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염원의 반지(2)
펜리는 비요른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죽음의 냄새가 풀풀 풍기지? 부딪친 순간 알아챘어. 저 난쟁이가 낀 반지가 저주의 매개체야. 광산에 재앙을 불러온 시발점.”
광산 개발 중에 나온 이름 모를 제단.
그 제단 안에 있던 반지를 광부가 건드렸고, 광부를 거쳐 전대 가주들에게 반지가 옮겨간 것 같았다.
“자, 이제 어떡할 거…….”
뒤를 돌아본 펜리는 멈칫하곤 헛웃음을 흘렸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녀석이 보였다.
어째 조용하더라니.
“지금까지 나 혼자 헛소리 한 거냐?”
“…….”
“하, 미치겠네.”
반응이 없다.
뭔가 문제가 생겼다.
녀석에게 다가가려는데 곰방대가 말썽을 부렸다. 마력 공급이 끊긴다. 그녀는 욕설을 내뱉고는 곰방대를 빨았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날숨 사이로 초록빛이 섞여 나오자, 곰방대를 흔들었다.
마력이 수명을 다했다.
그녀는 재빨리 곰방대 뚜껑을 열곤 손톱만 한 에메랄드 보석을 밀어 넣었다.
엘프석(Elf stone).
엘프족 중 오직 신녀만 제작이 가능하며 마력의 축복이 깃든 진귀한 보석이었다. 그 가치만큼이나 제조비가 살벌해서 언제나 돈에 쪼들리는 그녀였다.
“빌어먹을, 손해가 막심하네.”
체질 변환에 써야 할 엘프석을 쓸데없는 데에 다 써버렸다.
그림자 요정을 소환한 대가인데, 그림자 주술의 상위 기술을 사용하려면 그림자 요정의 도움이 필요했다.
5성의 마력으로는 긴 시간을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찌지지직― 찌직―
“…….”
그림자 가시들이 좀비 떼의 우악스러운 움직임에 찢겨 나가고 있었다.
터널에 있던 놈들까지 죄다 몰려왔다. 수백? 수천? 사방이 꼬챙이가 된 좀비 시체 더미로 막혀 있어서 숫자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오래 버티기 힘들 거 같지?”
펜리의 물음에 요정이 아기자기한 두 팔로 큰 동그라미를 그렸다.
5분도 채 버티지 못할 것 같은데, 비요른을 포함한 가주들이 합세하면 지금보다 더 빨리 그림자 가시가 찢겨 나갈 게 분명했다.
“하여튼 저 녀석이랑 엮이면 피곤하다니까.”
돌멩이라도 던져서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뒤쪽에서 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들의 움직임을 잠시 붙잡을 수 있겠습니까?”
“뭔 상황이야? 갑자기?”
“그 존재가 말을 걸어왔습니다.”
“…….”
펜리는 입을 다물었다.
그 존재.
그녀의 시선이 녀석의 심장을 향했다.
성에서 도르네프와 함께 밤을 지새울 때 녀석이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던 내용이었다.
[혹시 레토니칼스란 존재를 아십니까?]
불사자 레토니칼스.
인간의 수명보다 10배 이상을 살아가는 이종족이지만, 엘프도 드워프도 그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펜리는 그 존재가 실존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녀석의 육체를 빌려 오싹한 초근접 격투술을 펼쳤던 미지의 힘과 붙어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시간 없어. 본론만 말해.”
“반지와 접촉해야 합니다. 가주들을 붙잡아 주세요.”
“망할 새끼, 어려운 부탁만 골라 하네. 반지와 접촉하면?”
“저주를 풀 겁니다.”
“확실해? 내가 이 상처들을 왜 입었다고 생각해? 반지와 접촉했기 때문이야.”
반지를 강탈해갈 목적으로 반지를 잡아챈 순간 정신적 공황이 찾아왔다. 그건 전신의 신경이 죽어버리는 공포와 같았다.
“다크로즈의 축복이 아니었으면 반지의 주인이 나로 바뀌었을지도 몰라. 베네타의 군주들도, 나도 통제할 수 없는 반지를 네가 감당할 수 있겠어?”
“레토… 아니, 그 존재는 가능할 것이라 했습니다.”
“대체 뭘 들은 거야?”
“정확한 건 접촉해봐야 합니다. 확신을 준 게 아니라서요.”
“뒈질 수도 있다는 거네.”
“반지 때문에 죽진 않을 겁니다. 저 좀비 떼에게 물려 죽는 건 몰라도.”
“…….”
한 마디로 저주를 풀 동안 좀비들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얘기였다.
펜리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눈앞에 지옥 풍경이 펼쳐졌지만, 도망치려면 못 도망갈 것도 없었다.
‘엘프석만 충분하다면 말이지.’
소지한 엘프석이 단 두 개뿐이었다. 한 개를 녀석을 돕는 데 쓴다면 하나밖에 남지 않는다. 살짝 불안했다. 이 하나는 그녀에게 목숨줄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좋아.”
