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129화 (129/130)

#129화 개 같은 악당 새끼(2)

[이 개 같은 악당 새끼야.]

“…….”

통신구에서 흘러나오는 욕설에 막사 안은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보통 먼저 화를 내는 리옹조차 눈치를 보며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무표정.

주군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수정구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침묵을 깨고 카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전달자인가?”

[알렉스라고 한 거 못 들었어? 전달자 임무가 끝난 지 언젠데 아직도 전달자 타령이야.]

“겁대가리가 없군.”

[부친을 죽인 원수에게 무슨 말을 못 해? 아, 부친을 죽인 패륜아 새끼는 이 울분이 찬 떨림의 감정을 모르려나? 존나 미안하다.]

까득―

수정구를 움켜쥔 손아귀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모두의 앞에서 자신에게 이런 모욕을 준 이가 지금껏 있었던가.

회귀 전에도 이런 경험은 해보지 못했다.

“아주 재미있어.”

[재밌어? 넌 이게 재밌냐? 변태 새끼.]

벌레 따위로 취급했던 놈이 자신의 머리 위에 올라서려고 하는 꼴이라니.

카멜은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그 표정에 리옹과 렌구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수천 단위의 학살을 명할 때 보이는 표정.

저 표정 뒤엔 늘 수많은 피가 따랐다.

그렇다고 주군이 흥분한다거나 이성을 잃은 모습은 보지 못했다.

오히려 더욱 냉정하고 날카롭게 판단을 내렸다.

깊은 심계(心界).

그것이 주군의 장점이자 무서운 면모였다.

통신구를 들고 잠시 턱을 매만지던 카멜이 입을 열었다.

“조금 전 네 편지를 받았다. 거기 적힌 내용, ‘그’가 알려준 건가?”

[‘마스터’는 아직 너와 잘해볼 생각인 것 같은데, 난 아니야. 그것만 알아두라고.]

“내 위치를 어떻게 알고 편지를 보낸 거지?”

[네 곁에 첩자라도 있나 보지.]

“웃기는 소리.”

[둥지의 주술사들을 통해 베네타로 첩자들을 보낸 거 다 알아. 우리라고 둥지로 첩자를 못 보냈을 거 같아? 아, 주술사들의 기억을 뽑긴 좀 그렇지?]

곁을 지키던 렌구아도 당황하게 만드는 대답이었는데, 카멜은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내게 연락한 이유는?”

[마스터의 최후통첩이다. 당장 병력을 물려.]

“거절한다. 나와 적이 돼서 좋을 게 없을 텐데?”

[그건 마스터 사정이고. 나야 협상이 결렬되면 고맙지. 네 멱을 따러 가도 마스터가 별말 안 할 테니까.]

“내 앞에서 무릎 꿇고 살려달라 빌던 네깟놈이?”

[누가 나 혼자 간데? 헌트가 움직이면 다를 거야. 에토르 성의 바깥 공기가 무척 차던데. 네 무덤으로 쓰기엔 장소가 너무 춥지 않아?]

카멜이 리옹을 바라보자, 리옹이 다급히 예를 표하곤 바깥으로 나갔다.

“날 치러 오겠다?”

[군대는 베네타의 경계에, 정예 전력은 록터를 잡는데 보낸 것 같은데, 호위 좀 데려가지 그랬어. 급한 볼일이라도 있었던 모양이지?]

“재미있군. 와라. 그 머리통을 요긴하게 써줄 테니.”

[지금 가는 중인데?]

아케인은 묘한 표정으로 둘의 대화를 지켜봤다. 그는 계시(啓示)대로 움직이며 그 뜻에 순응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저 대화의 주인공들은 계시를 비껴간 존재들이었다.

크룩스의 암살자인 알렉스는 계시대로 진즉 죽었어야 할 인물이었는데 지금껏 살아서 카멜을 도발하고 있었다.

운명을 거부하고 자신을 찾아온 카멜 블레이저도 마찬가지.

즉, 저 둘의 대화는 계시를 벗어난 것이며, 아케인의 세상에선 절대 벌어져선 안 되는 장면이란 뜻이다.

‘어디서부터 틀어진 걸까?’

계시(啓示)가 만들어낸 세상을 비튼 변곡점이 저 둘 중 누군가에게 존재했다. 변곡점을 없애려면? 간단했다. 그 존재를 없애면 된다.

아직 계시의 흐름을 바꿀 정도의 힘은 없는 것 같았으니까.

[기다려. 이 학살자 새끼야.]

그 목소리를 끝으로 지직― 연결이 끊겼다. 렌구아는 송구하다는 듯 카멜이 내민 수정구를 받아 들었다.

“렌구아.”

