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혈맹이란 이름으로(5)
특별하다.
다만, 아직은 그 특별함이 피부로 와닿지 않았다.
아케인 앞에서 정체를 들킬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 정도?
그 정도면 특별한 건가?
당장은 넬라에게 괜한 의심을 받는 중이라 억울한 마음부터 들었다.
“길드 이름은 정했나요? 어제부터 머리를 쥐어뜯고 하시던데.”
“제가 그랬습니까?”
“네. 머리가 없어지는 줄 알았어요.”
“…아직입니다.”
“길게 고민하면 오히려 더 결정이 어려울 수 있어요. 딱 떠오른 것으로 하세요.”
“딱 떠오르는 것이라….”
“중요한 순간들을 떠올려보세요. 그 안에서 자신을 표현하고 앞으로 나아갈 무언가를 찾다 보면 답을 구할 수 있을 거예요.”
역시 신녀는 달라도 뭔가 달랐다.
레토의 조언과 비교해보니, 레토는 나이를 헛먹는 것이 분명했다.
뭔가 속이 뻥 뚫린 듯한 느낌.
이래서 사람들이 점을 보고 타로점을 보러 다니는 건가.
괜히 푸른 장미 마담뚜이자 뭇 남성들의 간택 No.1으로 불리는 게 아닌 것 같았다.
마음을 정확하게 꿰뚫어 본다.
“조언 감사합니다.”
난 고개를 크게 끄덕이곤 바닥에 편히 주저앉았다.
팔짱을 끼곤 두 눈을 감았다.
이곳에서 떨어진 첫날, 그리고 악착같이 살아남았던 과정을 떠올려봤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역시나 첫 살인의 기억이었다.
평범한 삶을 살아왔던 현대의 인간에게 첫 살인만큼 임펙트있고 충격적인 사건이 또 있을까.
칼바람의 협곡, 그리고 고대 문양의 경험을 떠올린 순간부터 의식의 흐름이 무아지경으로 흘렸다.
도네콜린트를 죽이고 그 힘을 빼앗았다. 그 힘을 이용해 아레나를 제거하고 그녀의 심장을 취했다. 그리고 그 심장을 이용해 폐광산에서 또 다른 힘을 얻었다.
고대 문양, 심장, 그리고 염원의 반지.
움켜쥔 힘을 통해 또 다른 힘을 얻어가는 과정.
조각처럼 퍼져 있던 기억들을 하나의 퍼즐로 완성한 순간, 한 단어가 벼락처럼 떠올랐다.
“아…….”
나직이 탄성을 흘리며 두 눈을 번쩍 떴다.
고개를 드니 넬라는 자리를 비웠고, 주변 하늘에 어스름이 꼈다. 벌써 밤이 된 건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지붕 위로 붉은 태양이 서서히 떠올랐다. 황당하게도 하루가 지나고 날이 밝은 모양이었다.
시간이… 이렇게 지났다고?
[제법이다.]
“…네?”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상태. 관조는 그렇게 하는 것이다. 가르친 보람이 있군.]
물아일체 뭐 어쩌고 어째?
그런 게 가르친다고 되니?
레토 녀석도 점점 뻔뻔해지는 것 같았다.
복잡한 생각은 버리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얼떨결에 아침을 맞이했다.
혈맹 의식이 열리는 날이었는데, ‘이름’을 찾았기 때문인지, 더는 한숨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설렌다.
그때 뒤에서 넬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 일어나셨네요. 안 일어나면 어쩌나 했는데.”
“제가 오래 앉아 있었죠?”
“집중하시는 것 같아서 건들지 않고 나왔어요. 이름은 찾았나요?”
“덕분에.”
그녀의 물음에 난 크게 미소 짓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준비할 시간이네요.”
“네? 뭐를….”
“들어오세요!”
넬라가 손짓하자 여러 사람이 우르르 훈련장으로 들이닥쳤다.
그중에는 늑인 할아범과 그 시종들도 있었다.
“…누, 누굽니까?”
“혈맹의 주인공이 그 몰골로 단상에 서려고요? 자! 시간 없어요. 서둘러요!”
“네!”
넬라가 손뼉을 치자, 사람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들의 손에는 미용 도구부터 화려한 옷들이 한가득 들려 있었다.
* * *
파팡팡! 팡! 팡! 팡!
하늘 위로 화려한 폭죽이 터졌다.
도르네프는 오늘을 베네타의 특별 기념일로 지정하고 축제를 선포했다.
주민들은 오랜만에 바깥으로 나와 축제를 즐겼다.
