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우린 블랙마켓이다
펜리는 두 눈을 끔벅였다.
암흑 공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주술로 연결된 암흑 공간은 정보 제공자와 고객의 신분을 완벽히 감출 수 있었다.
서로 정체를 모르며, 목소리 또한 가짜인 마법적인 공간.
블랙마켓 VIP만 입장할 수 있는 거래 공간으로, 이곳에선 오직 신명에 관한 정보만 취급했다.
펜리는 고객 신분으로 이 공간의 정보 제공자와 신명의 정보를 두고 거래 중이었다.
“한 명당 30만 골드?”
“왜? 비싼가?”
“아니, 생각했던 것보다 싸서.”
“셋의 신명 목록을 알아내는 건 단가가 싼 편이라 다른 곳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거든.”
“단가가 싸다고?”
거래자의 마지막 말에 펜리는 미간을 좁혔다.
액받이로 쓰던 노예들의 희생이 적었다는 뜻이다.
마녀사냥 시절에 블랙마켓에서 수많은 마녀를 노예로 사들였다고 들었다.
높은 확률로 희생당한 노예들은 ‘마녀’였을 것이다.
마녀 대학살 이후 마녀들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는데, 음지에선 여전히 마녀들에게 가혹한 짓을 벌이는 모양이었다.
펜리 또한 인간의 탐욕에 희생된 종족이라 눈앞의 상황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모른 척 무시했다.
블랙마켓은 세상을 주무르는 권력자들의 수단 통구다.
지금 펜리가 상대하기엔 너무 큰 산이었다.
“거래할 텐가?”
“최신 정보겠지?”
“물론이다.”
신명 목록은 그 주인의 성장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업데이트된 목록들의 가치는 세상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주인일수록 비싸졌다.
아니, 나중에는 돈으로 구할 수 없는 정보가 되기도 했다.
그만큼 알아내는 것에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펜리는 고개를 끄덕이곤 돈을 지불했다.
그녀가 구입한 신명 목록은 모두 세 명.
모두 합쳐서 90만 골드였다.
조직의 1년 예산에 버금가는 엄청난 금액이었지만, 도르네프의 의뢰를 완료한 덕에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물론, 돈을 건네는 펜리의 입장에선 욕이 절로 나왔다.
[어떤 대가를 줘서라도 제가 말한 정보들을 구해 오세요!]
넬라의 강력한 경고가 아니었다면 이런 정보 따위에 절대 거금의 골드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넬라는 엘프족 안에서 얼마 남지 않은 신녀 중 한 명. 평소에 조용하고 얌전한 그녀가 강력히 주장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도 속이 쓰린 건 어쩔 수 없네.”
90만 골드가 허공에서 사라졌다.
고작 이 종이 쪼가리에 적힌 정보 때문에 그 큰 투자를 하다니, 탄식을 내뱉으며 정보를 읽었다.
잠시 후, 펜리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
입을 앙다물고 마른침을 삼켰다.
표정 관리가 전혀 안 된다.
늘 그림자가 가려진 이 블라인드 공간이 마음에 안 들었는데, 오늘에서야 이 공간의 유용함을 알 것 같았다.
[펜리 체이서 – 세계수의 그림자(암(Shadow))]
[도르네프 가더 – 토바른의 방패(냉기(冷氣))]
[렌구아 필드 – 블러드 오크 샤먼의 후인(광기(狂氣))]
신명 목록에 적힌 세 명의 이름.
셋 모두 익숙히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는 바로 자신이었다.
목록을 받아 든 펜리는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넬라가 다급히 블랙마켓을 이용해 신명 정보를 받아 오란 이유를 이제 알 것 같았다.
신명의 주인이 됐다.
‘도대체 언제…?’
언제고 신명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했다.
6성에 오른다면 대부분 받게 되는 게 신명이었으니까.
신명을 받는 순간부터 인생에 큰 변화가 찾아온다.
당장 어딜 가든 대우를 받으며, 이곳 블랙마켓만 해도 수십만 골드 차용증을 우습게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펜리는 전혀 기뻐할 수 없었다.
‘내 무력과 조직의 전력은 변한 게 없어.’
그런데 신명을 받았다?
자신의 능력이 아닌 외부적인 요인이 그녀의 운명을 변화시켰다는 뜻이었다.
그녀의 시선은 또 다른 신명의 주인, 도르네프에게 닿았다.
베네타의 군주도 자신과 똑같은 시기에 신명을 받았다.
