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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114화 (114/130)

#114화 사냥개 부대

“정지! 여기서 내리겠습니다.”

워―

내 목소리에 마차가 천천히 멈춰 섰다.

넬라와 함께 바깥으로 나오니 날이 밝아 있었다. 마차를 타고 밤새 이동했는데 여기서부턴 베네타의 영토가 아니라서 마차에서 내려서 움직이는 게 안전했다. 마차로 가는 길목은 눈에 띄기 쉽고, 라웁 숲을 가로지를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숨을 깊게 들이쉬니 풀 내음이 짙게 났다. 숲 한가운데, 새 지저귐에 유독 시끄러운 저 너머가 라웁 숲이었다.

“넬라, 준비됐나요?”

“잠시만요.”

돌아보니 넬라가 늘어트린 머리를 가지런히 묶고 있었다. 복장은 움직이기 편하도록 딱 붙은 갈색 가죽옷으로 갈아입었는데 우윳빛 피부와 잘 어울렸다. 틀어 올린 묶음 머리 아래로 가녀린 목선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준비를 마친 넬라가 마부석을 가볍게 두드리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마스터께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고개를 끄덕인 검은 장미가 품에서 서신 한 장을 꺼냈다.

“이거 받으십시오.”

“이게 뭔가요?”

“이번 주 정기 정보입니다. 미리 드렸어야 했는데 상황이….”

검은 장미는 서신을 건네곤 나를 한 번 바라본 뒤 조용히 떠났다.

바퀴 자국만 남은 자리, 그녀는 조용히 서신을 펴곤 읽어 내려갔다. 내용이 궁금해서 슬쩍 다가가니, 그녀가 피식 웃으며 서신을 읽어보라고 권했다.

“무슨 서신입니까?”

“당신과 관련된 내용이 담겨 있네요. 검은 장미에서 최근에 모은 정보가 담겨 있어요.”

“정보요? 마차에 있을 때 미리 주지. 왜 지금 주는 겁니까?”

“자고 있었잖아요.”

“전 안 잤거든요?”

“아서님껜 주기 싫었나 보죠.”

“…….”

혈맹 의식에 많은 기력을 소모했는지, 그녀는 바로 곯아떨어졌다.

나는?

팔팔했다.

두 눈을 멀뚱히 뜨며 밤새 바깥 구경이나 하고 있었는데, 미리 정보를 줬으면 잡생각이라도 했을 거 아니야?

입맛을 다시며 서신을 건네받았다.

이렇게라도 질 좋은 정보를 받아볼 수 있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정보의 접근성.

혈맹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랄까.

하지만 서신의 내용을 읽은 순간 내 미간이 확 좁아졌다.

다크 엘프 새끼, 이런 내용이었으면 내게 진즉 줬어야지!

하여튼 펜리년을 닮은 녀석들은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근데, 이 내용…… 진짜야?

“크룩스가 먹혔네요…?”

“네. 아서님이 과거 암살자로 몸담던 곳이라 신경 썼던 곳이거든요. 근데 크룩스뿐만이 아니에요. 에토르 내에 자리 잡고 있던 암살 조직 대부분이 사라졌어요.”

크룩스가 사라졌다.

칼이 이 소식을 들으면 어떤 얼굴을 할지 궁금했다.

복수의 대상이 사라졌으니 말이다.

스토리를 보면 카멜이 에토르 영지를 점령하고 칼을 밑에 두기 전까지 크룩스는 잘 먹고 잘살던 조직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사라진 것이다.

누가 이런 짓을 벌였을까.

의심 가는 놈이 있긴 했다.

‘렌구아 필드, 그 흑주술사가 손을 뻗었을 가능성도 있어.’

블라이어 영지에는 암살 조직이 존재하지 않는다. 주술사들의 둥지가 들어서면서 씨가 말랐기 때문이다.

이유는 재료 수급.

암살자처럼 피로 물든 영혼은 주술 인형 반다이크들의 핵심 재료로 쓰인다.

에토르 영지에는 렌구아가 오래도록 자리 잡고 있었다.

게다가 신명을 각성한 것까지.

이것 또한 기존 스토리를 비켜 갔다.

렌구아가 이번 일과 관련됐을 가능성이 컸다.

그럼, 카멜의 지시를 받았다는 건데, 이 정도로 에토르를 들쑤시면 주인인 톰자엘 자작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에토르와 직접 부딪치기엔 아직 시기가 이를 텐데, 뭘 노리는 거지?

“잠깐만요.”

“다른 정보가 또 있습니까?”

“암살자 하니까 생각난 게 있어요.”

넬라는 턱을 잠시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기더니 새로운 내용을 언급했다.

“보름 전쯤인가? 블라이어 성주가 임시 부대를 창설했어요. 암살자 출신으로 구성된 부대라고 들었는데. 그것과 관련 있을까요?”

“임시 부대요?”

“네. 정확히 파악되면 알려드리려고 했는데, 지금과 맞물린 것 같아서요.”

학살자의 새로운 부대.

처음 듣는 내용이다.

게다가 암살자 출신?

