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127화 (127/130)

#127화 합류

아서 클레이튼.

그 이름이 록터의 입에서 흘러나온 뒤로 칼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잠시 후, 칼이 물었다.

“그 녀석이 마지막에 뭐라고 했지?”

“에토르로 오라고 했다.”

“…에토르? 에토르 영지가 확실해?”

“그렇게 들었다.”

칼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느낌이 안 좋았던 장소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그 녀석의 조언이라 한 번 더 에토르를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마스터의 제자라며? 그런데 블라이어의 손가락? 그 녀석은 여기저기에서 뭘 하고 다녔던 거야?’

녀석의 스토리를 들었다.

카멜의 암살을 시도했다가 탈출한 뒤, 실험체 감옥까지 흘러들어왔다고 했다.

그럼 잡혔을 때 록터를 만나 배신자의 정체와 탈출 후 갈 곳까지 전해줬다는 얘기인데, 포로 입장에서 그게 가능하다고?

언제 죽을 줄 알고?

그리고 그 정보들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의문투성이네. 의문투성이야.’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녀석의 조언대로 움직여서 지금껏 손해를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조언대로 록터는 탈출 직후 배신자를 처단했고, 자신은 록터와 합류하게 되면서 복수까지 이루게 됐다.

녀석의 조언대로 다 이뤄진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고민하는 건 당연했다.

‘진짜 에토르로 가야 하나?’

그런데 느낌이 진짜 싸했다.

4성이 된 이후로 그 감각이 더욱 또렷해져서 더 갈등 되었다.

칼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자, 록터가 물었다.

“알고 있는 인물인가?”

“알고 있지. 널 만난 게 다 그 녀석 덕분이니까.”

“그자가 날 돕기 위해 널 보낸 건가?”

“아니. 그거랑은 상관없어. 아니, 이젠 그것조차 의심해 봐야 하나?”

숲에서 녀석과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어느 정도 파악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닌 것 같았다.

예언자처럼 정보를 흘리고 다니는 녀석.

실험체 감옥에 대해서도 많은 걸 알고 있었다.

대체 뭐 하는 녀석일까?

모르겠다.

칼은 곧 잡생각을 털어냈다.

이딴 고민에 지금 시간 낭비할 때가 아니었다.

서서히 조여오는 압박감.

또 다른 포위망이 몰려오고 있었다.

“에토르로 일단 가자고.”

“거긴 위험하다고 하지 않았나?”

“맞아. 내 감은 지금도 에토르로 가지 말라고 하고 있어. 더 최악인 건 지금 내 직감은 더듬이처럼 바짝 서서 상태가 최고라는 거지.”

“그런데도 간다고?”

“녀석이 그렇게 말한 이유가 있겠지.”

“이미 수개월 전의 이야기다. 상황이 달려졌을 수도 있어.”

“솔직히 말해줘?”

“뭘 말이지?”

“에토르가 유독 심할 뿐이지 어디를 향하든 뒈질 것 같은 느낌은 똑같다는 거야. 아직도 네 몸에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겠지만, 위치가 계속 노출되고 있어.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야. 계속 움직이는 것. 그 사이에서 빈틈을 찾는 것.”

“무슨 소리인지 이해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내 직감이 전부 다 맞는 건 아니야. 상황을 보면서 움직여야 해.”

고개를 끄덕인 록터는 바로 움직일 채비를 했다.

자신이 먼저 움직여야 칼 일행도 거리를 두며 보조를 맞출 수 있었다.

에토르는 5시 방향에 자리 잡고 있으니 코룬 강 하류를 따라 쭉 이동하면 될 것 같았다.

록터는 장비를 살폈다.

상태가 양호한 두 자루의 검.

단단해 보이는 세 개의 검집.

모두 허리춤에 매달고 몸 상태를 확인했다. 주먹을 움켜쥐며 미간을 살짝 좁힌 록터는 채비를 마무리하고 칼 일행에게 다가갔다.

록터의 얼굴을 살핀 칼이 넌지시 물었다.

“컨디션은 어때?”

“나쁘지 않다.”

“두루뭉술하게 말고. 확실하게 어느 정도야?”

잠시 고민하던 록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체력 회복과 근육의 반응 속도가 점점 더뎌지고 있다.”

“몸이 점점 무거워진다는 거지?”

“맞아.”

“볼트의 저주 때문일 거야. 포션으로는 치료할 수 없었거든.”

록터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술사의 저주가 깃든 볼트를 여러 대 맞았다.

저주가 분명하지만, 일행들은 주술이나 마법 쪽으로는 취약했다. 저주를 풀 방법이 당장은 없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전처럼 미친 짓을 더 했다간 골로 간다는 뜻이었다.

록터의 상태를 파악한 칼은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지금처럼 움직여서는 안 된다.

“너무 급하게 그렇다고 너무 천천히 움직여도 안 돼. 일정한 속도로 쉬지 말고 움직여. 그래야 내가 네 위치를 가늠하면서 움직일 수 있어.”

“알겠다.”

“강 쪽은 되도록 피해. 그리고 혹여 내가 신호를 보내면 바로 내 쪽으로 튀어와. 위험할 수도 있을 것 같으니까.”

