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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111화 (111/130)

#111화 우리들의 이름, XX

찌릿찌릿한 환호 소리에 발을 삐끗할 뻔했다. 그런 나를 넬라가 팔짱을 끼며 부축했다.

“정신 차려요. 여기서 실수하면 평생 어리숙하다는 꼬리표가 따라다닐 거에요.”

“아, 죄송합니다. 이런 자리는 처음이라서….”

“저도 처음이거든요?”

새침한 시선으로 날 한 번 바라본 그녀가 앞을 바라보곤 허리를 꼿꼿이 폈다.

내게 살며시 손을 내밀었는데, 안내를 바라는 귀족 영애의 모습이라 눈치껏 그녀를 에스코트하며 단상으로 통하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넬라는 신녀의 신분으로 이번 혈맹의 주관을 맡았기에 이 자리에 함께했다.

“괜찮겠습니까? 이제 푸른 장미에서 일을 못 할 수도 있는데.”

“애초에 하고 싶어서 한 일이 아니에요. 이제야 제자리를 찾아가는 거죠.”

푸른 장미 손님 중 그녀를 알아본 이가 있다면 놀라자빠지지 않을까.

오늘은 그녀에게도 무척 중요한 날이었다.

그건 넬라뿐만이 아니었다.

“…….”

“…….”

뒤쪽에서 조용히 따라오는 도르네프와 펜리가 보인다.

둘 다 멋들어지게 차려입었는데, 자리가 자리인지가 투덕거리는 모습은 없었다.

수만 인파의 시선이 우리를 올려다보는 사이, 우리는 단상 꼭대기로 올랐다.

나토네의 지휘 아래 기사단이 올라오고 그들은 무기 대신 깃발을 들어 올렸다.

망치 문양의 깃발들이 하늘을 수놓는다.

단상 높이는 모든 이들을 아우를 정도로 높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개미 떼처럼 우글우글 움직이는 사람들이 시야에 잡혔다.

영지 전체를 꽉 채운 압도적인 광경.

수만 관객들이 가득 찬 올림픽 콘서트 한가운데에 오르면 이런 기분이려나?

미치도록 떨렸다.

펄럭―

“알렉…아!”

바람이 분다.

내 얼굴을 가린 순백의 로브 자락이 펄럭이며 얼굴이 드러났다.

바람에 나부끼는 브론즈 머리카락.

1단계 육체 훈련을 통해 레토와 동화율이 올라가서인지, 내 머리카락엔 핏빛의 기운이 은은하게 돌았다. 그건 매서운 눈매 속에 담긴 백금색 눈동자도 마찬가지.

거친 맹수의 기세가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난 다시 로브 자락으로 얼굴을 가렸다.

화려한 가죽옷 위로 얼굴이 살짝 비춰 보이는 순백의 실크 로브는 바라보는 이들로 하여금 신비감을 불러왔다.

이 순백(純白)의 컨셉트는 ‘구원의 성자’란 느낌으로 푸른 장미의 마담뚜인 넬라가 작정하고 꾸며준 스타일이었다.

특히 순백의 로브 뒤로 핏빛의 활 문양이 마법처리가 됐는데, 멀리서도 한눈에 띌 정도로 임팩트가 강했다.

실용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그저 돈 지랄인 복장.

존재를 어필하는 데뷔 무대로는 최고의 복장이긴 한데.

무슨 교주가 된 기분이었다.

[혈맹 의식을 시작합니다.]

넬라가 그녀의 보구인 마른 나뭇가지를 꺼내자, 엘프들이 조용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지금은 말라비틀어진 볼품없는 나뭇가지지만, 세계수는 엘프들에게 존재 이유나 다름없는 상징물이었다.

엘프족의 신녀 넬라.

그녀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넬라는 세계수가 그려진 황금빛 망토를 걸친 채 조용히 의식을 진행했다.

잠시 후, 도르네프와 펜리, 그리고 내가 단상 중심에 서고 넬라는 마법 영창을 이용해 혈맹 선언문을 크게 읽어 내려갔다.

그녀의 청량한 목소리가 베네타 곳곳에 울려 퍼진다.

높이 쳐든 나뭇가지에 신성한 빛이 흘러나오자 모두가 조용히 그 광경을 지켜봤다.

임팩트 지리네.

신녀가 혈맹을 주관하니 혈맹 의식이 무척 성스럽게 진행되었다.

물론, 그 사이에서 남몰래 벌어지는 난쟁이와 암고양이의 대화는 여전히 유치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단상에 오를 순서, 그거 가지고 으르렁거리더니 이내 펜리가 내게 슬쩍 다가와 속삭였다.

“네놈 순서가 마지막이다.”

“…제가요?”

단상에 서는 마지막 순서가 주인공이라며?

인지도나 세력으로 당연히 내가 처음인 줄 알았다. 그런데 둘 다 나한테 양보한다고?

착 달라붙는 검은 가죽옷으로 몸매를 드러낸 펜리가 으르렁거리며 도르네프를 노려봤다.

둘의 시선에 불꽃이 튀었다.

서로 마지막 순서는 절대 양보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내게 양보한 느낌인데, 애새끼들도 아니고 진짜 유치하게 논다.

