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제발 닥치고 있어라
“고맙다.”
강에서 돌아온 록터가 가슴 위로 주먹을 올리곤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칼은 록터의 인사에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적들에게 포위되어 도움을 줬을 때도, 가족들의 시신을 되찾아왔을 때도 감정을 표하지 않았던 그가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칼은 누군가의 인사가 이토록 묵직할 수 있구나, 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네 부탁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
“이미 조건은 말했을 텐데.”
“복수를 도와달라는 것 말인가?”
칼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자, 록터는 희미하게 웃었다. 복수의 대상은 달랐지만, 복수라는 것에서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복수?
도와준다.
그 마음을 이젠 누구보다 잘 알 것 같았으니까.
록터가 조용히 손을 내밀자, 칼은 미소를 띤 채 손을 맞잡았다.
“헛고생이 아니라서 다행이네.”
“최선을 다해 도와주겠다. 대신… 나를 도와다오.”
“설마 블라이어에게 복수하려고?”
록터가 고개를 끄덕이자, 칼은 난감한 듯 고개를 흔들었다.
중견 조직인 크룩스조차 타인의 힘을 빌려 복수를 이루려고 하는 처지에 블라이어?
블라이어 성주 한 마디면 크룩스도 전멸을 피하지 못한다. 자신들 따위는 목에 손 긋는 시늉 한 번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너무 큰 산이야.”
“대신 싸워달라는 억지스러운 부탁은 하지 않겠다. 지금처럼 조력만 해줘도 충분하다.”
“생각한 계획이라도 있나?”
“이제 막 탈출했는데, 있을 리가… 전혀 없다. 하지만 맞서다 보면 길이 보이겠지.”
“…….”
안 되면 혼자라도 싸울 인간이라 뭐라 말도 못 하겠다.
‘록터 펠리스를 도울만한 세력이 남아 있으려나?’
칼 일행은 그동안 블라이어에 둥지를 틀고 록터의 소식이 들리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면서 블라이어의 정세에 대해서도 빠삭하게 조사했는데, 현재 록터를 도울 세력은 와해되어 그 명맥조차 불투명한 상태였다. 블라이어 성주의 손속이 그만큼 잔혹하고 빨랐다는 의미였다.
정적 제거에 거침이 없다.
한 마디로 현재 록터 주변엔 자신이 전부였다.
록터의 단단한 눈빛에 칼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녀석의 말이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칼은 아서를 떠올렸다.
녀석의 조언대로 록터를 영입하는 건 성공했다.
엘튼이 확신했던 것처럼, 그는 크룩스를 무너뜨릴 무력을 지녔다.
복수를 도와줄 날카로운 검은 얻었는데 양날검이었다. 록터에게 달라붙은 악재가 너무나도 많았다.
블라이어와 적이 됐고, 100만 골드란 현상금이 붙으면서 실력 있는 노예 사냥꾼들의 표적이 됐다.
더 큰 문제는,
‘당장 갈 곳이 없어.’
어딜 가든 사냥꾼들의 눈이 존재했다. 크룩스의 눈을 피해 수년간 도주 생활을 해왔지만, 그때와 비교해서 지금이 열 배는 더 빡신 것 같았다.
근데 진짜 어디로 가지?
“우선 이곳을 벗어나서 생각하자고.”
아서를 믿고 록터에게 배팅을 했고 이미 물리기엔 늦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단점이 확실한 만큼, 장점도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실력이나 신뢰에 대해선 의심할 필요가 없는 사람.’
얼굴과 행동, 눈빛이 말한다.
한눈에 봐도 그는 믿을 수 있는 기사였다.
자신만 이렇게 생각할까?
아니, 대부분 록터를 보는 순간 ‘신뢰’를 떠올릴 것이다. 이는 아서의 조언처럼 사람을 끌어당길 수 있는 엄청난 잠재력이 될 수 있었다.
‘이 위기만 벗어나면 분명 기회가 있을 텐데.’
당장 벗어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만큼 카멜의 포위망은 지독했고, 그 압박감은 움직이면서 더욱더 강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
칼의 표정이 눈에 띄게 딱딱해지기 시작했다.
“마스터?”
“무슨 일이지?”
칼을 뒤따르던 록터는 칼이 갑자기 멈춰서자 이유를 물었다.
그건 엘튼도 마찬가지였다.
마스터의 특성은 위기 감별사.
마스터는 본능적으로 안전한 방향으로 루트를 정해 움직이기에 그 뒤를 따르는 것이 가장 안전했다.
블라이어에서도, 다른 곳에서도, 줄곧 안전하게 이동한 이유였다.
그런데,
“빌어먹을… 뭐지?”
칼은 주변을 서성이며 움직였는데 방향을 전혀 잡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어느 방향으로 가든 뒷골이 찌르르 울리고 가슴이 분탕질을 친다.
