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90화 (90/130)

90화 폐광산의 저주(2)

터널의 어둠마저 집어삼키는 머릿수였다.

쪽수가 터무니없이 많다.

터널 앞뒤를 꽉꽉 채워서 서서히 좁혀오는데, 그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꾸물꾸물 끝도 없이 몰려왔다.

우리는 일단 발밑에서 튀어나온 것들부터 정리했다.

스가각―!

펜리의 크로우가 허공을 빛내자, 좀비들이 뭉텅이로 썰려 나갔다.

난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좀비들의 머리를 밟아 부순 뒤 뒤로 살짝 물러났다.

그제야 두 쌍의 크로우가 반경을 넓히며 삽시간에 좀비들을 쓸어버렸다.

대인전 최강의 무기라더니, 눈앞에서 보니 확실히 살벌하다.

크로우에 묻은 썩은 살점을 털어내며 그녀는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이전보다 수가 더 많아졌다.

꾸역꾸역 땅속에서 계속 튀어나왔다.

“두더지 새끼들인가? 땅을 파고든 흔적은 없었는데?”

“지워졌을 겁니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까.”

“어쩔 거야?”

“움직여야죠. 시간을 끌수록 불리합니다.”

“왜?”

그 물음에 난 펜리의 뒤통수를 가리켰다.

은은한 빛을 흩뿌리는 머리 장신구.

어느 순간부터 다크 로즈의 축복이 발현되고 있었다.

펜리는 뒤늦게 다크 로즈를 만지작거리며 반응을 살폈다.

축복은 방어용이 대부분이다.

무언가로부터 펜리를 지키기 위해 축복이 발동한 것이었다.

펜리를 공격하는 보이지 않는 기운.

“설마…….”

“저주입니다.”

답을 하며 난 서서히 성력을 끌어올렸다.

저주의 영향인가?

육체에 이상 증상이 나타났다.

팔이 가려워서 살펴보니 피부가 거미줄 형태로 물들며 검게 퍼지고 있었다. 물든 부분을 꾹꾹 눌러보니 감각이 없다. 마치 고통 없는 괴사가 진행되는 느낌이었다.

저주가 육체에 주는 부작용이 분명했다.

펜리에게 다크 로즈가 있다면 내겐 성력이 있었다.

성력을 끌어올리자 변색하던 피부가 천천히 혈색을 되찾았다.

오염됐던 피부도 빠르게 재생되었다. 저주를 밀어내자, 심장이 피부 재생에 들어간 모양새.

폐광산의 저주는 내게 통하지 않았다.

저주가 안 먹히니 임무 성공에 반은 먹고 들어간 셈이고, 내가 임무를 적극적으로 맡은 이유였다.

‘저주의 발원지가 근처에 있다는 건데.’

갑자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저주가 발동됐다.

우리의 접근에 뭔가가 반응을 보인 것이다.

“펜리!”

“왜?”

내 부름에 앞에서 날뛰고 있던 펜리가 유령처럼 곁에 붙었다.

구체의 빛에 기울어진 내 그림자를 타고 나타났는데, 난 주변을 둘러보곤 혀를 내둘렀다. 앞쪽에 너부러진 수십 구의 시체들이 보였다.

그 짧은 사이에 양민 학살 수준으로 좀비들을 조져놨다.

‘실력은 인정해줘야 한다니까.’

평소에 틱틱거리며 날 괴롭히는 게 취미인 변태 같은 엘프지만, 동료로 두면 안심하고 등을 맡길 수 있는 인물이었다. 물론, 그때그때 고삐를 쥐고 관리해야 한다는 단점도 있었다.

“일단 달리죠.”

“달려? 어디로?”

“어디긴 어디예요. 정면 돌파지.”

“이 상황에서? 물러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펜리가 뒤를 가리켰다.

바닥에서 일어난 시체들이 퇴로를 꽉 틀어막고 있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도망칠 구멍은 만들어놓고 움직이자는 말이었다.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물러나면 다시 접근하기 힘들 수도 있어요.”

“앞쪽에 뭐가 있을 줄 알고.”

“뒤쪽도 마찬가지죠. 수십 년 동안 저주에 희생된 이종족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그리고 다크 로즈가 저주를 계속 막아주리라 확신하지 마세요.”

“축복이 멈출 수도 있다는 거야?”

“그건 모르죠.”

주인의 의지대로 축복이 발동하지 않고, 주변 상황에 맞춰 발동하는 것.

내가 다크 로즈를 양보한 이유가 저 불확실성 때문이었다. 긍정적인 효과라지만, 발동과 해제 조건이 불확실했다.

