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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119화 (119/130)

#119화 각성 신호탄(4)

달그락. 달그락.

침묵이 흐르는 공간.

식기 부딪치는 소리만 조용히 들렸다.

그런 탓일까, 릴리는 오물오물 음식을 씹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식당인데도 내부가 휑했다.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들어오자 하나둘 빠져나가더니 다신 들어오지 않았다.

인형인 척 연기하던 케로스만 눈치 안 보고 생고기를 씹고 있으니 괜스레 신나 보였다.

“이건 또 색다른 반응이네. 역시 인간들은 모르겠어.”

위쪽 지역의 반응은 이곳과 정반대였다.

식당을 가도, 길을 물어도, 숲이나 언덕에서 쉬고 있어도 사람들이 찾아왔다.

전부 남자들이었고, 눈빛에는 끈적한 욕망이 담겨 있었다.

죽이진 않았다. 하나둘 죽이다 보면 끝도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때부턴 로브를 벗지 않았다.

경험을 통해 안 것이다. 로브를 벗으면 귀찮은 일이 생긴다는 것을.

“황금에도 반응이 없고.”

식탁에 놓인 황금 덩어리를 툭툭 치며 회상에 잠겼다.

얼굴을 가린 뒤에도 황금 때문에 여러 가지 말썽이 일어났다.

큰 황금 덩어리를 본 인간들은 처음에는 웃으며 대화를 걸어왔지만, 눈빛과 목소리, 행동에서 거짓된 감정이 느껴졌다.

상점을 가거나, 무엇을 살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거래하지 않았다.

세상 물정은 모르지만, 오르타들을 통해 보고 배운 것이 있었다. 거짓된 감정을 가진 자들과 거래하면 손해 본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퉁명스럽게 무시하니, 그 끝은 대부분 같았다.

우악스러운 손길 아니면 날카로운 쇠붙이를 들이밀었다.

죽이진 않았다.

대신 돈을 빼앗았다.

그때 황금이 아닌 다른 것으로도 거래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마녀들과 여행을 다닐 때 모두 배울 수 있는 것들이지만, 릴리는 배우는 것을 극도로 귀찮아하는 성격이라 모든 것을 부딪치며 새로 배워야 했다.

작은 마을들을 거쳐 처음으로 큰 마을이라 생각했던 곳에 방문했을 때, 그녀는 영지 병사들과 마주쳤다.

[마녀?]

그 당시엔 복장이 문제였다.

그래서 한동안 병사들이 없는 장소만 찾아다녔다.

마을 한곳, 또 다른 곳을 방문할 때마다 그녀는 사건과 사고를 몰고 다녔다.

케로스가 마구간에서 말들을 잡아먹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검은 강아지는 흔했지만, 인간들의 경악 어린 반응을 보니 케로스는 이상한(?) 강아지가 맞았다.

언제부턴가는 손거울을 항상 들고 다녔는데, 귀찮은 일이 발생할 것 같으면 손거울로 최면을 걸어 사람들의 기억을 지웠다. 다만, 최면에 걸리지 않는 인간들이 더러 존재해서 사람을 홀리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외모.

손거울.

검은 강아지.

그리고 마녀.

소문이 알음알음 퍼지자 무기를 든 자들이 찾아왔다.

노예 사냥꾼, 용병이 대부분이었는데 모두 돈을 노리고 움직이는 인간들이었다.

몇 놈 잡아서 물어보니, 블랙마켓이라는 곳에선 마녀가 큰돈이 된다나?

그렇게 블랙마켓을 알게 됐다.

이 복장으로 다니면 더 귀찮은 일이 발생할 것 같아서 휴식과 변장을 할 마을을 찾고 있을 때, 한 마을에서 더럽고 추악한 영력의 잔재들을 만났다.

흑주술사들.

마녀들을 사냥해 그 신체로 주술력을 높이는 악질 중의 악질들이었다.

인간들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흑주술사들을 보는 순간, 마녀들이 사냥당했던 과거가 떠올랐다.

그녀는 처음으로 살심(殺心)을 드러냈다.

피바람이 불어닥친 자리에 인간들에게 빼앗은 재물을 놓고 왔다.

빨래 막대에 널린 옷값이었다.

“숲을 나오고 얼마나 지났지?”

“크릉.”

“그렇게나 오래됐어? 시간 참 빠르네.”

수개월이 지났다.

목적을 가지고 바깥세상에 나왔지만, 그녀는 어느새 목적을 잊고 돌아다니는 데만 집중했다.

인간들의 세상은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정적인 마녀의 숲과 달리 인간들이 모인 곳은 언제나 자극적이고 동적인 분위기로 가득 찼다.

하루하루가 살아있는 느낌이랄까.

마음에 들었다.

“응?”

손등이 간지러웠다.

시선을 돌리니 케로스가 할짝대고 있었다.

