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120화 (120/130)

#120화 각성 신호탄(5)

할짝할짝―

고개를 요리조리 돌리며 간지러운 감촉을 피하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케로스의 집요한 공격에 릴리는 투정을 부리며 눈을 떴다.

“응? 여긴 어디야?”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눈을 비비며 주변을 둘러봤다. 빗소리만 들리는 마차 안에는 둘 뿐이었다. 마부는 사라진 뒤였고, 마차만 울창한 숲 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녀는 소나기를 퍼붓는 밤하늘을 가리키며 케로스를 바라봤다.

“나 오래 잤어?”

“멍.”

“반나절? 얼마 안 잤잖아. 아침까지 자게 놔두지.”

하품을 하며 진지하게 더 잘까 고민하는데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비바람이 불어오는 뻥 뚫린 마차 공간.

귀찮은 것 다음으로 싫은 건 추위였다.

따뜻한 여관에서 쉬는 게 더 낫다는 결론이 나오자, 릴리는 로브를 둘러쓰고 바깥으로 나왔다.

세찬 비가 로브를 두들겼다.

그녀가 나오자 케로스가 마차에서 뛰어내린 뒤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근처 마을을 찾는 건 언제나 케로스의 몫이었다.

핏―

케로스가 사라진 순간 릴리의 모습도 땅으로 푹 꺼졌다.

* * *

“와, 장난 아니다.”

숲을 나오자 잘 닦인 도로가 시야에 들어왔다.

넓은 도로 위로 수많은 인파가 오고 가는 풍경이 펼쳐졌다. 상인, 용병 등 한눈에 직업을 알 수 있는 익숙한 복장도 많이 보였다.

마차와 수레도 여기저기 굴러다녔다.

볼거리 천지였다.

숲을 나온 이래 가장 많은 인간을 보는 것 같았다.

길을 따라 시선을 쭉 옮기니 저 멀리 큼지막한 성벽이 눈에 들어왔다.

마을 몇 개를 붙여놔도 저 성벽보단 작을 것 같았다.

대도시 블라이어.

릴리는 아주 큰 성벽을 본 순간 저곳이 목적지라는 것을 깨닫곤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작은 한숨 소리와 함께 목덜미로 폭신한 감각이 느껴졌다.

인형 놀이를 시작한 케로스의 머리를 쓰다듬곤 숲을 나와 길 쪽으로 이동했다.

인파 속에 파묻혀 인간들을 구경하고 싶었다.

“……?”

하지만 그녀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길 위에 서기 무섭게 길게 늘어진 행렬에 구멍이 생겼다.

마치 보이지 않은 벽이 존재하는 것처럼 모든 이들이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그녀와 거리를 벌렸다.

그전에 방문했던 마을과 비슷한 반응이지만, 묘하게 달랐다.

머릿수가 엄청 많아서일까.

시선을 무작정 피했던 그들과 달리, 이곳에선 감정을 담은 눈동자 일부가 자신을 똑바로 바라봤다.

두려움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짙은 원망.

늘 사랑만 받고 자랐던 그녀에겐 어색하고 외로운 감정이었다.

설마 이전 마을도 저런 눈빛이었을까?

관심이 없었으니 알 도리가 없었다.

이유를 물어볼까 고민하고 있을 때, 성벽 쪽에서 큰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그르르르륵!

“……!”

톱니바퀴가 굴러가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철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웅성거리던 소란이 일순간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가라앉았다.

무슨 일인지 고개를 빼꼼 내밀며 저 너머를 바라보는데 몰려 있던 인파가 빠르게 반으로 갈라지더니, 그 사이에서 일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

붉은 물결.

망토를 두른 무리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주변에 몰려 있던 사람들은 그들이 오기도 전에 허겁지겁 도망치기 바빴다.

더럽고 추악한 영력들이 사방을 가득 채웠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기운.

‘흑주술사.’

릴리가 그들의 정체를 정의했을 때, 붉은 물결이 그녀 앞에 멈춰 섰다.

가만히 있다 보니 홀로 그들과 마주한 상황에 펼쳐졌다.

그들은 릴리를 조용히 주시했다.

잠시 후, 선두에 있던 주술사가 릴리에게 손을 뻗었다.

우우웅―

“…….”

릴리는 걸친 망토를 살폈다.

망토가 나직하게 떨리며 울기 시작했다.

저 주술사가 영력을 일으키자 망토가 반응을 보였다.

붉은 망토.

