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마교 최후의 날(3)
상식적으로 모든 물건에는 유통기한이 있다.
설사 그것이 절세의 명검이건, 혹은 보석일지라도 일정 시간이 흐르면 녹이 슬거나 마모되어 사라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란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중원삼국도 마냥 모든 상식이 뒤엎어지는 세상은 아닌 바였고 말이다.
“설마 누가 알았겠어요. 성화라는 것도 수명이 있을 줄은.”
“어쩐지, 우리 둘이 기력을 아무리 쏟아부어도 꼼짝도 하지 않던 이유가 있었구나.”
나무로 따지면 이미 한참 전에 뿌리가 물을 못 흡수할 정도로 노쇠한 것인데, 그걸 억지로 살리려고 했으니 답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기껏해야 명줄만 붙잡을 뿐. 아무런 의미조차 없는 행위였을 따름이다.
다만.
“그래도 가까스로 살아 있던 걸 끝장낸 게 영감님이란 건 변함이 없지만요.”
“…크흠, 거 좋게 좀 넘어갈 것이지.”
“원래 팩트는 짚고 넘어가야 해요. 만약 영감님이 건드리지만 않았으면 5년 안에 자연적으로 소멸하고 끝났을 테니까요. 근데 괜히 막타를 가해 가지곤….”
이 귀찮은 사태를 일으킨 거다.
여명과 설기, 북궁린. 그 외 모든 이들이 자허를 째려보았다.
여전히 그가 원흉인 건 변함이 없었고. 증오하기 마지않는 원수인 것도 다를 바 없으니.
[우오?]
그래서 어쩔까?
백모신원은 여명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그러한 물음에.
“어어어…. 그냥 천산으로 돌아갈까요, 그럼? 장사도 이제 해야 하는데.”
귀가(歸家)를 희망하며 어깨를 으쓱일 따름이었다.
물론 이러한 발언에 신교의 교인 전원의 낯빛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 * *
여명이 귀가를 희망하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십만대산에 오고 벌써 사흘이 흘러갔고. 현대 장사를 못 한 지도 제법 오래된 실정이었다.
예상한 것보다 시간이 훨씬 많이 소비한지라, 자영업자 입장에선 조금 곤란한 상황.
하지만 여기서 지금 여명이 돌아가면….
‘성화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이미 성화의 수명은 끝났다는 백모신원의 언급으로 성화에 대한 판결은 끝난 상태였으니….
그러나 교인들은 아직 성화를 잃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무려 천 년간 그들을 지켜준 불길이 이대로 허무하게 사라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엔 아무래도 허망하였으니까.
그리고 현재, 그들의 허망함을 해결해줄 유일한 방안은 여명이었다.
천하에서 유일하게 백모신원에게 부탁을 넣을 수 있는 사람이 다름 아닌 그이니.
하지만….
‘아니, 어떻게 부탁을 해?’
‘감히 우리 따위가 모신의 지기지우에게 무언가를 바란다고? 그것이 곧 불경이지.’
‘음!’
신실한 종교인들의 귀찮은 점이자 장점이 다름 아닌 고지식함이었다.
감히 어찌 식선에게 부탁을 드릴 수 있으랴.
그들은 침묵으로 일관하며 침울하게 몸을 숙일 뿐이었다.
모든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겠다며.
‘뭐야, 갑자기 왜 초상집 분위기야?’
여명은 자기가 무슨 말을 했다고 이런 반응이 나오나 싶었다.
“원래 줬다가 뺏는 게 가장 서러운 일이 아니겠더냐. 네 녀석도 몹쓸 짓을 하는구나.”
“뭐래요, 진짜. 그리고 호칭 정리 좀 똑바로 하시죠.”
“무엇을?”
“‘주인어른’이라고 하셔야죠.”
“…….”
“어물쩍 넘어갈 생각은 하지도 말고요. 노비 영감님.”
“……썅.”
“어허.”
“왈왈!”
