서 이상하다는 겁니다.”

아케인은 둘러쓴 로브를 천천히 벗었다.

긴 백발이 허공에 흩날렸다.

새하얀 피부를 지닌 젊은 미남자였다. 왼쪽 귀에 푸른 사파이어가 박힌 귀걸이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백발과 어우러져 무척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아케인은 가느다란 눈매로 카멜을 잠시 응시한 뒤 고개를 살짝 숙였다.

“‘신명의 주인’이시면 귀한 분이 맞으니까요.”

“……!”

아케인의 말에 카멜 뒤에 서 있던 두 사람이 움찔했다.

주군이 앞에 있어 티를 내지 못했지만, 반응을 보니 주군이 신명의 주인인지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내가 신명의 주인인가?”

“모르셨습니까?”

“확인을 받은 건 처음이니까.”

카멜의 표정을 보니, 모르는 눈치는 아니었다. 아케인은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저와 당신은 인연의 연결고리가 무척 약합니다. 아직은 저를 만날 운명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나도 알아. 내가 당신을 찾아오게 된 것은 ‘그’ 때문이다. ‘그’가 날 이곳으로 이끌었지.”

“‘그’?”

“그대가 맹신하는 운명이란 것을 가볍게 비틀어버린 놈이지. 지금처럼.”

‘그’가 아니었다면 크룩스를 조사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고, 크룩스 손님으로 와 있는 아케인의 존재도 몰랐을 것이다.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던 아케인의 손짓이 멈칫했다.

카멜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이 많아진 표정이었다. 안 그래도 계시가 애매하게 어긋나서 크룩스에 계속 머물고 있던 참이었다.

‘계시’대로 죽었어야 할 인물의 생사가 불투명해지더니, 그 인물과 관련된 점괘가 뿌연 벽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인연의 연결고리에 없던 신명의 주인이 찾아와 ‘그’란 존재를 언급하며 경고를 한다?

잠시 고민하던 아케인이 카멜에게 물었다.

“‘그’란 사람도 신명의 주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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