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판이 개판이면, 뒤엎으면 그만(13)
여명과 자허 등에 인물이 심력을 쏟았음에도 성화는 여전히 불안정하고. 신교의 교인들은 참담함을 감출 수 없는 일련의 상황은 그야말로 개판, 혹은 아사리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거 안 좋은 흐름인데?”
“으음.”
단백설과 무백, 두 명의 마종은 작금의 상황이 쉽게 넘어갈 상황이 아님을 어림짐작했다.
수라신교의 후인인 그들이야 별반 큰 충격은 아니지만. 배화교의 후인들에게 이 상황은 끔찍하다 못해 저주스러울 상황임은 분명하니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을 해석하자면.
“그들이 움직이겠군.”
쿠우웅!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단백설의 거주지인 검마전 앞이 소란스러운 기색으로 역력했다.
단백설은 ‘빠르기는 더럽게 빠르네’라고 하며 사자후를 외치듯 언성을 높였다.
“그냥 들여보내! 문 부서지겠다!”
쩌렁쩌렁하게 울린 그녀의 목소리는 바깥마저 울렸고. 바깥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줄어드는 대신 희미한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으스스하게 검마전을 울렸다.
마치 귀신의 발걸음과 같은 불길한 소리였고. 설기를 비롯한 주교 삼총사와 갈지윤과 같은 태평한 이들조차 인상을 구겼다.
이 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기에.
“서, 설기님, 이것은…?”
“…월.”
그냥 잠자코, 그냥 관계되려 하지 마라.
설기의 충고와 같은 잔소리는 진중했다. ‘저것’들과 엮이는 건 그녀로서도 사양하고 싶은 일이니 말이다.
다름 아닌-.
“━이토록 갑작스레 무례를 저지른 것을 용서하십시오, 검마종이여. 아, 광마종도 있으셨군요.”
“!!!”
북궁린은 기겁했다.
언제, 어느 순간 나타났는지 모를 귀신과 같은 사내가 거기 있었고. 북궁린은 저도 모르게 손을 출수할 뻔했다.
그 정도로 귀신과 같은 사내는…!
‘이, 인간인 겁니까?’
괴의(怪疑)하고도 이질적이었으니까.
“…월.”
그의, 아니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설기는 약간 몸을 떨며 혀를 내둘렀다.
설마 간만에 귀환한 고향에서 저들을 보게 될 줄이야.
호법사자.
마교의 저승사자들이 바로 그들이었음이다.
* * *
흑원신교가 마냥 무질서해 보이며. 막무가내처럼 보이지만. 이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하는 말이다.
도리어 무질서해 보이는 만큼 흑원신교는 철저한 규율에 의해 움직이며. 이러한 신교의 규율을 위해서라면 단혁세와 같은 이들이 도리어 선비처럼 보일 정도로 과격한 이들이 있었다.
호법사자(護法使者).
같은 마인들조차 잡아먹는다는, 신교의 율법자들이 그러했다.
“…마교 이놈들, 고수를 찍어내는 장치라도 있는 것인가?”
“허허, 어처구니가 없군.”
“살수인가? 아닌데…. 군문(軍門) 떨거지 같기도 하고?”
삼존은 호법사자들을 보며 가볍게 놀랐다.
저 귀신같은 놈들, 당장 천산에 오른다고 해도 입산이 허락될 정도로 괜찮은 고수가 아닌가.
얼굴을 기괴한 귀신의 가면으로 가리고, 온몸에는 손과 목 부위마저 꽁꽁 감추는 검은 흑의 탓에 성별이나 나이를 가늠하지 못할지라도. 전해지는 기파만으로도 본능적으로 저들의 경지를 추측하는 그들이었다.
“사파의 육존자와 정파의 팔걸을 동시에 보게 되어 영광입니다. 또한 이러한 실례를 하게 되어 송구스럽군요.”
“…얼굴이 안 보이니, 진짜 송구스러운지 모르겠군.”
“허허, 이 또한 송구할 노릇입니다. 율법상 사자들은 얼굴을 드러낼 수 없어서 말입니다.”
“흐음, 뭐 그렇다면야.”
금천후는 가볍게 찔러보듯 말을 거니, 그들은 유들유들하게 말을 받았다.