쪽지에는 신명 각성 순서와 날짜가 적혀 있었는데, 가장 최근에 신명을 받은 이는 일주일 전으로 블라이어의 흑주술사로 알려진 렌구아란 인물이었다.
그다음이 도르네프인데, 그 각성 시기가 자신과 완벽히 똑같았다.
그럼, 각성 이유도 똑같지 않을까?
자신과 도르네프가 최근에 공통으로 엮인 사건은 하나뿐이었다.
‘라웁 숲, 도미닉 후아튼.’
그리고 이 사건의 중심에는 그 녀석이 있었다.
이름만 떠올려도 이가 갈리는 녀석.
하지만 자신의 신명이 그 녀석과 어떻게든 관련이 있을 것 같았다.
단순한 감이 아니었다.
녀석의 전투를 바로 곁에서 지켜봤기에 확신할 수 있는 감이었다.
빛의 물결로 수천의 키메라 떼를 물리는 압도적인 광경.
각성한 아레나의 기운을 짓누르는 권능.
마지막엔 그녀를 죽이고 심장까지 삼켰다.
이젠 묻혀버린 그 흔적 위로 그 처절한 전투를 기억하는 이는 오직 자신뿐이었다.
아니, 이젠 넬라까지 두 명이었다.
아서 클레이튼.
그 존재를 말이다.
‘그 녀석은 지금도 의식이 없으려나? 잠식으로 괴물이 되면 예상이 빗나가는 건데.’
녀석에 관한 모든 정보를 넬라에게 전달했으니, 그녀가 슬기롭게 대책을 세웠을 것이다.
신명 정보를 확인한 펜리는 쪽지를 태워버렸다.
신명 구매자는 웬만해선 타인과 정보를 공유하지 않았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정보를 흘린 주체가 신명의 주인들에게 흘러간다면 적대감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정보는 자신과 그 주변 인물의 정보였지만, 그래도 조심스럽게 다뤄야 했다.
“최근 각성한 주인들은 모두 다섯이라 들었는데?”
“몰라서 묻는 건가?”
“아니, 죽은 한 명은 빼고, 남은 한 명의 정보가 필요해.”
펜리는 아레나 후아튼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직접 그 시신을 태운 당사자였으니, 가장 먼저 알았다는 게 정확했다.
남은 이는 넬라가 베일에 감춰진 주인이라 말한 한 명.
블랙마켓은 그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까?
“그자는 완벽하지 않다.”
“완벽하지 않다? 그게 무슨 뜻이지?”
“일부 내용만 알고 있다는 뜻이다.”
“액받이들이 이젠 없나 보지?”
“그 입,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VIP라도 선이란 게 있으니까.”
목소리만 들리는 공간.
제공자의 목소리엔 섬뜩한 살기가 담겼다. 아니 분노하는 것 같았다. 다만, 분노의 대상은 펜리가 아닌 정보를 알아내지 못한 것에 대한 수치심 같았다.
“이 정보는 중개만 하고 있다.”
“중개?”
“정보 위탁이다. 정보를 제공한 위탁자가 원하는 물건이 아니라면 정보를 알려줄 수 없다는 의미지.”
“어떤 정보를 알 수 있지?”
“신명.”
신명.
어쩌면 가장 중요한 정보이기도 했다. 넬라는 어떤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그자의 정보를 구해 오라고 했다.
“가격은?”
“번외.”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건가?”
“정보 위탁자가 원하는 건 돈이 아니라 물건이니까.”
“물건?”
“상급 이상의 고대 아티팩트.”
“…미친 새끼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우리에게 교섭권은 없어. 정보 위탁자의 조건이니까.”
펜리는 헛웃음을 흘렸다.
상급 이상의 고대 아티팩트라니, 무슨 생각으로 이딴 조건을 내건 거지.
‘아니, 가능할 수도 있겠네.’
지금 알고자 하는 신명은 무척이나 특별했다.
무려 신명의 규칙을 깬 존재의 신명이었으니까.
방금 제시한 엿 같은 조건에도 분명 거래를 원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정보 위탁자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고대 아티팩트를 쓸어 담겠어.’
펜리는 잠시 고민했다.
상급 이상의 고대 아티팩트.
그 조건을 충족하는 물건이 그녀에겐 몇 가지 있었다.
그중 한 가지를 떠올린 펜리는 우선 교섭에 들어갔다.
“중개 조건으로 그 정보를 넘겨받았겠지?”
“…….”
“원하는 금액을 얼마든지 맞춰 줄 수도 있어. 나한테만 몰래 팔아.”