설기는 세상 통쾌하다며 웃었고. 자허는 분해하며 눈가마저 떨리고 있었다.
뭐, 장난이었지만.
‘이런 양반 노비로 두는 게 더 골치 아프지.’
노비도 노비 나름이지. 집안 말아먹을 노비는 들이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
“반도나 똑바로 주세요. 이번에도 없다고 하면 노비 문서 만들어서 신교한테 파는 수가 있어요.”
“차라리 죽이거라….”
“누구 좋으라고 그래요.”
여명은 끝까지 골탕 먹일 것이라며 장담하곤 백모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 정도면 저들에게 겪은 괘씸했던 일들도 약간은 되갚아 준 셈이었으니까.
“더 골려주고 싶긴 하다만. 그랬다간 저 양반들 심장마비 올 것 같네.”
[우오?]
“응, 그렇게 해줘. 너만 힘들지 않다면.”
[우오오.]
백모신원은 해맑고도 세상 천진한 미소를 지었다.
힘들 게 무얼 있으랴 하고.
───화르르르륵!
조금 전, 십만대산의 하늘을 뒤덮던 불길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내며 하늘을 점령했다.
착각이 아니라면 조금 전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도 강대해 보이는 불길이 아닐 수 없으며. 교인들은 아연실색하게 불길의 호수를 보았다.
“후, 후배 자네….”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 마요. 설마하니 제가 마교를 멸망시키려고요.”
“……지금 상황만 보면 누군들 오해하고 말 걸세.”
“그것도 그렇겠지만요. 그런데…. 진짜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
솟구치는 불길을 보며 저들이 불안해하는 것도 당연할 테지만. 여명은 괜한 걱정을 한다며 일축했고. 여유로움을 보여줬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불길은 절대 그들을 태우기 위해 타오르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보세요.”
“저건…….”
여명이 손가락질하는 방향부터 불길은 점차 줄어들더니, 금세 십만대산의 하늘을 되돌려주었으나. 중요한 건 멀쩡해진 하늘이 아니란 걸 그들은 빠르게 눈치챘다.
“불길이, 한 점으로 모이고 있구나.”
“허어!!”
“…저, 전설이 사실이었어!”
과거 성화가 내려졌을 당시. 세상을 불태울 것만 같은 겁화(劫火)가 있었다고 한다.
한데 겁화는 세상을 태우는 대신 재생과 정화의 상징이 되어 신교의 교인들을 지켜주는 수호신이 되어주었으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십칠마종과 마선오괴, 그리고 흑원국의 터전을 일군 무수한 마인들과 교인들은 멍하니 신화의 재림(再臨)을 목격하며 본능적으로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전설은 실존했음이다.
‘성화(聖火)’가 피어올랐다.
* * *
“성화는, 저 거대한 불길의 집합체였던가?”
“허허, 어처구니가 없구먼.”
“…왜 마도인들이 저토록 광적으로 교리를 따르는지 알 것 같군.”
마교도라면 징글징글한 정파와 사파일지라도, 이러한 천지개벽과 같은 광경을 마주하면 없던 신앙심도 생길 판이었다.
그야말로 천제(天帝)와 다를 바 없는 위용이 아닐 수 없으니…!
“신수란 것들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존재들이군.”
“부처다 이 불경한 놈아.”
“그거나 이거나지.”
호승심조차 느낄 수 없는 위용을 느끼며 묘한 감상에 잡혀 있던 그들과 달리 이해득실을 따지는 상인들의 제왕은 여명을 향해 물음을 던졌다.
“어찌 성화를 무상으로 주는 것이냐? 저들에게 은의라도 입힐 생각인 거냐?”
“아니요. 그다지.”
“허면 어째서?”
금천후로선 여명이 왜 성화를 준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미 그는 협상에 있어 절대적 우위란 말로도 부족한 위치에 있었다.