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석 하나가 있으니, 일단 길잡이의 말을 따른다. 망했다 싶으면 녀석을 업고 튀면 그만이었다.
도주는 그녀의 전문 분야였으니까.
그리고 공짜로 해줄 생각도 없었다. 앞으로 펼칠 주술은 대가를 꼭 받아야 했으니 말이다.
“네 제안대로 놈들을 모조리 잡아줄게. 대신 조건이 있어.”
“뭡니까?”
“광산 지분. 저주를 풀면 분명 네 몫까지 배당될 거야. 네 지분을 검은 장미가 갖겠어.”
“가져가세요.”
“…결정이 빠르네?”
“시간 없다면서요?”
광산 지분이 큰돈이 될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돈은 내게 힘을 기르는 수단에 불과했다.
그리고 비요른이 지닌 저 반지는 그 힘의 정점에 있는 아이템 같았다.
[‘염원의 반지’다. 내 육체를 소멸시켰던 도구 중 하나지.]
불사자의 육체를 소멸시켰던 반지.
왜 스스로 육체를 소멸시켰는지, 어떤 원리로 그 힘을 발휘했는지 모르겠지만 절대 존재인 레토니칼스가 고대 시절 최후까지 사용했던 반지라고 했다.
최상급 아티팩트를 넘어선 나도 처음 보는 신화급 아이템.
폐광산이란 히든 던전과 소설에서도 언급되지 않던 반지.
광산 지분이 아니라 광산 전체를 달라고 해도 줬을 것이다.
“거래 성립입니까?”
“나중에 딴말했다간…….”
“절 죽이세요.”
펜리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곰방대를 물곤 두 손을 내밀었다.
두 손바닥을 붙이고 펴자, 그 위로 그림자 요정이 폴짝 내려앉았다.
앙증맞은 손으로 우비를 동여매곤 결연한 눈빛을 내게 보내는데, 마냥 귀엽기만 했다. 새끼손톱으로 툭 치면 울 것 같은데.
“당신이랑 안 어울리게 귀엽네요.”
“만져볼래? 한 호흡이면 널 고깃덩어리로 만들어 버릴 텐데.”
“…제가 어떡하면 될까요?”
“가주들이 공격하는 순간을 노릴 거야. 준비해.”
고개를 끄덕인 나는 흡혈의 고리를 움켜잡았다. 순백의 활대가 흡혈을 시작하자 불그스름한 색감으로 서서히 물들기 시작했다.
급속 충전처럼 급속 흡혈 같은 거 없나?
단시간 내에 최대 출력에 이른다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여유가 될 때 흡혈의 고리를 세세히 연구해봐야 할 것 같았다.
시체 벽과 좀비 떼의 지지부진한 대치도 잠시였다.
쿵― 쿵― 쿵―
다른 좀비 떼와 달리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가주들이다.
핏빛 활시위를 천천히 잡아당기며 난 펜리를 바라봤다.
펜리는 그림자 요정을 두 손으로 포갠 채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잠시 후,
콰직! 콰지직!
그림자 가시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큰 충격에 그림자들이 거칠게 흔들렸고, 그 사이로 거대한 해머가 가시들을 짓뭉개며 나타났다. 찢긴 그림자들은 바닥으로 스며들었고, 잡혀 있던 시체 더미들은 빠르게 허물어졌다.
그어어어어어어―!!
“…….”
시체 벽을 밀어낸 비요른이 틈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며 괴성을 질러댔다.
뿌연 눈동자, 썩어 빠진 얼굴.
코앞에서 보니 꿈에 나올까 무서운 비주얼이다.
그 뒤로 비슷한 비주얼의 가주들이 무기를 쳐올리며 좀비 기사단과 함께 남은 시체 벽을 무너트리기 시작했다.
쿠쿠쿵―!
계속되는 둔기 공격에 그림자 가시들이 모조리 소멸했다.
시체 벽도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방어선이 뚫리자, 시꺼먼 좀비 떼가 불개미처럼 달려들었다.
아니, 광경이 딱 썩은 물로 이뤄진 해일 같았다.
휩쓸리면 같이 썩어버릴 것 같은 느낌 말이다.
펜리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우는 소리가 아니라 진짜 오래 못 버틴다. 최대한 빨리 해결해.”
그 말을 끝으로 펜리가 두 손을 펼치자 그림자 요정이 그녀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동시에 그녀의 양손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림자로 이뤄진 검은 장갑의 형태.
그림자 장갑을 추켜올린 그녀의 눈동자가 검게 물들어 있었다.
검은 연기가 줄줄 흘러나오는 섬뜩한 광경.
그녀가 지금 펼칠 능력이 뭔지 알 것 같았다.
모조리 견제해주겠다고 자신하더니 숨겨진 필살기를 선보일 줄 몰랐다.
검은 왕의 신체 일부를 불러오는 그림자 소환술.
“그림자의 왕(King of shadows).”
펜리의 주문이 펼쳐진 순간, 좀비들이 만들어낸 그림자 전체가 꿀렁이며 하나로 뭉치더니 거대한 손이 튀어나왔다.
