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91화 (91/130)

91화 염원의 반지

하나 같이 녹슨 도끼를 움켜쥐고, 낡은 방패들로 몸통을 가렸다. 그 틈 사이로 헤진 듯 보였지만, 값비싸 보이는 갑주를 걸친 드워프 무리였다.

아니 정확히 썩은 존재들이다.

피부가 바짝 말라비틀어지고, 지독한 악취를 뿜어내는 좀비들 말이다.

차별점이 있다면 걸친 장비들이 남다르다는 점과 짐승처럼 달려드는 타 좀비들과 달리 무기를 제대로 사용할 줄 아는 모습이었다.

마나 유저는 좀비로 변해도 전투 본능이 남아 있는 건가?

저주의 메커니즘을 모르니 섣부른 판단은 이르지만, 한 가지는 딱 봐도 알겠다.

‘정면 승부는 불가능해 보이고.’

우리를 막아선 업그레이드 된 좀비 떼는 대략 300 정도.

순간 ‘스파르타―!’를 부르짖던 영화 300이 떠오른 건 왜일까? 그만큼 숨이 턱 막히는 비주얼과 분위기였다.

펜리도 나와 비슷한 생각 중인지 얼굴을 서서히 일그러트렸다.

아, 불안해라.

“한 새끼한테 두 번이나 속을 줄이야.”

“제가 뭐요? 도르네프님이 눈앞의 장면을 봤더라면 황금패 서너 개쯤은 더 줬을 것 같구만.”

“더 줘? 지랄하네. 다 포기하고 영원히 광산을 폐쇄하자고 했을걸? 너 다 알고 있었지? 그래서 날 데려온 거지? 고작 황금패 하나를 미끼로.”

“에이, 고작 황금패 하나라뇨.”

“네 눈에는 저 썩은 방패들밖에 안 보이지?”

펜리는 방패를 든 좀비 떼 너머를 가리켰다. 왕관 비슷한 투구를 쓴 좀비 드워프들이 뒤쪽에 무게를 잡고 서 있었다.

모두 세 명으로 하나같이 무식한 해머와 할버드를 움켜쥐고 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무기의 때깔부터가 달랐다.

전(前)대 가주들의 장비니 당연한 건가?

“도르네프 세쌍둥이가 뒈져서 부활하면 딱 저런 모습이겠네.”

“…….”

살아있을 때보다 훨씬 약할 테지만, 베네타의 군주들은 모두가 베네타를 대표하는 괴물들이었다. 좀비라도 뭔가 다를 것 같았다. 게다가 그들 주변에 포진한 3대대 기사단까지. 도르네프가 따라왔어도 당장 도망가자고 외쳤을 것이다.

“이 사기꾼 새끼야. 이제 어떡할 거야?”

“…사기꾼?”

설마, 펜리년에게 사기꾼 소리를 듣게 될 날이 올지 몰랐다.

나도 저렇게 한마음으로 똘똘 뭉쳐서 기다릴 줄은 몰랐다고.

좀비가 된 군주들과 기사들이 따로따로 놀면 무섭지 않지만, 저렇게 뭉쳐 있는 건 부담스럽다.

우린 고작 두 명이거든.

하지만 내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일단 부딪쳐 보죠. 그래야 튀든, 싸우든 할 거 아닙니까?”

“부딪쳐? 딱 봐도 빡세 보이는데 싸우자고?”

“그럼 그냥 물러날 겁니까? 여기까지 왔는데?”

“시끄러, 판단은 내가 해.”

“아뇨. 제가 합니다.”

“뭐?”

순간, 펜리의 눈썹이 짜증으로 솟구쳤지만, 난 덤덤한 눈빛으로 이를 받아쳤다.

“폐광산의 저주가 당신의 신명과 관련 있다면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제가 당신을 이곳으로 이끌었으니까요. 절 ‘길잡이’라고 부른 게 당신 아닙니까?”

“…….”

“신명이 절 이끈다면서요. 넬라가 한 말을 잊었습니까?”

길잡이와 신명, 넬라를 들먹이자, 그녀도 잠시 멈칫했다. 막 나가는 그녀도 신녀인 넬라의 경고는 귀담아듣는 모양이었다.

현재 그녀의 상황을 표현하자면 이 문장이 딱이다.

우리 펜리가 달라졌어요.

‘세계수의 그림자’란 신명을 부여받고 미래가 바뀐 펜리는 소설 속의 펜리와 완전히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베네타는 여전히 건재했고, 토바른에 펜리가 지켜야 할 건 아주 많았다.

그런 그녀에게 ‘공략 포기’는 어울리지 않는다. 부딪쳐 보는 게 맞다.

“망할, 끝나고 보자.”

뭘 봐?

운명은 바뀌었는데, 저 썩을 성격은 똑같았다.

그래도 설득이 먹혔는지, 펜리는 한 번 으르렁거리곤 등을 돌렸다.

두 쌍의 크로우를 소환하는 모습.

‘나도 많이 변했네.’

처음과 달리, 이젠 펜리년의 선택에 변화를 줄 만큼 내 태도에 여유가 생겼다.

