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108화 (108/130)

108화 혈맹이란 이름으로(3)

“비밀 조직? 암고양이가 만든 검은 장미처럼 말인가?”

“그보다 더 은밀하게 갈 겁니다. 그리고 제가 조직의 얼굴마담이 되어볼 생각입니다.”

“얼굴마담? 무슨 뜻이지?”

“공식이든 비공식이든 수장임을 밝히지 않으려고요.”

도르네프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수장이면 수장이지 뭐가 그리 복잡하냐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펜리는 단박에 내 의도를 알아챘다.

“사람들이 네가 수장인지 아닌지 알아서 판단하라는 거네.”

“맞습니다.”

“네가 얻는 것은?”

“시간이요.”

시간이란 말에 펜리는 피식 웃었다.

“네 뒤에 더 큰 세력이 있음을 착각하게 하려는 거야?”

확실히 눈치가 귀신 같다.

도르네프와 달리 음지에서 활동했던 짬밥이 어디 가는 건 아닌 것 같았다.

“혈맹이 맺어지는 그림 상 충분히 가능합니다. 일반인들에겐 제가 수장으로 비치겠지만, 저흴 견제하려는 이들에겐 이름 모를 조직의 얼굴마담으로 의심하게 만드는 거죠.”

“네 뒤를 집요하게 파고들 텐데?”

“못 찾을 겁니다. 애초에 제 뒤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니까.”

“……음.”

“발각되더라도 제법 시간이 흐른 뒤일 겁니다. 그전까지 상대는 섣불리 저흴 공격하지 못합니다. 제 뒤에 누가 있는지 모를 테니까.”

“괜찮은 생각이에요.”

내 의견을 잠자코 듣던 샤르바딘이 고개를 끄덕이며 의견에 힘을 실어줬다.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적이 가장 무서운 법이죠. 방법도 그리 어렵지 않아요. 세상에 혈맹을 천명하고 아서님 뒤에 다른 존재가 있음을 은밀히 흘리기만 하면 되거든요.”

“누구에게 흘린다는 말이오? 샤딘?”

“며칠 전에 저와 나토네 경이 잡아 온 이들이 많잖아요. 세작들이요.”

“아! 역시 그대는 천재가 분명하오! 내 피앙새답소. 허허허허!”

“…….”

때와 장소 구분 없이 마누라 사랑이다.

그래도 뭐라 할 수 없는 것이 샤르바딘의 의견이 정말 괜찮았기 때문이다.

넬라가 엘프석을 가지고 숙소를 방문했던 그 날밤, 샤르바딘은 나토네와 함께 세작 소탕 작전에 나섰다.

혈맹 전에 베네타에 깔린 눈과 귀를 제거하려고 한 일인데, 그때 잡아들인 세작들이 백(百)여 명에 달했다.

현재 성 지하 감옥에 갇힌 채 의뢰주 파악에 나서고 있는데, 그 의뢰주가 누군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카멜 블레이저.

대부분 블라이어와 연결된 세작일 확률이 높았다.

그런 세작들에게 정보를 흘리겠다는 건 학살자에게 거짓 정보를 풀겠다는 의미와 같았다.

진실과 거짓으로 교묘히 살을 붙여서 퍼트린다면 학살자 진영에 혼란을 줄 수도 있는 카드였다.

“광산에 쏠리는 시선이 분산될 테니, 광산이 자리 잡는 데도 도움이 될 거예요.”

“대신 저 녀석에게 시선이 집중될 텐데 괜찮겠어?”

셋의 시선이 내게 쏠리자 난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당장은 시선이 쏠리겠지만, 잘만 신분을 포장시키면 더 안전할 수 있습니다.”

“안전하다고?”

“제 존재가 확고해질수록 진짜 이름을 숨길 수 있잖아요.”

셋은 내 이름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명 사냥꾼, 아서 클레이튼.

내 신명과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면 다른 신명 주인들의 관심을 불러올 수 있다.

지금 가진 혈맹의 무력으로 그들까지 상대하는 건 무리니, 힘을 기를 시간이 필요했다.

적어도 토바른 전체를 손에 넣어야 안전했다.

“실패한다면 더 빨리 네 진짜 신분이 들킬 수도 있어.”

“가만히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벌써 들켰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선수 쳐야 합니다. 제가 아서가 아님을.”

“들켜? 누구에게?”

“운명의 아케인.”

“아, 맞아. 그 녀석이 있었어!”

펜리는 주먹을 탁치며 욕설을 내뱉었다. 내 신명을 읽고 블랙마켓에 정보를 넘긴 인물. 다만, 어디까지 내 신명을 알고 있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내가 얼굴마담을 자처하며 공개적인 자리에 먼저 나서려는 이유는 하나다.

