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왜 너 혼자 장르가 다르니…?(4)
“그 개가 기특한 일을 하였구나, 허허.”
전날 있었던 황당무계한 얘기를 듣고도 단골들은 그저 어린아이의 장난을 들은 것처럼 피식거릴 따름이었다.
천문학적인 돈이 움직였다고 설명했지만. 돈보다 두 주먹과 자신의 검을 더 신뢰하는 무림인들에게 주식이란 그저 먼 나라 얘기일 뿐.
그들은 마냥 술안주처럼 여명의 얘기를 재밌게 들었다.
정작.
“기특하긴요. 제가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원.”
당사자는 떠올리기만 해도 아찔하다는 듯 한차례 몸을 떨었지만.
몇 날 며칠을 고생한 기억이 떠오르니 쓴웃음부터 지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엔 어떻게 되었는가?”
“뭐. 지금도 개판이긴 하죠.”
“…개판이라면서도 표정은 속 시원해 보이는구나.”
“권선징악 결말을 좋아해서요.”
여명은 이번 일로 피해 입은 이가 나쁜 놈들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며. 나쁜 놈들끼리 서로 물어뜯느라 바쁘다는 것 또한 안다.
가까이서 보면 비극일 테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인 법.
여명 입장에선 드라마의 악역이 천벌을 받는 모습을 보는 것이니 나름 괜찮은 결말이라 여기는 중이었다.
“그, 이 사부의 형제라 하였었나. 그자는 어떻게 된 겐가?”
“으음, 일단 한동안 정신없을걸요? 아무래도 가장 의심당하는 사람 중 한 명인지라….”
이종명과 그 집안이 아무리 법조계에서 좀 힘깨나 쓰는 집안이라고 한들, 결국 소수집단에 불과했다.
수십, 혹은 수백이 될지도 모를 적을 만들어놓고 어찌 버틸 수 있을까.
“제 예상이지만. 당분간 빡셀 거예요.”
워낙 지저분한 인간들이니 재기하는 것이야 얼마든지 가능할 테지만.
“예전처럼 나대진 못할 테죠.”
그 부분이 심히 만족스러운 듯 여명은 미소를 지어 보였고. 단골들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명과 여명의 혈연 사이에 얼마나 깊은 앙금이 있는지를 대강이나마 알기에.
“주식시장이라….”
어느 정도 이종명에 대한 얘기가 끝날 때, 금천후가 주식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어찌 보면 여기 있는 이들 중 가장 주식시장에 대한 이해도가 높을 터이니 그의 눈이 진중해지는 것도 당연하리라.
“위험하구나. 아무런 사전지식도 없는 자가 진입하기 좋으며. 성실한 양민들의 돈을 뽑아먹는 악랄한 행위로다.”
“그건….”
“있는 자들은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들은 더욱 가난해지게 만들 터. 아니더냐?”
“…차마 아니라곤 할 수가 없네요.”
여명은 볼을 긁적이며 부정하지 못했다.
주식 때문에 돈 잃고 환장하는 건 항상 서민이었으니까.
“이 사부. 어디 가서 주식이란 것을 얘기하지 말거라. 그건 독(毒)이다. 전날 만든 흑당보다 더욱 달콤한 독.”
“으음.”
혜안이 깊은 금 노야는 안 거다. 주식을 통해 쉽게 돈을 벌 수 있지만. 쉽게 돈을 버는 만큼 쉽게 잃을 수 있으며. 일상이 붕괴될 위협이 있음을.
“뭐, 딱히 내가 뭐라 하지 않더라도 영수들이 주식을 허락하지 않을 테지만.”
“아니, 허락할 것이다.”
“재밌을 것 같구나, 후후.”
“…….”
어쩐지 사악해 보이는 음흉한 미소를 머금은 두 영수가 어딘가에 있을 법한 흑막과 같은 표정을 지었다.