말빨도 장난 아니게 늘었다.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이 머리를 굴렸더니, 없던 머리도 진화한 모양이었다.

진짜 사기꾼으로 전향해도 성공할 것 같은데,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가?

‘공격수를 밀어 넣었으면 판을 만들어줘야지.’

펜리가 휘젓고 다닐 수 있게끔 틈을 만들어줘야 했다.

흡혈의 고리를 앞으로 겨눴다.

이동하는 내내 흡혈을 시켰더니, 활대의 겉면이 새하얀 순백에서 핏빛으로 변해 있었다.

핏빛으로 변한 뒤부턴 흡혈의 느낌이 없다.

지금이라면 활의 최대 출력을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끼이이이익―

난 붉은 시위를 힘껏 잡아당겼다.

당김과 동시에 허공에 모습을 드러내는 화살.

아니,

“…이 정도면 투창 아니야?”

붉은빛을 띤 매끈한 화살 형태가 활대를 뚫고 쭉쭉 뻗어 나왔다. 투창이라 착각할 만큼 그 길이가 길쭉하고 촉이 매우 날카로웠다.

대체 피를 얼마나 빨아간 거야?

난 화살에 인첸트를 부여했다.

부여된 효과는 기본 속성인 관통.

퉁―

모든 작업이 끝내고 가볍게 시위를 놓았다.

스스스스스스―

쏘아진 화살은 조용했다.

미약한 바람 소리만 들려올 정도.

하지만 만들어낸 결과물은 달리던 펜리조차 잠시 움찔할 정도였다.

퍼석―!

화살을 막은 방패 하나가 시원하게 뚫렸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 뒤의 방패도, 그 뒤의 뒤의 방패도.

화살이 관통하는 곳엔 방패와 무기, 썩은 시체들이 산산조각 찢겨 날아갔다.

관통력이 미쳤다.

종국에는 왕관 투구를 쓴 가주들까지 노리고 들어갔다.

콰아앙―!

망치로 화살을 쳐올린 군주 하나가 휘청거렸다. 충격에 몸을 가누지 못하는 모습.

화살은 그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소멸했지만, 단 한 발의 화살이 좀비 진형을 무너트리고 빈틈을 만들어냈다.

활 위력이 예상을 웃돌았는지 저들이 약한 건지 모르겠지만, 영화 스파르타 300은 일단 취소다.

할만할 것 같았다.

파팟!

빈틈을 놓칠 펜리가 아니었다.

좀비 떼를 훑던 그녀의 눈동자가 검게 물든 순간, 그녀의 신형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림자 주술.

굴곡진 신형이 좀비 그림자들 사이로 빠르게 스며든 것도 잠시,

카카카캉―!

무리 가장 뒤쪽에서 쇳소리가 터져 나왔다. 가주들의 등 뒤로 불꽃이 튀었다.

한 움큼씩 뜯겨나가는 왕관 드워프들의 갑주를 내려다보며 펜리는 허공에서 짧게 혀를 찼다.

“하여간 드워프 제(製) 갑주는 사기라니까.”

동시에 그녀의 신형이 먹물처럼 밑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그 위로 거대한 해머와 할버드가 붕― 매섭게 휘둘러졌다.

조무래기보단 좀비가 된 세 가주의 실력을 확인하려는 의도 같았다.

조무래기(?)들의 시선이 펜리 쪽으로 향하자 난 시선을 돌리기 위해 쉴 새 없이 활시위를 당겼다.

콰콰쾅―! 콰쾅―!

퍼부어진 화살이 저들의 방패와 몸에 부딪히며 폭발했다.

기본 마력탄 위력이라더니 확실히 시원시원하게 잘 터진다. 단단한 장비로 무장된 녀석들이라 큰 타격을 받지 않은 모습이지만, 시선을 끌기엔 충분했다.

좀비들이 도끼를 쳐들고 내게 우르르 몰려들었다.

움직임이 일반 좀비보다 월등히 빨라서 긴장해야 했다. 포위당한 순간 육포처럼 다져질 것이 확실했으니까.

떼로 몰려오는 압박감에 다급히 화살을 수십 차례 날렸는데, 순간 머리가 띵해지더니 두 다리에 힘이 탁 풀렸다.

활대를 잡은 팔뚝이 미라처럼 바짝 말라 있었다. 무리했더니 회복 속도가 흡혈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내 피통이 마르지 않은 우물인 것은 맞는데, 속도 조절이 필요해 보였다.

좀비들이 코앞까지 달라붙자, 흡혈의 고리를 해제한 뒤 바닥을 굴렀다.

틈을 찾아 미친 듯이 몸을 날렸다.

멈칫한 순간 포위가 시작되니, 멈출 수가 없었다.

“공간이 좁아터졌어!”

길이 막히자 방향을 틀고 두 팔을 교차했다.

눈앞에서 퍼부어지는 도끼 세례.

이를 악물고 그사이를 질주했다.

그어어어어―

“…시끄러.”

낡은 도끼가 날카로운 도끼보다 더 아팠다.