“찜찜한 놈들이군.”
강자를 숭상하는 흑원국일지라도 저 정도 수준의 고수라면 자존심이 강할 만도 하건만, 도리어 한없이 자신을 낮추니 떨떠름하기만 할 따름.
그때.
“크르릉!”
“…흑천께서 ‘호법사자들이 한가한 것도 아닐 텐데, 왜 여기 있냐’고 물으십니다. 또한 ‘만약 아무런 일도 없이 온 것이라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라고 경고하시는군요.”
심기가 불편한 흑천 주교의 경고가 떨어졌다.
아무리 신교의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감히 주교 셋이 모이고. 마종 또한 둘이나 있는 장소를 함부로 들어온 것이다.
이는 그들의 권위를 무시하는 행위였고. 이는 곧 흑원에 대한 반항으로 이어지는바.
“크릉!”
“‘주교의 지위는 신께서 직접 내려주신 걸 모르진 않을 텐데? 혹, 너희는 규율의 이름으로 신마저 넘어서려는 것이냐?’라고 말씀, 하십니다.”
사마윤윤은 일부러 말을 끊으며 사나운 시선을 주었다.
흑천의 경고가 좀 과한 면이 없지 않아 있으나, 틀린 말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만약 저들이 정말 신을 무시하려는 의도가 있다면 그것은 용서 못 할 처사였으니, 사마윤윤을 비롯한 다른 이들의 눈매는 절로 날카로워졌다.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소인들은 결코 신의 권위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 증거로.”
폴짝.
“카앙!”
“보십시오. 저희는 주교의 말에 따라 움직이는 것일 뿐입니다.”
“처, 청천 주교…!”
마치 푸른 바다나 호수를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털을 흩날리는 신성한 육신과 푸른 눈동자.
백천과 흑천 주교와 함께 한날한시에 태어났으나, 한 끗 차이로 셋째로 임명되고, 본인 스스로 교주 후보 직위를 포기하는 것으로 호법원(護法院)을 들어가 호법원주가 된 주교.
이른바 청천이란 이름보다 율법 주교란 이름으로 더 유명한 호법원의 수장이 다름 아닌 그였다.
“카앙.”
당당히 ‘형님, 나의 말을 따랐을 뿐인 그들이 과연 신을 거역한 것 같습니까?’라고 되물었고. 이는 흑천이 주교의 권위를 건드렸다고 하니, 같은 주교의 권위로 대항하는 방자한 모습이었다.
흑천은 그런 동생이 마음에 안 드는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척 보기에도 사이가 좋지 않은 불온한 관계.
하긴, 비교적 사근사근하고 애교 많은 금천 주교가 이상한 것이지, 원래 주교들끼리 사이는 험악하기 이를 데 없다는 게 상식이었다.
“월.”
허나 그 상식을 파괴하듯 설기는 송곳니를 보이는 대신 비꼬듯이 물음을 던졌다.
잘난 호법원주가 직접 행차한 이유가 무엇이냐며.
“캉…?”
침착하고도 냉정한 설기의 물음에 청천은 무언가 감탄한 것 같았다.
직설적이고, 항상 화가 많았던 누님이 어딘지 달라진 게 신선한 것처럼.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유라, 간단하지 않겠습니까. 성화를 가지러 왔습니다.”
“…월?”
호법사자의 발언에 설기는 어처구니없어했다.
성화…? 설마 지금.
“저, 저 부스러기를 가지러 왔다 이겁니까?”
“예에, 부스러기라 해도 성화는 성화이니 말입니다.”
“…한데 그것을 왜 호법원에서 가져가겠다는 거죠! 성화는-.”
사마윤윤은 무어라 더 따지려 했으나, 이어지는 호법사자의 되물음에 말문이 막혀야만 하였다.
“━당신들이 관리하지 못하니, 우리가 가져갈 뿐인데 무슨 문제라도?”
“!!”
“이번 사태를 통해 증명한 것이지 않습니까? 사마세가를 비롯한 가문들은 하나같이 성화를 지킬 자격이 안 된다는 것을. 그러니 호법원에서 책임지고 가져가겠다는데 무슨 문제라도-?”
“…….”
…분명 반박할 말은 넘쳐나는데 입이 안 떨어진다.
