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113화 (113/130)

#113화 펜리 반리

“위하여!”

“우, 위하여!!”

어째 전과 달리 구호에 힘이 없다.

이 자리보단 모두 바깥에 신경이 쏠린 탓이다.

난 무시하고 다시 술잔을 들어 올렸다.

이거 은근히 중독성 있는데? 회장들도 이 맛에 건배하는 건가?

뚱뚱보 녀석이 은근히 먼저 자리를 파하려고 눈치를 보냈는데, 난 이런저런 핑곗거리를 대며 뚱뚱보를 잡았다.

넌 마지막이다. 이 새끼야.

“이제부터 시작인데 섭섭합니다. 설마 제가 아닌 마나석을 보고…….”

“아, 아닙니다! 저도 이 자리가 너무 즐겁습니다. 하하하…!”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 같군요. 노래 한 곡 어떻습니까? 제가 부를까요?”

“…….”

갑질이 이렇게 재미있는 일이었어?

인생 자체가 철저한 을이었던지라, 이런 기분을 알 기회가 있어야지.

“위하여!”

그렇게 슬슬 건배사가 귀찮아질 때쯤이었다. 시간이 제법 지났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며 지배인이 들어왔다.

“알렉스님, 새로 와인을 내왔습니다.”

늑인 할아범이 와인을 들고 내게 다가왔다.

적포도주가 아닌 백포도주가 잔에 담기자 난 고개를 끄덕이곤 이마를 슬쩍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 작업이 끝났다는 신호가 떨어졌다.

“살짝 취기가 돌아. 자리를 파할까 싶은데. 원하신다면 더…….”

“아닙니다! 오늘 얼마나 피곤하시겠습니까!? 저희는 물러가겠습니다.”

“그러시겠습니까? 아, 그레노스님?”

“…네?”

“노래는 마저 끝내시고 가셔야죠. 멈추기엔 아까운 실력입니다.”

딱 뚱뚱보 순서가 됐을 때 난 자리를 파하고 상인들을 내보냈다.

처음엔 나와 어떻게든 자리를 만들려고 했던 자들인데 내가 허락하기 무섭게 배꼽 인사를 하곤 후다닥 사라져버렸다.

힘없이 노래를 끝마친 뚱뚱보를 마지막으로 파티가 끝이 났다.

뚱뚱한 녀석이 더럽게 빠르네.

모두가 떠난 접대실.

폭풍이 한차례 휩쓸고 간 풍경이었다.

“이것 좀 드시고 치우세요.”

“감사합니다!”

“넉넉하게 가져가셔도 됩니다. 가족들이랑 같이 드세요.”

산처럼 쌓인 펜케이크 상자를 가리키자, 할아범과 시종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주머니 빵빵해, 값비싼 간식도 챙겨.

나 같아도 행복하겠다.

포도주를 홀짝이며 상인들이 가져온 팬케이크를 하나씩 까먹고 있는데, 넬라가 조용히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맛있어요?”

“넬라표를 따라가려면 멀었죠. 볼 일은 다 끝났습니까?”

“네.”

“근데 호위가 없네요? 펜리님이 확실한 녀석으로 붙여준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아, 여기요.”

넬라가 배시시 웃으며 손등을 보여줬는데 익숙한 문양이 보였다.

설마 생명의 징표를 그녀에게 쓸 줄이야.

펜리 녀석, 넬라를 보내고 엄청 불안했나 보다.

하지만 생명의 징표는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했다.

일회용이라는 거.

게다가 그림자가 존재해야 한다는 조건도 붙었다.

어떤 위기가 어떤 타이밍에 올지 모르는데, 펜리를 막 부를 수 없는 노릇이었다. 왜 호위를 붙이지 않고 그녀 혼자 보낸 거지?

“이거 일회용 아닙니까?”

“아닌데요?”

“……네?”

넬라가 손바닥을 펴고 내밀자, 그 위로 거무튀튀한 정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비를 둘러쓴 펜리의 미니미니 버전.

전보다 살짝 커진 그림자 요정이었다.

정령이 날 힐끗 보곤 넬라의 품에 폭 안겼다.

뭐야? 이 온도 차이는?

아니, 그것보다 정령이 왜 넬라 곁에 있지?

“생명의 징표를 받으면 명령은 내릴 수 없지만, 그림자 정령을 곁에 둘 수 있어요.”

“이번에 정령이 성장하면서 가능해진 겁니까?”

“아니요? 처음부터 가능했는데요?”

“…처음부터?”

이 망할 펜리 년을 봤나.

나한테 생명의 징표를 쓸 땐 일언반구도 없던 내용이었다.

“아, 오해하지 마세요. 마력을 지녀야 정령이 머물 수 있으니까요. 전 강하지는 않지만, 마력 생성에 관한 능력을 지니고 있거든요.”