“중개 계약에 아주 곤란한 주술이 걸려서 말이지. 곤란하다.”
펜리는 짧게 혀를 찼다.
실력 좋은 주술사들을 밑에 두고 있는 자였나?
이러면 결국 조건대로 움직여야 하는데, 펜리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틈을 찾았다.
“정보 정확도는?”
“백 퍼센트.”
“출처를 알 수 있나?”
“운명의 아케인.”
더는 물을 필요도 없었다.
틈이 없다.
그리고 왜 블랙마켓이 욕심을 접고 중개만 맡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아케인은 신명을 취급하는 이들에게 절대 척을 져선 안 되는 존재였다. 아케인이 정보 위탁자로 나섰다는 건, 이 거래가 독점이란 뜻이다. 다른 곳에선 절대 얻을 수 없을 거란 확고한 자신감 말이다.
‘넬라도 그자의 신명을 전혀 읽지 못했다고 했으니까.’
펜리는 또 고민에 들어갔지만, 고민의 결론은 같았다.
어떠한 대가로든 그자의 신명을 알아내야 했다.
‘엘프족의 운명이 걸렸을 수도 있다고 했으니.’
펜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신명을 떠올렸다.
세계수의 그림자.
세계수는 태초 시절부터 내려오는 엘프들의 안식처이자 터전이다.
자신이 그 터전의 그림자로 지목됐다. 그것도 이번 라웁 숲 사건에 휘말리면서 말이다.
펜리는 넬라의 감을 믿었다.
그녀는 차고 있는 목걸이를 벗어 허공에 내려놨다.
소리 없이 사라지는 목걸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고대 시절에 존재했던 세계수의 축복을 받은 목걸이였다.
상급을 넘어 엘프족에겐 최상급에 준하는 고대 아티팩트다.
‘미끼로 이만한 게 없지.’
나름 머리를 굴린 선택이었다.
고대 아티팩트 수집.
아케인을 내세웠지만, 분명 그 뒤에 흑막이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펜리는 목걸이를 통해 그 흑막을 밝혀낼 생각이었다.
‘선택받은 엘프족이 아니라면 목걸이의 숨겨진 능력을 파악하지 못할 테니까.’
위치 추적이 그 능력 중 하나였고, 위치 파악을 통해 펜리는 두 가지를 얻을 생각이었다.
하나는 흑막의 주인.
그리고 다른 하나는,
‘수집된 고대 아티팩트들.’
찾기만 하면 훔칠 수 있다.
그건 자신의 특기였으니까.
목걸이의 감정 시간은 제법 길었다.
감정을 해봤자, 상급 정도의 가치로만 나올 것이다.
펜리는 목걸이의 가치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다. 블랙마켓이라면 목걸이의 가치가 대략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수 있을 테니까.
잠시 후,
“거래 성립이다.”
거래 수락과 함께 한 장의 쪽지가 손에 쥐어졌다.
펜리는 그 작은 쪽지를 받곤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쪽지를 펴고 읽었다.
단 한 줄의 신명 정보.
[신명 사냥꾼]
“…….”
신명 사냥꾼.
해석에 따라서 엄청난 파급 효과를 불러올 신명이었다.
펜리는 조용히 쪽지를 태웠다.
무슨 이유인지, 손을 내려놓은 그녀의 손이 덜덜 떨린다.
“흥미롭지 않나?”
“뭐가 말이지?”
정보를 구매했기 때문일까.
정보 제공자는 펜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줬다.
“신명의 ‘앞 글자’가 단순히 이름을 뜻하는지, 사냥하는 자의 먹잇감 이름인지 말이야.”
‘신명’ 사냥꾼.
해석에 따라 의미가 완전히 달라졌다.
만약 앞 글자 ‘신명’이 그 주인들을 사냥하는 존재라면 이자는 신명을 지닌 자들의 적으로 낙인찍힐 수 있었다.
“블랙마켓은 이자를 어떻게 판단하고 있지?”
“우린 블랙마켓이다.”
펜리는 고개를 끄덕이곤 등을 돌렸다.
그 답이면 충분했다.
블랙마켓은 이득이 기운 쪽으로 움직인다. 단일 세력이 아닌 철저한 이득 집단으로 이뤄진 연합체이기 때문이다.
펜리 자신도 이 신명을 알기 전까진 블랙마켓과 똑같은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었다.
‘…신명 사냥꾼.’
펜리는 나직이 신명을 중얼거리며 공간을 벗어났다.
자신의 엘프 인생에서 뭐랄까.
무언가에 더럽게 엮인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