사마윤윤은 힘없게 삿대질하던 손을 내려야 했고. 호법사자는 만족한 듯 성화를 옮길 준비를 서둘렀다.
그리고는.
“아, 그리고 태허일검. 마침 당신에게 전해드릴 게 있군요.”
“…….”
“이미 무엇인지 짐작하고 계실 테지요?”
“…….”
자운, 그는 침묵했다.
호법사자가 자신에게 무엇을 주려고 하는지 알기에.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받고 싶지 않아 그는 손을 내밀길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허나 그는 곤륜의 장문인이었고. 의무를 다할 필요성이 있었다.
“주시게. 못난 사제는 끝까지 본도가 책임져야겠지.”
“…당신의 참을성의 경의를 표하지요. 솔직히 목이 날아갈 것을 각오했는데.”
“사제 녀석이 반항을 했던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본도도 하지 말아야지. 그 난폭한 사제는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책임을 다하였는데, 본도가 폭동을 저지르면 쓰겠는가.”
“……하.”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비교적 여유로웠던 호법사자는 신선처럼 허허롭고 인자한 자허의 발언을 들으면 들을수록 어딘지 위축되는 모습이었다.
진정한 도인의 위엄에 감회되었다거나, 감탄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말과 행동이 따로 놀고 있으면서 뭔….’
사악!
주르륵….
“음….”
호법사자는 자운의 매서운 기세 앞에 처음으로 침음을 내었다.
그저 기세를 내뿜을 뿐인데, 그것이 칼날처럼 날카로워 검상이 생기다니…, 이 얼마나 두려운 기세인가.
‘지금만 보면 도인이 아니라, 검귀가 따로 없구나.’
지금만큼은 단백설보다 그가 더 무섭지 않을까 싶어 하며 호법사자는 얼른 이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더 이상 이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도발밖에 더 되지 않을 테니.
험악하기 짝이 없는 일촉즉발의 분위기에서, 각 무인들은 언제라도 출수하기 위해 내공을 끌어 올렸다.
자운이 만약 날뛴다면 이제부터 정말 정마대전이 시작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으니.
그때.
“아찔하군. 이게 팔걸과 삼존, 그리고 마종인가?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터져나간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겠어. 이런 괴물들투성이이니 빙궁이 중원을 아무리 노려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카앙.”
“아아, 미안하오, 율법원주. 그래도 북해의 궁주를 이런 잔심부름으로 쓰는 경우는 없소이다. 이 빚을 갚지 않으면 재미없을 줄 아시오.”
“…캉.”
어느 사내의 투덜거림과 푸른색 강아지의 대화는 일순 긴장감을 확연하게 날려버렸다.
갑작스러운 외부인의 난입 때문에 발생한 긴장의 완화, 그리고….
“……당신!”
자운을 뛰어넘는 어느 소녀의 분노가 상황을 어질거리게 하였다.
혼란의 도가니.
그러한 말이 적절하기 그지없는, 막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개판 상황 속에서.
“후우….”
한 남성이 드디어 피로를 딛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 * *
“빙궁인가…?”
서늘한 한기(寒氣)가 절로 눈살을 찌푸려지게 하며. 사내 주변에는 어쩐지 눈송이가 떨어지는 것처럼 극한으로 온도가 내려갔다.
안 그래도 빙공을 익힌 이들은 같은 공간에만 있어도 추위를 느끼게 하건만, 사내는 추위 정도가 아니라 오싹함을 주는 어딘지 불온한 느낌을 주는 한기를 내뿜고 있었다.
“흠, 마공이군.”
허나 여기 있는 이들 중 사내보다 못한 이들은 드물었고. 사내의 빙공이 이질적이란 걸 알아채며 사람들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허나 몇몇 이들, 특히 천산의 은거자들은 어딘지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내의 무위가 대단해서나 인상적이어서가 아니었다.
단지.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이 사부 세계의 속담은 신빙성이 있구먼.”
은거자들의 단골 식당 직원과 관련 있어 보이는 이였으니, 아무래도 묘할 수밖에 없었다.
“북궁제…!”
“여기 있다는 건 얼핏 들었지만. 설마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군.”
딱 봐도 증오하기 마지 없는 원수를 만나 으르렁거리는 북궁린과 어딘지 무덤덤한 것 같지만 반가운 사람을 만난 것처럼 친근한 반응을 보이는 사내.