“누가 위험하다는 거지?”

“내가.”

“네가 위험하다고?”

“사냥꾼들이 다시 뭉치면 골치 아파져. 흔들어야 해. 헌트에서 지원군이 왔다는 정보를 퍼뜨렸으니까. 그걸 이용할 거야. 조금 빡셀 수 있어.”

“난 헌트와 상관없다.”

“알고 있으니까. 그만 닥치고 달리기나 해.”

칼이 귀찮은 듯 손짓하자, 록터는 옅게 미소를 짓곤 등을 돌렸다.

블라이어에서 처음 만나 생사를 오가는 동행을 함께 했던 두 사람의 관계는 크룩스의 죽음 이후 완벽한 신뢰 관계를 구축했다.

서로 등을 맡길 수 있는 관계를 넘어, 서로 목숨을 맡길 수 있는 관계.

“위험하면 언제든 불러라.”

“내가 널 부른 순간이 우리한테는 가장 위기가 될 거야.”

“넌 내가 살린다.”

그 말을 남기고 록터는 빠르게 숲 안쪽으로 사라졌다.

록터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콧등을 긁적인 칼은 일행을 이끌고 사냥꾼 무리를 찾아 움직였다.

늘 그렇듯 포위망은 도주하는 록터를 중심으로 형성이 될 것이다.

그 주변으로 거리를 두고 움직이다 보면 사냥꾼 무리가 마주치게 된다.

이동 중 칼은 엘튼의 상태를 확인했다.

“상처는 어때?”

“버틸 만합니다.”

“사냥꾼들한테 당한 거야?”

“네. 머릿수가 많기도 했지만, 실력도 이전 놈들보다 뛰어났습니다.”

“빌어먹을, 슬슬 진짜들이 나타나는 것 같은데.”

실력 있는 놈들은 절대 먼저 나서지 않는다. 최대한 사냥감의 상태를 확인하고 움직였다.

그런 놈들은 자신의 목숨도 중히 여기는 놈들이라 신중했다. 상대가 록터 펠리스라면 개인전은 절대 안 할 테니, 분명 똘똘 뭉쳤을 것이다.

“복장 다시 확인해.”

칼 일행은 사냥꾼 복장을 다시 확인했다. 엘튼도 다른 옷으로 갈아입었고, 칼도 눈에 띄는 허리띠나 단검들은 옷 사이로 가렸다.

조무래기들과 달리 노련한 놈들 사이로 스며들려면 하나하나 조심해야 했다.

특히, 사냥꾼들을 움직이는 놈들을 잘 파악해야 했다.

우두머리가 누구려나?

그 의문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존재들이 엘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쌍둥이 형제의 지휘를 받는 듯 보였습니다.”

“…뭐? 잭과 하우엘?”

“네. 절 쫓는 사냥꾼들 사이에서 분명 두 형제의 이름을 들었습니다. 사냥꾼들과 함께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

앞서 달리던 칼은 표정을 굳히고는 자리에 뚝 멈춰 섰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칼이 보인다.

엘튼은 그 모습이 뭔가 일이 틀어질 때 마스터가 하는 행동임을 알아챘다.

“문제가 생겼습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

잭과 하우엘의 이름을 듣는 순간 가슴이 꽉 조이는 느낌을 받았다.

답답하다. 그리고 불안했다.

칼은 록터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보통 그 녀석과 멀어지면 모든 압박감에서 해방됐다.

록터와 거리를 둘수록 안전하다는 뜻인데, 무슨 이유인지 거리를 벌리고 있음에도 압박감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이유가 뭐지?”

위기 감별사의 직감은 완벽하지 않지만 대체로 맞아떨어졌다.

지금 자신은 무척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게 뭘까?

아니면 4성에 오른 감각이 너무 예민해서 그런 것일까?

목 아래까지 칼날이 파고드는 섬뜩한 감각이 느껴진다.

이 정도로 생생한 감각.

붐(Boom)이 왼팔을 터뜨리고, 죽기 직전까지 위기에 몰렸을 때 느꼈던 기분이었다.

뭔가가,

잘못됐다.

* * *

콰아아앙―!

거대한 주먹이 바위를 부수고 짓쳐 왔다.

주먹은 멈추지 않았다.

바위를 부수고, 나무를 부수고, 눈앞의 사내마저 부수려고 했다.

고개를 젖혀 주먹을 회피하고 반격을 하려는 순간, 뒤쪽에서 다급히 사내를 불렀다.

“알렉스 뒤요! 위험해요!”

“빌어먹을!”

넬라의 외침에 다급히 바닥을 굴렀다.

검은 그림자가 등 뒤를 덮더니 내가 있던 자리에 큰 구멍을 만들었다.

콰쾅―! 쾅!

주먹이 모든 것을 짓뭉개듯 덤벼들었다.

폭주 기관차가 따로 없었다.

난 재차 붉은 눈빛을 번뜩이며 질주해오는 주술 인형들을 노려보며 시위를 당겼다.

황금빛으로 물든 화살.

퉁―!