“그럼 누가 첫 번째입니까?”

“나.”

“네? 이유가 뭡니까?”

“혈맹 의식에 관한 비용을 저 난쟁이가 전부 대겠다고 했거든. 난 저 난쟁이가 마지막만 아니면 돼.”

그렇다고 돈에 홀라당 넘어가다니 역시 돈 귀신이 붙은 엘프다웠다.

[혈맹의 인연 고리에 축복이 깃들길!]

넬라의 짧고 굵었던 혈맹 선언문이 끝이 났다. 맹약 의식은 작은 잔에 피를 나눠마시는 것으로 끝이 났고, 혈맹의 주인들이 나와서 한마디씩 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펜리가 첫 번째로 단상 앞에 섰다.

대중 앞에 섰음에도 그녀는 덤덤한 표정이었다. 원체 뻔뻔한 년이라 아무렇지 않은 건가?

[검은 장미 마스터, 펜리 체이서다.]

첫 마디에 난 깜짝 놀랐다.

설마 검은 장미를 대중 앞에 공개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토바른 내에 엘프들의 대표에서 검은 장미의 마스터가 됐다. 이 뜻은 검은 장미를 음지가 아닌 양지로 드러내겠다는 건데, 이는 대륙에 퍼져 있는 엘프들에게 무척 큰 파급력을 불러올 것이다.

[우린 엘프족을 수호하며 세계수를 찾고 있다.]

기댈 나무가 생긴 셈이니까.

이에 대해선 펜리와 자세히 대화를 나눠봐야 할 것 같았다.

도르네프는 폐광산의 저주에 대해 말을 이었다.

[내 대(代)에 폐광산의 저주가 막을 내렸다. 우리의 신 아톨레스님의 가호가 내 대에 내려졌음이 분명하다!]

혹한의 망치와 갑주를 뽐내며 자기 자랑.

그리고 샤르바딘을 ‘사랑한다!’ 세 번 외치는 것까지.

정말 뭐에 한 번 꽂히면 뒤가 없는 드워프 같았다. 절대 적이 되면 안 되는 부류랄까.

드디어 내 차례.

둘 다 제법 오래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금방 내 차례가 됐다.

후―

길게 숨을 내쉬며 단상 중심에 섰다.

웅성거리던 소리가 천천히 가라앉는다.

날 바라보는 엄청난 시선들.

펜리도 그렇고 도르네프도 그렇고 공개적인 자리인 만큼 말이 길었다.

근데, 내 경우엔 다르다.

진실 속에 구라를 살짝 섞을 거라 말이 길면 손해다.

살짝 오글스럽게, 그리고 강렬하게 선언을 끝내야 한다.

“알렉스다.”

귀족이 존댓말 하는 거 봤냐?

나도 저들처럼 반말로 일관했다.

“이종족의 혈맹원이 된 최초의 인간으로서 목숨보다 가치 있는 이 신뢰를 지키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이 또한 내 소중한 이들을 걸고 맹세하겠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광장 아래를 천천히 내려다봤다.

모두가 나를 올려다본다.

그 모든 시선에 하나하나 맞추려는 둣 난 행동으로 저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다.

화려한 임팩트.

고대 문양을 최대로 소환했다.

번쩍―!!!!!!!

“……!”

단상 전체가 황금빛으로 물든다.

신녀 넬라가 소환했던 빛보다 성스럽지 않지만, 그보다 강렬하고 화려하며 눈부시다.

그 황금빛을 높게 쳐들며 크게 외친 나의 목소리가 광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내 소중한 이들.

내가 언급한 맹세의 주체.

“빛 아래 모여든 우리들의 이름, ‘헌트(Hunt)’의 이름을 걸겠다. 그들도 나와 함께 할 것이다.”

고민 끝에 지은 길드 이름, ‘헌트(Hunt)’가 세상에 공개가 됐다.

사람들의 뇌리에, 그리고 세상에 헌트가 처음으로 알려진 순간이었다.

* * *

이랴―!

대광장에 도착할 때는 각자 다른 마차를 타고 왔지만, 혈맹 의식이 성공 리에 끝난 후에는 다 같이 한 마차를 타고 복귀했다.

마차에는 혈맹 의식에 참여했던 네 명이 모두 함께했다.

상의할 것이 있어서 내가 먼저 부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시 넌 사기꾼이 맞았어.”

“뭐가요?”

“대중을 후리는 능력이 범상치 않았다는 뜻이네.”

정면에는 펜리가, 옆자리에는 도르네프가 날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며 압박하기 시작했다.

내가 뭘 어쨌다고?

화려한 황금빛으로 대중 좀 홀리고, 멋진 척 오글거리는 대사 몇 마디 뱉었을 뿐이다.

근데 이게 또 기가 막히게 먹혀들었다.

앞선 두 녀석과 달리 말이 끝내자 엄청난 환호가 터져 나왔거든.

이 세계도 그렇고 현실에서도 그렇고.

윗사람 연설은 짧을수록 인기가 많은 모양이었다. 물론, 그 외 화려한 장치가 한몫했지만 말이다.

