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화 Ep.31O 골디아스 왕국
[백지의 숲]
골디 아스 왕국의 북부에 있는 숲으로 자라나는 식물부터 뛰 어 다니는 짐승의 털까지 모든 게 새하얘 붙여진 이름.
그런 숲속의 어느 깊은 곳.
누군가 인위 적으로 나무와 풀을 베 어내어 만든 공터 위로 크고 작은 천 막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세워져 있다.
사람의 흔적 이 물씬 느껴 지는 그 주변은 지 키는 보초 한 명 없었으며, 어둠 을 밝히고 짐승을 쫓아낼 횃불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차디 찬 겨울바람이 나뭇잎을 스치 는 소리 만 이 어 지 는 공터.
바로 그곳의 가장 크고 화려한 천막의 안.
“빌어먹을 년들:
유려한 금발의 청년. 제국의 祄황자 마르비우스 폰 기엘 튤리우스.
그가 욕을 나직이 지껄이며 잔에 준비된 와인으로 목을 축였다.
사람 셋은 누울 수 있는 넓이에 최고급 원단과 날개 솜이 들어간 침대.
바닥의 냉기가 올라오지 않도록 마법적 처리가 된 마수의 가죽으로 재단 된 카펫.
항시 적당한 열기를 뿜어내는 랜턴.
마르비우스의 천막은 천막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아주 호화스럽게 꾸며져 있었다.그런 환경 속에서 침대에 걸터앉은 그는 무엇이 그리도 불만 인지 연신 와인을 홀짝이며 욕을 내뱉는다.
“감히 황자인 나를 무시하다니 ……!!”
황궁의 안락하고 편 안한 삶을 잠깐 뒤 로하고 이 척 박한 곳까지 귀 한 몸을 움직인 이유.
황제조차 쉽게 어찌할수 없는 열 명의 강자들. 십 마성.
마르비우스는 바로 그 십 마성과 친분을 다지기 위해 이곳까지 내려왔다. 물론, 황자라는 신분을 이용해 온 것은 결코 아니다.
아무리 제국이 강대하고 황족의 권위가 하늘 같다지만, 성직자들과 척을 질 정도는 아니었다. 또한, 십 마성들의 눈치도 보아야 했고.
그런 자리에 마르비우스가참석할수 있었던 건 이번 일에 손을 거들어줄 십 마성과 함께했기 때문이다.
열 번째와 아홉 번째 별.
십 마성의 말석 이 라고도 할 수 있는 그 둘이 바로 제 국 황실의 소속이 었다.
말석이 기는 하나 그럼 에도 대륙에서 가장 강한 열 명 중 일인이 다. 그런 자 들을 둘씩이나 대동했음에도 이곳에서의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정확히 이틀 전의 일이다.
바르비우스가 두 십 마성과 수발을 들 최소한의 인원을 꾸려 이곳 집결지 에 도착했던 바로 그날.
**
화려하기 짝이 없는 마차의 안.
그런 마차의 창문을 누군가 가볍게 두드려왔다.
마르비우스는 커튼을 살짝 들춰 창문을 두드린 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인 간의 귀보다 길고 뾰족한 귀에 녹빛을 머금은 머리칼. 십 마성중 한 명인 유
세핀이 었다.
마르비우스는 커튼을 걷으며 창문을 살짝 아래로 내렸다. 차가운 냉기가 스며들어오자그의 얼굴이 구겨졌다.
“도착했습니다. 그러니 그만 내리시지요.”
“……알겠습니다.”
마르비우스는 벗어뒀던 외투를 걸치고 마차에서 내렸다.
두꺼운 외투와 보온 마법이 걸린 부츠 덕에 몸이 춥지는 않았다. 그러나 언 제 어느 곳에서나 황족으로서의 품위를 지켜야 했기에 로브를 두를 수가 없 었다. 덕분에 마르비우스의 얼굴은 차가운 북풍에 고스란히 노출되 었다.
마차의 문을 두드렸던 유세핀이 타고 있던 말에서 내려와그의 옆에 섰다. 그리고는 천막이 세워진 공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추우시다면 성직자들이 세워둔 천막으로 곧장 들어가시지요.”
“아닙니다… 괜찮으니 배정된 천막에 꾸려온 짐부터 풀도록 하죠.”
당장이라도 천막으로 들어가고 싶었으나 마르비우스는 그러질 못했다. 왜냐면 천막에 나와 움직이고 있는 이들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
새하얀 법복과 갑주를 걸친 성기사와 사제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집결지 의 천막과 주변을 보수하고 있었다.
어 떻 게 보면 호시 탐탐 대륙 정벌을 노리는 마인들 보다도 제국에 위 협 이 되는 존재들이 바로 성직자들이었기에 마르비우스는 그녀들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일 수가 없었다.
그가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속으로 이를 갈고 있을 때였다.
“황자님.”
“왜 그러십니까.”
“저쪽을 보시지요.”
유세핀의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든 마르비우스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에 서 있는 눈처럼 새하얀 머리 칼을 가진 여 인들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저분이…….”