차라리 확실한 방어 수단인 정신 방벽과 심장에 의지하는 것이 내겐 마음이 더 편했다.

다크 로즈를 만지작거린 펜리는 날 뚫어지게 바라봤다.

뭘 원하는 눈빛인지 알 것 같았다.

그녀가 바라는 건 확실한 정보다.

내가 알고 있는 정보.

동료지만 부탁하는 처지라 최소한의 설득이 필요했다.

이곳은 위험 지대였으니까.

“발원지가 이 근처에 있어요. 저주가 발동했다는 게 그 증거죠.”

“발원지를 찾으면?”

“원흉을 찾아 없애야죠. 저주의 근원이니까.”

“원흉? 살아있는 존재라는 거야?”

“물건일 확률이 높아요. 광산 개발 중에 발견한 저주받은 물건을 광부들이 건드린 거죠.”

여기까지 말한 나는 펜리를 지나쳐 단검을 휘둘렀다.

다가오던 좀비 머리가 툭 떨어졌다.

펜리가 주변을 정리했다고 해도 틈이 채워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좀비들이 우르르 몰려와 손톱을 들이민다.

잡히는 순간 벌떼처럼 달라붙어 물어뜯을 기세였다.

“움직여요!”

“칫!”

펜리가 전방으로 튀어 나가고, 난 그 뒤를 쫓으며 측면을 맡았다.

우웅―!

단검에 성력을 싣자, 검날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도르네프에게 부탁해서 받은 드워프제(製) 단검인데, 인챈트를 무난히 버티는 것이 확실히 강도가 남달랐다.

광부 복장을 한 썩은 시체들이 양쪽에서 달려들자, 그들의 가슴에 큰 구멍을 뚫어줬다.

그런데,

“…안 먹히네?”

가슴이 뚫린 채 재차 덤벼드는 좀비들.

성력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 모습이었다.

저주를 막아내기에 성력이 통할 줄 알았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자세를 낮춰 바닥을 한 바퀴 구른 후 펜리 곁으로 바짝 붙었다.

“드디어 능력 빨이 다한 거냐?”

“기다려봐요.”

잠시 후, 황금빛 물결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고대 문양을 발동시켰다. 수백의 좀비들이 삽시간에 빛에 휩싸였지만, 빛 사이로 기괴한 음성은 여전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빛이 옅어지니, 되려 더욱 사납게 달려든다.

빛이 안 먹힌다.

“…키메라 때와 반응이 영 다르네요.”

“괜히 힘 빼지 마. 효과가 미미하니까.”

좀비들의 움직임이 다소 느려진 것을 보니, 문양의 영향을 아예 안 받는 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소모하는 마나에 비해 효과가 저조해서 고대 문양을 개방할수록 손해였다.

키메라와 좀비.

비슷한 듯 보였는데, 지닌 성질이 다른 것 같았다. 반응을 보니 펜리는 뭔가 알고 있는 듯 보였는데 당장 묻기는 힘들었다.

“질척거리지 말고 뒈져!”

그녀는 눈앞의 좀비 떼를 뚫고 가는 데 온 정신이 팔려있었다.

정면 돌파.

한 번 의견이 결정되자, 그녀는 더는 주저하지 않고 돌파에만 모든 힘을 집중했다.

일단 판단이 서면 행동력 하나는 끝내주는 여자였다.

얼마나 움직였을까.

한 발을 디딜 때마다 살점이 튀고 악취가 더욱 짙어졌다. 지나온 길목에 잘린 시체 조각들이 즐비하다.

잠시 후, 포지션 스위치가 이뤄졌다.

내가 정면, 펜리가 보조다.

내가 나서도 충분하다는 판단이 섰기에 제안한 것이었다. 혹시 모르니, 펜리의 힘을 아끼는 방법을 선택했다.

심장의 영향으로 내 체력은 이미 인간 수준을 벗어났다. 이 정도 전투에 쉽게 지칠 몸뚱이가 아니었고, 펜리의 무기인 갈퀴나무 손톱 정도는 아니지만, 인챈트를 이용하면 단검으로 좀비들의 팔다리는 어렵지 않게 절단할 수 있었다.

난 미친 듯이 단검을 휘둘렀다.

손에 도끼만 쥐여줬으면 게임 속 바바리안이 될 것 같았다.

“피도 눈물도 없는 놈.”

“피도 있고 눈물도 있거든요.”

날뛰었던 온몸이 쓰리다.

손톱과 이빨에 긁히고 찢기는 상처들.

쪽수가 많다 보니 상처도 삽시간에 늘었다. 하지만 열 걸음 정도 걷다 보면 대부분 아물어 있었다.

누가 좀비고 누가 사람인지 모르겠다.