“그 부대의 수장이 누굽니까?”

리옹은 친위대, 렌구아는 주술사들의 둥지를 맡고 있다.

칼 바스타인이 빠진 지금, 임시 부대를 맡을 자가 떠오르지 않았다.

설마 크룩스의 마스터…?

“잭과 하우엘. 카멜이 최근에 직접 영입한 쌍둥이 형제들이에요.”

“……!”

순간 숨이 턱 막혔다.

그 개새끼들이 학살자 밑으로 들어갔다고?

어떻게?

“정말 잭과 하우엘이 맞습니까? 카멜 밑에 있다고요?”

“네. 카멜이 직접 챙길 정도로 신임을 받고 있다고 들었어요. 다만 실력이 의심스러워요. 성주의 신임을 받기엔 모자라 보이거든요.”

“혹시 두 형제 근처에 검은 장미들이 머물고 있습니까?”

“정보를 얻기 위해 근처에 자리를 잡긴 했는데….”

“물리는 게 좋을 겁니다. 피해만 커질 테니까.”

“네? 하지만 저희가 판단하기로 형인 잭은 4성, 동생 하우엘은 3성 정도로….”

“아뇨. 형인 잭은 5성, 동생 하우엘은 4성입니다. 그리고 둘 다 특성 개화자들입니다.”

“……!”

넬라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두 형제가 감쪽같이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에 놀란 표정이었다.

“돈과 여자에 환장한 망나니들이라 들었어요. 그것조차 실력을 숨기기 위한 장치였던 건가요? 그 정도로 무서운 이들…….”

“아닙니다. 그들은 발정 난 개새… 아니 망나니들 맞습니다. 다만, 실력을 숨기는 데만 진심인 인간들이죠.”

“왜죠?”

“생존에 유리하니까요. 게다가 특성과 관련 있습니다. 둘 다 암살과 관련된 특성을 지녔거든요.”

암살 특성은 들키면 그 위력이 반감된다. 그래서 두 형제는 특성을 되도록 드러내지 않았다.

발정한 개새끼들.

그놈들은 여인에 미친 놈들이다.

신분 안 따지고 이쁘면 덮치고 보는 변태들이라 귀족들의 여인도 많이 건드렸다.

당연히 그들을 죽이려는 귀족가 역시 한 트럭인 상황.

그래서 실력을 숨겼다.

만만한 암살자들만 보내왔으니까.

하지만 쪽수에는 답이 없어서 두 형제는 지금쯤 학살자 밑이 아닌 암살자들을 피해 도망치고 있어야 했다.

바로 에토르의 모든 암살 조직에 의해 말이다.

그런데 에토르의 암살 조직은 씨가 말랐고, 쌍둥이 형제는 카멜을 뒷배로 두고 안전을 확보했다.

그것도 모자라 두 형제를 수장으로 둔 임시 부대?

‘학살자 전력에 변화가 생겼다.’

잭과 하우엘을 얻음으로써 카멜은 쓸만한 사냥개들을 얻었지만, 지독한 불명예를 떠안았다.

잭과 하우엘에게 이를 가는 귀족 가문들과 척을 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 에토르의 힘만 더 강해진다.

전쟁을 앞둔 상태에서 굳이…?

‘뭔가 확실한 패가 있어. 귀족 가문들 따윈 더는 눈치 볼 필요 없는.’

아, 아티팩트!

맞다. 카멜에겐 내 신명 정보를 팔아 획득한 다량의 아티팩트가 있었다. 그게 분명 큰 변수가 됐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이 사실을 알게 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두 형제가 이끄는 암살자 부대는 완벽한 사냥개 부대다.

물리면 골로 간다.

위치 파악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 녀석들 지금 위치 파악됩니까?”

“블라이어 영지에서 하루 떨어진 마을에 자리 잡고 있어요. 록터를 추적한 듯 보이다가 사흘 전부터 마을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데, 정확한 이유는 몰라요.”

하루거리.

살짝 위험한데?

두 형제의 전력이면 록터가 제 실력을 발휘해도 목숨을 장담하기 힘들다.

“카멜의 위치는 아직이죠?”

“네.”

넬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카멜을 감시하던 검은 장미들의 소식이 끊겼기 때문이다. 카멜이 영지를 벗어난 직후 벌어진 일인데, 그 후로 카멜의 정확한 위치가 파악이 안 되고 있었다.

난 고개를 끄덕이곤 숲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럼 위치부터 빨리 알아봐야겠네요.”

“마스터가 곧 위치를 알려올 텐데요?”

“더 빨리 알아야 할 이유가 생겼습니다. 따라오세요.”

내가 베네타에서 기어 나온 이유는 어느 정도 안전에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주각만 잡고 본다면 리옹과 렌구아 정도만 조심하면 되는데, 리옹은 학살자 곁에 머물렀고, 렌구아는 에토르에 있다.

학살자의 위치만 파악하면 되는데, 그건 펜리가 넌지시 언급해줬다.

그녀가 블랙마켓에서 신명 정보료로 건네줬던 세계수의 목걸이, 그 목걸이의 위치가 블라이어가 아닌 에토르 방향에서 잡혔기 때문이다.