“금천후, 그대는 부정적인 점만 얘기하였지만. 분명 주식이란 것에는 긍정적인 면모도 있다. 그것을 배제하지 말거라.”
“여가 봤을 때 인간의 욕망이란 통제 가능한 것이 아니지. 분명 언젠가는 주식이란 것으로 인한 비극이 생길 테지. 다만 인간에 의해 주식이란 새로운 판로(販路)가 생기기 전 차라리 여의 손에 의해 시장이 먼저 형성된다면 훨씬 더 깔끔해질 터.”
“그거야 그렇겠지. 다만, 자칫 균형이 어긋날 것이오. 그것은 어떻게 할 것인가?”
금천후는 타당한 의문을 던졌으나, 두 영수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깔끔하면서도 칼 같은 답변을 내놓았다.
“자신의 생업을 도외시하고 주식에만 빠져들 우려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라면 신경 쓰지 말거라.”
“욕망에 지는 이들이 있다면 이겨내는 이들도 있을 터.”
“오히려 욕망을 자극하여 내면의 본성을 볼 수 있게 될 터이니, 나름 유쾌하겠구나.”
“허허, 역시 당신들은 타고난 지배자구려.”
사람이 주식을 부정하고. 동물은 기꺼워하는 상황.
허나 털 달린 두 동물들이 주식을 반기는 건 서민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면모 때문이 아니었다.
도리어 인간을 싫어하기에 더욱 파멸로 몰아 그들의 본성을 파헤치므로, 진짜배기를 가려내기 위한 수단으로 쓰려고 저러는 것이지.
비록 훗날의 얘기겠지만 중원 삼국에서 주식이 활성화되어 시간이 흐른다면 영수들은.
“주식을 솎아내기 수단으로 사용하겠다, 이 말인가요?”
여명의 물음이었고. 두 영수는 가볍게 긍정했다.
“관리 또한 우리가 해야겠지.”
“물론 인간의 욕망이란 것이 엄청난 결과를 낼 수도 있겠지만. 그때는 주식이란 시장 자체를 없애면 될 테지.”
“다, 다른 사람이 만들면요?”
“반역죄로 구족이 멸할 텐데, 과연 할 자가 있을까 싶구나.”
“그것도 보는 재미가 있겠어, 우후후.”
“…두 분 언제부터 친해지셨어요?”
여명은 아연하게 읊조렸다.
저 복슬복슬한 콤비가 평소와 달리 싸우지 않고. 힘을 합치는 광경은 웅장한 것이었으며. 나누는 대화는 살벌하기 그지없지 않은가.
친해져선 안 될 이들이 친해진 감각이다.
“그대도 기억해두어라. 곡식이건 사람이건, 일정한 시기마다 솎아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여가 사는 곳이 깨끗하기 위해선 기꺼이 숙적과도 손을 잡아야 할 때도 있는 법이지.”
“…진짜 새삼스럽지만. 두 분이 무서운 분들이란 게 실감이 나네요.”
여명은 마냥 저들이 귀여운 마스코트가 아니라, 금천후의 말처럼 타고난 지배자임을 깨우쳤다.
현대에서 자기 돈 사라졌다고 찡찡대는 무늬만 정치인과는 완전히 격이 다른 존재.
새삼스럽지만,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감각을 맛보며 여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하고 있으니, 두 영수가 살며시 여명의 눈치를 보았다.
“그대여, 혹시 본녀의 말에 실망한 것은 아니지?”
“여를 미워하면 슬플 것이다.”
“…참 나.”
방금 전까지만 해도 최종 흑막처럼 사악한 표정을 짓던 여우와 올빼미가 눈가를 촉촉하게 물들이며 그를 올려다보니 몽글몽글한 흐뭇함이 차올랐다.
아무리 무섭다고 한들 귀여움이야말로 그녀들의 절초임을 증명하는 둘이었고. 여명의 입에선.
“제가 두 분을 어떻게 미워하겠어요.”
차마 싫은 소리가 나갈 수가 없었다.
