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각성 신호탄(3)
“인근에 마녀가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어디쯤입니까?”
“블라이어 주변 마을 같아요. 그런데 말하는 투가 가벼운 잡담처럼 느껴졌어요. 소문으로 끝날 것 같아서 아쉽네요.”
넬라의 표정에 실망감이 깃들었다.
마녀를 만나보고 싶은 건가?
아, 그러고 보니 빨강 리본을 달고 다닌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빨강 리본은 마녀 릴리의 시그니처 아이템.
그녀를 동경하는 이들이라면 하나씩 가지고 있는 액세서리였다.
릴리를 좋아하다 보니, 시답지 않은 잡담 속에서 마녀에 관한 소문만큼은 놓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마녀다.
난 다시 물었다.
“자세한 얘기 같은 건 없었습니까?”
“황당하긴 한데,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홀리고 다녔다고 해요. 미모라는 말도 있고, 엄청난 황금 때문이라는 말도 있어요. 애완동물도 한 마리 데리고 다니고요.”
“…네?”
공포 대상으로 찍힌 마녀가 엄청난 황금에 애완동물을 달고 다녀?
죽여달라는 말과 같았다.
이건 마녀로서 선을 많이 넘었다.
“그냥 돈 많은 귀족 중 하나가 아닐까요?”
“기사들은 마녀로 위장한 귀족들로 무게를 두고 있어요.”
“그들 말입니까?”
들어보긴 했다.
학살자의 표적이 된 몰락 가문 중 살아남기 위해 마녀 복장을 하고 오르도르 숲에 발을 디딘 도망자들 말이다.
숲이 위치한 엘레토르 성곽 너머부터는 카멜도 병력을 보내기 부담스러운 곳이라 도망자들이 최후의 선택지로 피한 것인데, 그건 늑대를 피하려고 범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는 짓이었다.
‘고립당하기 딱 좋은 장소인데.’
오르도르 숲에는 유령의 숲이란 결계가 존재한다.
마법사들도 뚫지 못하는 결계를 일반 귀족들이 뚫고 간다?
결계에 발을 들인 순간 유령들에게 둘러싸여 영혼을 뜯어먹힐 것이다.
뒤늦게 깨달아도 이미 늦었다.
카멜이라면 그곳에 노예 사냥꾼을 풀어 양몰이를 지시했을 것이다.
공포심을 줘서 유령의 숲으로 스스로 들어가게 하거나, 바깥으로 나오면 잡아 오게끔 말이다.
실제로 그렇게 했을 가능성이 컸다.
“쫓기는 신분일 텐데, 그럴 여유가 있었을까요?”
“마녀도 도망자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죠. 그래서 말했잖아요. 소문으로 끝날 확률이 높다고.”
“다른 주제는 없었습니까?”
“우리를 죽여서 구덩이에 파묻고 싶다는 것 정도?”
“…됐습니다.”
빗방울이 심해지더니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먹구름으로 물든 하늘을 보니 비가 쉽사리 멈출 것 같지 않았다.
코룬 강 하류까지 거리가 제법 됐기에 우린 인근 마을에서 마차를 빌리기로 했다.
“사람들의 얼굴에 두려움이 보여요.”
“우리가 입은 옷 때문일 겁니다. 마차만 구하고 얼른 나가죠.”
주술사의 복장으로 작은 마을에 들어서니 사람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눈치를 보며 빠르게 사라지는 모습인데, 혹여 눈에 띌까 긴장한 표정이 역력해 보였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거리에 나와 넬라만 덩그러니 남았다.
“왜 저러는 거죠?”
“주술사들이 사람들을 많이 잡아간 모양입니다.”
“…저 아이는.”
“눈빛에 원망이 담겼네요.”
창문에 얼굴을 내민 일곱 살배기 꼬마와 시선을 마주쳤다.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다급히 사라졌지만, 아이를 통해 카멜의 평판을 예측할 수 있었다.
“아이는 감정을 숨길 줄 모르죠. 저 감정은 어른들에게 배웠을 겁니다.”
“성주에 대한 원망일까요?”
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공포에 짓눌려 감정을 숨기고 있을 뿐, 마음 한켠에는 카멜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할 것이다.
그런 마을이 이곳 한 군데뿐일까?
통곡의 언덕에서도 이런 분위기를 느꼈다.
주술사들의 힘이 강해질수록 반대로 원망의 감정은 더욱 거세질 것이다. 주술사의 강함은 제물의 양과 비례했으니까.
게다가 잭과 하우엘 같은 망나니들이 카멜을 등에 업고 가만히 있을 리 없다.
