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혈맹을 제안해요
넬라가 들어온 입구 사이로 시끌벅적한 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아, 그러고 보니 밤이 됐지?
푸른 장미의 영업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오늘도 아리따운 꽃을 꺾어보려는 남정네들이 문전성시를 이룬 것 같았다.
물론, 내 눈에는 피를 빨리러 온 호구들로 보였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왜 찾아온 걸까? 접견실에서 쫓아낸 지 반나절도 안 지난 거 같은데.
“개인 훈련 중입니다만? 매너 모르십니까?”
“바람이나 쐴 겸 찾아왔어요.”
“바람을 쐬면 막 찾아올 수 있는 그런 곳입니까? 이곳이?”
“돈 갚기 싫으세요?”
“갚아야죠. 이리 들어오시죠.”
난 램프가 올려진 식탁 옆 의자를 손수 털어주곤 미소로 그녀를 맞이했다.
돈이 권력이고 깡패인 더러운 세상.
“제 얼굴이 보고 싶어서 오신 겁니까?”
“당연히 아니죠.”
“손님도 많을 시간에 무슨 용건입니까?”
“막 의식을 차린 분이 훈련장에서 상식 밖의 행동을 보여서요. 살펴보러 왔어요.”
“상식 밖의 행동?”
“갑주를 입고 온종일 뜀박질만 한다고.”
“……그게 수상한 겁니까?”
“정상인이 할 행동은 아니니까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확인차 방문했어요.”
“무슨 확인 말입니까?”
은은한 불빛 아래 넬라가 날 빤히 바라봤다. 아침과 달리 꽃처럼 치장한 그녀가 날 쳐다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하긴 했는데, 저 눈빛, 왠지 모르게 꺼림칙했다.
“잠식으로 괴물이 됐는지 안 됐는지.”
“…….”
“안타깝게도 정상이네요. 제법 준비를 많이 했는데.”
넬라가 살짝 손짓하자, 지붕 전체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사방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시발, 몇이나 있었던 거야?
더 무서운 건 내 기감에 안 걸렸다는 거다.
뛰어난 검은 장미들이 있었다는 것이고, 내가 오기 전부터 이미 지붕에 은신 중이었다는 소리였다.
“…무, 뭡니까?”
“심장에 잠식된 괴물로 판단되면 조직 전체를 동원해 제거하라는 마스터의 지시예요.”
“저를 감시한 겁니까?”
“당신이 장미들의 눈 아래 있는 거죠.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세요?”
어디긴 어디야.
검은 장미 본진이지.
“하하하…….”
어째 아침부터 날 예민하게 살피더니, 그런 무시무시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물론, 펜리의 판단은 이해했다. 심장의 주인은 하나같이 이지를 상실한 괴물들이었으니까. 어찌 보면 내가 예외적이라 볼 수 있었다.
이상하리만큼 확신이 있었거든.
“보다시피 정상입니다.”
“알아요.”
“저 살았습니까?”
“아쉽지만 그렇게 됐네요.”
“아쉽다라, 뼈가 있네요?”
“아까 말하지 않았나요? 기분 나쁜 밤이라고.”
“그게 저랑 무슨 상관 있습니까?”
내 물음에 넬라는 살포시 웃고는 다리를 살짝 꼬았다. 갈라진 원피스 사이로 아찔한 각선미가 드러났다.
원피스가 퇴색되어 보이는 우윳빛 피부. 게다가 하필 은은한 불빛 아래다.
이러니 남정네들이 정신을 못 차리지.
아침에 본 수수한 엘프와 같은 엘프인지 헷갈릴 정도로 도발적인 행동이었다. 이래서 여자는 변신의 동물이라 하는 건가.
“상관있죠. 오늘은 구름이 많이 낀 ‘그림자가 없는 밤’이잖아요.”
넬라의 답에 난 뺨을 긁적였다.
진짜 뼈가 있는 대답이었다.
‘그림자가 없는 밤’은 그림자 주술이 봉인되는 펜리의 약점을 우회해서 표현한 것이었으니까.
눈빛을 보니 떠보는 게 아니었다.
내가 그림자 주술을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마스터의 약점을 알고 있는 존재로 인지했다는 건데… 그녀의 분위기가 VIP룸과 접견실에서 봤던 것과 다른 느낌인 이유를 알겠다.
단순한 마담뚜가 아닌 검은 장미의 일원으로 날 바라보는 것이다.
“그녀에게 들었습니까?”
“마스터가 누굴 구해서 아지트로 데려온 건 처음이었거든요. 그래서 집요하게 물었죠.”
“어디까지 들었습니까?”
“생명의 징표, 전투 그리고 구출까지.”
라웁 숲 사건에 대해 빠짐없이 다 들었다는 말이었다.