마음만 먹었다면 마교에게 어떠한 요구도 할 수 있었고. 아무것도 이뤄주지 않는다고 하여도 그가 원망받을 일은 조금도 없었을 것이다.
한데 여명은 그 어떠한 것도 부탁하지 않고 인정(人情)을 베풀었다.
누군가는 그를 칭송해 마지않으며 경의를 보일 테지만. 또 누군가는 의심하리라.
과한 친절은 악행만큼 의심의 눈초리를 사는 법이었으니까.
“노야는 가끔씩 세상을 지나치게 매정하게 여기는 것 같아요.”
“같은 것이 아니라, 원래 세상은 매정한 것이지.”
“하하….”
여명은 허탈하게 웃으면서도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마냥 좋은 의도를 보인다고 해서 보답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그래도.
“뭐, 어때요. 제가 만족하면 되지.”
“자기만족이란 말이더냐?”
“네에.”
“……망설임 없는 속 시원한 답변이구나.”
물음을 던진 이가 되려 당혹스러울 정도로 깔끔하고도 망설임 없는 답안.
여명은 눈을 끔뻑이는 그를 향해 말을 덧붙였다.
“제가 노야보다 오래 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인생을 조금 험하게 살아본 놈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호의를 베푸는 행위는 아무리 좋게 포장한들 결국 자기만족 행위라는 거예요. 아니면 훗날 술안주로 써먹어도 좋고요. 아하하.”
“…정말 별거 없는 이유구나.”
“그렇죠? 그래도….”
여명은 안다. 자신을 구해주었던 스승 강태산이 베풀어 준 이유 없는 호의를.
‘노야를 비롯한 어르신들도 그렇고.’
자운과 금천후가, 그리고 삼존 노인들이. 그밖에 8년간 이어진 천산의 단골들.
‘산월님도 그렇고.’
그들이 보여준 호의가, 협(俠)이 있었기에 그는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
“저는 노야나 어르신들이 가르쳐준 걸 그대로 행할 뿐이에요.”
“…나와 저것들이?”
“하하, 기억나지 않으면 됐고요.”
“…?”
“아하하!”
“…아쉽구나.”
“장문사형?”
“허허, 만약 무공의 재능만 있었다면 기꺼이 차기 장문인 감인데. 아쉽구나, 아쉬워….”
“음?”
“아, 생각해 보니 그것도 아니군. 어쩌면 이 사부야말로 나조차 뛰어넘는 무인이 아니겠는가, 어허허!”
“…이 양반이 미쳤나?”
자운은 머리만 남은 괴상한 사제의 도발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저런 괴상한 녀석을 상대할 바에야, 그저 지금 느끼는 감동을 만끽하고 싶기에.
‘생전 스승님께서 말씀하셨지. 검객이 진정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는 심검도, 이기어검도 아니라고.’
진정으로 검객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는 검으로 사람을, 나아가 세상을 구하는 경지였으니.
“활인검(活人劍). 그것이 실존하는 경지였어.”
자운은 흐뭇했다.
그조차 이루어 내지 못한 경지를 이루어 낸 그가 더할 나위 없이 자랑스러워.
그리고 이는.
[우오.]
그의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 * *
“월….”
지금 상황만 보면 이토록 퍼펙트할 수가 없었다.
영화로 치면 모두가 웃는 분위기에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며. 엔딩 노래도 나오고 엔딩 크레딧까지 나오면 금상첨화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설기는, 인조영수의 완성작의 감각은 이상함을 감지했다.
‘뭔가, 이상해…멍.’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다고 할까?
게임 보스를 해치웠지만, 사실은 진(眞)보스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는 느낌 아닌 느낌이랄까?
“월….”
설기는 자신의 감이 틀리길 원했다.
하지만.
우우웅━.
“응? 누구지?”
원래 세상은 제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었다.
주인이 만리전성을 담은 법구가 울리며 휴대전화 받듯 법구를 귓가에 대니 음성이 울렸다.
정확히 설기 그녀에게 들릴 정도로만.
