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 내 잘못이 아니잖아 (31/181)

#31. 내 잘못이 아니잖아.2022.01.14.

16551946440962.jpg

  우진과 주먹다툼을 한 이후, 태하는 그전보다 한층 더한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었다. 맞은 것은 저쪽인데,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진 것은 이쪽이었다. 만약에 두들겨 맞은 게 자신이었다면, 그녀는 나를 위해서도 그렇게 막아서 줬을까?

16551946440967.jpg[나랑 결혼할 사람이야. 내 앞에서 더는 한 대도 못 때려.]

시현이 자신을 위해 그렇게 말해준다면, 태하는 맞아 죽어도 좋았다. 죽더라도 웃으며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여자의 마음을 가진 우진이 죽도록 부럽고,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시현이 우진을 용서하겠다고 말한 후부터 태하는 계속해서 고뇌하고 있었다. 사실대로 말해 버릴까. 당신의 약혼자와 바람피운 상대가 바로 이보라라고. 그걸 시현이 알게 되면 결혼은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결혼이 깨진다고 해서 시현이 자신에게 와줄 것 같지는 않았다.

16551946440973.jpg[대체 내가 어떻게 하면, 나한테 와줄 거야?]

매달리는 자신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치며, 시현은 말했다.

16551946440967.jpg[다시 태어나.]

뭘 해도 안 된다는 소리였다. 진짜로 죽어서 다시 태어나 볼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차피 강시현 없는 인생, 살아봐야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지금 죽어서 다시 태어나 봤자 이번에는 서른 몇 살이나 차이가 나 버릴 뿐이다. 며칠 동안 고민한 끝에 결국 태하는 시현에게 사실을 말하기로 결심했다. 상처받더라도, 그녀가 제대로 알고 선택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른 채로 결혼해버렸다가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되면 그게 더 큰일 아닌가. 무엇보다 알고도 입 다물고 있는 것이, 그녀를 기만하는 것 같아서 견디기 힘들었다.

16551946440967.jpg[오빠, 괜찮아?]

그런데 그날 우진을 대하는 시현의 태도를 보니, 사실을 알아도 헤어지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게 되면 내 손으로 그녀를 지옥으로 떠밀어버리는 거나 다름없다. 언제든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시현의 행복이었다. 군대에서 첫 휴가를 받자마자 달려갔다가, 그녀의 행복한 얼굴을 보고 아무 말 못 하고 돌아섰던 그날처럼. 그녀가 다른 남자 곁에서라도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을 때는 그나마 참고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지금은 그냥 미칠 것만 같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아버지 레온에게서 연락이 왔다.

16551946440988.jpg- 호텔은 인수하는 쪽으로 결정이 될 것 같아. 그 일 때문에 조만간 내가 직접 서울에 가게 될 테니까 그때 만나자, 아들.

1년 만에 아들을 만날 생각에, 화상 통화 속의 레온은 벌써부터 설레는 표정을 했다. 그런 아버지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미 머릿속이 시현의 일로 꽉 차 있는 태하는 다른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16551946440973.jpg“네.”

건성으로 대답하다, 태하는 문득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16551946440973.jpg“혹시 이쪽에서 뭔가 부탁하면 호텔 측에서 들어줄까요?”

16551946440988.jpg- 글쎄, 그렇지 않을까? 모기업의 경영난이 꽤 심각한 상태라서, 그쪽은 어떻게든 우리한테 호텔을 팔고 싶어 하거든.

16551946440973.jpg“그게 법에 저촉되는 거라도요? 예를 들어 고객의 CCTV 화면을 요청한다든지, 하는 거 말입니다.”

16551946440988.jpg- 무슨 일인데 그러니?

이런다고 시현이 제게 오지는 않겠지만, 혹시 나중에 그녀를 위해 필요하게 될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태하는 입을 열었다.

16551946440973.jpg“아버지, 제가 부탁 하나만 드릴게요.”

처음으로 들은 아버지라는 말에, 화면 속의 레온이 침을 꿀꺽 삼켰다.

16551946440988.jpg- 말해보렴, 아들.

16551946440973.jpg“호텔에 연락해서, 최대한 높은 사람과 만날 수 있게 해주세요.”

지구 반대편에 있는 레온이, 화면 너머로 태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생전 처음으로 아들에게서 아버지라고 불린 남자의 얼굴이었다.

16551946440988.jpg- 약속을 잡아둘 테니, 가서 뭐든지 이야기하렴.

아버지는 다시 한번 되풀이했다.

16551946440988.jpg- 뭐든지.