학살자에게 살아남기 위해 내가 더미로 만든 ‘그’란 존재.

내 뒤에 ‘그’가 있을 것이란 확신을 학살자에게 심어줘야 했다.

‘그’가 아서 클레이튼이 되어야 한다.

‘내 정보는 이미 너무 많이 풀렸어.’

얼굴도 팔렸고, 능력도 일부 팔렸다.

주술 인형 반다이크에게 노출까지 됐으니, 뛰어난 통찰력을 가진 학살자라면 내가 알렉스란 가명을 써도 곧 ‘그’의 전달자라는 것을 눈치챌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간다면 ‘그’의 전달자가 ‘그’라는 결론까지 도달할 수 있는 수준까지 왔다.

그러니, 학살자가 확신할 수 없도록 작업을 해놔야 했다.

그 첫걸음이 더는 숨는 것이 아닌 당당하게 앞으로 나서는 것이고, 두 번째로 확신을 주는 카드를 학살자에게 던져주는 것이다.

내 뒤에 진짜 ‘그’의 조직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게 하는 확실한 카드 말이다.

‘결국, 새로운 맴버가 필요하다는 말인데.’

얼굴마담인 나 다음으로 내세울 행동 대장급 맴버가 필요했다.

‘그’의 사람이란 소문을 퍼트려도 학살자가 납득할 수 있어야 하고, 토바른 내에 인지도도 확실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강해야 해.’

이 까다로운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할 인물.

한 사람의 이름이 자연스레 머릿속에 떠올랐다.

‘블라이어 전(前)대 기사 단장, 록터 펠리스.’

소설에서 정해준 학살자의 대항마이자, 영웅으로 분류된 인물.

영웅 록터라면 내 기준에 완벽히 부합한다.

최고의 시나리오는 혈맹 전에 록터를 영입하고 앞에 내세우는 건데, 위치조차 파악이 안 되는 지금 그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혹시 록터의 위치가 파악됐습니까?”

“아니, 귀신이 붙었는지 움직임이 신출귀몰해. 블라이어 영지에서 흔적이 끊겼다.”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는 겁니까?”

“기사 녀석이 암살자같이 움직이고 있어. 검은 장미들도 쉽지 않은 모양이야.”

암살자같이 움직인다.

기사 록터는 정통 기사다.

암살자처럼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일 수 없다.

‘칼이 붙었다면?’

칼 바스타인이라면 검은 장미의 눈도 피할 수 있다.

그는 무려 수년 동안 크룩스 정예들의 눈을 피해 살아남은 노련한 암살자였으니까.

칼이 내 조언을 듣고 블라이어로 갔다면 록터와 함께 할 확률도 배제해선 안 된다.

“검은 장미들을 에토르 영지로 물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왜? 그 녀석이 필요하다고 한 건 너잖아. 금광의 존재를 증명해줄 존재.”

“지금까지 흔적을 잡지 못했으면 앞으로도 힘들 겁니다. 그리고 블라이어 내에서 추적이 길어질수록 검은 장미들이 위험합니다.”

“위험해?”

“록터를 쫓고 있는 세력은 다른 누구도 아닌 블라이어입니다.”

록터 펠리스는 5성급 기사.

그를 제거하기 위해 무시무시한 녀석들을 보낼 확률이 높았다.

카멜의 최측근이 나설 거다.

펜리라면 모를까. 검은 장미로는 어림도 없다.

내 말에 펜리도 심각성을 느꼈는지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근데 왜 하필 에토르 영지지?”

“그에게 신호를 남겼거든요. 혹시 올지도 모릅니다.”

“신호?”

에토르 영지를 추천한 건 피의 만찬에서 내가 록터에게 에토르에 관한 메시지를 남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록터가 과연 에토르로 올 수 있을까?

학살자의 표적이 됐으니 운신조차 힘들지 몰랐다.

‘학살자보다 우리가 먼저 록터의 위치를 파악해야 하는데.’

나로 인해 록터의 운명이 변했기 때문에 소설의 내용만 믿고 움직이기엔 너무 위험했다.

아무래도 혈맹 의식이 끝난 후 내가 직접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폐광산의 저주가 풀렸다는 소식이 내일 중으로 베네타에 알려질 거네.”

“내일입니까?”

“자네의 혈맹 자격을 증명하려면 필요한 과정이니까. 혈맹에 관한 것은 이미 원로들의 승인이 떨어졌어. 모든 준비가 끝났네. 조만간 혈맹 의식도 열리게 될 거야.”

말을 잇는 도르네프의 표정에 후련함이 깃들었다.

그동안 폐광산과 혈맹에 관해 뛰어다니느라 무척 고생한 모양.