북궁제, 혹은 북해의 궁주라 불리는 사내가 바로 그였음이다.
“이이!”
북궁린은 북궁제의 덤덤한 반응에 더할 나위 없이 분기가 치밀어 올랐다.
마치 자신은 적으로도 생각하지 않는 오만한 대응!
불구대천의 원수가 있다면 그일 텐데, 정작 그 원수의 반응이 저러니 그녀로선 더욱 화가 나는 게 당연하다.
북궁린은 있는 힘껏 성을 내며 분노를 토해내려고 했다.
하지만.
스윽.
“일단 화내고 싶은 것은 이해하지만 자중했으면 좋겠군. 여기는 어디까지나 신교의 영역이며 빙궁이 아니다. 또한 현재 너와 난 신교의 객으로 온 것일 터. 그러니 객의 도리를 다하는 게 어떨까 싶군,”
“이 심장을 씹어 먹어도 부족할 작자가…! 감히 내 앞에서 지금 그따위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여-!”
사아아…!
다른 사람이 저런 말을 하면 몰라도 북궁제에게 저런 충고와 같은 말을 들으니 저도 모르게 내력이 개방되었고. 그런 그녀에게 북궁제는 못 말리겠다며 고개를 저을 따름이었다.
그러자,
“곤란하군요. 타 문파의 인물이 무공을 드러내는 것이 참….”
“…!”
“하하, 그저 곤란하다는 말입니다. 감히 식선의 식구에게 무어라 하는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
호법사자, 그가 입을 여니 북궁린은 찬물을 맞은 것처럼 가슴 속 울화가 식혀졌다.
그에게 겁을 먹은 것이 아닌, 이곳이 다름 아닌 마교란 사실을 떠올린 것이었다.
북궁제와 단둘이 만났다면 또 모를 테지만. 이렇게 마교에서, 그것도 천마가 기거하는 만마전에서 무례를 저지를 정도로 그녀는 막 나가지 못하였다.
“크윽…!”
분한 기색을 참지 못하며 북궁린은 그저 말없이 북궁제를 노려보았다.
만약 시선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골백번도 죽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살벌한 시선.
그러나 북궁제는 그러한 시선을 무덤덤하게 넘기며 여전히 태평히 말을 이었다.
“나중에 시간을 내서 따로 보도록 하지. 뭣하면 생사결도 받아줄 수 있으니.”
“…이이!”
그렇지만 상대방의 말은 어찌 듣느냐에 따라 도발로 들리는 법이었고. 북궁린은 다시금 화가 치밀어 오르려 했….
“린아.”
…다가 말았다.
“……사장님.”
신기한 일이었다. 단 한 명이 그저 따스하게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이토록 마음이 진정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가뭄에 단비가 내린 듯 그녀의 속내는 빠르게 진정되다 못해 포근한 봄날의 햇볕이 비치는 듯했고. 멍하니 있는 그녀에게 그가 다가왔다.
토닥토닥.
“진정 좀 하자.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한 건 네가 한 말이었잖아.”
“……맞는 말씀이십니다.”
“군자보구 십년태만(君子報仇 十年太晩)이라며. 그러니 지금은 참아. 아니면, 내가 대신해 주길 바라니?”
“그,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북궁린은 그가, 여명이 자신이 원한다면 기꺼이 힘을 빌려줄 것을 알고 기겁했다.
전날에도 말했지만, 복수는 그녀만의 것이었고. 결코 여명의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은 그녀였다.
죽으면 죽었지…!
“그래? 그러면 지금은 싸우지 마. 저 양반 아무리 봐도 너보단 강해 보이거든. 만약 네가 지금 복수한다고 달려들었다가 다치면, 내가 좀 많이 슬플 것 같다. 알겠지?”
“아, 알겠습니다….”
진솔한 여명의 발언에 북궁린은 얼굴을 붉히며 몸을 낮추었다.
사장님의 진솔한 면을 좋아하지만. 가끔씩 저러한 마음마저 울리는 발언을 들을 때마다 쑥스럽기 그지없는 북궁린이었다.
“허허, 신기한군요.”
“…저자가, 그.”
