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혈맹이란 이름으로(4)
2타 소식이 베네타를 강타했다.
[이틀 후, 나 도르네프 가더의 이름으로 혈맹 의식을 공개적으로 개최한다.]
혈맹(血盟)!
안 그래도 불타고 있던 관심에 기름이 뿌려졌다.
소문으로 돌고 있던 내용이 성주의 이름 아래 현실로 이뤄지자, 알렉스란 이름이 더욱 불같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게다가 혈맹 의식이 도시 대광장에서 공개적으로 열린다는 내용이었다.
“대광장이라니! 드디어 그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있겠어. 잘생겼을까?”
“인간이 잘생겨봤자지. 수염도 없잖아?”
“푸른 장미 출신 엘프들 사이에서 알렉스에 관한 관심이 뜨겁다는 말이 있어. 엘프들이 반할 정도라면 다르지 않을까?”
“거기 엘프들 몰라? 돈이지. 다 돈 보고 하는 거라고.”
“신분도 귀족이라던데….”
“몰락 귀족이야. 별것 아니라고.”
“너 여자 친구 없지?”
“…….”
남녀의 관점대로, 종족의 관점대로 끊임없이 알렉스란 이름이 화자 되며 식을 줄 몰랐다.
이종의 도시에 인간의 이름이 이토록 많이 언급된 적은 없었다.
베네타를 잠시 방문한 외지인조차 알렉스란 이름을 기억했고, 그들의 입을 통해 그 파급은 베네타 바깥으로도 알음알음 퍼지고 있었다.
* * *
소문의 진원지인 도르네프 영주성.
태풍이 뜨겁게 불어닥치는 바깥 분위기와 달리, 아서가 머무는 별장은 태풍의 눈처럼 맑게 갠 무풍지대였다.
도르네프의 허락 없이는 접근할 수 없는 장소가 됐기 때문이다.
바깥 상황에 신경을 끊은 채 난 남은 시간 동안 훈련에 매진했다.
팡―!
“……!”
인첸트를 부여하던 화살 하나가 터지며 시위에서 사라졌다.
실패다.
미간을 좁힌 채 남은 네 발에 기운을 집중했다.
잠시 후, 네 발의 화살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인첸트 성공.
위력을 살펴보고 싶은데, 이곳에선 마력탄 위력의 화살을 퍼붓기가 마땅치 않았다.
흡혈의 고리를 해제하니, 화살들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화살을 리셋시킨 나는 다시 흡혈의 고리를 소환한 후 활대를 움켜잡고 기다렸다.
잠시 후,
투쾅―!!!!!
대기가 거칠게 터지며 푸른 하늘로 한 줄기의 핏빛이 쏟아져 올라갔다.
최대 출력까지 5분.
전투 중에 최대 출력에 도달하는 시간 감각을 익히기 위한 훈련이었다.
다시 흡혈의 고리에 집중했을 때 어느새 시위에는 다섯 발의 화살이 걸려 있었다. 이번에는 달리기 시작했다.
1단계 육체 훈련을 마무리한 뒤로 난 인첸트 컨트롤에 대부분 시간을 쏟아붓고 있었다.
거칠게 움직이며 인첸트 부여를 시도했다.
눈앞에서 하나둘 빠르게 소멸하는 화살들.
제자리 때와 움직일 때의 집중력은 천지 차이다.
이번에는 두 발만 살아남았다.
다시 해제 후 최대 출력을 반복하며 훈련했다.
그때마다 염원의 반지가 빛을 발하며 내게 피를 공급해줬다.
무한의 화살을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후―”
[집중하면 네 발, 움직이는 동안에는 두 발이 안정권이다.]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 흡혈의 고리 한계치를 레토가 족집게 선생처럼 콕 집어줬다.
“생각보다 늘지 않네요.”
[훈련 부족이다.]
“하루에 20시간 훈련하는 사람에게 할 말입니까?”
[24시간도 부족하다.]
시바, 무슨 소리 없는 아우성도 아니고 뭘 말이 통해야 불만을 토로하지.
수건으로 땀을 닦곤 흙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체력에 자신 있는 육체지만, 인첸트 훈련은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터라 정신적 피로가 빨리 찾아왔다.
오랜 시간 훈련하면 시야가 핑핑 돌았다.
대(大)자로 누워 멍하니 둥둥 떠다니는 뭉게구름을 올려다봤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모습에 여유가 느껴진다.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평온함.
