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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117화 (117/130)

#117화 각성 신호탄(2)

풀 한 포기 없는 메마른 언덕을 넬라와 함께 천천히 올랐다.

흙먼지가 뿌옇게 피어올랐다.

언덕 위에서 그리고 아래에서 낡은 수레들이 자주 오가며 무언가를 옮기고 있었다.

수레를 옮긴 이들은 손등이 쪼글쪼글하고 등이 굽은 노인들이 대부분인데, 얼굴에는 고단함이 묻어나 있었다.

툭―

조용히 언덕을 오르고 있는데 휘청거리던 수레 한 대가 내 팔을 툭 치고 지나갔다.

수레를 덮은 천이 그 충격으로 흘러내리자 난 멈춰서서 잠시 수레를 내려다봤다.

“…….”

죽은 시신들이 가득했다.

하나같이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 그들의 마지막이 어떤 감정이었는지 알 수 있는 단면이었다.

통곡의 언덕.

우리는 지금 통곡의 언덕을 오르는 중이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제 잘못입니다! 저만 벌해주십시오!”

내 손을 친 사람들은 새파랗게 질린 채 넙죽 엎드렸다.

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채 벌벌 떨고 있다.

내 앞에서 바짝 엎드린 채 빌고 있는 노인. 그 등이 유독 왜소해 보였다.

자기만 죽여달라 외치며 내 망토를 붙잡고 늘어졌다.

주변에선 동정의 시선들이 몰렸지만, 그 누구도 말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붉은 망토.

블라이어에선 공포의 상징이었다.

“…….”

잠시 노인을 내려다보던 나는 노인을 발로 차곤 등을 돌린 채 언덕을 다시 올랐다.

명백한 무시, 그게 노인을 살리는 길이었다.

“병사들이에요.”

뒤에서 넬라가 작게 소곤거렸다. 우리는 로브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수상한 복장임에도 병사들은 오히려 우리를 발견하곤 주춤 물러나며 길을 열었다.

우리는 로브를 둘러쓰고 붉은 망토를 걸쳤다.

주술사들을 죽이고 그 복장으로 똑같이 위장한 것인데, 성문부터 시작해서 누구도 우리를 건드리지 못했다.

주술사들의 둥지.

성 지하에서 은밀히 힘을 키우던 주술사들은 카멜이 성주에 즉위하자 양지에 모습을 드러내며 힘을 과시하고 있었다.

병사들을 지나쳐 우리는 수레들을 따라 올라갔다.

인파가 상당했는데, 입을 여는 자들이 없다.

참으로 을씨년스러웠다.

잠시 후, 언덕 중턱에 오르자 광활한 대지 위로 무덤들이 즐비했다.

무덤 크기가 제각각이었는데, 그날 수레에 실린 시체들을 한데 모아 하나의 무덤으로 만드는 것 같았다.

크게 파인 구덩이 한곳으로 수레들이 몰리자 넬라가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쪽이 아닙니다.”

“네? 그럼 어디…….”

“저곳입니다.”

수레가 몰린 구덩이보다 훨씬 깊고 드넓은 구덩이가 바로 앞쪽에 존재했다. 초창기에 판 것으로 보였는데, 구덩이가 지금껏 메워지지 않은 상태라 역한 냄새가 이곳까지 흘러나왔다.

다른 곳과 달리 기사들도 많이 보였다.

우리가 다가가자, 기사 하나가 검을 올리며 우리를 막아섰다.

“주술사들이 여긴 무슨 일이지?”

어깨에 달린 푸른 견장.

블라이어의 정예 기사였다.

[주변에 아티팩트의 기운이 느껴진다. 제법 많다.]

구덩이에서 서성이는 푸른 견장의 기사들이 열 명이 넘어갔다. 아티팩트를 수여 받았다면 카멜의 친위대일 확률이 높았다. 정예 중에서도 선택받은 기사들이란 뜻.

부딪치기엔 부담스러운 숫자였다.

물론, 부딪칠 생각도 없었다.

“위에서 보내서 왔다.”

“위? 누구 말이지?”

“알아서 어쩔 거지? 우린 임무를 받고 왔을 뿐이다. 시체 도둑들의 흔적을 찾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뭐라고?”

기사들과 주술사들은 사이가 좋지 못했다.

알력 싸움인데, 역시나 내 대답에 기사들의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칼만 안 뽑았지, 눈빛만 본다면 당장 죽일 것처럼 보였다.

“시체 도둑을 찾는 건, 성주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하달한 임무다. 주술사 따위가 낄 자리가 아니야.”

“못 미더웠나 보지.”

“그 주둥이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주술사로 살아가고 싶다면.”

“불만이 있으면 성주님께 직접 아뢰라. 우린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것뿐이니까.”

블라이어에는 지금 카멜도 리옹도 렌구아도 없었다.

막 나가도 당장 알아볼 방법이 없다는 뜻이다. 게다가 누가 블라이어에서 주술사 흉내를 내고 다닌다고 생각하겠어. 혹여 신분을 의심할 수도 있어서, 우린 비밀 병기를 꺼냈다.

