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판이 개판이면, 뒤엎으면 그만(8)
“……구왕.”
여명이 나간 자리를 물끄러미 보며 아쉬운 듯 울음소리를 낸 천마였으나, 그는 곧 여명이 남기고 간 ‘선물’을 보았다.
척 보기에도 비범한 기운이 감도는 것이 아닐 수 없으며. 천마에게조차 긍정적 영향을 줄 비범함이 감돌았다.
천마는 망설일 것도 없이 보따리를 풀었고. 보따리 안에는 새하얀 무언가가 반듯한 모양새로 먹음직스레 빛을 뿜었다.
눈이 부신다는 듯 천마가 눈매를 좁히고 있자니.
“월….”
염병하고 자빠졌네.
설기는 특유의 독설을 쏘아내며 자신의 아비를 구박했다.
추태 좀 그만 부리라며.
그저 ‘두부(豆腐)’ 한 모 때문에 저러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설기 본인이 더 창피한 것이었다.
아무리 싫은 양반일지라도 천마라고까지 불리는 양반이 저러고 있고. 제 아비가 추태를 부리는 것이 마냥 가오가 상하는 (명예)대구 강아지 설기였다.
“으음, 겨우 두부라…. 실망이구나. ‘저것’의 가치를 모른다고 하지 않을 터인데.”
“…….”
다만 천마는 설기를 꾸짖듯 무심하게 보았고. 설기는 그 위압적이면서도 강렬한 시선 앞에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드는지 시선을 회피했다.
“와, 왈.”
결코 겁먹은 것이 아닌 작전상 회피를 외치며.
“─변했군.”
그런 설기를 물끄러미 시선 주던 천마는 제 딸이 단 1년 사이에 많은 것이 변했음을 느꼈다.
1년 전만 해도 그와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고. 도리어 경멸과 분노. 혹은 복수심을 불태우던 딸이었다.
한데 지금은 달랐다.
비록 그를 미워하고 있을지라도 지금은 두 눈을 똑바로 직시하고 있으며. 어딘지 모르게 심지가 굳혀져 있었다.
“많이 변했어….”
“왈.”
시간이 흘렀으니, 변하는 건 당연하다며 설기는….
“─그만.”
우우웅!!
“!!?!”
답변을 이으려던 설기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천마의 강대한 내력이 마치 주변의 기운을 모조리 장악한 것처럼 설기 한 명에게 어마어마한 압박감을 주는 것.
부르르르…!
엄청난 기압(氣壓)의 파도가 자신을 덮치는 듯한 감각에 무력감과 공포 등을 느끼며 설기는 정신마저 잃고 싶었다.
한데도 설기가 뒷걸음치지 않은 이유는 하나.
-우리는 가족이잖아. 힘든 일이 있으면 같이 나누자. 알겠지?
“……월.”
자신을 매일 같이 쓰다듬어주며 보물처럼 대해준. 그리고 항상 몰래 한다고 생각하지만 기력으로 몸의 건강 등을 챙겨주었던 주인의 힘이 여전히 설기의 몸을 따스한 햇살처럼 지켜주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설기는 도망치지 않을 수 있었고. 정신을 잃지도 않으며 눈앞에 거대한 공포에 맞설 수 있었다.
후우우웅!
“왈-!”
콰직, 하며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울린 듯했다.
설기를 압박하던 장막이 종잇장처럼 찢어진 그러한 소리가.
“으음, 그렇군. 그의 기력을 계속 접하며 너 또한 기력(氣力)을 쓰는 방법을 배웠군. 축하한다. 드디어 넌 모든 교도들이 원한 힘을 손에 넣은 것이다.”
“……으르르르!”
언뜻 딸의 성장을 칭찬해주는 다정한 아비의 말처럼 들리지만. 조금 전까지 자신을 위협한 주제에 잘했다고 칭찬하면 누가 기뻐하겠는가!?
…뭐, 기기련 같은 미친 광신도들은 기뻐할 테지만.
하지만 설기는 광신도도 아닐뿐더러, 오히려 천마를, 제 애비를 싫어하는 입장이었으며. 지금 일로 더욱 경멸감이 생긴 상태였다.
그런 그녀가 으르렁거리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말했을 텐데, 그만하라고. 언제까지 ‘짐승’인 척 굴 테냐.”
“……!”
