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판이 개판이면, 뒤엎으면 그만(14)
여명이 자허가 살아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은 어찌 보면 운이 좋아서였다.
전날 기환술의 경지가 상승한 것. 그리고 자허란 양반이 그냥 죽지 않을 양반이란 것을 짐작하여.
“어르신들을 속일 마음은 없었어요. 단지 다른 사람들을 나가게 하려면 이러는 수밖에 없다 싶었던 거죠.”
“으음, 상황은 이해하였네.”
“…이해했다면서 검은 왜 안 놓고 계세요?”
“……이게 쉽지가 않구먼, 이 사부.”
여전히 자운은 화가 가라앉지 않는지 자허의 머리를 쪼갤지 말지를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정도 두들겨 팼으면 됐지. 또 뭘 한다고….”
“닥쳐라, 이 망할 놈아!”
“……끙, 아파 죽겠군.”
자허의 얼굴은 푸르뎅뎅하게 변해 있었다.
검날과 검집으로 사람을 이토록 다양하게 팰 수 있구나 싶은 묘기를 선보인 자운이었고. 자허는 훌륭한 실험대가 되어주었다.
솔직히 몇 날 며칠을 처맞아도 할 말이 없을 터이지만. 겨우 이 정도로 봐주는 자운이 정말 대인이라 할 만했다.
“하아, 대체 네놈은 어떻게 살아있는 거냐?”
자운은 죽은 줄 알았던 사제가 살아있다는 점과 그를 두들겨 패며 조금은 침착해진 모습으로 그에게 물었다.
목이 베인 사자(死者)가 어찌 눈을 뜨고 말을 내뱉는 것이냐고.
그야말로 기사(奇事)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며. 혹은 그가 인간인지 의문마저 들 따름이다.
삼존과 금천후 또한 말만 안 할 뿐, 난생처음 보는 괴상한 광경에 낯빛이 그다지 좋지 않으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만약 그가 인외(人外)의 존재가 된 것이라면, 그때는…!
“요괴 같은 게 된 것은 아니니 걱정은 마시오. 그저 이 또한 술법 중 하나일 뿐이니.”
“기횐술이란 말이더냐?”
“으음, 그런 것과는 좀 다르지. 그저 사술 같은 걸 연구하던 도중 내 몸이 좀 특이해진 것이지. 뭐, 그렇게만 알아두시오.”
“…대체 어떤 연구를 하면 요괴 같이 변하는 것이냐?”
“요괴 아니라니까 그러네. 흘흘.”
“……하아.”
도저히 설득력 있는 말은 아니었지만. 믿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봉신대전을 겪은 세대인 그들이 썰어버린 요물의 숫자는 물경 수백에서 수천.
덕분에 요괴를 판별해내는 것에는 이골이 난지라, 자허가 요괴 같은 것이 아니란 것만큼은 기운만으로도 파악이 가능한 그들이었다.
뭐, 그렇다 한들.
“왈….”
“저도 동의합니다, 설기님.”
차라리 요괴가 더 귀엽겠다는 설기의 첨언이었고. 이에 동감하는 북궁린이었다.
…뭔가 잡소리가 길긴 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자허가 살아있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마교를 농락한 행위.
“네놈이 목이 베였다고 한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마교에겐 안 될 말이겠지.”
“네 녀석이 안 죽었다는 것을 안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곤륜의 몫이 될 게다.”
“첨언하자면 이 사부를 엮을 생각은 하지도 말거라. 만약 이 사부에게 책임을 돌린다면 비록 네놈이 죽여도 죽지 않는 놈이라고 한들, 모든 수단을 걸고 반드시 없애버릴 테니!”
절세의 고수들이 내뿜는 기세는 그 자체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무기와 마찬가지였다.
그야말로 의형살인(意形殺人)의 경지.
그러한 광폭하고도 오싹한 기세에도 자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코웃음만 쳤다.
“흥, 애초에 그럴 마음도 없다. 내가 저 풋내기 녀석 뒤에 숨을 일이 어디 있다고.”
“지금은 뭔데요, 그럼?”
“……크흠.”
“참 나.”
여명의 반박에 합죽이가 된 얄미운 영감이었으나. 목만 남은 모습이 조금 안쓰럽긴 하다.
‘이놈의 노인공경도 사람 가리면서 해야 하는 건데.’
가끔씩 이런 예의 바른 성격이 싫다며 고개를 저으면서도 여명은 그에게 애써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죽은 척마저 하면서 아직 살아있는 이유는 뭐예요? 천산으로 옮겨드려요?”
“안 된다. 아직 내 육체가 여기 있으니. 아, 얼려달라고 한 것은 잘했다. 덕분에 새 육신을 만들지 않아도 되겠어, 흘흘.”
“…진짜 영감님은 말하는 것만 들으면 도저히 인간 같지가 않네요.”