쏘아진 화살들이 성력을 담고 반다이크들을 압박했지만, 화살은 곧 반다이크의 몸에 맞고 무력하게 튕겨 나갔다.

성력 공격이 안 통한다.

아니, 정확히 화살이 주술 인형의 몸에 박히지 않았다.

“약삭빠른 새끼들. 벌써 대응책을 세웠네.”

화살을 쏴도, 단검을 찔러도.

통짜 쇠로 떡칠한 무식한 방어를 뚫고 반다이크를 공격하는 게 쉽지 않았다.

약점을 무식한 방어력으로 보완한 것인데, 손쉽게 소멸시켰던 때보다 훨씬 힘들어졌다.

한 마리라면 시간을 들여 충분히 공략할 수 있지만 세 마리, 네 마리가 동시에 압박하며 내 몸을 찢어버릴 듯 돌격해오니, 피하는 데만 급급한 상황이었다.

몸을 빠르게 튕기며 거리를 벌린 것도 잠시,

번쩍―!

“……!”

반대편 멀찍이서 섬뜩한 핏빛이 쏟아지자, 난 다급히 시위를 당기며 빛이 터진 곳으로 몸을 틀었다.

흑주술이다.

반디이크들로 내 발을 묶으면서 내게 원거리 주술을 날려댔는데, 쏟아지는 기운이 위협적이라 무시할 수가 없었다.

성력이 실린 화살이 빛을 관통하자, 오싹한 주술적 기운이 옅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저 멀리서 비틀거리는 일부 주술사들이 시야에 잡혔다.

저놈들이 내게 주술을 걸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주술사만 죽이면 끝나는 게임인데.’

가장 먼저 시도한 일인데, 방패를 든 기사들과 부딪친 이후로 엄두가 안 났다.

푸른 견장.

카멜의 친위대가 주술사들을 앞에서 보호하고 있었다.

‘주술사와 반다이크 다섯, 그리고 친위대 둘.’

한눈에 블라이어 군대의 핵심 전력인 주술사 부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술사 부대가 이 자리에 나타난 이유는 반나절 전에 카멜의 지시로 움직인 블라이어 군대가 베네타 경계에 주둔하고부터다.

베네타 방향에서 주술사 부대들이 코룬 강 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식이 들린 뒤 난 계획을 바꿔 눈에 보이는 주술사 부대를 족족 에토르 방향으로 유인하는 중이었다.

다행이라면 날 발견한 뒤로 주술사 부대들의 표적이 나로 변했다는 것이었다.

콰아앙―!

나무가 부서지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반다이크들이 반리와 대치 중이었다. 반리가 남은 주술 인형들을 막아내고 있지만, 그저 시간을 벌어다 줄 뿐이었다.

기습이 실패하고 성력마저 통하지 않은 상황에서 저들과 긴 시간 대치하는 건 위험했다.

주술사 부대는 저들만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후퇴.

판단이 서자, 주술사들을 향해 푸른 빛의 화살 세례를 쏘아 올렸다.

관통이 실린 화살을 보자, 기사들이 방패를 들고 나타났다.

모든 시선이 화살에 쏠리는 사이, 난 등을 돌리고 숲 쪽으로 몸을 날렸다.

“넬라!”

내 부름에 숲 안쪽에서 웅크려 있던 그녀가 내 곁에 바짝 붙어 따라왔다.

반리도 어느새 그녀의 그림자를 타고 올라와 그녀의 머리맡에 안착했다.

숨을 헥헥 쉬고 있는데 전투가 쉽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넬라는 다급한 얼굴로 수정구를 내게 내밀었다.

현재 상황을 알 수 있는 블라이어의 통신구였다.

“표적이 둘로 나뉘었어요!”

“설마, 새로 각성한 주인이 표적으로 추가된 겁니까?”

“네!”

“어딥니까? 그자가 있는 방향이.”

잠시 미간을 좁힌 넬라가 한 방향을 가리키자, 난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그를 구하러 갈 건가요?”

“그는 록터와 다릅니다. 우리가 안 가면 그는 무조건 죽습니다.”

“록터는 어쩌실 거죠?”

“그는 칼보다는 안전합니다. 더는 록터의 위치를 알 수 없지 않습니까?”

“네. 이젠 위치를 읽을 수가 없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넬라는 이제 록터 펠리스의 위치를 잡아낼 수 없게 됐다.

즉, 신명 각성을 통한 록터의 위치 노출은 더는 탐색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변수가 터졌다.

새로운 신명의 주인.

[칼 바스타인이다. 찾아라.]

칼이 하필 지금 상황에 각성해버린 것이다.

표적의 대상이 록터 펠리스에서 칼 바스타인으로 바뀌어버린 상황이었다.

“응? 반리 왜 그래?””

그때 반리가 기척을 발견하곤 넬라에게 신호를 보냈다.

또 다른 주술사 부대인가?

흡혈의 고리를 잡고, 전투를 준비하려는 그때였다.

시위를 당기고 있는데, 단 하나의 실루엣이 시야에 들어왔다.

한 손에는 투박한 검은 다른 한 손에는 낡은 검자루를 움켜쥔 사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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