“우스운 것. 그것이 네가 본인에게 보이는 반항임을 안다. 하지만 겉모습이 그렇다 하여 본질을 잃는다면, 넌 그때야말로 사람도 짐승도 아닌 것이 될 터.”
“…….”
“넌 똑똑한 아이다. 알아들었다면 짐승인 척 굴지 말고. 불만과 분노가 있다면 당당히 네 입으로 표출해라. 그것이 인간(人間)이란 것이니.”
“…….”
갈등이 이어졌다.
도저히 인정하기 싫고, 그의 말을 따르기 싫다는 고집 어린 갈등이.
하지만.
“……잘난 척하는 거, 보기 더러워서 내가 입을 연 거야, 멍.”
정론조차 무시할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기에, 그녀는 입을 열었다.
맑고도 청명한 목소리.
간만에 듣는 딸아이의 목소리에 천마는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전형적으로 미움 받는 아버지처럼 괜한 트집을 잡았다.
“입이, 상당히 험해졌군.”
“당신이 내 입 험해진 거에, 뭐 보태줬어요? 멍.”
“……으음.”
천마는 제 딸이 못 본 새 입이 많이 험해진 것도 험해진 거지만. 성격도 많이 안 좋아진 것 같다며 처음으로 침음을 내었다.
…조금은 어색하고. 뭔가 미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이런 침묵을 깬 것은.
“별꼴이에요. 말하라고 했으면서, 왜 당신이 입을 닫아요, …멍.”
“…그 말끝에 붙이는 웃기지도 않은 표현은 뭐지?”
“몰라요, 멍.”
“……으음.”
저토록 퉁명스럽게 굴고 입을 열지 않는다고 해도 천마는 상대의 속을 읽을 수 있었다.
상대가 자신보다 격이 낮은 상대라는 조건이 붙어야 한다는 것이 있지만. 제 딸아이의 격은 ‘아직까지’ 천마보다 떨어지는바.
천마는 그녀의 속내를 읽고 고개를 저었다.
“짐승의 의태(意態)를 너무 오래 유지하고 있던 반동이군. 못해도 1년 사이에 세 번은 본 모습으로 돌아와 줘야 인간성(人間性)을 유지할 터인데.”
“흥, 내 마음이에요, 멍.”
“마음까지 짐승으로 전락하는 수가 있다.”
“멍! 오히려 환영이네요.”
“…음.”
설기는 코웃음을 하듯 멍 소리를 내었고. 천마는 못 말리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흑원신교의 최고 걸작이란 소리를 듣는 딸아이지만. 그 본질은 반항심 많은 어린아이인바.
“네가 신교와 본인을 원망하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자신을 망쳐 우리의 ‘목적’을 망가트리려는 의도가 있음도 짐작이 간다. 허나 그렇다고 하여, 스스로를 망치게 된다면 본말전도이니.”
“멍, 언제부터 내 걱정을 했다고요.”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그것이 너의 선택이라면 그 또한 감내할 뿐. 하지만 ‘그’는?”
“!!”
흠칫!
순간 설기는 몸을 떨었다.
천마가 말하는 그가 여명을 일컫는 것임을 알기에.
“그에게 말하였나? 짐승의 의태를 유지하므로 생기는 부작용을? 아마 하지 않았을 것이다. 넌 그런 아이니까.”
“내 뭘 안다고…!”
“안다. 삼국에서 본인보다 너를 이해해줄 사람은 없을 터.”
“…….”
…그래, 저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도 한때는.
“나 또한 너와 같은 실험체(實驗體)였거늘. 어찌 본인이 이해하지 못할까.”
“…….”
설기는 차마 저 말에 반박하지 못하였다.
아비로도, 그리고 사람으로도 싫은 양반임은 분명하지만, 그는 분명.
“…나만 나쁜 년이에요, 멍.”
위대한 남자인 것은 분명하니까.
* * *
과거 수라신교와 배화교가 합쳐진 배경, 그리고 흑원의 제자 천마.
이 셋의 통합 과정에는 무수한 다툼과 충돌이 있었고. 이러한 과정에서 어쩌다 이런 결론이 난 것인지 모르겠지만. 흑원신교란 거대한 조직이 창건(創建)된 것에는 모든 집단의 의견을 한데 묶는 목표가 있던 덕분이었다.
신살(神殺).