  * 태하가 성큼성큼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16551946440973.jpg“여긴 웬일이야?”

태하가 물었다. 말하기가 내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어서 시현은 조금 머뭇거리다 사실대로 대답했다.

16551946440967.jpg“오늘 상견례 했거든, 여기 레스토랑에서. 너는?”

수려한 얼굴에 잠시 파문이 일었다. 그러나 태하는 금세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가서 대답했다.

16551946440973.jpg“아버지 일 때문에.”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려서, 시현은 그가 태연을 가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16551946440967.jpg“아, 그래.”

곁에서 아현이 놀란 얼굴로 태하와 시현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사이야?’ 하고 얼굴에 쓰여 있는 것 같았다. 저만치서 호텔 직원들도 공손하게 손을 모은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태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눈치였다.

16551946440967.jpg“저기, 부모님들이 밖에서 기다리셔서. 그럼 나중에 봐.”

빠르게 중얼거리고, 시현은 돌아섰다. 등 뒤에 꽂히는 시선이 아팠다. *

16551946470121.jpg“뭐야, 방금 그건?”

대기하고 있던 기사가 열어주는 차 뒷좌석에 올라타며, 아현은 중얼거렸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뛰었다. 방금 제 눈으로 본 광경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꿈속에서나 나올 것처럼 수려한 남자였다. 얼굴은 물론 키, 체형, 비율까지도 완벽했다. 양쪽으로 도열한 호텔 직원들의 공손한 인사를 받으며 들어오는 모습은 마치 영화나 드라마의 한 장면 같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남자가 시현과 아는 사이였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그냥 단순히 아는 사이인 눈치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16551946440967.jpg[오늘 상견례 했거든, 여기 레스토랑에서.]

시현의 말을 들은 순간 남자의 아름다운 얼굴에 어린 것은 분명 충격이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남자는 상처받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억지로 태연한 척을 했다. 한순간도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아현은 그 미세한 표정 변화를 하나하나 다 읽어낼 수 있었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이지? 둘이 무슨 사이지? 저 남자의 감정을, 시현 언니는 알고 있는 걸까? 알고 있다면 왜 별 볼 일 없는 남자와 결혼을 하려는 거지? 궁금증이 끝도 없이 꼬리를 물었지만, 아현은 그중 단 한 가지도 묻지 못했다. 물을 틈도 없이 시현이 우진의 차에 타고 가버렸기 때문에. 가족들이 모두 올라타자 기사가 차를 출발시켰다.

16551946470129.jpg“아유, 속이 다 시원하네!”

가족끼리 남자 그제야 아현의 엄마인 화란이 희색이 만면해서 속마음을 토해냈다. 그러고는 앞좌석에 앉은 남편을 향해 눈을 흘겼다.

16551946470129.jpg“당신 소원대로 조카부터 시집보내게 됐네요. 이제 속이 좀 시원하시우?”

아버지는 대답 대신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16551946470129.jpg“드디어 우리 아현이 시집보낼 수 있게 됐네. 가을쯤 날 잡으면 되겠다. 아현아. 저번에 만났던 김 대표님 댁 아드님, 다시 한번 보자고 할까? 아니면 닥터 최?”

양손에 쥔 떡처럼 재고 있던 사윗감들이었다. 하나는 건실한 중견기업을 물려받을 외아들, 하나는 병원장 아들. 외모와 스펙, 매너에 이르기까지 두루 흠잡을 데가 없었다. 아현이 생각해도 둘 다 놓치기 아까워서 하나를 고르기가 힘들 정도였다. ……바로 몇 분 전까지는.

16551946470121.jpg“아니.”

아현은 잘라 말했다.

16551946470121.jpg“둘 다 싫어.”

  * 상견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작은 실랑이가 있었다.

16551946440967.jpg“오빠. 결혼식장을 알아볼 거면 나한테도 미리 상의를 해야 했던 거 아니야?”

실랑이라기보다는 시현이 일방적으로 불만을 토로한 거였다. 우진은 어떻게든 시현을 달래려고 했다.

16551946470156.jpg“복지회관 예식장이라고 절대 허접하고 그렇지 않아. 얼마나 예쁘게 해놨는데. 너도 보면 좋아할 거야. 식사도 맛있고, 가격도 저렴해서 경쟁률이 세서 추첨까지 하고 난리라고. 너희 회사하고도 가까우니까 동료들도 오기 편할 거고…….”

16551946440967.jpg“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6월 말이라니, 난 마음의 준비도 안 됐다고.”

