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취중진담(醉中眞談), 삼자담화(三者談話).(4)
여명이 어렸을 적, 그는 ‘가족’이란 것이 다 자신들 같다고 여겼다.
“성적경쟁을 유독 일찍 시작했지.”
세 살의 나이. 이제 막 30개월이 되었을 뿐인 아이에게 그의 부모는 다양한 것을 바라였다.
좀 더 명석하길 바라며. 또래 아이보다 훨씬 더 우수한 학습 능력을 가지길 원한 것이다.
“나름 법조계 가문이었고. 가업처럼 모두가 검사 혹은 판사, 변호사가 되어야만 인정받는 구조였는데, 아무래도 판검사 소리 들으려면 공부를 잘해야 하니까. 자식들한테 바라는 게 많았지.”
그래도 머리는 타고나야 하는 것이 있다고 하고. 부모가 공부를 잘했으면 그 영향이 자식한테도 전해진다고 했었나?
그 얘기가 사실이란 걸 증명하듯 그의 남매들은 평균 또래보다 똘똘했고, 학습 능력이 좋았다.
덕분에 부모들은 만족했고.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도 우수하리라 여겼다.
그래서일까.
“기대치가 너무 높았던 탓인지, 평범한 아이를 용납하지 못하더란 말이지.”
여명이 말이란 걸 하게 되고. 사물과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고 기억하게 됐을 나이가 됐을 때 부모가 했던 말은 이것이었다.
“‘너 같은 게 내 자식이라니’였지.”
제 입으로 말하기 뭐하지만. 자신은 뒤떨어지는 아이가 아닌, 그저 평범했을 뿐이었다.
그 나이 아이처럼 순진했고. 아직 차근차근 배워가야 할 뿐인 평범한 아이.
하지만 여명의 부모는 이를 용납하지 못했다. 자신의 아이는 훨씬 더 우수해야 하며. 반드시 판검사 중 하나가 되어야만 했으니.
그렇게.
“난 좀 더 ‘엄격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지.”
엄격하다는 기준을 정의하는 건 사람마다 상대적인 요소일 테지만. 여명은 자신의 어린 시절이 엄격하다고 단언한다.
“부모의 애정이란 걸 몰랐고. 아이들과 놀 시간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지. 거기다 그 흔한 소풍이나 놀이공원도 간 적이 없고.”
분명 재산도 풍부하고. 남들에겐 참으로 친절하고 베풀면서도 자식에게 베푸는 것은 아까워했던 이들.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부족한 자식한테 베푸는 걸 싫어했던 거지.”
우수했던 형들과 누나, 그리고 동생들한텐 갖은 애정을 주었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다른 건 다 참겠는데, 사람 차별하는 건 정말 못 참았었어. 그렇게 내 머리가 커질수록 반발심이 커지기도 했지.”
맞는 것이야 잠시 아플 뿐이니 참을 만하다.
굶는 것도…. 뭐, 3일은 버틸 만하더라.
한데 항상 제 형제와 사촌, 혹은 TV에 나오는 어느 영재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부모는 그에게 끝도 없이 말했다.
“‘넌 한심한 놈’이고. ‘우리가 키워주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게 진짜 서러웠는데, 그 당시 난 진짜 내 스스로를 한심한 쓰레기라고 여겼어.”
요즘 말로 가스라이팅이라고 할 것이다.
마치 세뇌를 당하는 것처럼 그의 자존감은 끝도 없이 하락했고. 중학생이 되어 머리가 좀 굵어지며 반항심이 거세졌을 때쯤, 그는 자존감이란 걸 가질 수 있었다.
“무림으로 치면 지학 때쯤 나이일 거야. 아마 너희도 알걸? 그 나이 때 되면 사람이 반항심도 커지고. 감정조절도 뒤죽박죽인 거.”
남들은 중2병이다 뭐다 하며 흑역사를 갱신했지만. 오히려 여명에겐.
“나한텐 전화위복이었지.”
반항심이 심해지며 부모의 말에 반박할 수 있었고. 제 가족이 도리어 이상한 인간들이란 사실을 똑바로 깨달아갔다.
여명은 이후.
“집을 나왔어.”
그 집안에 계속 있어봤자 답이 없을 거란 사실을 중학생밖에 안 된 여명조차 안 것이다.
하지만….
“반년, 딱 그 반년이 내 인생 최악의 지옥이었어.”
대략 3세부터 14세까지 겪은 무수한 가스라이팅의 세월은 물론 고단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몸을 뉘일 집이 있었다.
배고픔과 폭력보다 더욱 서러웠던 것은 자신의 편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과, 이른 나이에 깨달은 사회의 무정함이었다.
“무정한 것도 무정한 건데, 진짜 어른들이 잔인하더라.”