귀족들도 고통을 피해 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다 원망과 분노가 쌓이고 쌓여 누군가 터트릴 계기를 만들어준다면 어떻게 될까?
‘곪았던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겠지.’
록터 펠리스.
내가 그를 헌트로 영입하려는 이유였다.
록터는 카멜이 공들여 밟아놓은 반란의 불씨를 단번에 살릴 카드였으니까.
* * *
“어, 얼마든지 가져가십시오!”
“전부 해서 얼마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말을 취급하는 상점을 방문해 말 두 필과 작은 마차를 골랐는데, 주인은 두 손을 흔들며 돈을 받지 않으려고 했다.
내가 그를 조용히 바라보자, 상인은 마른침을 삼키며 시선을 피했다.
이마에 땀도 연신 흘렸는데 무척 긴장한 반응이었다.
뭐지? 생각보다 반응이 거센데?
아니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주술사를 생각하는 두려움이 큰 건가?
마을 사람들도 그랬던 것 같다. 통곡의 언덕에서 본 반응보다 좀 더 조심스러웠다고 해야 하나?
순간 상인의 눈길이 한곳에 머물렀는데, 그쪽을 바라보니 문고리를 잡고 서 있는 작은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아이는 내 복장을 빤히 바라보더니 날 손가락을 가리키며 작게 중얼거렸다.
“댕댕아, 물어.”
“……?”
뭘 물어?
어이없는 상황에 두 눈을 끔뻑이며 아이를 바라보고 있자, 상인이 딱딱한 웃음을 흘리며 몸으로 아이를 가렸다.
“방금 깬 아이라 헛소리를 하는 것 같습니다. 더 좋은 말이 있는데 그걸로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제 성의인데…….”
말과 마차를 받은 것도 모자라, 돈주머니까지 받았다.
흑주술사들의 기본 태생이 탐욕 덩어리였다. 거절하는 그림도 이상해서, 돈주머니를 받고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마차를 끌고 나왔다.
넬라가 피곤해하길래 마차에 태웠고, 내가 마부석에 앉았다.
마차를 조용히 끌고 가는데, 그녀가 하품하며 말했다.
“거짓말이에요.”
“뭐가 말입니까?”
“아이가 헛소리했다는 말이요. 아이가 방금 깬 것은 맞지만, 헛소리한 것은 아니란 뜻에요.”
“그래서요? 가서 주인이랑 아이를 놓고 삼자대면이라도 할까요?”
“그냥 제 눈에 걸려서 이야기해준 것뿐이에요.”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 그녀는 창가에 기대어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색색 얕은 호흡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잠이 든 모양이었다.
이 상황에서 잘도 자네.
‘피곤하겠지.’
사흘 정도 잠도 줄이면서 라웁 숲을 이동했다. 나야 잠을 안 자도 버티는 몸이니 상관없지만, 넬라는 아니었을 것이다.
용케 참았다고 해야 하나.
코룬 강까지는 푹 자게 둘 생각이었다.
조용히 덜컹거리는 마차.
빗길을 뚫고 가니, 잠시 미뤄뒀던 고민이 떠올렸다.
학살자의 갑작스러운 에토르 행(行).
전쟁 준비에 한창이어야 할 놈이 갑자기 에토르로 왜 가는 거지?
‘렌구아, 그리고 광인.’
에토르의 광인 작업은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학살자가 직접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렌구아의 신명 각성이 마음에 걸렸다. 렌구아의 각성은 소설에선 없었던 이벤트였으니까.
직접 가서 확인해보는 게 가장 확실하긴 한데,
‘록터와 칼이 먼저야.’
무엇이 되었든 이 둘의 확보가 먼저였다.
쏴아아아아아아―
“……징하게 내리네.”
폭우에 젖는 질퍽한 땅 때문에 마차 속도가 더 느려졌다.
그래도 마차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걸어서 움직였으면 넬라가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투레질하는 말들을 다독이며 쏟아지는 빗줄기를 올려다봤다.
“록터의 신명 각성은 과연 이뤄질까?”
폭우를 보니 록터가 떠올랐다.
이처럼 소나기가 퍼붓는 날에 각성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로 인해 많은 것이 변했다.
그건 록터의 운명도 마찬가지.
첫 영웅의 탄생 구절이 떠올랐다.
[…다 죽인다.]
가족의 묘비 앞에서 서럽게 울던 올곧은 기사. 빗방울과 함께 더 많은 물방울이 뺨을 타고 흐른다.