“마, 말씀하십시오.”

“2소대가 당했다. 다른 소대 위치를 파악한 뒤 우리 쪽으로 모두 보내.”

“베네타 경계에 주둔 중인 군대는 어찌할까요?”

“전원 대기한 채 경계 수위를 더 올려. 그곳 포위망은 절대 내주면 안 돼. 록터가 베네타로 가면 곤란하다.”

록터는 반란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자다. ‘그’의 손에 넘어가게 두면 절대 안 된다.

“그래도 주술사 부대 외에 호위 병력을 더 늘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방금 그 헌트라는 놈들이….”

“안 오면?”

“네?”

“놈들이 안 오면 우린 닭 쫓던 개 신세가 된다. 최소한의 대비만 해두고 상황에 따라 움직인다.”

수정구를 통해 놈은 자신을 도발하며 당장 쳐들어올 것처럼 행동했지만, 카멜은 상대가 기만책일 경우도 생각했다.

놈의 말만 믿고 병력을 자신 쪽으로 물리는 순간 록터는 물론 놈도 놓치기 때문이다.

일단 잡아두고 상황을 보면 된다.

기만책일 경우엔 포위망을 좁히면 되고, 정말 쳐들어오면 에토르 내에 준비해둔 장소로 몸을 피하면 된다.

주술사 부대라면 그 정도 시간은 벌어다 줄 것이다.

“그 녀석 말인데.”

“네? 누구를….”

“알렉스. 그 암살자 놈의 기억을 뽑을 당시에 실패하더라도 그 머릿속 뇌 구경을 해야 했어.”

“모두 제 불찰입니다.”

“이번 작전이 꼭 성공해야 할 거야. 렌구아.”

“무, 물론입니다. 오늘 밤 안에 마법진이 완성될 겁니다. 에토르를 곧 주군의 손에 바치겠습니다.”

“나가봐.”

고개를 숙인 채 렌구아가 막사를 나가고 안에는 아케인만 자리했다.

카멜은 다리를 꼰 채 아케인을 말없이 바라봤다.

식탁 위 지도를 내려다보는 그가 보인다.

부드럽게 흘러내린 백발.

그 백발에 물든 듯한 새하얀 피부.

푸른 사파이어 귀걸이로 용모를 꾸민 수려한 외모가 눈에 띄었지만, 카멜의 눈에는 저 생각을 알 수 없는 가느다란 눈매가 가장 눈에 띄었다.

얼핏 보면 신비로운 점성술사 느낌이 물씬 풍겼지만, 카멜의 통찰적 감각으론 점성술사보단 마법사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다.

회귀 전에도 소문으로만 듣던 인물.

그조차 잘 알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조금 전 놈이 보낸 편지 내용을 떠올렸다.

[우리 헌트(Hunt)에게 원한이라도 있으신가. 현상금에 나를 포함해서 헌트 멤버가 다 있던데, 록터 펠리스는 우리 헌트의 멤버야. 영입 조건으로 목숨을 한 번 살려줬지. 마스터가 당신이 심어둔 세작 에펠로아의 존재를 록터에게 알려주는 것으로.]

거슬리는 내용이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자신의 위치를 알고 편지를 보낸 것도. 세작의 존재가 들킨 것도 작은 변수일 뿐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으니까.

문제는,

[헌트의 맴버는 건드리지 마. 병력을 물리면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지. 손해 보는 걸 싫어하니까. 마스터의 전언 중 앞부분을 전달할게.]

마스터가 보냈다는 전언 부분이 문제였다.

[[‘피를 마시는 잔’은 아케인과 관련 있는데 곁에 두고 계시더군요. 이전보다 더 빨리 죽고 싶으신가 봅니다.] 난 전했다?]

이 문구를 본 순간 아케인이 다르게 보였다.

경각심.

‘그’의 노림수라도 제대로 짚었다.

피를 마시는 잔.

자신을 파멸로 이끈 뒤 산 채로 피를 뽑아간 악마 같은 놈. 기억나는 건 흰나비 가면 사이로 비친 메마른 눈동자뿐이었다.

“제게 할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그대의 도움에 늘 고마워하는 마음뿐이다.”

“별말씀을.”

“록터의 위치는 이제 알 수 없나?”

“네. 하늘의 부름이 끝났습니다.”

아케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곤 다른 말을 움직였다.

조금 전 각성한 새로운 신명의 주인. 영웅 조력자, 칼 바스타인의 말이었다.

그 모습에 카멜은 아케인에 대한 시선을 거두었다.

생각 같아서는 피를 마시는 잔을 언급하며 반응을 살피고 싶었지만, 뭔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아케인은 헌트와 관계가 없어.’