“예. 아르델 필로리 아 백 작이옵니다. 옆에 있는 자는 장녀인 아르델라일 테지요.”
“크흠.큼.유세핀경은 필로리아백작과 친분이 있으십니까?”
“얼굴을 뵌 것도 친분이 라면 있다고 할 수는 있겠군요.”
“평범하게 없다고대답하시면 될 것을
99
마르비우스는 고민했다.
이대로 걸어가 인사를 건넬지 . 아니면 회의 가 열리는 날까지 조용히 숨죽 이고 있을지.
잠깐의 고민 끝에 마르비우스는 결단을 내렸다. 지금 가서 인사를 건네기 로.
회의가 시작되면 참석하기로 했던 모든 십 마성과 신전 측에서 파견 나온 고위 성직자들까지 대거 참여할 것이다. 한 자리에서 모두에게 자신을 알릴 수 있는 좋은 자리 이기는 했으나.
‘소개 따윌 할 시간이 주어질 리 없지.’
이 자리에서 인맥을 다지고자 참석한 이는 자신뿐이라는 것을 제대로인지 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마르비우스는 옆에 선 유세핀에게 부탁했다.
“함께 가주시겠습니까.”
“그다지 기분이 좋아보이지 않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황자에게 대뜸 욕을 박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뭐. 가시지요.”
유세 핀은 미묘한 반응을 보이 며 고개를 끄덕 였고 마르비 우스는 그녀 함 께 아르델이 서 있는천막으로 향했다.
‘종자인가.’
마르비우스는 아르델 모녀 옆에 금발의 여인이 서 있다는 사실을 코앞까 지 다가와서야 눈치챘다. 외모 면에서는 두 모녀와 비교해 전혀 꿀리지 않는 미모를 가진 여 인이 라고 생 각했다.
마르비우스와 아르델 모녀의 거리가 열 걸음 정도로 좁혀졌을 때다.
카가가가각一!!
“커 억!!”
앞 아래서 솟아오른 날카로운 얼음 조각에 놀람과 동시에 뒤에서 당겨지 는 힘에 마르비우스는 괴스러운 소리를 내며 뒤로 자빠지고 말았다.
“콜록, 콜록…!!”
“괜찮으신지요.”
새하얀 눈밭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기침을 토하는 마르비우스. 그런 황자 를 향해 유세핀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 나 마르비 우스의 눈에 는 유세 핀의 새 하얀 손이 보이 지 않았다. 그의 눈에 는 코앞에 솟아난 날카로운 얼음 조각만이 보였다.
만약유세핀이 뒤에서 당겨주지 않았더라면 자신은분명 저 얼음에 찔렸 을 것이다.
길이를 보아서 몸을 관통하지 않고 외투에 구멍을 만드는 선에서 그쳤을 테지만 이건 엄연히 선을 넘은행위였다.또한, 태어나 단한번도 생명에 위 협을 받아본 적 없는 마르비우스를 분노케 만들기 에 충분한 행위 였다.
마르비우스는 유세핀의 손을 밀어내며 스스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 고 분노를 숨기 지 못한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이오!! 갑자기 이런 위협을 가하다니!!”
“황자님.”
“유세핀 경은 가만히 있으십시오!!”
그의 반응에 유세핀은 처음 이곳으로 올 때와 비슷하게 미묘한 분위 기를 풍기며 뒤로물러났다.
“이보시오 필로리아 백작!! 그대는 내가 누구인지는 알고 이런 위협을 가 한 것이一”
스아아아아아.
아르델을 중심으로 새하얀 안개 가 뿜어져 나오더 니 순식 간이 일대를 집 어삼켰다.그 안에는 마르비우스 역시 포함되어 있었는데.
“어 어으 버 번 어버 번 버 버 브……II”
I, I-----,--, I---,-----번 ••
황실의 궁정 마법사가 직접 마법을 부여한 부츠와 외투를 걸치고 있었음 에도 뼈에 사무치도록 스며드는 냉기에 마르비우스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추레하게 이를 딱딱! 부딪히며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귓 가로 소름 끼 치도록 낮게 가라앉은 성숙한 여 인의 목소리 가 스치고 지나갔다.
—다시 한번 내 앞에서 소리친다면 그 머리통을 부숴버릴 것이다.
그와 동시 에 새 하얀 안개 가 옅 어지 기 시 작했고 마르비 우스를 괴 롭히 던 냉기 역시 더는그의 몸을침범하지 않게 되었다.
안개가 모두 사라졌을 때, 아르델 역시 마르비우스의 눈앞에서 사라져 있 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마르비우스를 향해 누군가 다가왔다.
그는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했다.
사라진 아르델과똑같이 눈처럼 새하얀 머리칼을 가진 여인.
모친을 쏙 빼 닮은 아르델 라였다.
그녀는 모친과 똑같이 무미 건조한 표정으로 마르비우스에 게 덤덤히 말했 다.