배부르면 잡생각에 빠지곤 했는데, 케로스가 늘 이렇게 신호를 보내줬다.

“다 먹었어?”

“멍!”

“부족해? 그럼 다른 식당으로 가자. 이 식당에 있는 메뉴는 다 먹어봤거든.”

숲을 나오고서 한 가지 알게 된 것이 있었다.

숲에서 먹던 마녀들의 음식은 음식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풀과 약초, 짐승의 알과 나무 열매로 이뤄진 간소한 식단.

릴리는 바깥세상에서 맛의 신세계를 경험하고 있었다.

고기.

그래, 고기다.

인간들은 육류로 다양한 요리를 조리했는데, 그 맛이 중독적이라 이젠 숲에선 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오르타들은 왜 이런 음식들을 알려주지 않았지? 나중에 마녀들에게 자신이 먹어본 새로운 음식들을 전도할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일단 많이 먹어봐야 했다.

“댕댕아, 가자!”

릴리가 오른쪽 어깨 위를 툭툭 치자, 케로스의 꼬리가 축 늘어졌다. 인형 놀이를 하기 싫다는 표현이지만, 어쩔 수 없다.

그동안 변장을 여러 번 하고 돌아다녔는데 몇 차례 마녀로 의심받았던 적이 있었다.

검은 강아지.

케로스의 존재 때문이었다.

“넌 너무 눈에 띈다고. 빨리 와.”

“멍!”

“뭐? 왜 나한테 그러냐고? 마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릴리는 인정하지 않았다. 케로스의 목덜미를 붙잡곤 어깨에 올려놨다. 축 늘어진 케로스는 단념한 듯 보였다.

“아, 망토.”

릴리는 의자에 걸린 붉은 망토를 챙겼다. 야영할 때 춥다고 투정을 부렸더니 케로스가 덮고 자라고 입 속에서 뱉어낸 망토였다.

어디서 났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돌아다니는 동안 이것저것 삼키고 다니다 보니 어디서 생긴 물건인지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릴리도 케로스도 주술사를 잡아먹고 나온 전리품임을 알지 못했다.

식당을 벗어나 거리 한가운데로 나오니 분위기가 또 이상했다.

인간들이 자신을 힐끔거리며 피해 갔다.

릴리는 자기 몸을 요리 조리를 살폈다.

얼굴도 가렸고, 영력도 숨겼다.

손거울도 품에 넣었다.

케로스도 인형으로 변장시켜 어깨에 달고 다녔다.

이게 이상한 건가?

“케로스 너 때문일까?”

“크릉.”

“아니면 말고.”

식당이 보이자 릴리는 발걸음을 멈췄다. 메뉴판을 쭉 훑어본 그녀는 흡족한 미소를 띠며 식당으로 들어갔다.

처음 보는 음식의 이름 보였다.

그녀의 여행 계획은 단순했다.

마을을 떠나기 전에 사람들에게 가장 가까운 마을이 어딘지 물어본다.

그 마을로 간 뒤 식당들을 쭉 둘러본다.

식도락을 마친 뒤엔 다음 마을로 간다.

아서 클레이튼이란 존재는 이미 머릿속에 지워진 지 오래였다.

“케로스, 우리 당분간 이곳에 머물까?”

여섯 군데의 식당을 방문한 뒤 배를 툭툭 두드리며 밖을 나왔다.

이 마을, 먼가 굉장히 멋졌다.

음식값을 안 받았다.

게다가 먹기 편하게 주변 자리까지 모두 비워줬다. 가는 길에는 또 어찌나 공손히 인사를 하는지 그동안 마녀로서 고된 경험을 떠올려보면 이곳은 천국이 맞았다.

“근데 음식들이 별로야. 작은 마을이라서 그런가?”

“크릉.”

“맛있었다고? 내 입맛이 까다롭다는 거야?”

케로스의 이마를 가볍게 튕기곤 그럴 수 있겠단 생각을 들었다.

아쉽지만, 이 마을에서 더는 먹고 싶은 것이 없었다.

해가 지기 전에 떠나기로 마음먹고 다가오는 사람 중 아무나 붙잡았다.

가까운 마을을 물어보려고 한 것뿐인데,

“…힉! 사, 살려주십시오!”

무릎을 꿇고 이마를 코에 박았다.

상태가 이상해서 다른 인간을 물색해봤더니, 주변이 텅 비었다.

다 어디 갔지?

“부끄럼을 타나?”

확실히 이곳은 이상한 마을이었다.

* * *

덜컹―!

릴리는 마차 뒤편에 걸터앉아 하늘을 올려다봤다.

소나기가 시원하게 쏟아지면서 걸어가려고 했던 계획이 마차 여행으로 바뀌었다.

마차를 구하는 건 쉬웠다.

다음 마을로 가는 마차를 붙잡아 태워달라고 부탁했는데 너무 쉽게 허락받았다.