펜리가 숨김없이 다 말했다는 건, 넬라의 지위가 조직 내에서 상당하다는 것을 뜻했다.
확실히 몇 차례 부딪쳐 보니 보통 여인은 아닌 것 같았다.
아름다운 미모, 그 안에 무서운 비수를 담고 있다고 해야 하나?
가시 돋친 장미란 표현이 잘 어울리는 여자였다.
‘눈만 뜨면 긴장의 연속이네.’
죽을 고비 끝에 좀 살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사형수의 마지막 만찬은 아니겠지?
“알려진 약점 아니었습니까?”
“마스터가 그 말을 들었다면 당신 목을 두 바퀴 정도 돌렸겠네요. 마스터는 지금껏 모든 의뢰를 홀로 수행했어요. 능력을 최대한 숨기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고 보니 샤르바딘 의뢰 때도 혼자 움직였었다.
나와 함께 움직인 게 이례적이란 뜻인데, 상황이 그만큼 급박하긴 했나 보다.
지금까진 그림자 능력을 잘 숨긴 모양인데, 제단에서 크리스탈 미믹을 상대할 때 많은 드워프들 앞에 능력을 노출시켰다.
그 미친 미믹 새끼가 좀 버텨야지.
“저 때문에 약점이 노출됐다는 겁니까?”
“당신이 계획의 주동자라고 들었거든요.”
“뭐, 틀린 말은 아닌데… 그래서 절 원망하시는 겁니까?”
“원망은 안 해요. 반대급부로 조직의 5년 치 예산을 도르네프에게 받게 됐거든요. 한마디로 돈방석에 앉았죠.”
“뽀찌 같은 거 없습니까?”
“살려드렸잖아요.”
독한 년.
있는 것들이 더했다.
그런데, 뽀찌란 단어를 어떻게 알지?
“그럼, 왜 제게 그 말을 꺼낸 겁니까? 그림자 없는 밤 말입니다.”
“한 가지 제안을 하려고요.”
“제안?”
“마스터의 능력에 대해 함구해 줄 것.”
“이미 노출이 됐다고….”
“드워프들이라면 괜찮아요. 봐도 모를 것이라고 했으니까. 문제는 당신이죠. 마스터와 등을 맞대고 마스터의 전력을 지켜본 존재.”
아레나 후아튼과 싸웠을 때를 말한 것 같았다.
하긴 그때 펜리가 똥줄 타면서 밑천을 전부 드러내긴 했지. 아레나가 좀 세야지.
근데, 등을 맞대기보단 내가 거의 업혀 다녔다.
날 구하느라 발에 땀 나도록 뛰어다녔는데, 말하기 쪽팔렸는지 넬라에겐 돌려 말한 것 같았다.
“저도 염치라는 게 있어서요. 제 생명의 은인인데 발목을 잡고 싶진 않습니다. 마스터의 능력은 무덤까지 가지고 가겠습니다.”
“전 인간을 신뢰하지 않아요. 아니, 모든 엘프가 그렇게 생각하죠.”
“원하는 게 뭡니까?”
“당신께 혈맹을 제안해요.”
“…혈맹? 진심입니까?”
“네.”
혈맹.
피로 맺은 연합체란 뜻인데.
엘프가 말하는 혈맹은 인간이 생각하는 혈맹과 달랐다.
인간이야 혈맹이든, 혈족이든 제 살길 힘들면 배신을 밥 먹듯이 하지만 엘프는 아니었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
괜히 펜리가 날 살리려고 그 개고생을 자처한 게 아니었다.
엘프가 내뱉은 맹약은 그만큼 구속력이 강력했다.
언령에 특화된 종족의 비애랄까.
“전 인간입니다만, 당신들이 신뢰하지 못하는.”
“알아요. 인간은 우리와 다르게 배신을 잘하죠.”
“그런데 혈맹 제안? 저랑 말장난하자는 겁니까?”
“전 거짓말을 못 해요.”
“이유가 뭡니까? 이미 여러 차례 배신당한 경험이 있으실 텐데?”
“…….”
엘프들이 좋아서 술을 팔고, 웃음을 팔고 다니겠는가?
전부 생존을 위해서였다.
숲을 잃었고, 터전을 잃었기에 엘프들은 돈이 필요했다.
그 터전을 망가트린 주범이 누구였을까.
인간이다.
정확히 세상의 큰 주축을 담당하는 마법사 집단 말이다.
“설마 그녀도 허락한 겁니까?”
“제 개인적인 제안입니다. 하지만 마스터도 결국 허락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곧 진실과 마주하게 될 테니까.”
“진실?”
내 의문에 넬라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내게서 뭘 봤길래 이런 무리수를 두는 거지?
도통 그녀의 생각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목 깨끗이 씻고 기다리란 쪽지를 보지 못한 건가?
제법 오랜 시간의 침묵.