웃기게도 흑원신교의 교도들은 자신들의 신 흑원을 경배하는 만큼 그를 미워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에는 수많은 가설이 있는데, 흑원국이 지리적으로 영수의 피를 이어받은 혼혈이 많다는 이유, 혹은 옛 중원의 황제들의 원한과 저주가 깊게 새겨져서라는 가설도 있었다.
뭐, 무엇하나 아직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지만. 분명히 말해 흑원신교는 흑원을 죽이는 것을 목표로 탄생한 집단이었고. 이를 위해 흑원신교는 장대한 목표를 하나 세웠다.
-위대한 신수, 흑원을 죽일 만한 존재를 우리의 손으로 탄생시킨다!
애초에 말도 안 되는 목표였다.
신수(神獸)가 괜히 ‘신’과 같은 존재라 불리겠는가?
그들의 힘은 결코 일반 영수와 같지 않다.
말 그대로 실존하는 천재지변(天災地變)이자 기적(奇蹟).
인간은 그저 신수 앞에서 벌레만도 못한 존재가 될 따름.
그러나 이를 인정하지 못한 옛사람들은 생각했다. 인간은 벌레만도 못하다면….
-영수는 어떠할까?
비록 신수는 되지 못했지만. 분명히 말해 영수 또한 위대한 존재임은 분명했다.
천재지변과 같은 존재는 아닐지라도, 지변(地變) 정도는 충분히 일으킬 만한 힘을 가진 고귀한 존재.
-인간으로 안 된다면, 영수의 힘으로 우리의 송곳니를 키운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영수에게 도움을 얻겠다는 소리가 아니었다.
흑원신교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힘’으로 신수를 죽이는 것인데, 영수의 힘을 빌린다면 그것은 낙장불입과 같은 것이니 말이다.
대신 그들은.
-영수가 될 만한 존재를 만들자!
가히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인간이 인간인 상태로 영수의 힘을 가진 존재를 만들자.
도저히 상식선에서 받아들일 계획이 아니었지만. 광신도가 괜히 광신도겠는가?
한 가지의 맹목적으로 미친 인간들이기에 광신도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광신도만 모인 집단이 흑원신교였으며. 미친 짓을 해낼 수 있는 자본력과 인력, 의지마저 모두 갖추고 있다는 점이야말로 아이러니한 일일 터.
-교주, 당신의 핏줄이야말로 답이 될 것이오.
흑원의 제자가 될 만큼 강력한 육체와 정신력. 그리고 강철과 같은 영혼(靈魂)을 가진 초대 천마.
그 핏줄을 기반으로 하여 우수한 종자(種子)를 수확해낸다.
초대 천마는 이러한 계획을 들으며 무시할 법도 했지만.
-재밌군.
그는 이러한 계획을 듣고 흥미로워했다고 한다.
자신의 핏줄이 언젠가 흑원을 멸(滅)한다.
이만큼 흥미로운 계획이 어디 있을까.
-무(武)의 전수로 그 괴물을 이길 가능성은 영원히 없을 테지. 흑원이란, 신수란 존재는 영원불멸하며 전무후무한 존재일 테니. 하지만 피로, 내 후대가 계속해서 힘을 쌓아 이어받는다면…. 어쩌면 가능할 법도 하겠군.
제 스승을 죽이는 계획을 기꺼이 수용하는 천마였지만. 이는 스승의 영향이라 할 수 있었다.
흑원의 별명은 투신(鬪神).
오히려 그의 스승이라면 기꺼워할 만한 계획일 거라 여겼고. 실제로 이 소식을 전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자 흑원은.
-우오오.
재밌을 것 같으니 해보라고 부추기까지 했다고 전해지는 바였다.
신의 허락과 초대 천마의 협력, 신교란 거대 세력의 집념까지.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지며 천마의 핏줄은 엄중한 관리하에 대(代)를 이어왔으며. 조금씩 그 성과를 내갔다.
솔직히 아무리 맹목적이라 하여도 이러한 미친 계획이 오래갈 리 없는 게 정상일 테지만. 흑원신교는 무려 7백 년이란 시간 동안 이 계획을 이어왔다.
그리고 마침내.
-드디어 태어났다! 우리의 이론은 옳았던 것이다…!
-태어났다! 우리의 신을 죽일 무적자(無敵者)가!
영수의 핏줄을 가진 것도 아니지만. 수많은 피(血)를 계승하고. 뱃속에 있을 때부터 기환학사와 주술사 등에게 무수한 보살핌을 받으며 탄생한 광기의 성과
인조영수(人造靈獸)의 탄생이었다.