복수귀와 다름없던 북궁린이 진정되자 호법사자와 북궁제는 신기한 듯 눈을 치켜떴다.
“당신들도 마찬가지예요. 우리 애 그만 괴롭혀요. 안 그러면….”
“안 그러면?”
“뭐, 여우님이나 백효님, 아님 산묘님한테 대신 혼내달라고 이르죠, 뭐.”
“……그거, 정말 무서운 협박이군요.”
“협박이 아니죠. 조금 유치한 수단일 뿐이지.”
“허허….”
호법사자는 처음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유치하다니, 지금 영수 셋을 동시에 움직이게 만들겠다고 말하고선 그것이 유치하다고 하는 것인가?
그것도 이름 없는 영수들도 아니었다.
신수 황룡보다는 못하지만. 황룡 못지않은 세월을 살며 그 힘을 쌓았다고 전해지는 미곡왕과 어느 민족에겐 신으로까지 숭배받는 백효. 끝으로 육탄전이라면 단일 최강의 영수라는 산웅왕까지….
이건 뭐.
‘신교를 멸문시킬 수도 있겠군.’
제 앞에서 방자하게 굴거나, 협박 같지도 않은 협박을 하는 자들을 무수히 만나온 호법사자였으나, 감히 장담하건대, 이만큼 두렵고도 마른침이 넘어가는 협박은 처음이었다.
“너도 마찬가지야. 할 말이 있으면 그냥 오면 되지. 형이랑 누나한테 누가 그렇게 건방지게 굴래.”
“…카, 카아앙….”
건방지고 오만한 푸른 털 촉법 강아지는 처음으로 위축된 자세로 눈을 내리깔았다.
어딘지 모르게 까불면 안 될 것 같은 느낌.
그렇게 단번에 마교의 권력자 둘을 제압한 여명은 북궁제에게 시선을 돌렸다.
움찔…!
얼음장처럼 무표정하던 북궁제였으나, 여명과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 몸을 절로 움찔거렸으니.
그런 그에게.
“…저는 당신과 원한이 없죠. 그리고 린이 본인이 당신과의 일은 자신이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개인적으로 부탁하고 싶네요. 이 애한테 시간을 달라고.”
“……저에게 불리한 말이군요.”
“5년만 주시죠. 만약 이 부탁을 들어주면 저는 당신을 절대 적대하지 않을게요, 설사…. 어떠한 결과가 일어나더라도.”
“………여기 있는 고수 모두를 합한 것보다 당신이 더 어려운 건, 제 착각인지 잘 모르겠군요.”
북궁제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 없는 수락을 보였다.
사실상 이제 북궁제는 5년 동안 북궁린을 건드릴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즉, 그녀가 성장하는 시간을 준 것이며. 복수행을 받아주기로 한 셈.
북궁제 입장에선 이보다 더 불공정한 계약이 없었다.
“사, 사장님.”
“린아, 이 정도만 해줄게. 이제부터는 네가 알아서 해야 하겠지만.”
“……감사, 감사합니다….”
북궁린은 울먹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이 감정을 표현하려면 몇만 번의 감사도 부족할 것이다.
어느새 상황 정리가 대충 끝나며, 여명은 마지막으로.
“그 손에 든 건…, 이제 건네받아도 될까요.”
북궁제의 한기로 보호받는 어떠한 둥근 포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어딘지 심사가 몹시 복잡해 보이는 눈빛이었고. 또한 침울하고도 서글퍼 보였다.
사전에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하였을 텐데, 상황을 대충 짐작하고 있듯이.
“이 사부….”
“어르신, 죄송해요. 주제넘게 나섰네요.”
“아, 아닐세. 본도가, 아니 이 늙은이가 주책을 부렸구려. 미안할 뿐이오.”
자운은 역시 같은 기환학사인 여명이 그보다 먼저 참담한 일을 감지하였다 여기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제는, 이 사부의 손을 더 좋아할지도 모를 테니.”
“…….”
자운의 서글픔을 참는 말투에 여명은 보다 더 심각해진 표정으로 입을 앙다물었다.
그 또한 울컥하는 무언가를 참는 모습이었고. 북궁제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포대를 넘겨주었다.
“나머지 몸 또한 바로 인계해주겠소.”