민무늬 붉은 망토야 상점 어딜 가든 쉽게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신호에 맞춰 특유의 영력을 뿜어내는 망토는 어디에서도 판매하지 않았다.

평범한 망토라 생각했는데, 영력에 공명하며 음울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영력 동화 현상.’

릴리는 망토의 현상을 한눈에 알아봤다.

마녀들도 신분 확인을 위해 자주 사용하는 주술이었다. 마녀로 위장하여 숲으로 들어오는 이들이 해마다 수백 명은 되기 때문이다.

이 망토는 신분증 같은 것이었다.

릴리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멀찍이 거리를 둔 채 굳어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수백 수천의 인파들.

걸친 옷들을 살펴보니 붉은 망토를 걸친 이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인간들이 자신에게 보인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마녀들의 긴 챙처럼, 붉은 망토는 이곳 흑주술사들의 상징 같았다.

조금만 신경 쓰면 알 수 있는 반응이지만, 그녀는 흥미를 느끼지 않은 것엔 철저히 무관심을 보였다.

생각하는 것 자체가 너무 귀찮거든.

영력을 거둔 주술사는 곁의 주술사들과 대화를 나눴다.

‘방금 망토의 신분을 확인했어.’

릴리의 눈동자가 순간 샛노랗게 번뜩였다.

만월의 재능인 만월의 눈을 펼친 순간 망토에서 흘러나오는 영력 배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배열을 삽시간에 파악하곤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저주.

이 망토의 주인은 저주 계열의 흑주술사 같았다.

“저주 학파 아그레일드.”

“…….”

“왜 늦었지? 복귀 신호를 여러 차례 보냈을 텐데?”

선두에 선 이가 대장인 모양이었다.

쇠 긁는 듯한 탁한 소리, 성별 구분이 힘든 중성음.

주술로 변조된 목소리다.

뒤가 구린 흑주술사답게 앞선 이들 중에 얼굴을 드러낸 주술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마 자신을 부른 아그레일드란 이름도 진짜가 아닐 확률이 높았다.

영력 동화를 통해 서로의 신분을 확인하는 모양인데, 릴리에겐 다행인 일이었다.

주술로 이야기하면 오히려 편했다.

세상 물정은 하나도 몰라도, 주술에 관해선 장로 할머니보다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흑주술이라면 그녀가 그나마 관심 있어 하는 분야였다.

복귀 신호?

듣는 순간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잃어버렸다.”

“통신구를 잃어버려? 다른 동료들은 어디 있지? 셋은 항시 같이 다닌다는 둥지의 원칙도 잃어버렸나?”

“…….”

“어디서 오는 길이지?”

“위쪽 마을.”

“…위쪽 마을?”

주술사의 반응이 이상한 듯 보이자, 릴리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기억하는 게 귀찮아서 그렇지, 일단 집중하면 한 번 들었던 건 모두 기억하는 그녀였다.

붉은 망토가 주술사의 것이라면 주술사를 만났던 마을일 것이다.

“반디 마을이다.”

“임무가 뭐였지?”

“제물 수급.”

“흠….”

릴리는 대답을 하며 주술사 무리를 살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총 머릿수는 스물다섯.

많다.

그중에는 주술사가 아닌 존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붉은 갑주로 완전히 무장된 큰 덩치들이 보였다.

생기(生氣)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 만월의 눈으로 살펴보니 속 안이 텅 비어 있었다. 수많은 영혼을 붙이고 조립해서 만든 혼탁하고 이질적인 기운만 보였다.

‘주술 인형이네.’

흑주술사들의 대표 인형인 반다이크 같았다.

무게를 두면 효율이 엄청나게 떨어질 텐데, 왜 반다이크의 포맷을 저렇게 해놨지?

보통 주술 붕대로 단단히 둘러 형체를 유지했는데, 이것들은 단단한 갑주로 도배해놨다.

집요할 만큼 방어에 신경 쓴 형태였다.

잡생각도 잠시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선두에 선 주술사 곁에 머물던 다른 주술사가 자신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영력이 뭉치는 것이 보였다.

‘주술? 들킨 건가? 어디서 걸린 거지?’

판단은 빨랐다.

흑주술사 열다섯, 주술 인형 열 개체.

케로스 없이는 부담스럽다.

문제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여기서 케로스가 본모습을 보이면 숲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지도 몰랐다.

그건 싫었다.

인간들의 세상을 더 구경하고 싶었다.