그제야 해맑게 웃는 두 영수는 그에게 연신 교태를 부렸고. 계속되는 애정 공세에 기어이 함락당하는 여명은 그저 두 손을 들고 항복만을 외쳤다.
“…요망한지고.”
금천후는 떨떠름하게 애교를 부리는 두 영수를 보았고. 속이 매스꺼운지 시선을 돌렸다.
자신이 어릴 적부터 세상을 지배하던 영수들은 금천후에게 있어 귀여운 외형의 동물이 아닌, 자신보다 한참이나 나이 많은 ‘어르신’이라 할 만했다.
금천후의 눈에는 마냥 여명에게 애교를 부리는 저들의 모습이 마치 어느 노파(老婆)가 젊은 청년을 꼬드기는 것처럼 보인다는 의미.
“오래 사니 못 볼 꼴 많이 보는군.”
금천후는 간만에 술이 마렵다며 맥주 한 잔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이걸로 매스꺼움을 억눌러보자는 듯.
한데.
─천산의 관리 대리자, 곤륜의 이름으로 천산령(天山令)을 선포한다.
멈칫!
“…술도 여유롭게 못 마시게 하는군.”
금천후는 맥주를 그대로 쭉 들이켜며 단숨에 비웠다.
음미하면서 술을 마시는 그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최악인 주도(酒道)였으나, 그는 혀만 찰 뿐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로 접시에 있는 음식을 단숨에 비우곤 자리에서 일어나 서서히 식당 밖으로 나가는 일련의 상황에.
“노야?”
“금방 올 터이니 마령서를 더 튀겨다오. 시원한 맥주도 준비해주고. 거품이 없어지기 전 오마.”
“??”
후웅!
바람 부는 소리와 함께 금천후가 있던 자리에는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땅으로 꺼진 듯이 순식간에 모습을 감춘 금천후였으며. 눈을 끔뻑이는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즘 삼국지 읽으시나…?”
여명은 의문을 표하면서도 감자를 튀기고. 오크통에서 맥주를 담아갔다.
정말 거품이 사라지기 전까지 다시 돌아올까 궁금해 하면서.
………
………
천산은 항상 고즈넉하고도 조용했다.
과거 정파와 사파에 분란으로 인해 정사대전이 일어났을 때도 천산은 조용했고. 여러 세력들이 옛 인연을 들먹이며 도움을 청했음에도 천산은 움직이지 않았으며. 정사의 세력들이 천산을 공격했을 때는….
그대로 지워버렸다.
과거 천산을 공격했던 연합 세력이 삼국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건은 현재까지도 화자처럼 전해졌으며. 이로 인해 세간에서 천산을 별개의 세력으로 보기 시작한 결정적인 사건이기도 했다.
어쩌면 백룡성이나 마교보다 더욱 강대할지 모르는 비공식적 무림 최강 집단.
그것이 바로 천산이었고, 천산이 항상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비법 아닌 비법이었다.
그런 뜻에서 현 무림에서 천산을 향해 공격을 감행하려는 멍청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만약 그런 자가 있다면, 그건….
“아하하! 좋구나, 좋아!”
천하의 우자(愚者)이거나, 혹은 자살하려고 호랑이 무리에게 뛰어드는 들개와 별반 다를 것이 없을 터.
한 남자의 주먹이 뻗어나갈 때마다 압축된 공기가 주먹 끝에서 터져 나가 작은 폭발음이 울렸다.
콰아앙!
그야말로 과격하고도 무식하기 그지없는 주먹질이었지만. 무식한 주먹질과 달리 신법과 움직임은 교묘하였고. 상대의 공격을 유려하게 흘려내기까지 했다.
퍼버벅!
공방 일체의 절묘한 한 수를 물 흐르듯 자유롭게 구사하는 사내의 무위는 대단한 것이었고. 절정의 무인조차 감탄이 나오게 만들 신묘함이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기 있는 이들 중 그 누구도 사내의 무공에 감탄하지 않았다.