“흘흘, 원래 이 나이까지 살다 보면 이리 괴상해지는 법이지.”
“…….”
글쎄, 아마 당신 같은 양반은 없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레 반박해 본다.
“어쨌든, 내 목이 잘리는 것으로 어느 정도 시간을 벌 수 있었으니 다행인 일이야.”
“다행이라고 말하긴 아직 좀 그렇지 않나?”
다시금 말하는 것이지만. 자허는 마교 입장에서 여전히 골백번 죽여도 부족할 대죄인이다.
만약 그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만 알더라도, 즉시 자허를 다시 죽이기 위해 호법사자란 양반들이 밀려올 터.
“대체 이 개판 상황은 어떻게 해결할 거예요?”
“…….”
“혹시 싶어서 묻는 건데, 아무런 생각도 없는 건 아닐 거라고 믿습니다.”
“…전혀 믿는 얼굴이 아니다만.”
“주둥이!”
“…….”
속 시원한 자운의 일갈이었다.
* * *
아직 뭔가 정확한 제시안을 들은 게 없었으나. 그래도 시간적 여유가 생겨서일까.
“후우, 이제 와서 물어보는 것도 웃기긴 한데, 대체 성화를 훔친 이유가 뭐예요?”
그동안 쌓였던 궁금증을 풀기 위한 물음을 던졌다.
“봉마림 때문이라네.”
“어르신?”
뜻밖에도 답변은 자운의 입에서 나왔다.
“아귀굴에서 들은 게 있나 보군,”
“대충은.”
자운이 자허에게 협력 아닌 협력을 해준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원래도 그냥 패 죽일 마음밖에 없었지만.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제법 그럴듯한 이유였기에.
“이 사부나 자네들도 알다시피 봉마림은 수많은 악령과 괴이. 마물 등이 서식하는 곳이라네. 또한 그중 한 마리만 풀려나가도 성(省) 하나가 초토화되는 것도 알 것이야.”
“으음….”
여명이야 떠오르는 것이 별반 없겠지만. 삼국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참사(慘事)에는 무조건 봉마림의 괴이들이 끼어있다는 게 삼국의 상식이었다.
“그렇지만 백룡 그 양반이 잘 막아주고 있잖아요? 저번에 보니까 혼자서 원자폭탄 터트리고 다니던데….”
“무봉일패, 확실히 성격은 그 모양이더라도 믿음직한 녀석이지.”
그래, 무봉일패가 이끄는 백룡성과 황군(皇軍) 등이 이끄는 병력이 봉마림을 에워싸고 있으니 봉마림의 괴이들이 바깥으로 나올 일은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정확히 언제인지 모르겠으나, 봉마림이 폭주한 적이 있던 모양일세. 그때 하필 봉마림에서 나오는 악기(惡氣)가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고 하네.”
“…정말인가?”
“일단 사제의 말로는.”
“…….”
“크흠, 신뢰가 떨어진다는 건 나도 아네.”
자허의 말이라고 하니 확 떨어지는 신뢰도가 아닐 수 없으나, 다행스럽게도.
“아, 혹시 그건가?”
“이 사부?”
신뢰의 대명사와 같은 이가 말하는 거라면 얘기가 다른 법이었다.
“왜 전에 제가 봉미림에 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여명은 백룡의 부탁으로 폭주한 봉마림을 진정시키기 위해 달 구름을 하늘에 띄운 얘기를 해주었고. 그제야 사람들은 당시 일을 떠올린 것인지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군.”
“듣고 보니 생각나는구먼.”
“이 사부 말이면 확실하지. 확실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거구먼.”
자허의 말에는 신뢰가 1푼도 존재하지 않지만. 여명의 말은 10할의 신뢰가 있을 따름이니.
곧장 수긍하는 그들이 자운에게 설명을 촉구했다.
“크흠, 계속 얘기를 잇자면 그러한 상황으로 인해 악기가 사방팔방으로 퍼지며 일종의…, 그래 지뢰와 같은 상황이 됐다고 할 수 있다네.”
“지뢰요?”
“그렇다네. 이 사부가 전에 보여줬던 영화에서 나왔던 무기가 있지 않은가. 밟는 순간 터지는.”
“아아….”
설마 무림인에게 지뢰란 단어를 들을 줄 몰라 당황하던 여명이었지만. 현대 문명을 가르쳐준 사람이 자신이란 것에 바로 수긍한다.
그리고는 지뢰란 말에 어떠한 불온함을 느끼며….
“그 악기라는 게 터지면 안 좋은 일이 발생하는가 보죠?”
확인하듯 물어보았고.
“정확하네. 악기가 터진다면, …어쩌면 제2의 봉마림이 탄생할지도 모른다네. 그것도, 연속적으로….”
“…….”
…지뢰가 따위가 아니라 방사능 무기가 터지는 수준이었다.
