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상견례2022.01.11.
“이 새끼가, 아직도 우리 시현이한테 집적거려?”
우진이 다짜고짜 사이에 뛰어들어 태하의 멱살을 잡았다.
“너 오늘 잘 걸렸다!”
시현이 놀라서 말리기도 전에 우진은 태하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다행히 키 차이도 있고, 태하가 직전에 고개를 틀어 피하는 바람에 주먹은 턱 끝을 약간 스치는 정도로 끝났다.
“어쭈, 이 새끼가? 피해?”
빗나간 것이 더 화가 났는지, 우진은 또다시 주먹을 날리려 했다.
“무슨 짓이야?”
시현은 얼른 우진을 뒤에서 껴안아서 떼어내려 했다.
“이거 놔, 시현아!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새끼야.”
“그만하라니까?”
“아 좀 놓으라고!”
우진이 거칠게 시현을 뿌리쳤다. 그 바람에 시현은 그대로 땅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순간, 태하의 눈에 시퍼런 살기가 돌았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태하의 주먹이 우진의 턱에 보기 좋게 꽂혔다.
“억!”
잡고 있던 멱살을 놓고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리는 우진의 멱살을, 이번에는 태하가 움켜잡았다. 이번에는 그대로 뺨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컥!”
우진의 입가가 찢어져 금세 피가 흘러나왔다. 그러고도 태하는 분이 풀리지 않은 것 같았다. 또다시 주먹을 치켜드는 태하의 팔에, 시현이 매달렸다.
“그만해, 제발!”
그제야 태하가 움찔하며 시현을 바라보았다. 그 눈을, 시현은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나랑 결혼할 사람이야. 내 앞에서 더는 한 대도 못 때려.”
태하의 주먹이 힘없이 떨어졌다. 동시에 우진의 멱살을 움켜잡고 있던 손도 풀렸다. 바닥에 나뒹구는 우진에게, 시현이 황급히 달려들었다.
“괜찮아, 오빠?”
걱정스럽게 우진을 살피는 시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태하는 등을 돌려 어딘가로 가버렸다. *
“아야!”
찢어진 입가에 면봉으로 조심조심 소독약을 바르는 시현에게, 우진이 비명을 질렀다.
“저 새끼 저거, 진짜 개발자 맞아? 깡패 아냐?”
아파 죽겠는 모양이었다. 하긴 퍽, 소리가 나는 것이 정통으로 얻어맞은 것 같기는 했다.
“두고 봐. 내가 경찰에 고소할 거야.”
이를 가는 우진을 보고, 시현은 가슴이 철렁했다. 둘이 주먹다짐을 하는 것도 모자라서, 소송까지 하는 걸 볼 수는 없다.
“그래 봐야 쌍방폭행이야. 먼저 때린 건 오빠잖아?”
“너 지금 그 새끼 편드는 거야? 내가 이렇게 다쳤는데?”
시현은 한숨을 지었다. 전에 시현은 샤워 가운 사이로 태하의 몸을 본 적이 있었다. 누가 봐도 한시도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은 몸이었다. 반면에 우진은 그냥 일에 치여 사느라 운동 따위는 할 시간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직장인의 몸이었다. 나잇살인지 슬슬 배까지 나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키도 키지만, 애초에 체급 자체가 달랐다. 무슨 생각으로 덤벼들었는지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그러게 내가 말릴 때 그만하지 그랬어.”
우진이 벌컥 성질을 냈다.
“내 여자 건드리는데 어떤 놈이 눈이 안 돌아가?”
‘그걸 아는 사람이 다른 여자를 만나?’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시현은 꿀꺽 삼켜 버렸다.
“어쨌든 오빠도 잘한 거 없어. 내 얼굴 봐서라도 넘어가 줘.”
새삼 시현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우진이 말했다.
“이게 다 네가 너무 예뻐서 그런 거야.”
“무슨 소리야?”
시현은 픽 웃었지만 우진은 따라 웃지 않았다.
“아까 그 새끼가 너 쳐다보는 눈빛 못 봤어? 남자끼린 딱 보면 알아. 저 자식, 분명히 너 좋아한다. 아니, 아예 너한테 미쳤어. 완전히 눈이 돌아갔다고.”
고백까지 받아 놓고 차마 아니라고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했다간 더 큰 사달이 날 게 뻔해서, 시현은 예전의 입장을 고수했다.
“몇 번이나 말해야 해? 태하는 나한텐 그냥 애라고.”