오히려 적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아케인 덕에 ‘그’의 신명을 알아냈고, 블랙 마켓을 통해 ‘그’의 정체를 노출시키는 것 외에 엄청난 이득을 챙겼다.

지금도 록터와 그 동료를 죽이기 위해 도움을 주고 있었다.

아직은 이용 가치가 있다.

괜한 부스럼을 만들 필요 없었다.

카멜은 식탁에 서서 칼 바스타인의 말을 한동안 응시했다.

잠시 후 그는 주술사들을 불러 통신구를 여러 대를 놓게 했다. 그중 하나를 작동한 카멜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블라이어 성주다.”

아직 사냥은 끝나지 않았다.

* * *

“이쪽이에요!”

앞쪽에서 빠르게 내달리던 넬라가 메마른 나뭇가지를 흔들더니 방향을 틀었다.

그녀의 신명 도구가 칼 바스타인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나와 록터는 그녀의 안내에 따라 그 뒤를 바짝 뒤쫓았다.

달리면서 난 통신구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카멜에게 직접 도발을 날린 이후로 카멜의 목소리가 빠르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위치를 보낼 테니, 주술사 부대는 칼 바스타인를 찾는 즉시 척살하라.]

[베네타 경계에 주둔 중인 군대를 숲으로 모두 투입시킨다. 록터 펠리스를 찾는 즉시 알리도록.]

[잭과 하우엘은 임무를 중단하고 당장 에토로 이동해라. 호위 임무로 변경한다.]

“…….”

난 잠자코 그 내용을 듣다가 더 들을 필요 없다는 듯 통신구를 품속에 넣었다.

그런 내 행동에 곁에서 붙어 따라오던 록터가 의문을 표했다.

“왜 더 듣지 않지? 중요한 내용 아닌가?”

“더 들을 필요 없습니다. 전부 거짓이니까.”

“거짓?”

“통신구로 거짓 지시를 내리면서 다른 쪽에선 따로 지시를 내리고 있을 겁니다. 절 방심하게 하려는 개수작이에요.”

“그대가 의도한 방향으로 놈이 지시를 내리고 있는 게 거짓이라는 건가?”

“네. 베네타의 경계는 여전히 군대가 있을 거고, 잭과 하우엘도 칼을 추적하고 있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상대가 카멜이거든요. 제가 노린 건 주술사 부대입니다. 블라이어 군대 최정예들과 전투에서 엮이면 상황이 엄청 불리해집니다.”

“그래서 도발한 건가?”

“네. 주술사 부대 대부분을 에토르 근처로 유인해놨거든요. 가까우니까 호위로 곁에 둘 확률이 높습니다. 최악을 염두에 두는 놈이라 최소한의 호위 정도는 두려고 할 테니까.”

“…설마 그걸 노리고 주술사 부대를 유인한 건가?”

“아뇨. 다른 의도로 한 일인데, 어쩌다 보니… 뭐, 운이 좋았죠.”

록터는 앞서가는 아서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신음을 삼켰다.

주술사 부대.

최소 열 부대가 넘는 위협적인 상대라고 했다.

아서의 말대로 된다면 도발 한 번으로 주술사 부대들을 전투에서 배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그렇게 된 것 같고.’

이따금 주술사 부대로 보이는 흔적이 잡혔는데, 움직이는 동안 그들과 마주친 적이 없었다.

그들이 카멜의 호위를 위해 에토르로 향했다면 지금 상황이 모두 설명이 된다.

자신은 카멜과의 수 싸움에서 무참히 패해서 모든 것을 잃었다.

아니. 수 싸움이 아니라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당했다.

지금 흘러나오는 통신구의 지시에도 속지 않았던가.

하지만 아서는 아니었다.

그는 단번에 카멜의 수를 파악했다.

수를 놓고 카멜과 싸우는 모습을 보며 록터는 전율이 일었다.

지나가듯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지만, 이 짧은 시간 안에 계획을 떠올리고 카멜 같은 이에게 써먹을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절대.

자신은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꼴통 기사.

록터는 그동안 모두에게 꼴통으로 불리며 기사로서 우직하게 신념에 따라 모든 고난을 홀로 헤쳐왔다.

하지만 처음으로 카멜을 보며 한계를 느꼈다.

카멜은 자신의 성정으로 절대 무너트릴 수 없는 성과 같았다.

칼도 말하지 않았던가.

불가능한 목표라고.

그런데,

‘아서 클레이튼.’

문득 이런 기분이 들었다.

저 사내의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정말 복수를 이룰 것 같은 그런 확신 말이다.

‘이번 전투가 무사히 끝난다면…….’

아서의 등을 바라보는 록터의 눈에는 열망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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