기사는 많은 감정이 교차하는 눈동자로 블라이어의 깃발을 올려다봤다.
[일평생을 지켰던 가문이여, 동고동락했던 내 사랑스러운 영지여. 그 찬란했던 나의 고향, 영지 블라이어여.]
기사는 검자루를 꽉 움켜잡았다.
기사의 눈에 어느새 붉은 눈물이 흐른다.
배덕의 기사, 록터 펠리스.
[그 모든 것을 내 손으로 베어내리.]
비 오는 그날, 영웅으로 탄생했던 한 기사의 마지막 구절이었다.
* * *
후―
상인은 가슴을 부여잡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차를 타고 사라지는 주술사들이 보인다.
진짜 죽다 살아난 기분이었다.
순순히 마차를 받고 떠난 걸 보니, 며칠 전에 사라진 주술사들의 일로 자신을 찾아온 게 아닌 모양이었다.
“아빠!”
딸이 문을 열고 후다닥 달려오자 상인은 딸을 안아 올렸다.
딸의 온기가 느껴지자 줄곧 딱딱했던 표정이 부드럽게 풀렸다. 그리고 딸이 자신의 곁에 있음에 다시금 안도했다.
며칠 전 주술사들이 찾아와 마을의 어린아이들을 노렸다.
재산을 내놓고, 빌어봐도 소용없었다. 반항하면 주술에 당해 장난감처럼 죽을 뿐이었다.
빌어도, 부탁해도 소용없자 저주를 퍼부었다.
나도 데려가라고.
서로 낄낄거리던 주술사들이 재밌다는 듯 손을 뻗는 순간, 모든 이들의 뇌리에 여인의 목소리가 박혀 들었다.
[댕댕아, 물어]
그 광경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흐릿한 형체이지만 거대했다.
새하얀 이빨만 보인 것 같았다.
날카롭지만 걸리는 순간 주술사들은 고깃덩어리처럼 뜯겨 나갔다.
바닥에 남은 건 흥건한 핏자국뿐, 주술사들은 삽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목소리 주인의 손짓 한 번에 모든 흔적이 지워졌다.
그때 그녀를 보았다.
[튀자.]
상인은 두 눈을 감았다.
긴 챙을 둘러쓴 마녀의 존재가 뇌리에 박혀 잊히지 않았다.
그 압도적인 살육 앞에 기억나는 건 하나뿐이었다.
상인은 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머리에 달린 작은 리본.
상인은 그 붉은 리본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 * *
“머엉!”
“쉿! 조용해. 케로스.”
릴리는 손가락을 튕겨 검은 강아지의 이마를 가볍게 때렸다.
딱밤을 맞은 강아지는 부르르 떨더니 입을 앙 다물었다.
두 귀를 쫑긋 세운 검은 시바견은 인형처럼 행동했다.
릴리는 어깨에 매달린 작은 강아지 인형(?)을 쓰다듬고는 다가오는 주인장을 바라봤다.
얼굴을 가린 로브를 갈무리하고 고개를 돌리자, 식당 주인은 쭈뼛쭈뼛 다가와 식탁에 음식을 내려놨다.
릴리는 음식을 보며 눈을 반짝였지만, 이내 헛기침을 하며 말없이 기다렸다.
“피, 필요한 게 더 있으십니까?”
“생고기.”
“…새, 생고기?!”
“신선한 피가 많은 것으로.”
“네, 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새파랗게 질린 식당 주인은 도망치듯 홀을 나갔다가 벼락처럼 접시에 생고기를 담아왔다.
생고기 냄새에 개처럼 생긴 인형이 들썩들썩 움직이자 식당 주인은 기겁하며 두 손을 내밀었다.
본능적인 방어 행동인데, 릴리는 다른 뜻으로 받아들였다.
드디어 가져온 황금을 사용하는 건가!
품에서 주섬주섬 황금 덩어리를 꺼내 건넸는데, 주인장은 오히려 살려달라고 빌며 무릎을 꿇었다.
블라이어에 들어선 후 몇 차례 본 반응이라 릴리는 입술을 삐쭉 내밀곤 황금을 도로 넣었다.
오늘도 황금을 사용하지 못했다.
주인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부리나케 홀을 벗어났다.
“할머니 말로는 인간은 돈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왜 아무도 돈을 안 받지?”
“멍!”
“그치? 일단 먹고 생각하자.”
음식을 앞에 두고 생각하는 건 그녀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릴리는 편히 먹기 위해 망토를 벗어 의자에 걸었다.
붉은 망토.
며칠 전 주술사들을 죽이고 빼앗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