“이번 일은 따로 찾아뵈 어 말을 나누는 편이 좋을 듯합니 다. 그럼.”
사과도 무엇도 아닌, 나중을 기 약하며 아르델라는 옆에 서 있던 금발의 종자를 데 리고 천막 안으로 들어 가 버 렸다.
“하…….”
아직 입이 얼어 제대로 말을하지 못하는그를향해 잠깐멀찍이 물러나 있 던 유세핀이 다가와 말했다.
“시 작은 필로리 아 백작이 했으나, 황자께서도 선을 넘으셨습니 다.”
“제,제가 말입니까…?”
유세핀은 그의 몸에 달라붙은 서리들을 털어내며 말을 이었다.
“필로리아 백작은 이곳에 백작의 신분으로 참석한 게 아닙니다. 그녀는 아르델 필로리아. 십 마성의 다섯 번째 별로 이 자리에 참석한 것이지요.”
“그,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마르비우스의 대답에 유세핀이 처음으로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그녀가 이 자리에서 황자를 홧김에 죽이더라도 황제께서는 그녀에게 아 무것도 묻고 따지 지 않으실 거 라는 말이 지요.”
“이보시오 유세핀一”
“황자.”
그녀가 마르비우스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으며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황자께서 아무런 의무도 지지 않고 권리만 누릴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 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설마 황제께서 황자를 특별히 어여삐 여기시어 그런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생 각하고 계 셨다면 그만 꿈에 서 깨어 날 시 간이 라고 말씀드려 야겠습니 다.”
유세핀이 가까이 붙였던 얼굴을 천천히 떼어냈다.
“그간권리를 누리셨으니 이제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시간이옵니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서리를 털어내며 끌어올렸던 입꼬리를 다시 끌어 내 렸다.
“황자를 대체할 자식은 얼마든지 있다는 걸 항상 기억하시길.”
**
이틀 전의 일을 떠올렸더니 다시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가치를증명할시간이라고? 감히 계집 따위가…!!’
마르비우스는 아예 병째로 입에 가져대고 와인을 들이켰다.
“푸하!! 젠장.”
그날 이후로 아르델의 모습은 보지도 못했으며 함께 왔던 유세핀과 다른 십 마성인 아드리안은뒤늦게 도착한어떤 상인과 모험가 일행의 천막으로 각각 나뉘 어 들어가 버렸다.
황자인 자신을 방치한 상태로 말이 다.
마르비우스는 반쯤 비 어버린 와인병의 주둥이를 꽉 움켜쥐 며 이를 갈았 다.
‘증명 ? 그래 . 얼마든지 해주마. 이 내 가. 이 마르비우스가 얼마나 우수한 남자인지.’
그가 다시 와인을 들이 키려고 할 때였다.
딸랑. 딸랑.
천막의 안쪽에 설치해둔 종이 울렸다.
밖에 서 누군가 찾아왔다는 신호였다.
마르비우스는 길게 내려와 있는 녹색 끈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천막 안으 로 백은색의 머리칼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너무늦은 시간에 방문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에게 위해를 가했던 아르델의 딸인 아르델라가 예의 그 무표정한 얼 굴로 걸어들어왔다.
마르비우스는 손에 쥔 와인병을 얼른 테이블에 올려두며 목을 가다듬으 며대답했다.
“괜찮소. 아, 일단은 앉으시오.”
“아닙니다.오래 있을 만한것도 아니니.서서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러시오.”
마르비우스는 얼굴이 구겨질 뻔한 걸 가까스로 참아냈다.
“요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
갑자기 말을 하다 말고 고개 를 돌리는 아르델 라의 행동에 마르비 우스는 결국 이마를 찌푸렸다.
“이보시오.도대체 지금나와무얼一”
“죄송합니다.급한일이 생겨서.이야기는다음에 이어서
99
!
.........
“아니, 이보시오!! 뭘 시작을 했어야 이어 하든 말든하지!! 젠장!!”
그는 다급히 천막을 뛰어나가는 아르델라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결국 외투를챙겨 입고그뒤를쫓았다.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황자인 자신을 제쳐 두고 뛰 쳐 나가야만 했는지. 두 눈으로 직 접 확인하기 위 해 서 .
“빌어먹을.
빛 한줌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주변을 더듬거리며 힘겹게 앞으로 나아 가던 바로 그 순간.
—스미스!!
—서방니임!! 저, 저 좀 살려주세요!!
—야!! 너 이리 안와?!
조용해야 할 집결지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스미스?’
그는 소리를 이정표 삼아 조심 이 걸음을 옮겼고 마침내 소리의 근원지에 다다를수 있었다. 그리고.
—다친 곳은 없는건가요?
—응? 어 괜찮아요.
소란스러운 틈 속.
마르비우스는 똑똑히 보았다.
얼음장보다 차가운 얼굴로 자신을 위 협했던 그 필로리 아 백작이.
사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덩치를 가진 남자의 팔에 달라붙는 장면을.
그에 마르비 우스는 생 각했다.
와인을 너무 마셨나 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