출입을 봉쇄한 대광장 중심부를 제외하곤 특수를 노린 상인들이 성 곳곳에 좌판을 깔고 대규모 장사진을 이뤘다.
볼거리, 다양한 음식과 물건, 흥겨운 놀거리까지 아이들의 얼굴에 오랜만에 미소가 깃들었다.
“보기 좋네요.”
움직이는 마차 안에서 넬라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바깥을 구경했다. 그러다 날 보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부터 표정이 왜 그러세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아닙니다.”
멍한 표정으로 자리에 기대고 있던 나는 고개를 털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야 좀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수십 명의 사람에게 둘러싸여 정신없이 변신하는 과정은 혼이 빠져나가는 작업 같았다.
귀족들은 어떻게 매일 같이 이렇게 꾸미고 사는 거지?
새삼 그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을 토하며 창가를 바라보니 확실히 바깥 열기가 남달랐다. 들뜬 분위기가 마차 안까지 느껴졌다.
“평소에는 축제가 없었습니까?”
“근래에 무척 뒤숭숭했잖아요. 축제는커녕 성주님 눈치 보기도 바빴어요.”
“아, 그렇죠.”
도미닉의 손에 많은 이들이 납치당하고 사라졌다.
그중에는 성주가 사랑하는 샤르바딘도 있었고.
생각해보니, 베네타의 축제는 나도 처음 경험해보는 것이었다.
몰락의 운명을 지녔던 이종들의 영지.
창가 너머로 비추는 주민들은 표정은 모두 밝았다.
스토리 상 죽거나 노예로 끌려갈 운명이었지만, 지금의 베네타는 폐광산의 저주까지 해결되면서 그 화려한 꽃을 피우려고 하고 있었다.
감회가 새롭다.
내 손에 의해 이뤄진 것 같아서.
“근데, 다른 마차는 안 보이네요?”
“오늘 내성에는 마차 운행이 금지됐어요. 마차를 몰 수 있는 이들은 혈맹의 주인들뿐이에요.”
“…네? 그럼 이 마차에 누가 타고 있는지 알겠네요?”
“당연하죠.”
다시 바깥을 바라봤다.
마차가 지나가면 인파가 우르르 몰려들어 구경하기 바빴다.
호기심 짙은 시선으로 마차를 구경하곤 다시 돌아갔는데, 성주가 안에 타고 있어도 저렇게 반응을 보일까 싶었다.
인간들의 영지에선 넙죽 엎드리며 예를 표했기 때문이다.
“복종, 차별, 권위는 인간만 하는 짓이에요. 여긴 베네타에요. 성주를 향한 존중과 존경만 있을 뿐이죠.”
“만약 성주가 존경을 받지 못한다면 어찌 됩니까?”
“물러나야죠.”
“그럼 물러납니까?”
“당연한 거 아닌가요?”
지지율이 바닥이라고 물러나라 한다면 정말 ‘네.’하고 물러난다고?
자유 민주주의 세상에도 보기 힘든 일인데?
혈통과 권력에 집착하는 인간들과 비교하면 이종족의 마인드는 엄청 파격적이었다.
아메리칸 스타일보다 더 매운맛이다.
그에 놀란 것도 잠시, 걸리적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너무 노골적으로 바라봐서 모를 수가 없었다.
이종족과 거리가 먼 이들.
인간들의 무리였다.
“인간 상인들이 많이 보이네요.”
“폐광산의 저주가 풀렸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이들이에요. 드워프가 운영하는 광산은 인간들에게 황금알을 낳은 거위나 다름없거든요. 아서님께 줄을 대려고 하겠죠.”
“저한테요?”
“저주를 푼 장본인이니 광산 개발에 큰 영향력을 끼칠 존재라 파악했겠죠. 게다가 같은 인간, 몰락 귀족, 말이 통하는 상대라 생각할 거예요.”
“저 쥐뿔도 없는데요?”
“상인들이 그 말을 믿을까요?”
“개지랄을 해도 안 믿겠죠.”
염원의 반지와 광산 지분을 엿 바꿔 먹어서 내겐 아무것도 없었다.
파리가 무진장 꼬일 것 같은데, 상관없었다.
혈맹 의식이 끝나는 즉시, 넬라와 함께 베네타를 뜰 생각이거든.
“혈맹 의식이 끝나시면 바로 벗어나실 거죠?”
“네. 록터가 있을 법한 장소로 가야 합니다.”
“생각해둔 데가 있나요?”
“염두에 둔 장소가 있습니다.”