내일 베네타가 한바탕 시끄러워질 것 같았다.

알렉스란 이름이 좌판, 대로, 상점, 술집 곳곳에 퍼져나가겠지.

폐광산의 저주를 푼 존재라고.

“제가 따로 준비할 것이 있습니까?”

“길드 이름이나 생각해둬. 혈맹 의식이 거행되는 자리에서 밝혀야 할 수도 있으니.”

“…이름이라.”

뒤에 도르네프가 불라불라 앞에서 뭐라 떠들었는데 전혀 들리지 않았다.

스스로 이름을 짓자니 여러 생각이 스쳐 갔기 때문이다.

레토가 말했었다.

이름에는 존재를 증명하는 힘이 된다고.

그래서 레토는 이름을 버렸다. 존재를 지우고 싶었으니까.

난 ‘이름’이 갖는 힘을 알고 있다.

아서 클레이튼이란 이름을 짓는 순간, 세상이 날 바라봤기 때문이다.

앞으로 사용할 길드의 이름.

뭐가 좋을까?

* * *

폐광산의 저주가 풀렸다!

베네타의 주민들은 아침 인사 대신 이 소식을 가지고 대화를 나눴다.

이른 아침부터 베네타 소속 용병들이 영지 곳곳을 돌아다니며 소식을 알렸기 때문에 소식은 삽시간에 영지 전체로 퍼져나갔다.

인간 알렉스.

그에 대한 무성한 소문이 주민들의 입을 타고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그 인간이 구원의 성자라며?”

“성주님을 내던진 검은 괴물을 찢어 죽였다는 말도 있어.”

“꾸며낸 말 아니야? 성주님이 얼마나 강하신데.”

“영주성에서 직접 본 이들이 얼마나 많다고. 진짜라니까?”

“하긴, 그 정도니 누구도 풀지 못했던 폐광산의 저주를 풀었겠지.”

“심판자들을 탄생시킨 존재란 말도 있어.”

“…뭐? 시, 심판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주민 일부가 심판자라는 말에 긴장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죄를 지은 이들에게 심판자는 재앙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몽둥이에 걸리면 차라리 혀 깨물고 죽으라는 말이 있을 정도라서 범죄자들은 언제나 심판자들을 두려워했다.

요즘은 잠잠했는데, 며칠 전 잡혀간 세작들을 심문하는 데 투입됐다는 소문이 있었다.

“뭐 하는 인간일까?”

여러 가지 정보와 소문이 합쳐지면서 주민들의 머릿속에 ‘알렉스’란 이름이 강렬히 각인되었다.

당연히 그에 대한 정보가 바깥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근래에 가장 노난 곳은 다름 아닌 푸른 장미가 운영하는 정보 길드였다.

인간 상인들이 정보의 주고객이었다.

베네타에 인맥을 만들어보려는 상인들은 알렉스란 존재에 큰 관심을 보였다. 배타적인 이종과 거래를 틀 수 있는 연결고리가 될 수 있는 존재.

“기본 정보는 천 골드입니다.”

“…비싼데.”

이름 알렉스.

마르샤 가(家)의 몰락 귀족.

단검과 석궁을 잘 다루며 특별한 빛을 다루는 특성 개화자.

쓸만한 정보이긴 하다.

하지만 호감을 사려는 상인들에겐 부족한 정보였다.

“다른 것은 없나? 여자를 좋아한다거나, 돈을 좋아한다거나 취미 같은 거 말이네.”

“아, 이번에 들어온 특급 정보가 있긴 한데….”

“특급 정보……?”

엘프 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 다섯 개를 들어 올렸다.

5천 골드.

“…장난치는 건가?”

“마스터의 지시라 네고 불가능합니다. 싫으시면 안 사시면 됩니다.”

“사, 사겠네.”

누군지 모를 마스터에게 심한 욕설을 날리며 상인들은 정보를 구매했다.

[팬케이크를 광적으로 좋아함.]

“…이게 뭔가?”

“아, 그건 서비스고 진짜는 뒷면에 적혀 있습니다.”

“뒷면?”

뒷면을 돌려본 순간 상인들은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누구도 이 정보의 값에 불만을 표하지 못할 정보가 적혀 있었다.

[두 종족의 대표가 혈맹으로 알렉스를 묶으려는 이유에는 그 뒤에 강력한 세력이 있는 것으로 판단됨.]

“더 특급 정보가 있는데….”

“…특급 정보가 대체 몇 개나 있는 건가?!”

엘프가 손가락 열 개를 펴자, 상인들은 이곳 마스터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돌아갔다.

더 끌려가다간 파산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종족의 도시인 베네타.

그 도시 안에 이종이 아닌 단 한 명의 인간에 의해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