이 감각,
크룩스의 마스터가 자신에게 붐(Boom)을 먹었을 때의 그 감각이다. 어느 방향으로 이동하든 목숨이 위태롭다. 제자리에 선 채 칼은 욕설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X된 거 같은데, 이유가 뭐지? 어디서 잘못된 거야?”
하늘을 바라봤지만, 신호탄이나 다른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럴 때 내리는 소나기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환경이다. 그런데 상황이 변했다.
척후조를 쓰러뜨릴 때까지만 해도 안전했던 루트가, 지금은 사지(死地)로 변해 있었다.
칼은 고민에 빠졌다.
수많은 경험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결국, 판단을 내렸고 한 가지 결론에 다다랐다.
‘적들이 우리의 이동 루트를 모조리 꿰고 있다?’
말도 안 되는 가정이지만, 이것 말고는 지금 같은 감각을 설명할 수 없었다.
칼은 자신의 경험을 믿었다.
적들은 우리의 이동 루트를 파악할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움직여야 한다.
판단을 내린 칼은 근처 숲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록터가 그 뒤를 따르며 물었다.
“위치가 발각당했나?”
“몰라. 그런데 느낌이 너무 싸해. 적들이 어디서든 나타날 것 같다.”
칼은 말을 내뱉으며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 모습에 뒤를 따르던 일행도 무기를 꺼내 들었고, 칼도 검자루를 잡았다.
전투를 피할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적들이 나타나면?”
“나타난 적들을 빠르게 정리하고 그 방향으로 질주한다.”
“적들이 나타난 방향으로 도주한다고?”
“그래.”
“이유가 뭐지?”
“그게 포위망을 흔들기 좋거든.”
칼의 말에 록터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생전 처음 듣는 황당한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경험상으로 이 방식대로 움직이는 게 생존 확률이 가장 높았어. 믿어도 돼.”
“다른 방법은?”
“있었으면 진즉 내 주둥이부터 때렸을 거야.”
록터는 고개를 끄덕이곤 칼의 곁으로 바짝 붙었다. 적들을 빠르게 제거하려면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한다.
록터는 심호흡을 하며 전투를 준비했다.
* * *
“자, 잠깐만요.”
질퍽한 땅을 밟고 가고 있는데, 넬라가 내 옷자락을 확 잡아끌었다.
의도한 건 아닌데 그녀의 젖은 몸에 팔뚝이 닿자 부드러운 살결이 느껴졌다.
가, 가슴은 아니었지?
지금 상황에 내가 무슨 생각을.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는데, 넬라가 다급히 내 어깨를 툭툭 치며 귓가에 대고 작게 소곤거렸다.
“떴어요.”
“네? 떠요? 아, 설마……?”
넬라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곤 품에서 신명 도구인 나뭇가지를 꺼냈는데 영롱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신명의 빛이 분명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서님이 말한 신명의 주인이 맞아요.”
정말 내 말대로 이뤄지니 그녀는 무척 흥분한 모습이었다. 느낌이 싸해서 방금 뭔가 뜰 것 같다고 말했는데 정말 떴다.
빌어먹을.
맞췄는데 전혀 기뻐할 수 없었다.
“혹시 방향을 알 수 있습니까?”
“코룬 강 하류, 정확한 방향은 이쪽이에요.”
넬라가 팔을 들어 방향을 가리켰다.
“얼마 동안 방향을 잡아낼 수 있습니까?”
“각성의 여운을 생각하면 반나절 정도는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반나절. 그럼 아케인도 가능하겠죠?”
“저보다 훨씬 뛰어난 인물이니 당연하겠죠?”
짙은 한숨부터 나왔다.
“하, 염병, 미치겠네.”
록터, 이 꼴통 기사는 하루만 더 늦게 각성할 것이지. 왜 하필 이 타이밍에 각성해서 날 심란하게 만드는 것일까.
“반리.”
내 부름에 넬라 머리 위에서 부지런히 정찰하던 반리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없어? 진짜?”
“반리가 두 번은 묻지 말래요.”
“…아, 네.”
반리에게 부탁한 건, 이 주변에 서성거리던 주술사들의 기척을 확인해 달라는 것이었다.
마차의 흔적을 쫓아온 놈들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수가 많아져서 마차를 버리고 움직이던 차였다.
근데 방금 그 기척들이 모조리 사라졌다.
조금 전, 통신구에서 들린 학살자의 지시 때문이었다.
“모조리 코룬 강 쪽으로 움직인 건가?”
“우리에겐 다행 아닌가요?”
“글쎄요. 이게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네요.”
내 손에는 작은 수정구가 쥐어져 있었는데 수정구에선 여러 가지 대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주술사들이 쓰던 광역 통신구를 손에 넣은 것이다.
이 통신구는 반리가 마차에서 가지고 놀던 것을 빼앗은 것이었다.
반리가 넬라 몰래 빼돌렸는데, 멱살(?)을 흔들며 물어보니 반짝이는 구슬이 이뻐 보였다나?
도망치던 사냥조 주술사에게 빼앗은 것이라고 했는데, 난 구슬이 반짝였다는 부분에 집중했다.