“성화는 정화의 성능을 가지고 있다 전해지지. 내가 확인하기로 성화의 능력만 잘 활용하면 여기저기 퍼져나간 악기를 찾아내고. 성화의 힘으로 악기도 겸사겸사 얼마든지 태울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지.”
자허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정말 대국적인 관점에서 성화를 필요로 했다는 납득이 갔다.
다만.
“그럼 좋게 협력을 구하면 되지, 왜 사태를 이렇게까지 키워요.”
“좋게 말해서 안 줄 걸 아니까. 조금 과감한 수단을 쓸 필요가 있었지.”
“이건 과감한 게 아니라, 무식한 거고. 개념이 없다고 하는 거예요, 영감님.”
“…….”
“하아…!”
세 살배기 어린애도 아니고, 이런 막무가내가 또 없을 거다.
늙으면 어려진다더니….
‘아니, 이 양반은 어려진 게 아니라, 그냥 개념 자체가 일반적인 인간이랑 생각 방식이 180도 다른 거겠지.’
이 양반의 업적 등을 자세히 파고 들어보면, 정말 어쩌다 잘 풀린 종류가 많았다.
특히 장강의 물을 뒤집었다는 설화도 자세히 들어보면, 황룡국을 뒤집어버린 범죄가 아닐 수 없었지만. 한참 가뭄에 시달리던 백성들에게 물고기의 비를 쏟아준 것으로 정상참작 되었다고 하던데.
‘그 물고기 비도 의도한 게 아니라, 우연이었다는 게, 참.’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사람이 있다면, 이 양반은 넘어지면 금화를 줍는 양반이 아닐 수 없었다.
그야말로 인성은 최악(最惡)인데, 운빨은 극상(極上)인 양반이 아닐 수 없을 터.
그러나
“솔직히 말할게요. 어떤 의도가 있었다고 해도 저는 이번만큼은 영감님 편을 못 들어줘요.”
“어째서? 내가 죄를 저질러서 그러느냐?”
“그런 이유는 아니에요. 애초에 저한테도 성화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으니까요.”
“허면 어째서 편을 안 들어주느냐?”
“‘이득(利得)’이 안 되니까요.”
“…….”
설마 여명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지 예상치 못했는지 자허는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고.
하지만 여명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며. 또박또박하게 자신의 의견을 내었다.
“못돼먹었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저는 장사를 하는 사람이에요. 마냥 정으로만 움직일 수 없죠. 그래도 제 능력이 닿는 한 친한 친구나 지인을 도와줄 도리는 있어요. 하지만 그 도리에도 ‘기준치’라는 게 있어요.”
여명은 누군가에게 막무가내로 퍼다 주는 게 얼마나 손해 보는 장사인지 안다.
친구라는 이유로, 지인이란 이유로 계속 호의를 줘서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
영화에도 왜 이런 대사가 있지 않은가?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 제가 공감하는 영화 대사예요. 실제로 비슷한 사례를 수 차례 보기도 했고요.”
그리고 여명은 자신이 일정 기준치를 넘기지 않는 수준으로 누군가를 도와준다는 의미에서 이미 자허에게 배정된 기준치는 이미 한참을 넘겼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 말할게요.”
“…….”
“이제부터는 선불(先拂)입니다.”
“……이 녀석, 언제 이렇게 컸지?”
자허는 허탈해하면서도 감탄했다.
그도 그럴 게.
“나랑 생각하는 방식이 비슷한데?”
“…욕이에요?”
“아니, 칭찬이지.”
“…….”
도리어 더 욕 같이 들리는 건 아마 착각이 아니리라.
tmi후기.
-악기(惡氣)가 퍼져나가면 중원삼국은 [바이오하자드 in 무림]이 된다고 보면 된다.
-물론 영수와 신수가 나선다면 이러한 문제는 일어나지 않겠지만. 인간들을 괘씸하게 여기는 영수들이 있다면 일부러 해결하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영수 중에는 인간 혐오자가 많으며. 그나마 숭배를 받기에 봐주는 편이지, 만약 현대로 오면 현대 인류는 몰살이라고 할 수 있다.
-무림인들에게 영화 등을 보여주는 것으로 현대 문명의 물건을 발명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싶을 수도 있지만. 천산의 은거자들 중 현대 문명의 이기(利器)를 활용하거나 발명하는 사항은 이미 금지되어 있는 상태다.
-입신이나 화경 정도에 오른 고수의 성향과 육신은 판타지로 따지면 거의 엘프나 반(半)정령 비슷한 상태다.
-즉, 환경을 파괴하는 것 자체를 극도로 혐오하게 되며. 현대 문명의 이기를 관람하는 건 흥미로워 해도 실제로 사용하는 행위 자체를 혐오한다.
-만약 여명 외의 인물이 넘어와서 돈을 벌기 위해 플라스틱 물품이나 총을 팔기 시작한다면 그 인물은 이유를 불문하고 세상에서 소멸당한다고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