마부 빼곤 타고 있던 인간들도 모두 내렸는데 덕분에 편한 자리를 얻어 타게 됐다.

인간 중에는 친절한 이들도 많다는 것을 그때 느꼈다.

“블라이어라…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어디지?”

다음 마을 행선지가 정해졌다.

대도시 블라이어.

수십 곳의 마을을 전전하고 돌아다니며 수많은 마을 이름을 들어봤지만, 이처럼 익숙한 지명은 처음이었다.

릴리는 미간을 좁힌 채 고민했다.

“멍!”

고개를 돌리니 마차 자리에 꼬리를 흔들며 살 것 같다는 케로스가 있었다.

사람이 없는 곳이 지금 녀석이 가장 편할 때였다.

“댕댕아, 블라이어가 어딘지 알아?”

“멍!”

“아, 맞아. 거기였어!”

케로스가 알려줬다.

우리의 처음 목적지.

토바른 지역 마을들을 돌고 돌아 수개월 만에 처음 정했던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었다.

블라이어를 듣자, 그녀는 그제야 잊고 있었던 목적을 상기시켰다.

오르도르 숲은 나온 진짜 목적 말이다.

‘아서 클레이튼!’

한 사람의 신명이 불현듯 떠오르자, 그녀는 품에서 손거울을 꺼내 들었다.

오랜만에 살펴볼까?

그것도 잠시, 손거울에 자기 얼굴이 비치자 얼굴을 요리조리 돌리며 자기 얼굴을 감상했다.

“멍!”

“아! 맞아!”

또 목적을 잊을 뻔했다.

릴리는 손거울을 잡고 두 눈을 감았다.

주문을 외우자 손거울에서 영롱한 빛이 흘러나왔다. 거울 표면에 글자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눈을 뜬 그녀는 거울에 새겨진 신명 목록을 바라봤다.

[아서 클레이튼― 신명 사냥꾼(성(Divine))]

[제3의 정신 방벽]

[세이렌의 찬가(Siren's Hymn)]

[레토니칼스의 심장(동화율 25%)]

[이종족의 길잡이]

[염원의 반지(생존)]

“변화가 생겼네.”

신명 목록에 많은 변화가 추가됐다.

이종족의 길잡이는 이종족과 관련된 목록일 테고, 염원의 반지? 이건 무슨 아이템이지?

신명 목록에 추가될 정도라면 세계의 눈이 인정한 물건이란 뜻이었다.

심장의 동화율이란 숫자도 표시됐는데, 이것도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모두 궁금증을 불러오는 신명 목록뿐이다.

“맞아. 이런 궁금증 때문에 그를 찾고 있던 거였어.”

오직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신명.

그동안 왜 잊고 살았던 것일까.

뭔가 떠오르자, 릴리는 입술을 내밀곤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댕댕아, 이것도 만월의 저주 때문일까?”

“멍.”

“그렇지? 저주 맞지? 하, 그래도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자꾸 이상한 데 정신이 팔리거든.”

릴리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월의 재능’은 축복이자 저주란다.]

장로 할머니의 말을 떠올랐다.

뭐든 한 번 보면 마나 흐름부터 발현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악마 같은 재능.

하지만 이 재능의 지독한 저주는 한 가지에 집중할 수 없는 게으른 태생에 있다.

무엇을 보던 빨리 질리고 쉽게 포기했다. 뭐든 이해하지만 익히려 들지 않았다.

오르타 전원이 그녀의 스승으로 자리한 이유이기도 했다.

한 명으로는 그 천성적 게으름을 감당할 수 없었다.

릴리는 드러누운 채 쏟아지는 비를 멍하니 올려다봤다.

손거울에 비친 신명 목록이 스르륵 사라지더니 하나의 이름만 덩그러니 남았다.

아서 클레이튼.

“어딨니? 너.”

갑자기 거울의 존재가 보고 싶었다.

그런 감성적인 분위기도 잠시였다.

“드르렁―!”

“멍….”

케로스는 릴리의 망토를 쭉쭉 당기며 그녀를 깨우려고 했지만, 그녀를 코를 골며 잠에 빠져들었다.

이미 늦었다.

한 번 잠들면 소나기가 퍼붓던 불이 나든 산사태가 쏟아져도 그녀는 일어나지 않았다.

“…….”

마차가 멈춰 섰다.

잠든 그녀를 보고 마부가 마차를 세운 것인데, 검은 강아지를 본 순간 마부는 온몸이 딱딱하게 굳으며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붉게 물든 눈동자.

움직이면 죽을 것 같은 공포가 옥죄여 왔다.

“가, 갈 겁니다. 가요.”

마차는 다시 조용히 출발했다.

케로스는 한숨을 푹 쉬곤 릴리의 머리맡 위에 웅크렸다.

마차는 조용히 블라이어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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