후읍―!

넬라의 어깨에 서서 얼굴을 찐빵처럼 부풀린 반디가 기사들을 노려봤다.

무서운 표정이라는 데 전혀 안 무섭다.

다만 존재 자체가 딱 보면 불길해 보이는 검은 정령이라 이곳 분위기와 딱이었다.

미지의 존재는 주술사들의 영역이라 치부되는 시대, 게다가 신분패까지 꺼내서 기사에게 보였다.

내가 강탈해 온 건 사냥조의 관리자 신분이었다.

급이 제법 높더란 말이지.

신분패를 확인한 기사는 멈칫하곤 반디에게 눈길을 한 번 준 뒤 말했다.

“얼굴을 보여라.”

“너희들이 얼굴을 본다고 뭐가 달라지지?”

“…….”

“우린 누군가에게 얼굴을 보이는 걸 싫어해. 적이 많거든. 그래서 얼굴을 보인 이들에게 저주를 내리곤 하지. 내 얼굴을 볼 텐가?”

기사는 한발 물러났고, 주변 흔적을 살피던 기사들도 욕설을 뱉어내며 구덩이 바깥으로 나왔다.

기사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10분이다. 그 안에 끝내고 돌아가.”

10분.

넬리토리 협곡의 경험 때문에 10분이란 시간에 노이로제가 걸린 상태라, 난 기사를 무시하곤 넬라와 함께 구덩이 밑으로 몸을 던졌다.

10분.

넘기면 어쩔 건데?

우린 수백 구가 넘어가는 널브러진 시체 더미 앞에 섰다.

넬라가 코를 막으면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까진 무난히 왔네요.”

“피곤하죠?”

“안 피곤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블라이어로 향하는 최단 거리로 라웁 숲을 주파했다.

잠도 줄이면서 빠르게 이동했는데 통곡의 언덕까지 이틀 정도 소요된 것 같았다.

“이젠 뭘 해야 하죠?”

“흔적을 찾아야죠. 전 시체를 뒤질 테니, 넬라 님은 잠깐 대기했다가 구덩이 위에서 귀를 열고 계시면 됩니다.”

“기사들의 대화를 엿들으라는 말인가요?”

척하면 척이라 편했다.

엘프의 청력은 인간보다 훨씬 뛰어나서 기사들의 대화를 엿듣기 충분했다.

흔적을 찾는 건 나만 가능한 일이라, 넬라는 위쪽에서 정보를 모으는 게 더 도움 되는 일이었다.

잠시 후, 넬라는 눈치껏 위로 올라갔고 난 허리를 굽히며 시체들을 살피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시체는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되네.”

게다가 썩어 문드러진 시체 더미는 더더욱 끔찍했다.

이곳에 버리진 시체들은 카멜의 세력에 반하여 처형된 자들이었다.

귀족 가문부터 기사단, 상인 연합까지.

카멜은 반란의 불씨가 될 것 같은 세력은 잔혹하게 전부 숙청했다.

그 숙청 대상에는 록터의 사람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중에는 록터의 가족도 있었다.

아내, 딸, 그리고 동료들까지.

록터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구덩이를 메우지 않고 그들의 시체를 공개한 건 일종의 본보기였다.

그리고 그중 본보기로 세운 시체 일부가 사라졌다.

‘넬라가 건네준 정보에는 잭과 하우엘에 관한 정보 외에 시체 도둑을 쫓고 있다는 정보도 담겨 있었지.’

내가 통곡의 언덕에 온 이유고, 헛구역질을 참으며 시체들을 살피는 이유였다.

그 시체 도둑.

록터의 가족을 포함해 시체 다섯 구를 가지고 사라졌다.

시체 다섯 구를 은밀히 옮기는 건 록터 혼자 할 수 없는 일, 조력자가 있다.

‘칼 일행이 한 일이겠지.’

칼이 도왔다면 분명 지나간 곳에 내가 알아볼 수 있는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라웁 숲에서 헤어지기 전에 다시 만날 것을 대비해 약속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꼼꼼한 칼이 날 떠올렸다면 지나간 곳마다 특정 표식을 남겼을 것이다.

라웁 숲 생활을 하며 칼에게 배운 것이 많다. 특히 상황에 따른 비밀 표식의 경우에는,

[주변에 시체가 있다면 내 결핍을 떠올려봐. 필요한 정보가 있을 거야.]

칼의 결핍.

붐(Boom)으로 잃어버린 왼쪽 팔이다. 그리고 칼은 여성의 시체를 건드리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남성, 그리고 왼팔.

“찾았다.”

왼팔을 중점적으로 살폈는데 깨알만 한 글자가 새끼손톱에 흐릿하게 적혀 있었다.

코룬 강(Korun River) 하류.

한두 구의 시체에서 나온 것이 아닌 다섯 구 이상에서 똑같은 흔적이 발견됐다.