16551946470156.jpg“무슨 소리야. 여태 빨리 결혼하고 싶어 했던 건 너잖아?”

정곡을 찔린 시현은 당황했다.

16551946440967.jpg“아니, 준비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6월은 너무 빠르니까 그렇지.”

16551946470156.jpg“준비야 하면 다 되게 돼 있는 거야.”

운전하던 우진이 시현을 흘깃 바라보았다.

16551946470156.jpg“아니면 뭐, 망설일 이유라도 있어?”

시현은 입을 다물고 생각해보았다. 우진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달 전만 됐더라도 오히려 기뻐하면서 뭐부터 준비하지, 서두르고 있었을 텐데. 이미 용서하기로, 노력하기로 해 놓고 나는 또 뭘 망설이고 있는 걸까. 어찌됐든 이미 일은 정해졌다. 이제 와서 너무 빠른 것 같으니 미뤄야겠다고 말을 번복했다가는 양가 부모님의 노여움을 살 뿐이다. 어차피 할 결혼인데. 무엇보다 작은어머니의 패악을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16551946470129.jpg‘넌 우리 아현이는 안중에도 없지? 키워준 은혜를 이 따위로 갚는 거야?’

길길이 날뛰는 목소리가 귀에 들려오는 듯했다. 우진이 달래듯 말했다.

16551946470156.jpg“갑작스러울 거라는 거 알아. 근데 난 하루라도 빨리 너랑 함께하고 싶은 욕심에 그랬어. 내가 잘할 테니까 믿어주라, 응? 시현아.”

진작 이러지 그랬어. 내가 그토록 결혼하고 싶었을 때는 늘 심드렁하다가, 왜 이제 와서…….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말들을 꿀꺽 삼키고, 시현은 눈을 감았다. 요즘은 입안에서만 맴돌다가 그대로 사라져버리는 말들이 늘었다.

16551946440967.jpg“알았어.”

눈을 감아도, 아까 보았던 태하의 상처받은 표정이 잔상으로 남았다. * 시현을 집에 데려다주고 우진은 집으로 돌아갔다.

16551946470156.jpg“준비하려면 다음 주부터 바빠질 거야. 오늘은 푹 쉬어.”

작별 인사로 키스하려는 우진에게서, 시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홱 돌렸다. 결국 우진의 입술은 시현의 입술이 아닌 뺨에 닿았다. 그것만으로도 왠지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집에 들어와서도 시현은 좀처럼 진정하지 못했다.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화장을 지우면서도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두 달 후에 결혼이라니. 마치 빠져나올 수 없는 늪 안에 한 발을 들여놓아 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꽃길 걸을 생각에 설레지는 못할망정, 왜 자꾸만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시작부터 이런 기분이 드는 결혼을, 하는 게 과연 옳은 걸까. 수많은 생각들에 지쳐서 시현은 결국 생각을 그만둬 버렸다. 원래 결혼 전에는 생각이 많아진다지 않는가. 그것뿐이다. 오늘 한 일이라고는 낮에 상견례를 한 것뿐인데, 정신적으로는 밤새 야근을 한 것만큼이나 지쳤다. 시현은 초저녁부터 잠자리에 들었다. 피곤하기도 했지만, 차라리 잠들면 아무 생각도 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잠에서 깬 것은 초인종 소리 때문이었다. 내내 깊이 잠들지도 못하고 선잠을 자고 있던 시현은 금세 눈을 떴다. 인터폰으로 확인해보니 태하가 서 있었다.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일까. 잠시 망설이다 시현은 현관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태하는 쏟아지듯 품에 와락 안겨 왔다. 시현은 놀라서 받아 안았다. 무거운 남자의 체중이 그대로 실려 오는 바람에, 조금 버티다 그만 뒤로 나동그라졌다.

16551946440967.jpg“태하야?”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남자가, 억눌린 목소리를 냈다.

16551946440973.jpg“내 잘못이 아니잖아.”

순간 시현은 무슨 소린가, 생각했다. 잠시 후 태하가 겨우 손으로 바닥을 짚고 그녀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미약하게 와인 향기가 나서, 그제야 시현은 태하가 취했다는 걸 알았다.

16551946501543.jpg

16551946440973.jpg“아홉 살에 만난 거, 그게 왜 내 잘못이야.”

평소 태하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깊게 가라앉은 눈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평소의 가장假裝을 알코올이 다 씻어 간 것일까.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눈빛이 시현을 향했다. 그린 것 같은 입술에서 원망의 말이 쏟아져 나왔다.

16551946440973.jpg“당신이 나한테 온 거잖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