‘구슬이 반짝였다. 통신구가 작동했다. 누군가에게 우리의 정보가 흘러갔다.’
이 광범위 통신구는 마탑의 전유물이다. 마탑은 폐쇄적인 집단이라 함부로 전유물이 된 물건들을 교환하지 않는다.
‘빌어먹을, 내 신명 정보가 이렇게 비싼 거였어?’
카멜이 내 신명 정보를 가지고 제대로 해 먹었다.
우리가 비에 쫄딱 젖으며 진흙 바닥을 걷고 있는 이유였다.
정체가 탄로 난 것이다.
‘그 주인에 그 정령 아니랄까 봐.’
하여튼 반짝이는 물건엔 사족을 못 썼다.
미리 알았다면 다른 방법을 세웠을 텐데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블라이어 영역에 깔린 전력들이 학살자의 원격 지시에 바로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건 예상치 못한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다행인 건 반리가 수정구를 챙겨왔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적들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었으니까.
“어쩌실 거죠?”
“아무래도 카멜의 유인책 같습니다.”
“네? 유인책이요? 누구를…….”
“저요.”
“아서님을요?”
“록터를 미끼로 저까지 사냥할 목적인 것 같습니다.”
알렉스 마르샤.
수정구를 통해 카멜이 내 존재를 파악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하나둘 밝혀지는 흔적을 통해 내 목적을 예측하고 모든 전력을 록터에게 집중시키고 있었다.
록터를 구하려는 의도가 파악 당한 것이다.
“그럼 위험한 거 아닌가요?”
“네. 위험하죠.”
“이제 어쩌죠? 다른 방법을 찾아볼까요?”
“아뇨. 그러기엔 너무 늦었습니다.”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카멜에게 시간을 주면 안 된다.
게다가 록터를 잃으면 모든 계획이 어그러진다.
카멜과 정면 대결은 내 입장에선 공멸과 같았다. 아레나와 베네타가 공멸하는 사이 학살자가 베네타를 무너뜨렸던 것처럼, 카멜과 베네타가 공멸하면 또 다른 세력이 토바른을 넘볼 것이다.
“달리면서 생각하죠.”
그건 안 된다.
토바른을 기반으로 나아가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려면 록터가 필요했다.
거친 빗속을 뚫으며 난 통신구에 집중했다.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주술사들의 목소리.
[사냥개 부대의 척후조가 하류 쪽을 맡고 있다.]
[코룬 강 도착. 우리는 상류부터 흔적을 찾아보겠다.]
[그럼 우리는 중간 지점을 맡지.]
[빗속이라 흔적을 직접 찾기 힘들다. 척후로 반다이크들을 나눠서 보내겠다.]
아직 록터에 관한 정보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아케인이 카멜 곁에 없는 건가?
이유야 어떻든 학살자 곁에 아케인이 머문다면 곧 알려질 정보였다.
‘사냥개 부대보다 먼저 도착할 수 있을까?’
통신구를 통해 대략적인 전력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주술사들의 둥지.
노예 사냥꾼.
그리고 사냥개 부대.
주술사들의 부대나 노예 사냥꾼은 얼마가 오던 무섭지 않다.
하지만 사냥개 부대는 부담스럽다.
그들은 물고 늘어지는 것에 특화된 녀석들이었다. 게다가 코룬 강 하류 쪽에 대기 중인 상태인 것 같았다.
녀석들에게 걸리면 분명 지능적으로 시간을 끌려고 할 테고, 그 사이 주술사들과 노예 사냥꾼 무리가 도착하면 무조건 죽는 게임이었다.
시간 싸움.
유인책이 펼쳐지기 전에 빠져나와야 한다.
“어디죠?”
“이쪽!”
넬라가 한쪽을 가리키자, 우거진 숲을 뚫고 미친 듯이 달렸다.
잠시 후,
콰아아아아아아-
빗소리를 뚫고 멀찍이서 흐릿한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코룬 강의 물줄기가 들려온다. 처음부터 하류를 목적지로 잡고 움직였다.
반리가 신호를 보내왔다.
주술사들이 주변에 있는 모양.
노출되는 건 사양이다.
목표가 우리로 바뀌면 곤란하거든.
우리는 숲 쪽을 길게 우회해서 코룬 강 하류 주변을 돌아다녔다.
‘록터라면 쉽게 당하진 않을 거야.’
누구에게 잡히든 록터 펠리스라면 수세 속에서도 능히 버틸 실력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빗줄기가 쏟아지면 잭과 하우엘의 특성이 무력화된다.
소나기가 퍼붓는 지금이 탈출할 기회였다.
다만, 가장 우려되는 한 가지.
난 긴장하면서 수정구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나오지 마라.
나오지 마라.
‘빌어먹을! 제발 닥치고 있어라!!’
학살자 카멜.
녀석이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상황이 급격하게 변했다.
범상치 않은 놈이라 어떤 짓을 할지 예측이 안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