[─들립니까, 은인.]
“…백미 어르신?”
백미선자.
아미산의 큰 어른이자 무림에서 그 영향력이 어마어마하신 거물이지만. 막상 만나보면 옆집 할머니보다 더욱 고우시고 친절한 사람.
한데 그런 그녀가 어찌 연락을 한 것일까.
[─일단 대화에 앞서 괜히 바쁜데 연락한 것이 아닌지, 미안하기 그지없습니다.]
“아, 아니에요, 어르신. 제가 먼저 연락드려야 했는데.”
주인은 백미선자에게 약한 편이었다.
하긴, 괴랄한 무림인들 중에서도 유일한 인격자이자. 세심공의 새로운 수련법마저 알려준 고마운 사람이니, 주인이 저토록 친절히 응대할 만도 했다.
설기도 이를 인정하는 편이었는데, 지금만 봐도.
[─여전히 은인께선 예의가 바르십니다. 허나 다 늙은 노인네가 바쁜 젊은이를 붙잡아 늘어지는 것은 안 될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귀찮게 하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아니, 전혀 안 귀찮은데….”
[─말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오호호.]
“하하….”
정말 현명한 어른이란 건 저런 걸 말할 터.
설기는 왜 자기 집안에는 나이만 많은 어린애밖에 없을까 투덜거렸다.
[─은인. 이런 소리를 하는 게 괴상한 것은 알지만. 혹 조사(祖師)와 같이 계시지 않습니까?]
“조사라면…. 아, 백모요? 네 지금 같이 있어요.”
[─…….]
“어르신?”
[─허허, 진실을 들었음에도 미욱한 제가 어리석은 거겠지요.]
“예에?”
백미선자는 무언가 혼란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평소 한없이 냉정한 그녀가 왜 저토록 말끝이 흔들리는 걸까?
[─은인. 이상한 말일 수도 있지만. 조사와 같이 있으시다면 얼른 아미산으로 돌아오라고 해주실 수는 없는지요?]
“그…. 일단 말은 할 수 있겠지만. 혹시 이유를 좀….”
[─…아무래도 은인께서 위험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
[─현재 아미산의 하늘에서 화를 내시는 분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저도 조사라 여겼거늘, 아무리 봐도 제가 아는 조사와는 다른 것 같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금 하늘에 계시는 분은 ‘그분’인 것 같습니다.]
“그분이요?”
[─그렇습니다. 다름 아닌…, 아-.]
“어르신!? 어르신━!”
…백미선자의 목소리는 갑자기 끊겼다.
주인은 당황하며 눈을 끔뻑이더니 자신과 눈을 마주치며 되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래?”
“…월-.”
자신 또한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설기는 머리보다 몸이, 본능이 먼저 어떠한 기류를 감지해냈다.
섬짓, 하고 온몸에 털을 곤두세우게 하는 전율적인 감각!
설기는 일순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입을 쩍 벌렸다.
“…왈.”
“응? 뭐라고?”
“번개다, 멍.”
“번개… 가 아니라 너 지금 말했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멍. 하늘을 봐라 주인.”
“아니, 아무리 봐도 지금 너보다 중요한 건……. 어, 있네?”
때마침 여명도 보았다.
콰르릉!
미치도록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아니 떨어지는.
콰르르릉-!
흑뢰(黑雷)를 말이다.
………
………
[우오오오오━━!!]
흑원이 포효했다.
tmi후기.
-눈치챈 분들도 있을 테지만. 226화 아미산에서 투정을 부린 건 흑원이며. 백모는 흑원을 만나기 싫어 몰래 천산에 있었다.
-흑원은 자신의 몸을 번개로 만들 수 있다.
-아미산에서 십만대산까지 오는데 10초면 충분하다.
-전류(電流)가 흐르는 장소라면 어디서든 강림할 수 있으며. 나머지 신수인 황룡은 바람, 백록은 흙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강림하고 관조(觀照)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