퍼퍼퍼퍼펑―!

바깥에 폭죽 소리가 요란하게 터졌다.

혈맹 의식이 끝나자 대광장 전체가 개방되었고 본격적인 축제가 시작되었다.

축제는 3일 동안 열린다고 넬라가 알려줬다.

“헌트(Hunt), 앞으로 사용할 길드 이름인 거야?”

“네.”

“흠, 헌트… 사냥이라 나쁘지 않네. 너랑도 어울리고.”

펜리는 신명 사냥꾼을 염두에 두며 하는 말 같았다. 하지만 난 그저 지금껏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를 떠올린 것뿐이었다.

그 핵심은 ‘사냥’이었다.

도네콜린트, 아레나 후아튼 그리고 폐광산의 비요른까지.

누군가를 사냥하고 얻는 힘이 내겐 생존과 직결됐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헌트의 첫 번째 영입 인물은 역시나 록터 펠리스겠지?”

“네. 모두를 위해선 그가 꼭 필요합니다.”

“블라이어와의 전쟁을 염두에 둔 건가?”

도르네프의 물음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록터 펠리스는 학살자가 100만 골드 현상금을 내건 특급 범죄자다. 내가 그를 영입하면 당연히 블라이어와 적이 될 수밖에 없는 그림이었다. 물론, 그 외에 내 가짜 신분 때문이라도 블라이어와 친분을 유지하는 건 불가능했다.

내 신분은 알렉스 마르샤.

마르샤 가(家)는 ‘용아의 망토’를 가진 죄로 카멜의 친위대인 리옹에게 몰살당한 가문이었다.

공개적으로 카멜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정보를 좀 다룬 이들이라면 몰락 귀족인 내 과거를 곧 알게 될 것이다.

도르네프의 표정이 내키지 않은 듯 보이자 슬쩍 물었다.

“아직도 카멜이 베네타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나도 원로들도 의심은 하고 있네. 하지만 확신은 일러. 블라이어와 엮인 게 제법 있거든.”

지하 감옥에 베네타의 정보를 빼돌리던 세작들이 대거 잡혔다.

정확히 이틀도 안 돼서 세작들은 눈물 콧물을 질질 짜며 의뢰주에 대한 정보를 모조리 불었는데, 몽둥이를 든 드워프들 만큼은 절대 보고 싶지 않다며 간절히 매달렸다고 한다.

심판자의 몽둥이들.

이들의 명성이 갈수록 드높아지는데, 왜 머리가 점점 지끈거리는지 모르겠다.

나중에 더 깊게 엮이는 건 아니겠지?

“보고 받으셨죠?”

“받았네.”

“의뢰주들은 대부분 이름 없는 주술사들과 관련 있습니다. 그들의 뒤를 캐면 에토르 영지에 머무는 신명의 주인, 렌구아 필드와 연결되죠. 렌구아는 카멜의 최측근 주술사이자, 주술사들의 둥지를 책임지는 인물입니다. 즉, 카멜이 세작을 보낸 진짜 의뢰주입니다.”

“원로들은 폐광산의 일로 카멜이 베네타에 관심을 가졌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네.”

“전(前)대 블라이어 성주와 맺은 광물 거래 건 때문에 말입니까?”

도르네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베네타는 블라이어와 오랜 세월 광물 거래로 사이가 우호적인 편에 속했다.

저주로 광산을 폐쇄한 후 대용량의 광물을 주기적으로 공급해줄 영지로는 대규모의 광산을 가진 블라이어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벌써 수십 년째 이뤄지고 있는 거래.

원로들은 당장 블라이어에서 광물 공급이 끊기는 걸을 우려하고 있었다.

“폐광산을 개발하면 해결되는 거 아닙니까?”

“그건 폐광산 규모를 몰라서 하는 말이야. 폐광산을 정상화하려면 빨라도 6개월이 소요돼. 채굴까지 생각한다면 더 오래 걸리겠지. 문제는 그사이에 쓸 광물이 곧 바닥난다는 데 있어.”

“여유 분량이 전혀 없습니까?”

“없어. 키메라와의 전쟁으로 한동안 공급이 끊겼거든. 원로들이 블라이어에게 공급을 요청한 상황이네. 어린 성주가 어떻게 나올지 반응을 보고 판단해야겠지.”

베네타는 드워프들의 제조업으로 경제가 유지되는 자유 도시다. 하루라도 광물이 끊기면 베네타의 경제에 큰 타격이 올 게 분명했다.

개인과 달리 확실히 세력은 염두에 둘 게 많은 것 같았다.

똑똑한 카멜이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테니, 분명 광물과 관련된 패도 준비하고 있을 거다.

“록터의 영입이 베네타한테 불리할 수도 있겠네요.”

“그래도 자넨 계획을 강행하겠지?”

“네. 계획을 미루면 공개적으로 혈맹 의식을 한 이유가 사라지니까요.”

당사자에겐 허락조차 받지 않았지만 은밀하게 소문을 흘릴 것이다.

헌트(Hunt)의 행동 대장, 록터 펠리스.

영웅 록터를 헌트의 두 번째 인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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