칼 일행이 코룬 강에 숨어 있다.

코룬 강은 블라이어 영지의 남쪽에 자리한 강인데, 하류에는 크고 작은 마을들이 자리를 잡고 살아가고 있었다.

마을 숫자가 제법 된다고 들었는데, 그 마을 한 곳에 록터와 은신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코룬 강을 본 순간 난 헛웃음을 흘렸다.

“칼, 이 아저씨도 운빨이 나랑 비슷하네.”

재수가 더럽게 없는 양반이 분명했다.

은신처를 골라도 하필 코룬 강 하류를 골랐다.

잭과 하우엘 형제가 이를 갈며 웅크리고 있는 장소가 분명 코룬 강 주변이라고 했는데.

등잔 밑을 좋아하는 양반이라고 듣긴 했는데, 너무 발밑으로 골라잡았다.

구덩이를 나오자, 기사들과 거리를 두고 있던 넬라가 내게 다가왔다.

“흔적을 찾았나요?”

“찾긴 했는데 썩 좋은 소식이 아닙니다.”

“숨은 장소가 위험한 곳인가 보네요.”

“서두르죠. 흔적이 드러나기 전에 찾아야 하니까.”

“흔적? 신명 각성 말인가요?”

내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넬라는 눈을 가늘게 뜨곤 날 바라봤다.

눈빛을 보니, 또 그 질문을 하려는 것 같았다.

“록터가 신명을 각성할 것이라 어떻게 확신하죠?”

“말씀드렸잖아요. 길잡이의 감이라고.”

“거짓말이 다 티 나는 거 아시죠?”

“믿고 따라온 거 아니었습니까?”

“순진한 엘프도 안 믿을 말을 누가 믿어요? 저도 신녀의 감으로 따라 나온 거예요.”

“그 감 믿어도 될 겁니다.”

내 능글스러운 답에 넬라는 고개를 흔들며 따라왔다.

“카멜도 각성 사실을 알고 있나요?”

학살자는 1회차 회귀자다. 록터의 탈출조차 예상 못 했을 텐데, 신명 각성은 무슨.

“모릅니다. 하지만 아케인이 곁에 있다면 바로 알 수 있겠죠. 록터의 이름이 드러날 테니까.”

“각성을 안 한다면요?”

“그것대로 좋습니다. 은밀히 록터와 접선한 후 빼 오면 되니까.”

통곡의 언덕을 빠르게 내려오는 길. 그때 다수의 수레가 보이더니 발길을 붙잡는 소리가 들려왔다.

울부짖는 통곡이다.

노인, 아낙네, 아이들이 움직이는 수레를 붙잡고 서럽게 운다. 병사들은 창대로 그들을 뿌리쳤고, 주저앉은 이들은 멀어지는 수레 행렬을 바라본 채 눈물을 흘렸다.

넬라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떻게 같은 동족을 이리 가축처럼 다룰 수 있죠?”

“인간을 엘프족과 같이 생각하면 안 됩니다.”

카멜은 주변 영지와 마을을 복속하고 곡괭이를 잡을 힘만 있으면 나이 성별 불문하고 금광에 처넣었다.

블라이어의 살을 찌우는 재물은 저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다만, 난 저렇게 보이는 단면보다 보이지 않은 단면이 더 잔혹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주술사들의 둥지.

‘재물’이 아닌 인간 자체를 취급하는 ‘제물’의 희생.

이에 대해선 굳이 넬라에게 말하지 않았다.

같은 인간으로서 쪽팔렸거든.

“모든 인간이 다 이런가요?”

“그럴 리가요. 하지만 당하는 이들은 똑같죠. 힘이 없는 존재들.”

“블라이어 성주는 강한가요?”

“주변에 강한 이들을 거느리고 있죠. 그게 카멜의 힘입니다.”

“카멜 블레이저. 알면 알수록 무서운 인물이란 생각이 들어요.”

무섭다라….

맞는 말이다.

카멜은 무서운 인간이다.

하지만 내겐 그저,

“카멜은 그저 악당 새끼일 뿐입니다. 죽어도 싼.”

카멜과 처음 만났던 블라이어 첨탑을 힐끗 올려다본 나는 영지를 벗어나 남쪽으로 경로를 잡았다.

“비가 올 것 같아요.”

“비?”

제법 떨어진 거리에서 뒤쪽을 바라보니 영지를 뒤덮는 먹구름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후 하늘이 흐려지더니,

쿠쿠궁―!

천둥소리가 울리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왜일까.

하늘이 우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정도로 내가 느낀 블라이어의 풍경은 암울했다. 카멜의 부친이 어째서 혈육인 그를 암살하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한 사람의 통치로 이렇게 영지 분위기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빗물로 젖어버린 로브를 가볍게 털어내며 넬라에서 엿들은 정보가 없는지 물어봤다.

그녀는 기사들에게 들었던 대화를 간략히 말해줬는데, 난 순간 한 단어에서 멈칫했다.

“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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