“저도 함께 따라나서야 하고요.”
“그렇죠.”
그녀가 곁에 있어야 록터가 신명의 주인으로 각성했을 때 그 위치를 바로 파악할 수 있다.
“음, 혹시 모르니 마스터께 말해놔야겠네요.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
“보호자가 필요할 겁니다. 펜리님에게 가장 센 녀석으로 보내 달라고 강력히 어필하세요.”
넬라를 최우선으로 보호하겠지만, 나 혼자서는 힘들 수도 있다. 강한 적이라도 만나면 지키면서 싸워야 하는데, 내 미천한 전투 경험으로 그녀를 보호하다간 실수가 있을 것이다. 전투 스타일이 워낙 무식해야지.
그런 부담감으로 하루에 20시간 이상 훈련에 매진하고 있지만, 넬라를 지킬 호위가 따로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검은 장미 내에 그녀의 위치를 생각하면 펜리가 알아서 호위를 붙여줄 것이다.
“잠시 멈추십시오.”
대광장 중심부로 통하는 입구에 들어서자, 기사들이 마차를 막아섰다.
그것도 잠시, 내가 로브자락을 들추며 얼굴을 드러내자 드워프들은 허리를 착 세우며 경례를 표했다.
“여, 영광입니다!”
“영광입니다!”
“…….”
사이비종교도 아니고.
무슨 영광.
요즘 기사들이 날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그 몽둥이 녀석들의 영향 같은데, 도대체 나에 대해서 뭐라고 떠들고 다니는 거야?
나중에 난쟁이들을 불러서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드르르르―
대광장에 천천히 들어섰다.
우리가 탄 마차가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등장하자, 시끌벅적했던 소란이 잦아들고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수천수만의 인파로 둘러싼 외곽과 달리, 대광장 중심은 텅 비어있었다.
한눈에 올려다볼 크고 높은 단상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인데, 오늘 혈맹의 주인들이 오를 무대였다.
“그런데 펜리님은 어디 있습니까? 도르네프님도 안 보이고.”
“하….”
두 녀석의 이름에 넬라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흔들었다.
이 녀석들 또 싸우고 있는 모양인데?
“서로 눈치를 보고 있어요.”
“눈치? 무슨 눈치요?”
“보다시피, 대광장에 가장 나중에 등장하려고요.”
“…나중에?”
설마,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한다는 그 논리가 이곳에서도 먹히는 건가.
이러다가 두 녀석 다 영영 안 오는 거 아니야?
난 다른 마차가 도착할 때까지 마차 안에서 잠시 대기했다. 지금 바깥으로 나갔다간 시선 테러에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난 반장 선거도 떨려서 못 나갔던 사람이라고.
“이전 혈맹도 이렇게 공개적으로 했습니까?”
“아니요. 그땐 핵심 인물들만 따로 모여서 조용히 의식을 진행했어요. 공개해서 얻을 이득이 전혀 없었거든요.”
“그럼 지금은 이득이 있다는 겁니까?”
“네. 아주 많죠. 아서님은 혈맹 회의에 참여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많은 대화가 오갔고 안건들이 정해졌어요.”
혈맹 회의에 초대받긴 했는데, 시간이 아까워서 무시했다.
베네타와 검은 장미.
그들의 이득과 관련된 안건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공개적인 혈맹 의식 선언.
도르네프도 펜리도 내 경우처럼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야 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말이었다.
혈맹의 이름으로 선언하는 건 듣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움직일 정도로 강한 힘이 실린다.
그것이 한 세력의 수장들이 지닌 힘이었으니까.
두 사람이 어떤 선언을 할지는 두고 보면 알 것이다.
뎅―!!!!!!!!!!
베네타를 가득 채우는 종소리.
정오가 됐다는 신호가 떨어졌다.
종이 울리자 주변에 어수선해졌다.
대광장으로 통하는 양쪽 갈래에서 길이 크게 열리더니 화려한 마차 두 대가 양방향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한쪽은 엘프, 다른 쪽은 드워프 무리였다.
시간을 딱 맞춰서 동시에 등장하다니, 서로 어지간히 지기 싫었던 모양이었다.
저것도 말을 맞췄겠지?
두 대의 마차가 우리 마차 근처에 멈춰서고 신호에 맞춰 도르네프, 펜리 그리고 내가 마차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엄청난 환호가 터져 나왔다.
드워프, 엘프 그리고 인간.
무려 백 년 만에 이종족의 혈맹에 인간 하나가 끼어들었다.
혈맹 의식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