펜리가 직접 나섰으니, 사흘 안으로는 위치가 파악될 것이다.

다만, 신경 써야 할 전력이 늘어서 계획보다 더 빨리 움직여야 했다.

사냥개 부대.

듣기만 해도 살벌하다.

난 라웁 숲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블라이어 영지는 라웁 숲 서쪽 끝에 자리한 영지다.

우리는 라웁 숲에 들어서기 무섭게 달리기 시작했다.

나무가 휙휙 지나갈 정도로 빠른 속도. 곁눈질로 넬라를 바라보니 걱정과 달리 가볍게 따라오고 있었다.

엘프가 지닌 특유의 민첩함 때문인지, 그녀는 인간보다 몸이 날랬고 숲에선 더욱 가벼워 보였다.

다만, 체력적 한계가 있어서 이따금 쉬고 움직이길 반복했다.

“쉬지도 않고 달렸는데,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죠?”

“개처럼 구르면 가능합니다.”

그렇게 반나절 정도 움직였을 때, 처음으로 짐승 소리가 아닌 괴상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키에에에엑―!

크아아앙!

넬라가 긴장한 듯 내 소맷자락을 당기자, 난 나무 위를 가리키곤 그녀와 함께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높은 나뭇가지를 밟고 몇 차례 이동한 것도 잠시, 건너편 나무 아래서 익숙한 녀석들이 서로 물어뜯고 뒹굴며 싸우는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넬라는 그 괴물들을 바라보곤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생명체와 거리가 먼 기괴한 외모.

“키메라들이네요.”

“아레나가 죽고 도망친 키메라들이 상당히 많았거든요. 숲을 돌다 보면 자주 마주치게 될 겁니다.”

“서로 왜 싸우는 거죠?”

“통제하는 자가 없으니 그저 본능대로 움직이는 겁니다.”

“광인들처럼 말이죠?”

“네.”

광인들의 존재는 현재 많이 알려진 상태였다.

특히 에토르.

에토르 영지에선 서서히 늘어나는 광인들 때문에 톰자엘 자작이 골치를 썩이고 있다고 들었다.

기사단을 움직여도 그 피해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데, 마석의 부작용을 경고하고 복용하는 행위를 금지해도 강해지려는 욕구 때문인지 소용이 없었다.

톰자엘 자작 자신도 은밀히 마석을 모아 기사들에게 먹이는 상황이니 통제가 될 리 없다.

지금까진 큰 소란 없이 마무리되는 모습인데, 영지 내부가 얼마나 썩었을지는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렌구아가 은밀히 작업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요즘 마석 값이 많이 올랐죠?”

“부르는 게 값이에요.”

시간이 갈수록 마석의 가치는 천정부지로 올라갔다.

키메라 생산이 멈춘 지금, 희귀성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돈이 되면 당연히 용병들은 움직인다.

눈앞의 상황이 그렇다.

키아아아아악!

“포위해!”

괴성이 들리고 얼마 되지 않아, 일련의 사내들이 무기를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에토르의 용병들이었다.

서른 명에 달하는 용병들이 키메라 두 마리를 포위하고 집중 공격을 퍼붓자 전투는 순식간에 끝이 났다.

“저들을 기다린 거예요?”

“아니요. 저들은 아닌데, 곧 제가 기다리던 놈들이 나타날 겁니다.”

“놈들? 누구를 말하는 거죠?”

“먹이사슬 상위 단계겠죠?”

키메라를 사냥하는 용병들.

그리고 그 용병들을 사냥하는 또 다른 존재들.

지금 시기에 한창 활동할 때였다.

잠시 후,

우웅―!!

“뭐, 뭐야!? 무슨 일……!”

키메라 시체에서 채취한 마석들을 가지고 시시덕거리고 있던 용병들이 흠칫하더니 바닥을 바라봤다.

핏빛 마법진이 생기더니, 용병들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실력 좋은 용병들은 한발 빨리 움직여 마법진을 벗어났지만, 그들은 곧 숲에서 튀어나온 로브의 존재들과 맞닥뜨렸다.

용병들은 다급히 그 상대들에게 무기를 찌르거나 휘둘렀다.

푹―

“…어?”

“이, 이것들 뭐야?!”

재빨리 상대의 심장에 검을 박아넣은 용병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상대를 베어낸 또 다른 용병도 마찬가지.

허공을 찌른 듯한 느낌.

손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의문도 잠시 용병들은 곧 로브 자락 사이로 뻗어 나온 번뜩이는 주먹을 맞고 기절했다.

용병들이 순식간에 제압당하자 우거진 숲에서 네 명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명은 기사 복장, 다른 셋은 핏빛으로 이뤄진 가죽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핏빛 망토를 본 순간 나는 흡혈의 고리를 소환했다.

주술사들의 둥지.

핏빛 망토는 그들의 시그니처 로브였다.

기다리던 사냥감이 나타났다.

먹이사슬 최상위 단계인 내가 나설 차례였다.

5분 후에 사냥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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