노숙을 하려다가 오히려 다른 노숙자에게 소주병으로 맞기도 하고. 어느 폭력배들한테 잘못 걸려 억지로 구걸을 해야 했고. 또 어떨 때는 드디어 신뢰할 만한 어른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뒤통수를 제대로 맞고.
여명의 인생 중 가장 추잡했고. 감정이 더러워졌던 나날이 아닐까 싶다.
“만약, 영감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난 그렇게 계속 더러운 삶을 살았지 않았을까 싶어.”
여명은 자신의 인생 최고의 행운이 다름 아닌 강태산을 만난 것이리라 단언했다.
그가 아니었으면 자신은 하루살이 같은 인생을 계속 살았을 것이고. 사회의 부조리에서 발버둥 치다가 기어이 꺾였을지도 모를 테니.
“아, 미리 말하는 건데 난 괜찮으니까 불쌍하게 안 여겨도 돼. 가끔 지인한테 내 과거 얘기를 하면 동정한단 말이지….”
여명은 쓰게 웃었다.
동정. 이게 자신을 위해서 해주는 것이기에 고맙긴 하지만. 여명은 과거 일을 가지고 전혀 서글퍼하지도, 그렇다고 끔찍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물론 가볍게 넘길 만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난 과거의 일에 사로잡히는 것보다 앞으로 나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보거든. 그리고 나한테 있어 과거의 악연과 악몽은, 내 ‘현재’에 아무런 이득조차 안 되는 쓰레기란 사실이야. 그러니 나한테 과거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
누군가는 그런 여명이 답답하다며 묻는다.
‘너의 어린 시절을 지옥으로 만든 가족과 악연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느냐?’고.
그러면 여명은 말한다. ‘하면 좋을 테지만. 안 해도 상관없다,’
여명이 호인이라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 사람들을 신경 쓸 시간에 나를 좀 더 발전시키는 데 시간을 쏟고 싶거든.”
가족에게, 혹은 그를 괴롭혔던 사람들에게 복수를 한다면 속은 시원할지라도, 복수를 위해 할애할 시간과 돈, 심력 등이 아깝다.
“그래도 만약 그놈들을 확실하게 무너트릴 기회가 있다면 한 번쯤 해볼 마음은 있어. 확실한 일에는 투자해도 손해는 아니니까.”
여명은 가벼운 어투로 그리 중얼거렸다.
정말 뭐가 됐건 상관이 없다는 것처럼.
여명은 그렇게 자신의 얘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무덤덤하게 끝내었다.
마치 타인의 얘기를 늘어놓은 것처럼.
그리고선 그는 흐릿한 표정을 지었다. 씁쓸하여 짓는 표정이 아닌, 어딘지 재미없는 얘기를 하여 분위기가 흐려진 것이 신경 쓰여 보이는 사람처럼.
아니나 다를까.
“봐봐, 들어도 별거 없잖아?”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퉁명스러워하는 그였고. 설기와 북궁린은 여명의 말에….
“……월.”
“저도 동의합니다, 설기님.”
그를 괴롭게 한 사람들을 찾아가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었다.
복수의 의미조차 찾지 못하는 그가 너무나도 가엾고도 애달파서.
그가 저토록 달관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여며집니다.’
북궁린은 애써 올라오려는 눈물을 억지로 삼켰다.
동정은 그가 원하는 게 아니라 하였으니까.
다만.
‘언젠가 반드시, 제가 응징할 겁니다…!’
북궁린은 제 삶의 목표를 또 하나 추가했다.
* * *
여명은 북궁린과 설기의 반응이 예상보다 더욱 격분하는 것에 난감함이 어렸다.
‘확실히, 정작 난 괜찮아도 다른 사람들한텐 충격적인 얘기긴 하겠지.’
지금이야 여명도 덤덤히 얘기하는 것이지. 만약 십 대 시절 강태산에게 본격적으로 요리를 배우며 새로운 집중 거리를 찾지 못했다면 그들에 대한 원망으로 미쳐있을지도 모르리라.
또한 자운에게 전수받은 세심공을 8년간 수련하며 여러모로 마음공부를 하게 된 여명이었으니, 어찌 보면 현재의 그는 집을 나오기 전의 자신과 완전히 별개의 인물이 된 게 아닐까 싶다.
“어쩌면 15살 이후부터 나는 제2의 인생을 새롭게 사는 걸지도 모르겠네.”
“…월.”
누가 보면 깨달음을 얻은 성인(聖人)인 줄 알겠다며 설기는 여명에게 반박했다.
어찌 사람이 저토록 순진하고 착한지, 원….
그러면서도 설기는 여명의 큰형이란 놈을 가볍게 혼낸 것을 후회했다.