등과 팔다리, 온몸의 살점이 뜯기는 느낌이다. 어그로는 제대로 끌었는데, 이러다간 내가 먼저 죽을 판이었다.

사방이 막힌 구조라 출구 쪽으로 몸을 틀었는데 헛바람을 들이켜며 멈춰 섰다.

터널 출구가 좀비들을 꾸역꾸역 토해내기 시작했다. 터널에서 부활했던 좀비들이 모조리 이곳으로 몰려오는 것 같았다.

크아악! 크악!

“징글징글하다. 진짜.”

출구도 막혔다.

주변을 둘러봐도 날 반기는 건 시체들뿐이다.

아, 살짝 위험한데?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팔뚝 위로 소름이 오소소 돋는 순간, 내 것을 포함한 주변 그림자들이 꿀렁이기 시작했다.

파파파파파파팍―!

“……!”

바닥에 검은 가시들이 사방으로 솟구쳤다.

그림자 가시들은 내 키보다 컸고 날카로웠으며 셀 수 없이 많았다.

나를 에워싸듯 바깥으로 솟구친 그림자 가시들.

가시에 꿰뚫린 좀비들은 넝쿨처럼 뒤엉켜 허우적거렸다.

가시로 만들어진 시체 벽이 좀비 떼의 접근을 막았다.

내가 위험해 보이자, 펜리가 나선 모양.

서둘러 펜리를 찾으려고 시선을 돌렸는데, 내 눈동자 앞에 작은 존재가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이 녀석은 설마….”

주먹만 한 크기의 생명체였다.

검은 우비를 둘러쓴 귀여운 소녀의 모습.

날 보며 눈을 흘기는데 눈매가 묘하게 펜리를 닮았다.

암코양이의 미니 버전을 보는 느낌이랄까.

귀여운데 달콤살벌했다.

“그림자 요정?”

“인간 주제에 그림자 요정을 알아?”

뒤를 돌아보니 펜리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그녀가 나타나자 그림자 요정도 펜리 머리 위에서 팔짱을 낀 채 날 노려봤다.

곰방대를 물고 연신 연기를 뿜어냈는데, 엘프석을 통해 마력을 보충하는 것 같았다.

“전투가 빡빡했습니까?”

“죽을 뻔했어. 무식한 세쌍둥이 새끼들.”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드러난 허벅지와 골반 쪽에 베인 상처가 제법 깊어 보였다.

그녀는 도르네프가 준 배낭에서 포션을 꺼내 발랐다. 그리곤 육포를 꺼내 질겅질겅 씹었다.

좀비 떼 사이에서 육포 섭취라니.

아포칼립스 세상에 던져놔도 웃으면서 기어 올라올 년이었다.

“요정을 소환하신 건 처음 보내요.”

“그만큼 상황이 최악이니까. 이것도 얼마 못 버텨. 마력 소모가 심하거든.”

그림자 가시 더미가 좀비들을 꿰뚫고 벽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몰려드는 수가 너무 많아 조금씩 밀리는 모습이었다.

서둘러 판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

펜리는 곰방대를 내 얼굴에 뿜으며 말했다.

“길잡이 씨, 안내해야지? 고(go)야, 다이(die)야?”

“고는 뭐고, 다이는 뭡니까?”

“여기서 뒈질 건지, 후퇴할 건지.”

“…그게 그렇게 됩니까?”

“바싹 썩었어도 가주들은 다르더라고. 제거는 불가능해.”

“매개체는 찾았습니까?”

“찾긴 찾았지.”

우리의 목표는 좀비들과 데스 매치를 뜨는 게 아니라, 폐광산의 저주를 없애는 것이었다.

진원지에서 좀비들과 부딪치다 보면 매개체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는데, 그녀가 찾는 모양이었다.

“저 가운데 있는 녀석.”

펜리는 시체 벽을 밀고 있는 좀비 떼 중 한 곳을 가리켰다.

거대한 해머를 질질 끌며 다가오는 왕관 투구.

“가주 중 한 명이네요.”

“알고 있는 난쟁이야. 이름은 비요른, 저 셋 중 나이가 가장 많은 녀석이지. 저 녀석 왼쪽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살펴봐.”

반지?

허우적거리는 좀비 떼 뒤로 비척비척 다가오는 비요른을 살폈다.

거리가 제법 멀어서 반지를 어떻게 보나 싶었는데,

“…아우라가 장난이 아니네요.”

반지에서 검은 아우라가 느껴졌다.

구토감이 느껴지는 거북함.

죽음의 기운이 짙게 풍긴다고 해야 하나.

내 두 눈동자 위로 죽음의 아우라가 선명히 새겨진 순간이었다.

두근―!

“…큭!”

반지에 반응하듯 몸에 이상 반응이 나타났다.

심장에서 강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뻣뻣한 감각. 마치 흥분하는 것 같았다.

심장이 갑자기 왜 이러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가슴을 움켜쥔 채 주저앉았다.

[염원의 반지(ring of desire). 그리움이 든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야.]

“……!”

잠잠했던 레토니칼스의 심장이 말을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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