하지만 이 평온함도 내일이면 끝이다.
혈맹 의식.
태풍으로 들어갈 시간이 곧 다가온다. 그래서일까. 유독 오늘은 한숨이 계속 흘러나왔다.
[웬 한숨이지?]
“마땅한 이름을 짓지 못해서요.”
[길드 이름을 말하는 건가?]
“네.”
[내가 지어준 이름들이 있는데 무슨 고민이지?]
“하하하…….”
레토가 내 고민을 느끼고 몇 가지 이름을 후보로 알려주긴 했다.
[까미레토, 다리가 132개 달린 고대 벌레 이름이다. 생존력이 질긴 품종이었지. 네 목표가 생존이라면 아주 적합한 후보 이름이다.]
“…….”
[타마라, 거북 품종으로 터틀 드래곤이다. 수명이 내가 알기론 생명체 중 드래곤 다음으로 길다. 대머리를 상징하지.]
“…대머리는 좀.”
그 외 드래곤, 신(神), 악마를 알려줬는데 이건 모조리 패스다.
드래곤은 마법사들이 신성시하는 존재, 드래곤의 이름을 썼다간 마법사들이 거품을 물고 달려들 거다.
신이나 악마도 마찬가지.
이곳 세상의 종교는 우리나라 사이비 종교가 귀여워 보일 정도로 믿음이 빡센 곳이다.
심지어 힘도 더럽게 셌다.
그들 앞에 신과 악마의 이름을 거론하라고?
안 그래도 살기 힘든 세상.
더 빡세게 살고 싶지 않았다.
‘레토니칼스가 딱이긴 한데.’
불사자의 이름.
그리고 나를 표현하기에 이보다 완벽한 단어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이름을 ‘레토’로 바꾼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지? 그건 네가 더 잘 알 텐데.]
스스로 존재를 부정하고픈 마음.
그런데 내가 그 이름을 쓴다? 레토에게 장난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시 머리를 끙끙 싸매며 이름을 고민하고 있는데, 입구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지?
오후가 되자, 입구에서 호리호리하고 길쭉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큰 접시를 양손에 들고 조심조심 발을 움직이며 나타났는데, 그녀가 푸른 잔디 위에 음식을 가지런히 세팅하기 시작하자 바람을 타고 맛있는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먹는 건 못 참지.
입맛을 다시며 몸을 일으켰다.
길게 늘어진 금발, 가녀린 뒷모습이 정리를 끝낸 후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돌아봤다.
“와서 먹어요.”
신녀 넬라였다.
“제 식사를 직접 챙길 필요 없다니까요? 늑인 할아범도 먹고살아야죠.”
“심심해서요. 전 뭔가를 해야 마음이 편하거든요.”
“휴가 나왔다고 생각하세요.”
“놀아주지도 않을 거면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난 머리를 긁적이곤 음식 앞에 앉았다.
푸른 장미 운영에 정보 취합까지, 늘 바쁘게 살아온 그녀에게 이곳은 심심한 공간이긴 했다.
이틀 전부터 그녀는 나와 함께 별관에 머물렀다.
내 부탁이 있었기 때문인데, 앞으로 발생할 신명을 느끼고 그 신호를 긴급으로 알려줄 인물이 필요했다.
오직 넬라만 할 수 있는 일.
다만, 그녀는 검은 장미의 핵심 인물이자, 엘프족의 하나뿐인 신녀였다.
그런 그녀를 기한 없이 내 곁에 둔다?
보호자도 없이?
당연히 펜리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
두 눈 딱 감고 펜리에게 귀띔을 하니, 당연하게도 주먹부터 날아왔다.
[이유나 듣고 때려요!]
[시끄러!]
내가 넬라를 곁에 두려는 이유는 영웅 록터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숙소로 돌아와 영웅 록터의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록터는 학살자의 심장에 비수를 찌르는 카운터 카드다.
그의 신병을 확보하는 건, 베네타의 미래와도 관련 있는 중요한 일이고, 그건 학살자 세력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학살자보다 록터를 먼저 찾을 수 있을까.
그 고민을 하던 중 문득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바로 신명.
신명 각성을 이용해 위치를 파악하는 방법.
‘근시일 안에 록터가 신명의 주인으로 각성할 거야.’
신을 받드는 자 중에 뛰어난 이는 그 각성한 위치를 어렴풋이 파악할 수 있었다.