하지만 우진의 귀에는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터진 입안을 혀끝으로 더듬어보며, 우진은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빨리 결혼해야겠어. 저 자식이 감히 널 넘보지 못하게.”
*
“그랜드호텔 레스토랑 르 블랑. 토요일 오후 한 시로 예약했어.”
우진이 알려준 상견례 장소가 하필 전에 태하와 함께 갔던 호텔 레스토랑이어서 시현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 레스토랑에서 우진이 다른 여자와 식사하는 걸 태하가 우연히 보고, 일부러 시현을 데려가 줬던 것 아닌가.
“왜 하필 거기야? 어른들 계신데 한정식집으로 하지.”
“엄마가 집에서도 맨날 먹는 한식, 나가서까지 먹어야 하냐고 하셔서. 거기 프렌치 레스토랑이 분위기가 죽인다고 소문이 자자하길래 예약했지.”
‘그게 아니라 오빠가 가 봤는데 좋았던 거겠지.’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을 시현은 겨우 삼켰다. 용서하기로 했으니까 잊어버리자고 생각하고 노력하는데도 이렇게 가끔씩 불쑥불쑥 생각이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토요일 점심, 호텔 레스토랑에서 상견례 자리를 갖게 되었다. 우진 쪽은 가족이 너무 많아서 부모님 두 분만, 그리고 시현 쪽에서는 작은아버지 부부와 사촌동생 아현이 함께 나왔다.
“반갑습니다. 우진이 아비 되는 사람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시현이 작은아버지입니다.”
먼저 양가 어른들끼리 인사를 나누고 나서, 우진이 시현의 작은아버지 부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김우진입니다. 진작 찾아뵙고 인사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얘기 많이 들었어요. 참 듬직하고 잘생겼네. 우리 시현이 잘 부탁해요, 호호.”
말쑥하게 차려입은 우진을 바라보는 작은어머니의 눈에 흡족함이 어렸다. 시현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작은어머니가 보기에 우진은 영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저렇게 기분이 좋은 거였다. 어릴 때부터 작은어머니는 시현에게 좋은 것은 무엇 하나 주고 싶지 않아 했으니까. 주문한 음식이 채 나오기도 전에 예비 시부모는 돌아가며 아들 자랑을 하기 바빴다.
“제 자식 자랑하기 민망합니다만, 저희 우진이가 세 살 때 한글을 떼었답니다. 일곱 살 때는 신문에 있는 한자까지 줄줄 읽었지요, 허허.”
“우진이 좋다는 아가씨들도 얼마나 많았는지 몰라요. 심지어 조한신문…….”
“엄마!”
우진이 목소리를 높였다. 정임이 아차, 하는 얼굴로 얼른 물잔을 들어 마셨다. 마침 음식이 나오는 순서에 신경을 쓰고 있느라, 시현은 미처 듣지 못했다.
“대학도 원래 충분히 SKY 갈 수 있었던 걸, 굳이 장학금 받겠다고 낮춰 갔지 뭡니까.”
“저희 우진이가 그렇게 효자랍니다.”
그 후로도 내내 아들 자랑이 늘어졌다. 작은아버지 부부는 ‘우리 시현이도 공부 잘했다’는 말 한마디 없었다. 한참 듣고 있다가 작은어머니가 겨우 한다는 말이 이랬다.
“제가 어릴 때부터 시현이 신부수업 하나는 확실히 시켰답니다. 요리 솜씨도 좋고, 살림도 아주 잘할 거예요.”
정임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유, 무슨 말씀을. 겉절이 하나 제대로 무칠 줄 모르던데요?”
작은어머니가 곁눈질로 시현을 흘겨보았다. 대체 어떻게 했길래 저런 소리를 듣느냐고 탓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화끈거리는 감각이 되살아나는 것 같아서, 시현은 테이블 아래로 손을 꼼지락거렸다.
“걱정 마세요. 제가 앞으로 내 딸이다, 생각하고 제대로 가르치겠습니다.”
대놓고 며느리를 부려먹겠다는 선언에도 작은어머니는 우아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사부인.”
시현은 씁쓸하게 생각했다. 속된 말로 똥개도 자기 집 앞에서는 50점은 먹고 들어간다고 하던데, 나는 개만도 못한가 보구나.
“신혼집은 저희들끼리 알아서 얻겠다고 하니 다행이에요.”
“예, 살림도 둘이 알아서 장만하겠다고 하네요. 요즘 젊은이들이 참 야무지지요.”