“가능하면 몸도 빙공으로 얼려줬으면 해요. 가능할까요?”
“…오늘은 손해만 보는 날이군.”
“음식 좀 대접해드리죠.”
“……얼른 하고 오지.”
거스름돈이 과하게 남는 장사라며 북궁제는 말도 없이 자리를 떠났다.
스윽, 하고 북궁린을 향해 시선을 주긴 했지만. 그 또한 다시금 무관심으로 변하며 사라질 따름.
“크흠, 그, 그럼 저 또한….”
“이거 안 가져가요?”
“…아아.”
“이건 그래도 최소한의 예의를 지킨 것에 대한 서비스, 덤이라고 생각해요.”
“가, 감사합니다, 식선.”
호법사자는 존중의 자세로 예의를 보였다.
안 그래도 어찌 가져가야 하나 난감해하던 성화를 여명은 기환술로 감싸 건네주었으니 말이다.
감읍해하는 그에게 가볍게 주억거리며 여명은 여전히 위축된 강아지에게 말했다.
“너도 다음에는 그냥 놀러와. 이렇게 예의 없게 막무가내로 오지 말고. 알겠어?”
“…….”
“대답.”
“카, 카앙….”
“그래, 착하네.”
“…!!”
청천은 즉각 도망가 버렸다.
그에게 칭찬을 들었을 뿐인데 이상하게 몸이 달아오르며 기분이 붕 뜨는 것을 인정하기 싫은지.
그런 청천을 따라 호법사자들도 다급히 따라나섰고. 나가는 와중에는 끝까지 그들은 여명에게만은 예의를 잃지 않았다.
보다 큰일로 번졌을 것이라 생각했던 일련의 상황을 빠르게 정리해준 것이 고마운 듯.
그렇게 소란스럽던 검마전이었고. 사람들은 차례대로….
“으음, 저, 저희도 이만 나가볼게요.”
“왜요?”
“누, 눈치 좀 챙겨요, 제발…!”
“??”
사마윤윤과 갈지윤, 검둥이와 밤톨이 등은 살며시 그의 눈치를 보며 발걸음을 옮겨갔다.
그의 손에 들려진 둥근 구체에서 풍기는 혈향(血香)은 틀림없는….
식선의 저조해진 기분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도 그들은 재빨리 모습을 감추었고. 심지어 집주인이라 할 수 있는 단백설 등도 살며시 눈치를 보며 바깥을 나섰다.
“……유감이야. 모든 걸 제쳐두고 이건 진심이야.”
“조금 진정된다면 술이나 가지고 오지.”
남의 눈치 안 보기로 유명한 무백마저 살며시 눈치를 보며 한 말이었고. 여명은 고맙다며 눈웃음을 지었다.
어딘가 슬픈 기색이 역력한 채.
어느 순간 마교의 인물들이 모두 빠져나가며, 천산의 식구들만이 남은 방 안에서 여명이 구체가 담긴 포대를 자운에게 건네려 했지만.
“어르신, 이거….”
“괜찮다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사제에겐 이 사부의 품이 더 편할 것이야, 암 그럼 그렇고말고….”
여전히 참담함을 숨기지 못하는 자운이었으나,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하는 그였고. 뒤늦게야 포대의 정체를 눈치챈 삼존과 금천후 등이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사, 사제라고?!”
“설마 그것이….”
“자허…, 그자라고?”
“으음!!”
풍운운선이라 불리며, 곤륜의 신선이라고까지 불리는 전설적인 기환학사.
정파의 전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그의 머리란 사실에 여럿이들이 충격을 받았는지 어안이 벙벙했으며. 북궁린은 뒤늦게야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몸을 떨었고. 설기는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다며 안절부절못하였다.
죄질이 크긴 했지만. 설마 이토록 단번에 처결할 줄이야…!
“와, 왈….”
“그대가 잘못한 것은 없네. 그러니 그런 시선을 안 주어도 된다네.”
설기의 말을 알아듣지도 못할 테지만. 자운은 대충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겠는지 고개를 저었다.
“이 또한 사제의 각오일 테니.”
만일 자허가 죽기 싫어 도망가려 했다면 반드시 도망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 자신의 죄를 순순히 인정하며 죽음마저 받아들인 것은 아마도 곤륜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일 터.