“그렇습니까?”

“정령과 친화력도 있어야 해요. 전 반리와 상성이 좋거든요.”

“반리…?”

“정령 이름이에요. 제가 지어줬거든요.”

펜리? 반리?

리자 돌림으로 지은 건가?

이름이 언급되자 정령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정령에게 이름을 지어줬다는 건 무척 큰 의미가 있는데, 계약자인 펜리가 그녀에게 허락한 걸 보니 그림자 정령과 계약할 때 넬라의 도움을 받았던 모양이었다.

어쨌든 오해는 풀었고.

바깥일이 궁금했다.

“작업은 다 끝났어요.”

“너무 해 먹으면 안 됩니다. 의심을 살 수 있어요.”

“그 정도로 눈치 없는 분은 아니에요.”

글쎄, 돈 귀신이 붙은 펜리가 직접 하는 일이라 살짝 불안했다.

방금 나간 상인들이 철광석을 구하기 위해 어디로 가장 먼저 달려가겠는가?

바로 베네타 내에 자리한 광물 거래소일 것이다.

하지만 이미 펜리가 유통된 철광석을 모조리 쓸어간 상태였다. 내가 상인들을 붙잡고 늘어진 이유와 관련 있다.

펜리가 움직일 시간을 벌어다 준 것이었다.

상인들이 철광석을 구할 곳은 베네타 외의 지역, 블라이어나 에토르 지역뿐이었다.

보름 안에 토바른 내 유통 중인 철광석을 최대한 확보하려면 똥줄 타게 뛰어다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최종 캐스팅 보드를 쥔 펜리가 수집한 철광석을 한 명에게 밀어주는 조건으로 거액을 요구하겠지.

과연 얼마나 뜯어 먹을지.

“근데 광산에서 정말 마나석이 나옵니까?”

“네. 소량이지만 꾸준히 채굴됐다고 문헌에 적혀 있어요.”

“도르네프님이 여유분을 가지고 있어서 다행이네요.”

“남은 것들은 제작에 사용할 수 없는 하(下)품이에요. 그러니 지금껏 남아 있었죠.”

“상인들은 그것에도 만족할 겁니다. 마나석은 마법사들이 귀하게 여기는 물건이니까요. 유통 중인 철광석들을 악착같이 모아올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넬라는 팬케이크를 하나씩 까먹는 아서를 말없이 바라봤다.

드워프들이 우려했던 광물 부족을 인간 상인들을 이용해 해결할 줄은 몰랐다.

신기한 사람.

“같은 인간이라서 할 수 있는 생각인가요?”

그 물음에 난 피식 웃었다.

“인간을 털어먹는 건 인간뿐이거든요. 비슷하다고 봐야겠죠?”

“인간을 이해 못 하겠어요. 그리고 당신도요.”

“사람 속은 자기 자신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해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럼, 그다음은요?”

“다음 뭐 말입니까?”

“상인들이 성으로 철광석을 싸 들고 오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성주님이 알아서 하겠죠.”

난 남은 조각을 입에 털고 손을 탁탁 털고 일어났다.

그다음?

‘내 알 바 아니지.’

필요한 광물을 바리바리 성으로 배달해줬는데 나머지 일까지 일일이 내가 말해줄 필요가 있을까?

성주인 도르네프가 마나석을 제공하든, 제값을 주고 전량을 구매하든, 무력으로 빼앗던 알아서 할 것이다.

난 미끼만 대신 던져줬을 뿐, 그물을 건지는 건 도르네프의 몫이었다.

그것도 못 챙기면 성주 그만둬야지.

펜리의 경우엔 그냥 어부 곁에 어슬렁거리는 고양이 포지션이었다.

어부가 고기를 노획하다 보면 몰려든 고양이 무리에게 먹으라고 던져주는 생선 같은 거 있지 않나?

앞으로 돈이 많이 필요할 것 같아서 살짝 발을 담그게 해줬다.

검은 장미의 명성을 듣고 찾아올 엘프들을 먹여 살리려면 많은 돈이 필요할 것처럼 보였으니까.

나중에 이 일로 상인들이 나를 찾아와 하소연해도 소용없다.

“슬슬 갈까요?”

난 지금 떠날 거거든.

그레노스란 그 뚱뚱보의 아부가 살짝 그리워질 것 같긴 한데, 다시 볼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

“당분간 영주성에 머물 것 같으니, 잘 지내고 계세요.”

“마차를 준비할까요?”

“아닙니다. 축제 구경도 하면서 천천히 갈 생각입니다.”

“…알렉스님.”

“네 말씀하세요.”

넬라와 함께 입구에 선 나는 늑인 할아범의 배웅을 받았다.

