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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128화 (128/130)

#128화 개 같은 악당 새끼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다가오는 실루엣.

잠시 후, 숲 사이로 너저분한 몰골의 사내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거리가 있었지만, 난 그를 본 순간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내 눈에만 보이는 신명 사냥꾼의 능력.

후광(後光).

사내의 머리맡에서 은은한 후광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신명의 주인.

그리고 저 고집스러운 얼굴까지.

“록터 펠리스!”

이름을 외치는 내 감정엔 반가움이 깃들었지만, 눈앞의 사내는 오히려 반대였다.

경계 어린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도망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외침이 바로 자신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멈춰선 그는 우리 복장을 살폈고, 판단을 마친 듯 그대로 검을 움켜쥔 채 잔상처럼 사라졌다.

오싹한 감각이 경고를 보내왔다.

아, 붉은 망토!

위장에 익숙해진 탓에 잠시 잊고 있었다. 우리 복장이 지금 흑주술사라는 것을 말이다.

“자, 잠깐!”

망토를 벗어 던지고 얼굴을 드러냈지만, 록터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번뜩이는 검이 짓쳐 온다.

상대는 5성이었다.

이를 악물곤 넬라를 풀숲으로 거칠게 밀어냈다.

“반리, 붙잡아!”

넬라 머리 위에서 뛰어내린 반리가 땅속으로 사라지더니 눈앞에 그림자 손들이 담쟁이넝쿨처럼 솟구쳤다.

록터의 그림자 밑에서 튀어나온 것인데, 찰나의 순간 두 다리가 묶인 록터가 나타난 곳은 내 코앞이었다.

시발, 더럽게 빠르네.

뒤로 한 발 물러난 순간 앞 머리카락 일부가 싹둑 잘려 나갔다.

아니, 검은 더 빨랐다.

방금 죽을 뻔한 거 맞지?

“시발! 내 얘기 좀… 이, 이 꼴통 새끼가!”

검이 빛으로 번뜩였다.

오라 소드로 그림자 손들을 단칼에 잘라버리고 날 노려보며 옆으로 검집을 휘둘러 쏘아진 화살을 튕겨냈다.

카장―!

넬라가 쏜 화살이었다.

그리고,

쾅―!

“……!”

두 번째 화살을 검집으로 때린 순간 폭발에 휩쓸리며 록터가 뒤로 주춤 물러났다.

순백의 활이 보였다.

그 시위 사이로 하나둘 핏빛 화살이 생성되더니, 자신에게 우수수 쏟아졌다.

록터의 양손이 어지러이 움직였다.

콰콰콰쾅―!

폭발이 터지고, 뿌연 연기가 솟구쳤다.

[물러나라. 두 번은 안 통한다.]

“압니다.”

[자세를 잡고 전투를 준비해. 보고 움직일 상대가 아니다.]

레토의 조언대로 난 거리를 벌리곤 흡혈의 고리를 해제했다. 두 주먹을 움켜쥐고 긴장한 눈으로 록터가 있는 방향을 노려봤다.

록터를 상대로 내가 쓸 수 있는 카드는 총 세 가지다.

신명 사냥꾼.

펜리 소환.

그리고 격발(擊發).

다만, 이중 내 계획에 록터에게 쓸 카드는 없었다.

한 마디면 충분하거든.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미리 준비한 대사가 있었는데 너무 갑작스러워서 제때 써먹지 못했다.

물론, 100프로 확신은 없으니 대비는 해야 했다.

연기 뚫고 록터의 신형이 튀어나온 순간 난 빠르게 한 단어를 언급했다.

“말린 사과, 기억 안 납니까?”

“……!”

블라이어 전(前)대 영주인 리암슨 자작의 암구호를 언급한 순간, 흙먼지를 뒤집어쓴 록터가 뚝 멈춰 섰다.

대략 열다섯 걸음 거리.

[아슬아슬하군. 긴장 놓지 마라.]

“…….”

록터가 암구호를 알아볼 것이라 확신하지만 혹시 모른다.

세 가지 카드 중 당장 쓸 수 있는 격발 자세를 잡고 작게 중얼거렸다.

“오지마. 제발.”

“…….”

잠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록터의 눈동자가 꿈틀하더니 살벌했던 기운이 서서히 수그러들었다.

말린 사과.

이 암구호를 알고 있는 이는 이제 단 두 명뿐이다.

자신, 그리고 자신에게 이름을 알려준 한 인물.

“…아서?”

“오랜만이네요.”

“그대가 왜 이곳에 있지?”

“구하러 왔습니다.”

록터가 검을 내려놓자,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자세를 풀었다.