저러한 과거를 알았더라면 결코 그 정도 수준으로 봐주지 않을 터인데…!
“으르르.”
설기는 결심했다. 이번 일이 끝나고 천산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반드시 여명을 괴롭게 한 원흉들의 인생을 파멸로 이끌고 말겠다고!
설사 주인이 그다지 신경 쓰고 있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어디까지나 자기만족을 위해서라며 살벌한 기세를 머금는 설기였다.
하지만 그 전에.
“월.”
“응? 뭐가 미안해?”
“…월월.”
“아아, 그런 뜻이었어. 난 또 뭐라고.”
여명은 설기의 갑작스러운 사과에 생뚱맞다 싶었으나, 이어지는 말에 쓰게 웃었다.
진짜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데….
‘자기 때문에 괜히 아픈 과거를 건드렸다 싶은 건가.’
나름 비밀 공유를 통해 서로를 보듬는다는 의도였던 것 같은데, 하필 여명의 과거 얘기 수위가 상당히 셌고, 어떤 의미론 북궁린보다 비극적인 것 같아 미안해하는 설기였다.
툭.
“됐어, 이 녀석아. 진짜 별거 아니고. 천산의 어르신들 대부분도 아는 얘기인 걸, 뭐.”
“…끼이잉.”
“안 그런 것 같으면서도 순한 구석이 있네, 얘도.”
여명은 설기의 등을 다정스레 쓸어 넘기며 온기를 공유했다.
백 마디 말보다 이러한 체온의 접촉이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해줄 때가 있는 법이었으니.
“…왈.”
설기의 그의 진심을 접하며 힘들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더 이상 미안해하는 것은 오히려 여명을 무시하는 행위가 될 거란 걸 인지한 것이었다.
하지만 평소처럼 그냥 이대로 넘어가는 건 또 아니 될 말이다 싶으니, 설기는….
“월월.”
……자신이 품은 최고의 비밀을 말해주기로 하였다.
“비밀?”
“설기님이 품고 계신 비밀 말입니까?”
여명과 북궁린은 설기란 강아지가 보통 강아지가 아니란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으며. 정체도 어느 정도 알고는 있으나,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형편이었다,
워낙 자기 얘기를 입에 담지 않는 설기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리라.
“월.”
하지만 지금. 설기는 결심이 선 것인지 자신의 비밀을 입에 담았고. 점차 설기가 털어놓는 얘기를 들으며 여명과 북궁린의 동공은 시간이 지날수록 휘둥그렇게 변해갔다.
모든 얘기를 들은 두 남녀는….
“너 진짜 개가 아니었어?”
“사, 사람이었던 것입니까?!”
“……월.”
무례한 인간들일세….
참으로 그들다운 담백한 반응으로 설기의 ‘정체’에 놀라고 말았다.
이후, 아스라이 떠오른 초승달의 지저세계 아래에서, 그들은 많은 얘기를 나누고. 무수한 진심과 감정을 토로하는 시간을 가지며 세 ‘사람’은 어제보다 좀 더 서로에게 가까워지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는 지저세계의 날이 밝아올 때까지 계속되었고. 여명과 북궁린, 설기 등은 간만에 늦잠을 자게 되었다.
아주 기분 좋고도 마음 편한 늦잠을 말이다.
tmi후기.
-만약 여명이 강태산을 만나지 못했다고 해도, 그의 천성이 워낙 깨끗하고 올바르기에 뭐든 잘했을 것이다.
-요리가 아니더라도 여명은 뭐든 진득하게 노력하는 사람이기에 어떻게든 성공했을 것이다.
-여명은 자기 가족을 용서한 것이 아니다. 그저 이번 화에 나온 그대로 그들을 용서하지 못하되, 자신의 앞날과 발전을 위해 기여하는 나날이 더욱 소중하고. 그들에게 투자할 시간 자체가 무의미하다 느끼기에 악연에게 무관심한 것을 넘어, 죽든 말든 관심이 아예 없다는 것에 가깝다.
-여명은 모르지만. 천산의 은거자들은 여명의 부모 얘기를 듣고. 몰래 현대로 가서 부모들의 단전을 깨놓은 상태다. 죽이지 않은 건 여명의 마음을 존중하는 최대의 예의라고 한다.
-단전이 깨진 사람은 노화가 빠르게 진행되며. 아무리 좋은 약을 먹을지라도 몸의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장육부가 점차 고장 나는 경험을 실시간으로 하게 되며. 암 환자와 같은 몸이 되어간다.
-암 환자는 고칠 방법이 희미하게라도 있다면, 현대에서 단전이 깨진 사람은 아예 단전이란 개념을 몰라 고칠 방법이 없다.
-어린아이를 괴롭힌 만큼 죽을 때까지 고통을 받는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