도리어.
“저놈, 저거 옛날에는 거칠기만 했는데 이제는 좀 제법이군.”
여유롭게 무대를 직관하듯 평을 내릴 뿐이었지.
“호오, 주먹에다 무당 면장을 섞은 건가? 무당 놈들, 무공을 얼마나 파훼당한 거지?”
“검귀 녀석, 강해졌네.”
현재 천산에 난입한 남자를 상대로 싸우는 것은 다름 아닌 마라검귀였다.
밥심에 있을 때만 해도 친근하고 허허롭게 웃기만 하여, 항상 여명에게 마 영감님이라고 불리는 자.
한데 오늘의 그는 달랐다.
서걱!
그의 검 끝이 움직일 때마다 공기가 찢어발겨지며. 사내가 쏘아내는 권압조차 단숨에 베어졌다.
검이 마치 제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만 같은 신묘한 검술.
“저게 검귀의 현극비검(玄極飛劍)인가? 대단하군,”
“벽을 넘지 못했다고 들었다.”
“저게 벽을 넘지 못한 것으로 보이나. 하루도 수련을 멈추지 않은 검이다. 진작 벽을 뛰어넘었군.”
“으음. 동의.”
천산을 찾아온 불청객은 남자 한 명만이 아닌 것인지 두 사람의 흑의인이 같이 있었다.
흑의로 얼굴과 몸을 덮어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천산의 은거자들은 흑의 따위는 무시하며 상대방의 정체를 꿰뚫었다.
“저 녀석, 검마종(劒魔宗)인가?”
“아직도 살아 있었다고?”
“그럼 저자는…. 틀림없군. 광마종(狂魔宗)이다.”
저 두 남녀의 정체를 깨달은 은거자들의 시선에는 경악이 깃들었다.
웬만해선 놀랄 일이 없는 그들이었지만. 차마 저들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이백 년 묵은 할멈이 아직도 살아있을 줄이야.”
“저 할멈, 아직도 살아있었어?”
싹둑!
“누구 보고 할멈이야!!”
여인은 자신을 할멈으로 비유한 이들을 향해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고. 일순 거대한 검풍이 천산을 한 바퀴 휩쓸며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콰아앙!
충격파가 얼마나 격정적이었으면 숲이 공터로 변할 정도였으며. 간담이 절로 서늘해지는 광경이었으나, 여기 있는 이들 중 저 정도 검풍을 막아내지 못할 머저리는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맞네, 할멈.”
“우와, 동안공(童?功)을 대체 얼마나 익힌 거야 저 할망구?”
검풍과 함께 흑의가 벗겨진 여인을 보며 고개를 절로 주억였다.
뿅…!
흑토(黑兎)의 귀.
이른바.
“이 새끼들! 죽여 버린다!”
토끼 귀를 가진 여검수.
검마 단백설이 자신의 몸뚱어리보다 두 배나 더 큰 거검(巨劍)을 본격적으로 쥐었다.
tmi후기.
-다시금 말하지만, 마교의 사람들은 인외종이 많다(154화 tmi참조).
-흑원국에는 영수와 혼인한 사람들이 많으며. 격세유전의 영향으로 동물의 귀를 가진 사람이 제법 있다.
-다만 최근에는 영수와 혼인한 사람이 존재치 않으며. 이제 격세유전의 핏줄은 정말 드물다.
-마교에서도 몇몇만이 격세유전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으며. 압도적인 재능과 수명을 가지며 높은 자리를 보전하는 중이다.
-검마는 세수 200세가 넘은 여인이지만. 동안공을 익혀 현재는 젊은 모습을 유지하는 중이다.
-동안공 너무 오래 유지한 부작용으로 인해 십 대의 모습으로 고정된 상태이고. 팔다리의 리치가 짧은 것이 흠인지라 자신의 몸집에 두 배가량인 거대한 검을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