케로스에게 도주 신호를 보내려고 하는데, 주술사의 손에서 익숙한 영력 배열이 만월의 눈에 담겼다.

착용한 망토에서 흘러나왔던 영력 배열과 유사한 기운이었다.

저주다.

게다가 기운이 미약했다.

릴리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주술사가 펼치는 저주의 배열을 흉내 내서 영력을 조합했다.

어렵지 않은 기본 조합이라 가능할 것 같았다.

잠시 후, 주술사가 저주를 쏟아내자, 릴리도 똑같은 저주를 퍼부었다.

“…큭!”

주술사의 몸이 검게 물들더니 비틀거렸다. 그 모습을 보곤 릴리도 똑같이 비틀거리곤 천천히 저주를 풀어냈다.

저주를 풀어내는 과정은 어렵지 않았다.

배열을 역으로 돌리면 되는 것이었으니까.

저들이 이 해주 과정을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면 경악할 테지만, 그녀에겐 그리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다.

주술사가 몇 차례 저주 주술을 펼치자, 릴리는 빠르게 반응하며 저주를 똑같이 흉내 냈다.

처음 보는 저주의 형태지만, 기본에 맞춰져 있어서 어렵지 않았다.

잠시 후, 선두에 선 이가 가로막았다.

“그 정도면 충분해. 의심할 필요는 없겠어.”

최근에 둥지에서 개발한 저주 계열을 모조리 펼쳤다.

신분은 확실했다.

굳이 한 번 더 확인 작업을 한 이유는 최근 라웁 숲으로 파견된 주술사들이 살해당한 사건 때문이었다.

마스터의 지시가 떨어졌다.

셋을 이루지 않은 주술사는 신분을 반드시 확인하라고.

흑주술사들은 대부분 범죄자 출신이라 신분을 밝히는 조건이면 영입이 힘든 경우가 많았다.

각인된 망토로 1차 신분을 확인하고, 둥지에서 개발한 최신 주술로 2차 확인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받아라.”

“……?”

주술사가 품에서 던진 건 머리통만 한 수정구였다.

처음에는 통신구인 줄 알았는데 통신구의 반경을 늘려주는 보조 도구 같았다.

‘이런 것도 있었어?’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수정구를 받아든 릴리는 눈앞의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의심은 피한 것 같은데, 어째 상황이 꼬인 것 같았다.

“마스터의 지시가 떨어졌다. 너도 지금부터 합류해라.”

“…어?”

“이동한다.”

주술사들은 인파를 헤집으며 빠르게 이동했다.

분위기에 휩쓸려 자신이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는 주술사 무리를 얼떨결에 따라갔다.

뒤를 돌아보니 대도시 블라이어가 점점 멀어졌다.

따스한 욕조와 포근한 침대, 최고로 기대되는 대도시의 음식들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있다.

‘…어쩌지?’

대도시에서 시간을 보내며 아서 클레이튼을 찾으려고 했는데 계획이 틀어졌다.

분위기를 살폈는데 이탈은 당분간 힘들 것 같았다.

‘상황을 봐서 튀면 되겠지.’

신체 강화를 했는지 주술사들의 몸놀림이 상당히 빨라서 릴리도 일단 이동하는 데 집중했다.

마차로 가기 힘든 가파른 숲 사이를 빠르게 주파했는데, 쏟아지는 비에도 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근데 어디로 가는 거지?

의문은 그녀가 쥐고 있는 수정구를 통해 풀 수 있었다.

통신구의 보조 도구.

메인 통신으로 사용하는 빛나는 수정구는 무리를 이끄는 주술사가 가지고 있었는데, 그 안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목소리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듯 실시간으로 정보를 교환하는 것처럼 보였다.

[블라이어 쪽은 어찌 됐지?]

“가용 전력 전부가 출동했다.”

[반다이크 모두 중갑으로 무장시켰나?]

“무장 완료했다.”

[황금빛의 존재를 발견했다. 되도록 그 존재를 만나면 물리적인 피해는 피해라.]

“정체 파악은 끝났나?”

주술사의 물음에 일순간 시끄러웠던 통신구가 침묵했다. 잠시 후, 나른한 사내의 목소리가 수정구에서 흘러나오자 주술사들의 기운에 긴장감이 서렸다.

무리가 멈춰 섰다.

누구기에 달리는 것도 멈춘 거지?

[블라이어 성주다.]

“…충!”

[‘알렉스 마르샤’로 판명. 베네타의 신성(新星)으로 헌트(Hunt)의 일원으로 떠오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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