갑작스런 만남에 자칫 골로 갈 뻔했다.

“그 복장은 뭐지?”

“잠입하려고 위장을 하긴 했는데…….”

“위치는? 내 위치를 어떻게 알았지?”

날 알아봤지만, 록터는 아직 의구심을 버리지 않았다.

험한 도주 생활.

사방이 적이니 확신이 필요한 것 같았다. 과거 내게 도움을 받았다지만, 칼 일행과 달리 그는 피의 만찬에서 나를 잠깐 본 게 전부였으니 말이다.

“넬라.”

설명하는 것보다 흑주술사가 아니란 증거를 보여주는 게 더 빨랐다. 내가 손짓하자, 넬라가 곁으로 다가와 로브를 벗었다.

금발의 엘프가 얼굴을 드러내자, 록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 중에 흑주술사가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칼은 어디 있습니까?”

“모른다. 내가 움직이면 그가 늘 날 찾아왔으니까.”

“칼이 위험합니다.”

“…뭐?”

지금껏 덤덤한 표정을 유지하던 록터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칼의 신변이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급한 상황이라 일단 록터를 데리고 움직이려고 했는데, 넬라가 귓속말로 록터의 상태를 전했다.

“저 사람, 저주에 걸렸어요.”

“저주요?”

“네. 중첩된 저주가 온몸을 압박하고 있어요. 움직이는 것도 힘들었을 것 같은데….”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단시간에는 안 돼요. 하지만 저주를 약화시킬 순 있어요.”

“부탁드립니다.”

“아, 전 안되고, 당신이라면 가능해요.”

흑주술이란 뜻이었다.

우리 대화를 들었는지 내가 다가오자 살짝 놀란 눈으로 날 바라봤다.

“그대가…?”

“잠시.”

록터의 등에 손을 얹고 고대 문양을 소환했다. 황금빛이 은은하게 흘러나와 록터와 나를 부드럽게 감쌌다.

하―

록터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고통보단 답답했던 무언가가 빠르게 사라지는 쾌감에 가까웠다.

주먹을 몇 번 움켜쥐며 감각을 살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육체를 옥죄던 압박에 약해지니 감각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고맙다.”

“임시방편입니다. 제대로 된 치료는 나중에 꼭 받으세요.”

“그러지. 이 빚은 꼭 갚겠다.”

대화는 잠시 멈춰졌다.

동시에 모두의 고개가 숲을 향했다.

숲 너머에서 들려오는 인기척 때문이다.

황금빛이 시선을 끈 것일까.

쿵. 쿵. 쿵. 쿵.

육중한 것들이 숲을 짓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식간에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눈앞의 숲이 무너지며 반다이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따돌렸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을 지체한 사이에 발각당했다.

엉망이 된 숲 너머로 주술사 부대가 모습을 드러내자, 난 미간을 좁혔다. 저들을 정리하고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다른 전력과 합류하면 귀찮아질 테니까.

나와 넬라만 있었다면 할 수 없는 판단이지만, 지금 내 곁에는 미래의 돌격 대장이 있었다.

“돌격… 아니 록터.”

“……?”

“그 빚 지금 갚으시죠?”

“복수를 원하나?”

“그 정도까진 아니네요.”

록터는 고개를 끄덕이곤 검을 뽑아 들었다.

* * *

숲 위로 태양이 서서히 저물고 있었다. 붉게 물든 대지 위로 그림자 하나가 길게 늘어졌다.

주술사 복장으로 얼굴을 가린 이가 숲 사이를 뚫고 주술사들이 뭉친 방향으로 매섭게 짓쳐 왔다.

그를 발견한 주술사들이 반다이크들에게 복귀를 명령했지만, 저 멀리 검은 정령에게 발이 묶인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이미 한 차례 겪어본 전투 패턴이었다.

“놈이다!”

“접근하기 전에 막아!”

놈이 사용하는 황금빛은 자신들에게 치명적이었다. 주술사들은 빠르게 물러났고, 그 앞을 기사들이 막아섰다.

“알렉스 마르샤, 아까 혼이 덜 났나 보군.”

“이번에는 꼭 머리를 가져가겠다.”

푸른 견장으로 무장한 두 명의 기사.

과거에도 푸른 견장은 블라이어의 정예 기사로 실력이 증명된 명예의 상징이었지만, 근래에 푸른 견장은 명예를 넘어 토바른 내 기사들의 부러움과 공포의 상징이 되어 있었다.

아티팩트로 무장된 최정예 기사단.

푸른 견장은 곧 아티팩트의 주인을 뜻했다.

기사들은 각자 자신들의 아티팩트를 꺼냈다.