그림자 장갑과 비슷한 형태의 두 개의 손그림자.
펜리가 그림자 장갑을 서서히 움켜쥐자, 거대한 손들도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녀가 허공에 주먹을 매섭게 휘둘렀다.
부우웅―!
거대한 그림자 주먹도 매섭게 공간을 갈랐다.
콰자자자자자자자자작!
검은 주먹들이 바닥을 무참히 쓸어 버린다.
좀비 떼들은 짓눌리거나 허공으로 튀며 산산조각 부서졌다.
“…무시무시하네.”
“서, 서둘러!”
힘겨워하는 펜리의 목소리에 정신을 바짝 차린 나는 비요른을 향해 돌진했다.
얼굴을 보니 벌써부터 죽상이다.
한계 이상의 힘을 펼치고 있다는 뜻이고, 그녀의 말처럼 그림자의 왕은 5성도 유지 자체가 힘겨운 능력이었다.
콱―
내가 비요른 코앞까지 다다르자, 거대한 그림자 손 하나가 비요른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괴성을 지르며 발버둥을 치는 비요른.
퉁―
화살을 날리자, 쾅―! 소리와 함께 비요른의 머리가 뒤로 확 젖혀졌다.
하지만 재차 괴성을 지르며 내게 손을 뻗는 모습이 충격을 받은 모습이 아니었다. 난 헛웃음을 흘리곤 단검을 뽑아 비요른의 오른쪽 손목을 찔렀다.
콱! 콱! 콱―!
“…질기네 진짜!”
발악하는 통에 손가락을 노리기 힘들어서 손목을 노렸는데, 한 번에 잘리지 않았다. 그림자에 잡혀 움직이지 못하는 놈이라 집중적으로 손목만 노렸는데, 남은 가주들이 내 뒤를 노리고 둔기를 사납게 휘둘렀다.
콰앙―!
“……!”
그들의 공격은 또 다른 그림자 손에 틀어막혔다. 거대한 손이 둘을 낚아채더니 좀비 떼 위로 내던지자, 투석기에 처맞은 것처럼 좀비 떼들이 뭉그러졌다.
그림자 손들이 움직일 때마다 좀비들이 뭉텅뭉텅 사라졌다.
이대로 섬멸시키는 편이 좋았을 텐데, 터널에서 몰려오는 좀비 떼가 끝도 없었다.
펜리는 그림자의 왕을 이용해 좀비 떼를 쳐내고 막고 밀쳐냈다.
흡―!
곰방대를 빨아대는 펜리의 표정이 고통으로 얼룩졌다.
엘프석을 통해 마력을 채우고 채워도 마력 고갈 현상이 몸을 괴롭힌다.
이 능력은 5성으로 펼치기엔 확실히 무리였다.
“됐다!”
아서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펜리는 기합을 터트리며 팔을 크게 휘둘렀다.
반경 수십 미터의 좀비 떼를 멀리 치워버린 후 헛바람을 토해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식은땀이 줄줄 흘러나오고, 그림자 장갑이 해제된 두 손은 약에 취한 듯 바들바들 떨렸다.
떨리는 손으로 다 써버린 곰방대의 엘프석을 갈아 끼우곤 재차 흡입에 들어갔다.
연기를 후― 뱉어내며 힘겨운 시선으로 녀석을 찾았다.
잘린 비요른의 손목에서 반지를 살피는 녀석이 보인다.
녀석이 반지를 조심스레 뽑아냈다.
반지와 접촉했다.
다행히 자신과 같은 패닉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손가락에 반지를 낀 순간 녀석이 뚝 멈춰버렸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그어― 그어―
“…….”
죽은 자들의 괴성이 다시 들려오기 시작한다.
펜리는 멈춰버린 녀석을 말없이 바라보곤 키득키득 웃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참으로 기가 막혔다.
그녀는 비틀비틀 걸어 녀석의 곁에 섰다.
부릅뜬 눈에는 초점이 없다.
반지에 잡아먹힌 것인지, 저주를 푸는 중인지 알 도리가 없는 상황. 그제야 반지가 아닌 좀비 떼에게 죽을 수 있다는 말이 이해가 갔다.
“도대체 언제까지 부려 먹을래. 응?”
녀석은 언제까지 저주를 풀 것이라 알려주지 않았다.
잠깐이 될 수도 하루 이상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라 이대로 머물 수 없는 일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죽은 자들이 주변을 에워싼 채 좁혀오고 있었다.
팔목이 잘린 비요른도, 다른 가주들과 기사들도 각기 다른 방향에서 압박해 들어왔다.
펜리는 조용히 아서를 어깨에 둘러업은 뒤 곰방대를 쭉 빨았다.
후―
뿌연 연기를 내뱉으며 그녀는 출구 쪽을 바라봤다.
“엘프석이 오래 버텨야 할 텐데.”
도르네프가 건네준 모래시계가 다 떨어지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
그때까지 이 빌어먹을 공간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흩어지는 연기와 함께 그녀의 신형도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