눈빛에 진한 아쉬움이 한가득 깃들길래, 그동안 정이 들었나 싶었다.

그런데,

“상인분들은 또 안 오십니까?”

“빗질이나 열심히 하세요.”

돈맛을 너무 늦게 알아버린 늑대 할아범이었다.

* * *

별장은 내성 구석에 자리한 탓에 조용했다. 하지만 외각을 조금만 벗어나면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우리를 반겼다.

어느새 대광장 중심까지 밀고 들어온 좌판들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썰물과 밀물처럼 인파가 내 어깨를 쉴 새 없이 치고 가는데, 방심했다간 길을 잃을 것 같았다.

혈맹 의식 때보다 인파가 더 늘어난 느낌이었다.

우린 로브를 걸친 채 성 바깥으로 향했다.

축제 분위기를 즐기는 건 덤이었다.

넬라의 표정이 즐거워 보인다.

“표정들이 행복해 보여요.”

“축제가 주는 힘이죠. 좋은 기억을 심어주거든요.”

“베네타가 늘 이랬으면 좋겠어요.”

“자주 보게 될 겁니다. 이제 베네타는 혈맹이 지켜야 할 심장부가 됐으니까.”

“지킬 수 있겠죠?”

“노력해야죠. 펜리님도 베네타를 지키려고 검은 장미를 세상에 공개한 거 아닙니까?”

“맞아요.”

마스터 펜리는 엘프족의 수호를 슬러건으로 내걸었다. 게다가 세계수의 존재까지.

방랑 중인 엘프들을 베네타로 끌어들이겠다는 포부를 밝힌 것이다.

엘프의 힘을 하나로 결속시키려는 것인데, 그 이유는 당연히 힘을 키우기 위함이었다.

‘쉽진 않을 거야.’

엘프들이 모이고, 드워프들이 힘을 합쳐도 위기는 계속될 것이다.

넬라와 달리 내 머릿속은 이미 이 행복 뒤로 펼쳐질 새로운 전쟁을 떠올리고 있었으니까.

그건 학살자, 그리고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베네타의 광산은 탐욕스러운 세력의 표적이 될 확률이 높았다.

마나석의 존재는 비밀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차라리 광산이 저주로 폐쇄됐을 때가 베네타의 안전에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잠자코 멸망을 기다리는 일.

이제 베네타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벽을 부수고 부순 뒤, 토바른 지역 너머를 바라봐야 했다.

그래야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우리에겐 힘을 기를 시간이 있다는 거다.

오르도르의 숲.

마녀들의 숲이 보호막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 전에 우리는 첫 번째 벽, 학살자 카멜을 무너트리고 토바른을 손에 넣어야 했다.

퍼퍼펑―! 펑! 펑! 펑!

화려한 폭죽을 뒤로한 채 우리는 성문을 나왔다.

바깥에 나오니 병사들이 대기한 곳에 엄청난 마차들이 정차되어 있었다. 성안으로 마차를 몰고 갈 수 없으니, 외성 벽에 줄지어 마차들을 댄 모양인데, 무슨 군대 병력이 도착한 줄 알았다.

더럽게 많다.

잠시 후, 넬라 앞으로 마차 한 대가 도착했다.

마부가 다크 엘프인걸 보니, 검은 장미의 일원을 안내자로 보낸 것 같았다.

마차는 곧 우리를 태우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지시한 방향은 블라이어 방향이었다.

난 록터가 아닌 칼을 염두에 두고 록터의 위치를 생각해봤다.

내가 칼 바스타인이라면?

‘추적자들이 절대 생각지 못한 곳에 숨어 있겠지.’

칼은 유독 등잔 밑이 어두운 곳을 좋아했다.

칼이라면 도망치는 대신 반대로 블라이어 중심부로 더욱 들어갔을 확률이 컸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뒤 넬라에게 물었다.

“편지는 어떻게 됐습니까?”

“이미 블라이어로 출발했어요. 그곳에 없더라도 사흘 안으로 블라이어 성주의 손에 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근데, 편지 내용은 언제 말해줄 거예요?”

“나중에요.”

“록터 펠리스와 관련 있겠죠?”

난 고개를 끄덕였다.

록터 펠리스를 찾기 전에 사전 작업이 필요했다.

바로 알렉스의 이름으로 학살자에게 당당히 편지를 보내는 것.

난 이미 학살자가 내 정체를 ‘그’의 전달자로 파악한 것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다.

카멜의 조직인 주술사들의 둥지라면 정보를 모으기 충분할 것 같거든.

그래서 먼저 선수를 쳐서 알릴 생각이다.

내가 ‘그’의 사람이고.

록터 펠리스도 ‘그’의 사람이라고.

상대가 미래를 알고 있는 회귀자라면 혼란을 주기에 편지만 한 것이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