놈은 활을 잘 쓰지만, 근접 격투도 상당한 편이었다. 황금빛에 취약한 주술사들을 지키면서 싸우려면 아티팩트 사용이 필수였다.

민첩을 올려주는 팔찌가 빛나고, 강도와 절삭 증폭 효과가 있는 검이 눈부시게 빛났다.

두 기사는 자리를 지킨 채 곧 다가올 녀석을 기다렸다.

잠시 후, 눈앞에서 서로 마주한 순간이었다.

“아티팩트에 집착할수록 기사와 멀어진다고 내가 그리 말했거늘.”

“……?”

로브가 벗겨지더니, 단단한 눈빛의 사내가 두 자루의 검을 펼치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 사내를 본 순간, 기사들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록터 펠리스.

과거 블라이어의 전대 기사 단장.

“다, 단장!?”

“너희에게 원한은 없다.”

“자, 잠깐….”

눈앞에 오라 소드가 번쩍이는 순간, 기사들은 이를 악물곤 검을 휘둘렀다.

카앙―!

마법검이 오라 소드와 부딪치며 버티자, 다른 기사가 록터의 목을 벼락같이 베어냈다. 팔찌의 힘을 빌린 엄청난 속도. 하지만 곧 검집에 흘리며 기사의 검은 위로 솟구쳤다.

카카카카카캉―!

한 호흡에 이뤄진 수십 공방.

공격을 모조리 튕겨낸 록터가 자세를 낮추자, 기사들은 다급히 소리 질렀다.

“빌어먹을! 모두 공격해!”

단장의 검은 리옹 부단장의 변칙과 달리 단순했다.

하지만 같이 훈련하는 기사들 백이면 백, 단장과 대결하는 것을 가장 꺼렸다.

극한에 이른 기본 검술.

빈틈이 없는 검.

이런 아티팩트 같은 편법으론 절대 못 이긴다.

기사들이 록터를 붙잡고 늘어지는 사이, 주술사들은 다급히 주술을 준비했다. 그중 한 명은 통신구를 꺼내, 이 사실을 카멜에게 알리려고 했다.

“…어?”

통신구 겉면으로 빛이 반사되자, 주술사는 무심코 뒤를 돌아봤다. 그리곤 툭― 통신구를 떨어트렸다.

투창 크기의 황금빛 화살이 등 뒤로 짓쳐 오고 있었다.

뒤늦게 이를 눈치채고, 다른 주술사들이 화살을 보며 입을 쩍 벌렸을 때,

번쩍―

한줄기의 황금빛이 한데 뭉친 주술사들을 무참히 휩쓸고 지나갔다.

서 있는 주술사는 없었다.

찢긴 망토, 피로 흥건한 바닥.

신체 일부만 드러난 흔적 아래로 잠시 후, 두 개의 머리가 툭 굴러떨어졌다.

고통으로 한껏 일그러진 얼굴.

두 기사의 머리였다.

“…….”

록터는 한때 동료였던 기사들의 머리를 한 번 내려다본 후 등을 들리곤 반다이크를 향해 달려나갔다.

오라 소드가 반다이크의 투구 덮개를 무참히 반으로 쪼갰다.

* * *

“존나 깔끔하네.”

흡혈의 고리를 해제하곤 전장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성력에 당한 반다이크들은 모두 소멸한 상태였다.

록터가 놈들의 두꺼운 철갑을 갈라버리면, 그 틈으로 화살만 날리면 되는 전투였다.

반다이크들의 갑주를 뚫기 위해 별 개지랄을 떨었던 과거가 허무할 정도로 쉬운 전투였다.

그건 주술사들을 제거할 때도 마찬가지.

강력한 기사 한 명을 동료로 얻자, 전투 난이도가 말도 안 되게 쉬워졌다.

‘역시 동료가 필요해.’

등을 맡길 수 있는 동료.

헌트를 통해 한 명, 한 명 모아갈 생각이었다.

[2소대, 신호를 보냈으면 보고하라.]

서둘러 칼을 찾기 위해 록터에게 손짓을 했는데, 바닥 어딘가에서 카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찢긴 망토를 들치니 통신구가 있었다.

통신구가 붉게 변해 있었는데, 주술사가 카멜에게 통신을 연결하고 죽은 모양이었다.

난 통신구를 집어 들곤 잠시 고민했다.

이 타이밍이라면 한 번 흔들 수 있지 않을까?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아. 아.”

목을 한 차례 가다듬고.

“오랜만이다. 카멜.”

[……?]

“알렉스 마르샤다. 내 부친을 죽인 이 개 같은 악당 새끼야.”

오늘 한 번 질러본다.

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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