“…문파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못난 놈인 줄 알았거늘, 그래도 가슴 한편엔 곤륜을 품고 있었구나, 허허!”
그래, 이는 자랑스러워해야 하는 일이었다.
자허가, 그의 사제가 곤륜을 소중히 했다는 결단이었으니!
자운은 그렇기에 울지 않았고. 그저 웃을 따름이었다.
당당히 제 책임을 다하는 사제를 자랑스러워하며.
삼존도, 금천후도. 그리고 북궁린과 설기도.
그러한 자운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그저 그의 서글픔을 받아주었다.
무려 백년이 넘도록 같이 지낸 사제가 죽은 것이니, 어떠한 말로도 그에겐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비록 괴선이라 불릴 정도로 괴팍한 노인네였으나, 마지막 정도는….
“─저기.”
“……?”
순간 감상에 젖으려는 그들의 이목을 그가 주목시켰다.
“으음, 이 상황에서 하려니 좀 이상한 말이긴 한데, 아직 안 죽었거든요….”
“……?”
“…아니, 저 미친 거 아니에요.”
사람들은 여명이 무슨 말을 하는가 싶었다.
머리만 남은 유해를 들고 아직 죽지 않았다니, 혹 그가 크나 큰 슬픔 탓에 제정신이 아닌 것일까 하고 걱정스럽기까지 한 그들이었으나, 여명은 억울하다며 울상을 지었다.
“내가 진짜…! 하아, 어쩌다 이런 영감님이랑 얽혀서는.”
“원래 인생이 다 그런 것이다.”
“적어도 영감님한텐 듣고 싶지 않은 조언이네요.”
“내가 뭐 어때서?”
“…진짜 몰라서 그래요?”
“아무렴. 나 정도면 훌륭하지, 흘흘!”
“……말은.”
서럽다며 읊조리는 여명은 백 마디, 만 마디 말보다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는 편이 이해하기 쉬울 것이라며 들려주었다.
사자(死者)의 목소리를.
“……어?”
자운은 그답지 않게 멍청한 소리를 내며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 목소리는….
“장문사형도 많이 늙었구먼. 겨우 이런 속임수에 넘어가다니, 하여튼 감이 없어 감이.”
건방지고도 재수없는 말투까지.
그야말로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장문사형, 설마 싶어서 묻는 건데.”
“…….”
“울었소?”
“…….”
“흘흘, 진짜 울었나 보네? 으하하!”
자운은 보았다.
머리만 남은 채 껄껄 웃어대며 그를 놀려대는 사제의, 아니….
“이런 개새끼를 보았나…?”
원수가 차라리 사랑스러워 보일 정도로 사람 같지도 않은 원수를 말이다.
자운은 기어이 칼을 뽑으며 생애 최초로 욕설을 내뱉었다.
제 손으로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며…!
“말려! 이 사부까지 휘말리겠다!”
“…저거 진짜 사람 새끼 맞나?”
“나도 모르겠구먼….”
사람들은 자운을 말리면서도 의심했다.
자신들이 보고 있는 게 과연 현실은 맞는지.
또한 저 괴상한 인간은 과연 머리가 두 쪽으로 쪼개고도 죽일 수 있을지 없을지….
차마 죽지 않는다는 쪽으로 생각을 기울이는 것을 막을 수 없는 일동이었다.
tmi후기.
-여명은 자허가 살아있다는 사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으며. 참담한 척 연기하느라 큰일이었다.
-자허가 계속 ‘야, 우는 척 해’라고 말하는 탓에 머리를 집어 던지고 싶은 것을 참고 있었다.
-현재 자허는 제 몸을 지나치게 개조하여 자신조차 어떻게 죽을 수 있는지 잘 모른다.
-수명이 다하면 죽기야 죽겠지만. 워낙 명줄이 질겨서 잘 안 죽을 예정이다.
-자허를 죽이려면 절대고수들이 쉬지 않고 다섯 시간 동안 삼매진화를 불태워야만 한다.
-참고로 삼매진화를 최대로 유지할 수 있는 고수는 천마로, 천마의 삼매진화조차 30분 이상 태우지 못한다.
-나머지 고수들은 5분이 한계이다.
-즉, 이론상 물리적 방법으로 죽일 방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