기가 막힌 방법이라 자화자찬하고 있는데, 순간 가슴이 턱 막혔다.
‘시발, 아케인!’
학살자 곁에는 운명의 아케인이 머물고 있었다.
그라면 록터가 각성할 시, 그 위치를 완벽히 파악할 수 있을 터.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록터를 잃을 수 있다.
다급한 마음에 아주 긴 시간, 아주 격렬하게 내가 정리한 생각을 펜리에게 전하니,
[누가 신명을 각성해? 꿈꿨냐?!]
[시발, 믿으라…억!]
당연하게도 두 번째 주먹이 연달아 날아왔다.
망할 년.
진짜 언제고 꼭 널 멍석에 앉혀서 살풀이를 거하게 할 테다.
그래서 사용한 것이 목숨 코인이었다.
정령의 갑작스런 진화 과정에서 생긴 불협화음.
저번 영주성에서 펜리는 내게 목숨 빚 하나를 졌다.
그걸로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니, 넬라의 의견을 따르겠다는 절충안까지 나왔다.
그 결과가 바로 푸른 잔디 위에서 아리따운 엘프와의 식사였다.
펜리의 제안에 넬라는 고민 없이 내 손을 잡아줬다. 하여튼 펜리와 달리 이쁜 짓만 한다니까.
“이건 또 어디서 배웠습니까?”
“아, 샌드위치요? 요즘 유행하는 레시피거든요. 귀족들한테 인기가 좋아서 메인메뉴에도 추가한 메뉴에요. 괜찮죠?”
“진짜 맛있습니다.”
빈말이 아니라 진짜 맛있다.
샤르바딘에게 미안하지만, 그녀의 것이 그냥 샌드위치면 넬라의 것은 T.O.P였다.
넬라가 요리를 이렇게 잘했나?
아, 그러고 보니 펜케이크 장인이라고 했지.
“그쵸? 마스터가 이 레시피의 개발자를 납치해오라고 했는데, 샤르바딘이 말을 안 하네요.”
“하하하….”
펜리, 이 돈에 미친 엘프년은 사사건건 내 목줄을 조여온다.
샤르바딘이 날 보호해주다니, 역시 은인의 위력은 강했다.
즐겁게 식사를 하고 가벼운 담소를 나눴다.
당연히 대화 주제는 ‘신명’이었다.
난 질문을 통해 이 세상의 신명에 대한 규칙을 넬라에게 배워가고 있었다.
내가 신녀인 그녀를 곁에 두는 두 번째 이유다.
고유 능력이 ‘신명 사냥꾼’인 만큼 신명에 대한 생생한 정보는 내가 꼭 알고 있어야 할 내용이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음… 안 보여요.”
“이래도?”
날 잠시 직시하던 그녀가 찡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의 손에는 마른 나뭇가지가 들려 있었는데, 저 나뭇가지가 신녀가 신명을 부르는 도구였다.
빛바랜 세계수의 나뭇가지.
신화 속의 세계수를 직접 보고 만져보니 무척 신기했는데, 그 나뭇가지를 바라보는 넬라의 눈이 너무 슬퍼서 굳이 나뭇가지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보통은 주인이 허락하면 신명이 보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네. 하지만 아서님의 경우엔 보이기는커녕 기운조차 읽을 수 없어요. 정말 신명의 주인이 맞아요?”
“…맞는데.”
“진짜요?”
며칠 전 고민 끝에 그녀에게 내 신명에 대해 털어놨다.
펜리도 알고 있는 정보를 그녀도 언젠간 알게 될 거란 판단이 있었고, 그녀를 통해 꼭 확인할 것이 있었다.
신을 받드는 자들은 보는 순간 그 사람이 신명의 주인임을 알아볼 수 있을까?
답은 ‘조건부로 볼 수 없다.’였다.
신명의 주인들이 의식을 가지고 마음을 완전히 닫는다면 곁에 신명의 주인이 지나가도 알아보기 힘들다고 했다.
대신 반대로 신명의 주인이 마음을 열면 볼 수 없는 신명도 읽을 수 있다고 했다.
주인에게 허락을 구하는 행위가 신명을 바라보는 대표적 절차 중 하나라나?
그래서 실험을 해봤는데 내 마음을 활짝 열어도 그녀는 내 신명이 전혀 안 보인다는 말뿐이었다.
기운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넬라는 그런 날 보고 특별한 존재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