먼저 침묵을 깬 건 넬라였다.
그녀는 기지개를 쭉 켜곤 의자에서 일어나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베네타에서 가장 귀가 밝은 사람이 누군지 아나요?”
“넬라 당신이겠죠.”
푸른 장미에는 수많은 정보가 모여든다. 그 주인이 바로 넬라고.
“맞아요. 자랑은 아니지만 토바른 지역 전체를 봐도 손꼽을 정도로 귀가 밝은 편이죠. 당신이 의식이 없었던 3개월 동안 많은 일이 일어났어요.”
3개월.
나도 그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무척 궁금했다.
특히, 카멜 블레이저.
그 녀석의 행보가 가장 궁금했다.
“그중 가장 큰 관심사는 근래에 각성한 신명의 주인들이죠.”
“신명의 주인들?”
미간이 확 좁혀졌다.
주인들?
왜 여러 명이지?
스토리 흐름대로라면 백 개의 심장 각성 이후로 한동안은 신명의 각성이 없었을 텐데?
“…혹시 몇 명인지 압니까?”
넬라는 내 앞에 멈춰 선 후 다섯 손가락을 폈다.
다, 다섯? 아니지?
“각성한 신명의 주인은 모두 다섯 명이에요.”
하지만 넬라의 쐐기에 난 헛웃음을 흘렸다.
이건 말이 안 되는데?
“그중 한 명은 죽었고, 다른 한 명은 온통 베일에 감춰졌어요. 정체가 드러난 이들은 남은 셋인데 토바른 내에선 유명 인사들이죠.”
“…….”
난 말없이 넬라를 바라봤다.
나머지 셋의 정보를 알고 있다?
신명은 정보를 통해 함부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려 ‘신명’이다. 발설하면 저주를 받는.
“혹시 정보를 샀습니까?”
“아직이에요.”
“당신, 설마 신을 받드는 자입니까?”
“놀란 표정이네요. 신을 받드는 자는 그리 희귀한 직업이 아니잖아요. 물론, 나름 신명을 잘 보는 편이라 다른 자들보단 차별점이 있지만.”
그녀는 신명을 받는 자가 맞았다.
엘프라면 뛰어난 정령사 혹은 신녀, 이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마법사는 신명으로부터 배척되는 게 이 바닥의 규칙이었으니까.
엘프 넬라.
비중이 있는 인물 같은데, 기억에 없는 인물이었다.
‘부각되기 전에 죽었다는 건데.’
백 개의 심장이 베네타를 휩쓸었을 때 희생당했던 모양이었다.
넬라란 인물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 물론, 호감과 아주 거리가 먼 관심이었다.
“죽은 신명의 주인은 아레나 후아튼이에요.”
“…말해도 됩니까?”
“신명의 생사는 신을 받드는 자라면 누구나 확인할 수 있고, 죽은 신명의 주인은 이 세상에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어요. 괜찮아요.”
한 명은 파악했다.
그리고 내가 알던 신명의 주인이기도 했다.
도미닉 후아튼 대신 각성하게 된 아레나 후아튼.
나머지 네 명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내가 미래를 바꿈으로써 무려 넷이나 각성했다는 거다.
“혈맹을 맺는다면 신명의 주인 중 세 명에 대해서는 알려줄 수 있어요.”
“그게 가능합니까?”
“마스터가 돌아오면 알려 줄 거예요. 그 정보를 얻기 위해 자리를 비운 거니까.”
혈맹이면 가능하다라.
잠만, 그러고 보니 이 혈맹….
‘내가 거부할 이유가 없잖아?’
엘프와의 혈맹은 인간인 내겐 너무나도 유리한 맹약이었다.
저쪽이 내게 발목 잡힐 확률이 훨씬 높았다.
수틀리면 배신할 가능성이 있는 나와 달리, 저들은 아니었으니까.
검은 장미는 계산이 아주 철저한 조직이다.
왜 이렇게까지 손해를 보며 날 잡으려는 거지?
그 답은 넬라가 알고 있고, 펜리가 돌아와야 그 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신명과 정보.
난 펜리가 향한 곳이 어딘지 알 것 같았다.
블랙마켓(black market).
힘과 권력을 지닌 자들이 수단을 위해 암묵적으로 인정한 암거래 시장.
신명의 주인에 대해 직접적으로 알고 싶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기도 했다.
블랙마켓에는 돈을 받고 신명을 알려주는 일종의 액받이, ‘저주받은 노예’들이 있었으니까.
“제안에 대한 답은 결심이 서는 대로 알려주세요.”
넬라는 꾸벅 고개를 숙인 후 훈련장을 벗어났다.
그녀가 나간 문 사이로 새까만 암흑이 펼쳐졌다.
진짜 그림자 하나 없는 구름 낀 밤이다.
펜리가 가장 싫어하는 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