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나한테 기회를 줘2022.03.04.
“잠깐만, 여긴……?”
드디어 도착한 곳을 보고 시현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플레이월드잖아?
아주 옛날에 태하와 둘이서 놀러 왔던 놀이공원이었다. 그립고 반가운 마음에 그만 시현은 화내는 것도 깜빡 잊어버렸다.
“와, 이게 대체 몇 년 만이야?”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왔었지.”
시현은 손을 꼽아 보았다. 그럼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니까…….
“세상에, 16년 만이네!”
시현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태하를 바라보았다.
“윤태하, 너 언제 이렇게 컸니?”
꽤나 즐거운 기억이었나 보다. 16년이나 된 일이 이렇게 생생하게 떠오르는 걸 보면. 그때 태하가 얼마나 예쁜 아이였는지,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태하를 한 번씩 쳐다보지 않고는 못 배기던 것조차 바로 어제 일 같았다.
“잠깐 기다려.”
티켓을 사 오는 태하를,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힐끗거리며 쳐다보았다. 특히 여자들이 태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람들 눈길을 끄는 건 여전하구나, 싶어서 웃음이 났다. 잠시 후 입장한 놀이공원은 기억 속에 있는 것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심지어 그때 탔던 놀이기구가 아직도 있어서 놀라웠다.
“저거 기억나? 그때 우리 탔던 거 맞지?”
방금까지 안 가겠다고 버티던 것도 잊어버리고, 시현은 태하의 팔을 붙잡아 끌었다. 어린아이들이 타는 놀이기구라, 줄을 서 있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아이를 데리고 있는 엄마, 아빠들이었다. 어른들끼리 타는 것은 오로지 시현과 태하 둘뿐이었다.
“와, 신난다!”
어린이용 낮은 롤러코스터를 타고도 시현은 즐거워서 어쩔 줄 몰랐다. 파란 하늘이 가슴 깊이 밀려드는 것 같았다.
“다음엔 뭐 탈까?”
내리자마자 들떠서 묻다가 문득 가슴이 뭉클해졌다. 옛날에 왔을 때, 돈이 없어서 겨우 두 개밖에 타지 못하고 남들 타는 것만 종일 구경했던 게 기억나서였다. 고등학생인 자신은 괜찮지만 어린 태하가 얼마나 타고 싶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내가 얼른 어른이 돼서 돈 벌어서, 우리 태하 놀이기구 많이 태워줘야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어쩌다 보니 두 번 다시 오지 못한 채, 태하는 벌써 이렇게 어른이 되어 버렸다. 시현은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타고 싶은 거 다 타자, 이번에는.”
그런 대답이 돌아와서, 태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4월 말, 날씨는 덥지도 춥지도 않고 딱 화창했다. 어디를 봐도 꽃들이 예쁘게 피어 있어서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내가 마음이 편해지긴 했나 보다고 시현은 생각했다. 올봄은 그 흐드러진 벚꽃조차 언제 피었는지 언제 다 졌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이제야 꽃이 눈에 들어오는 걸 보면 그랬다. 새파란 하늘에 바람까지 살랑살랑 기분 좋게 불어서, 그냥 놀이공원 안을 걷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날아갈 듯 상쾌해졌다. 이럴 때 아이스크림 하나 먹으면 딱 좋겠는데. 시현은 여기저기 있는 아이스크림 부스를 흘깃거렸다. 아까 급하게 끌려 나오느라 지갑은커녕 휴대폰도 없었다. 누나 체면에 차마 나 아이스크림 사줘, 하고 말도 못 하고 있는데, 태하는 그런 시현의 눈치를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태하는 시현을 아이스크림 부스로 데려가 주었다. 그러더니 뭐 먹고 싶으냐고 시현에게 물어서 주문을 대신 해주고, 나온 아이스크림도 자기가 받아서 건네주었다. 시현은 약간 어안이 벙벙했다. 나도 입 있고 손 있는데?
“고맙긴 한데 너.”
달콤한 크림을 핥으며, 시현은 태하를 살짝 노려보았다.
“왠지 나를 좀 애 취급하는 거 같다?”
“말했잖아. 나한텐 애라고.”