이런저런 얘기가 오가다 작은어머니가 슬그머니 본론을 꺼냈다.
“이왕 결혼하기로 한 거, 식은 최대한 빨리 올렸으면 하는데 사돈댁 의향은 어떠신가요?”
“예? 아니, 뭐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딱히 서두를 이유가…….”
우진이 끼어들어 제 어머니의 말을 가로막았다.
“좋습니다, 작은어머님. 저도 하루빨리 시현이 데려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정임은 영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벌써 4월이잖니. 5월은 워낙 성수기니 자리가 없을 테고, 7, 8월은 한여름이니 손님 치르는 법 아니고. 이것저것 생각하면 아무리 빨라도 가을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어?”
“그럼 6월에 하면 되지요.”
우진의 말에 시현도 깜짝 놀라서 얼른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오빠. 벌써 4월인데, 6월에 예식장을 어떻게 잡아?”
“걱정 마. 우리 회사 복지회관 예식장에 문의해봤더니 마침 얼마 전에 파토 난 커플이 있어서 6월 마지막 주가 비었대. 지금 예약하면 추첨 없이 바로 잡을 수 있다고 했어.”
시현은 까맣게 몰랐던 사실이었다. 이제 보니 우진은 이미 작정을 하고 온 모양이었다.
“아유, 신랑감이 아주 시원시원한 게 마음에 드네.”
시현을 빨리 치워버리는 것만이 목적인 작은어머니는 더없이 흡족한 얼굴을 했다. 아들이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나오니 예비 시부모도 결국 찬성했다.
“뭐, 이왕 하는 거 빨리 해치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두 달 후에 결혼이라고? 시현이 얼떨떨해 있는 사이에 이미 얘기는 결정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작은아버지 부부는 시현을 빨리 보내버리자는 목적을 달성했다. 우진의 부모는 또 그들대로, 시현의 작은아버지 부부가 일절 조카딸을 자랑하지 않고 고분고분 숙이고 들어오는 것이 흡족했다. 설령 며느리를 하녀 부리듯 하더라도 친정에서 간섭할 일은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즉 서로 만족스러운 흥정이었다. 덕분에 부모들끼리의 흔한 기 싸움 한번 없이, 상견례는 화기애애한 가운데 끝났다. 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을 나왔다. 전용 엘리베이터가 작아서, 우진이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먼저 내려가기로 했다.
“결혼 축하해, 언니.”
단둘이 남게 되자 사촌동생 아현이 불쑥 말을 걸었다.
“난 언니가 하도 버티고 안 가길래 대체 눈이 얼마나 높아서 저러나, 궁금했거든. 그런데 오늘 형부 보니까 그럴 만했네. 딱 어울려, 언니랑.”
아현은 어릴 때부터 꼭 작은어머니의 축소판 같았다. 외모도, 마음 씀씀이도, 시현이 무엇 하나 좋은 걸 가지는 꼴을 못 보는 것까지도. 역시나 아현의 눈에도 우진은 그저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같은 집에서 자랐지만 아현은 아가씨, 시현은 가정부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아현은 응당 부잣집에 시집보내 사모님으로 만들 테지만, 시현은 평범한 회사원이면 차고 넘쳤다. 작은어머니도, 아현도 그런 의미에서 우진을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다. 딱 시현의 주제에 맞는 남자라고 여기는 게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여태 시현은 한 번도 우진이 평범해서 싫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되니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좀 더 멋진 남자를 데려왔으면 어땠을까. 작은아버지 댁에서 보고 아주 놀라서 뒤집어질 정도로.
‘너도 잘난 거 하나 없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어느덧 속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을, 시현은 금세 속으로 탓했다.
“축하 고맙다. 너도 얼른 좋은 사람 만나.”
시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하며 돌아온 엘리베이터에 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로비에 도착했는데, 아현이 갑자기 어머, 하면서 걸음을 멈췄다. 아는 사람이라도 마주쳤나 싶어서 시현은 덩달아 아현의 시선을 좇았다.
“어서 오십시오.”
호텔 정문으로 들어오는 한 남자를, 양쪽에 도열한 호텔 직원들이 허리를 숙여 맞이하고 있었다.
“뭐지? 재벌 2세라도 되나?”
아현이 황홀한 듯이 중얼거렸다.
남자를 알아본 시현은 숨을 멈췄다. ……태하였다.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던 걸까. 갑자기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흠칫 놀라 얼른 시선을 피하려는 순간, 태하가 성큼성큼 이쪽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