그만큼 좀비 떼는 내가 무쌍을 찍기 딱 좋은 상대였다. 다만, 쪽수가 징글징글하게 많아서 돌파 속도가 더뎠다.

‘전(前)대 가주들이 어떤 식으로 당했는지 알겠네.’

저주에 노출되면 육체가 괴사하며 좀비화가 진행된다.

나와 펜리의 경우는 저주에 대항하는 힘이 있지만, 드워프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터널 깊숙이 들어온 상황에서 좀비들에게 포위. 쪽수에 밀려 빠져나가지도, 그렇다고 나아가지도 못하는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발목이 잡히는 사이, 저주에 잡아먹히며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모두 저들처럼 좀비가 됐겠지.

“…좀비가 됐겠지?”

중얼거린 것도 잠시, 흠칫 놀란 나는 전장을 빠르게 둘러봤다.

죽은 이들의 복장은 걸레짝이나 다름없지만, 태를 보면 살아생전 어떤 일을 했는지 가늠이 됐다.

몰려든 이종족들은 대부분 광부나 일반 병사들이었다.

순간 펜리가 알려준 정보가 떠올랐다.

[전대 가주들이 광산의 저주를 풀려다가 목숨을 잃었어. 그때 함께 사라진 정예 기사단만 3대대, 350명이 넘어가지.]

“…갑자기 불안해지네.”

전대 가주들.

그리고 정예 기사단.

일부라도 보여야 할 존재들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머릿속에 경고등이 뜬 순간, 난 뒤로 물러나며 손을 내밀었다.

일종의 터치다운.

스위칭 신호인데, 펜리는 눈살을 찌푸리곤 내 엉덩이를 걷어찼다.

이 망할 년이?

내가 눈을 부라리며 손을 한 번 더 내밀자, 펜리는 입맛을 다시곤 앞자리로 스위칭했다.

하여튼 청개구리도 아니고 한 번에 간 적이 없다. 언제고 매운맛 좀 보여줘야 하는데.

“시간 좀 끌어줘요.”

“이미 끌고 있어!”

아, 그런가?

난 어색하게 웃고는 순백의 팔찌를 움켜잡았다.

흡혈의 고리.

손바닥이 팔찌를 감싸자, 손바닥 사이로 순백의 활대가 빛처럼 늘어났다. 활대를 움켜쥐자, 흡혈의 고리가 기지개를 켜며 모습을 드러냈다.

부드러운 그립감도 잠시,

스스스스스―

‘옴팡지게 처먹네.’

흡혈의 고리가 내 피를 게걸스럽게 빨아먹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어지럼증이 올라왔는데, 심장이 크게 맥동하기 시작하자 금세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래, 줄 땐 내가 확실하게 준다.

‘위력만 만족스럽다면 말이지.’

흡혈이 길어질수록 화살의 위력이 강해진다고 했다.

얼마나 강해질까?

이번이 그 실험대가 될 것 같았다.

한쪽으로 활대를 잡은 채 다른 쪽으론 단검을 역수로 쥐곤 펜리 뒤를 보조했다.

언제부턴가 질척거리던 좀비 떼가 헐거워진 느낌이 든다. 좀비 수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는 뜻이고, 목표 지점이 멀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저기예요. 저기!”

터널의 너비가 빠르게 넓어지더니, 저 너머 바깥 출구가 보였다.

지긋지긋한 전투의 끝이 보인다.

저 출구 너머가 발원지일까?

스토리상 내가 알고 있는 정보는, 펜리가 저 출구 너머까지 도달한 뒤 공략을 포기하고 물러난 장면까지다.

홀로 좀비 떼를 뚫고 온 그녀가 갑작스레 물러난 이유.

“멈춰요!”

“갑자기 왜?”

터널이 끝나는 순간, 새로운 공간이 펼쳐졌다. 확 트인 느낌에 펜리가 구체를 여러 개 소환해 사방으로 흩뿌렸다.

대낮처럼 밝아진 을씨년스러운 공간.

무너진 틈새로 보이는 공간 구석엔 석관으로 된 작은 제단 하나가 보였고, 제단을 막아선 새로운 좀비 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을 본 순간 난 짧게 욕설을 내뱉었다.

“하, 어떻게 불길한 가정은 틀린 적이 없냐?”

이 정도면 과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발, ‘귀찮은 기운’을 뿜어내는 죽은 자들이라며?’

6성의 펜리는 저들을 상대하기 귀찮은 것들이라 표현하곤 공략을 포기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귀찮은 것들이 전대 가주들과 기사단이었다.

귀찮아? 저게?

난 펜리를 노려봤다.

이 엘프 년은 확실히 사기꾼이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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