그들은 기뻐했다.
이걸로 신수를! 그들의 원대한 목표를 이룰 날이 얼마 남지 않아…!
-태어나게 해준 것은 고맙다만. 이제 죽어라.
-……어?
허나 안타깝게도 칠백 년간 맹목적으로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려고 했던 자들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인조영수, 그러니까 당시 완성작이라 불렸던 무극천마가 인조영수 계획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않았기에.
무극천마는 흑원신교가 소망(所望)이란 이름으로 행한 모든 악업을 부정하며. 무극천마는 흑원신교를 정화(淨化)했다.
허나 이러한 정화 작업은 쉬운 것이 아니었고. 무려 3백 년의 세월을 더 소비한 끝에야 끝맺음을 맺을 수 있었는데, 이러한 정화 작업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 다름 아닌 무극천마의 아들이자 당대의 천마.
현재 흑원국에서 역대 최강의 천마라 불리는 홍염천마(紅焰天魔)가 다름 아닌.
“…재수 없어, 멍.”
눈앞에 제 애비였다.
“지극히 사실을 언급했을 뿐. 재수가 없게 느껴진다면 본인의 업적이 그만큼 대단한 것이겠지.”
“…….”
“눈으로 욕하여도 다 들리는군.”
“…쳇.”
역시 너무 잘나서 재수가 없다.
그러나 재수 없는 것과 달리 제 아비가 자신을 ‘정상’적으로 낳는 데 기여한 인물이란 것이 그녀를 더 이상 투덜거리지 못하게 하는 이유일 것이고. 설기는 묵비권을 행사해 갔다.
더 이상 입을 열어봤자 자기만 손해라며.
그때.
“그래서, 너의 목표는 이루어가고 있나.”
“목표?”
“숨기지 않아도 좋다. 이미 지괴에게 들은 바가 있으니.”
“!??!”
설기는 입을 쩍 벌렸다.
설마 그 영감…!
“다, 다 말했어요?”
망할 아비에게 모두 까발렸단 말인가!?
천마는 설기가 경악하고 충격을 먹건 말건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탓하지 마라. 그 또한 결국 본인의 교인.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
“재밌는 계획이었다. 확실히, 그러한 방법이라면 신교가 지금껏 이어온 천년의 계획이 모두 어그러지는 결과이긴 할 테지.”
천마는 흥미로워 보였다.
설기를 타박하는 것도 아닌, 오히려 그녀의 얄팍한 계획이 한없이 재미지다며.
“──바깥세상에서 ‘반려’를 만들어 피를 흐리게 만든다. 하책이지만 간편한 일이다. 허나 가장 중요한 것을 물어보고 싶군.”
“…….”
“반려는 만들었나?”
“…….”
…차마 아직 손잡을 사람도 못 구했다는 말은 자존심상 죽어도 하지 못할 설기였다.
tmi후기.
-마교에선 무극천마와 홍염천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영수 혼혈처럼 귀나 꼬리만 달린 인간만이 태어났다. 그 때문에 실패작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실험에서 실패작이었을 뿐, 워낙 좋은 재능만 가지고 있고. 기본적으로 극마지체 같은 것을 패시브로 가지고 태어나다 보니 그냥 인간으로서도 역대 천마들은 최강이었다.
-다만, 이러한 실험이 점점 미쳐가고. 교인들을 대상으로 인체실험을 하려던 것을 알고 무극천마가 실험을 그만두게 하였다고 보면 된다.
-어떤 느낌이냐면 과거 유럽의 바티칸이 마녀사냥이나 종교재판, 이단심문, 종교 전쟁을 일으킨 것처럼 마교도 실험이란 목적으로 여러 죄를 지으려던 것을 무극천마가 단호하게 끊었고. 그가 죽고. 백년에 걸쳐 홍염천마가 완전히 끝낸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래도 여전히 인조영수의 데이터가 남아 있고. 이를 기반으로 한 안정적인 인조영수가 탄생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설기와 그 형제들이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디지몬을 예로 들 수 있다(디지몬을 보지 못한 독자님들은 파워 디지몬을 보길 추천한다).
-원래는 설기나 홍염천마 등이 키메라몬이 될 수도 있었는데, 다행히도 그냥 진화태그 잘 탔고. 등급으로 따지면 천마가 SR등급이고. 설기가 SSR등급이라고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