그렇게 대꾸하며 태하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시현의 입가에 묻은 크림을 닦아주었다. 이러니 한층 더 어린애가 된 기분이다.
“언제부터?”
“내가 당신을 좋아하게 됐을 때부터.”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하는 고백에, 시현은 당황해서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누가 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시현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태하는 얼른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이번엔 저거 타자.”
놀이공원에 도착한 것이 이미 늦은 오후여서, 놀이기구 서너 개 정도 타고 나니 금방 해가 졌다. 여기저기 하나씩 조명이 켜지고, 놀이공원은 낮과는 또 다른 얼굴로 화려하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해가 지자 급격히 싸늘해졌다. 겉옷이 없는 시현에게, 태하가 자신이 입은 겉옷을 벗어서 걸쳐 주었다.
“괜찮은데.”
“그러게 따뜻하게 걸치고 나오라고 했잖아.”
핀잔을 주면서도 태하는 손수 지퍼까지 잠가 주었다. 그런 태하에게, 시현은 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어색하게 건넸다.
“고마워, 데리고 나와 줘서.”
이 좋은 날씨에 그냥 집에만 있었으면 자칫 심란할 뻔했다. 분수대에 기대어 어두워진 하늘을 바라보는 시현의 옆에 서서, 태하가 조용히 말했다.
“옛날에 나하고 온 뒤로는 한 번도 온 적 없었던 거야?”
조심스러운 말투에 시현은 태하가 우진에 대해 묻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둘 다 직장인일 때 만났잖아. 놀이공원 같은 데는 안 오게 되더라. 서로 바쁘기도 하고, 또 마침 회사도 가까우니까 주로 근처에서 만나서 밥 먹고 가끔 영화나 봤지 뭐.”
6년이나 만났으니까 당연히 추억이 굉장히 많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정작 헤어지고 나니 기억나는 거라고는 온통 회사 근처에서 국밥 먹은 거나 영화 본 일뿐이었다. 둘이서 갔던 제일 좋은 곳이래야 겨우 패밀리 레스토랑 정도였으니까. 오히려 추억이 많은 건 태하 쪽이었다.
“그래도 너랑은 놀이공원도 가고, 프렌치 레스토랑도 가고 그랬네.”
“그것뿐이야?”
태하가 불쑥 말했다.
“나 초등학교 때 참관수업도 왔었잖아. 운동회는 매년 와 줬고.”
“아, 그랬지?”
문득 옛날 일이 생각나서 시현은 웃음이 나왔다. 그때는 아직 고등학생이어서, 꾀병을 부리고 조퇴를 해서 달려갔었다. 우리 태하 기죽을까 봐.
[저 교복 입은 애는 뭐야?]
[누나라는데?]
[근데 누나는 혼혈이 아닌 거 같은데?]
여기저기서 다른 부모들이 의혹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시현은 열심히 운동회에 참가했다. 학부모 참가 종목은 달리기든 뭐든 단연 시현이 1등이었다. 그야 펄펄 날아다니는 나이였으니까. 상품을 안겨줄 때마다 태하가 얼마나 행복한 얼굴을 하던지. 그 얼굴이 보고 싶어서 매년 목숨 걸고 참석했던 기억이 난다. 아쉽게도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운동회에 학부모 참석 자체가 금지돼서 더는 못 가게 됐지만.
“기억나? 너 3학년 땐가, 너희 반 반장 아빠가 나 이겨보겠다고 이 악물고 달리다가 넘어져서 슈퍼맨처럼 휙 날아간 거.”
“걔가 2학년 때 나 괴롭히던 애라, 당신이 죽어도 이겨주겠다고 했었지.”
“당연하지. 그땐 내가 백 미터 14초에 끊던 시절인데, 배 나온 아저씨가 무슨 수로 날 이겨?”
오랜만에 옛날 얘기를 하니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너무 웃은 나머지 배가 아파서, 시현은 나중에는 눈물까지 훔쳤다. 웃음이 좀 잦아들고 난 뒤에 시현은 입을 열었다.
“어제 말이야.”
채 본론도 꺼내기 전에 알아들은 태하가 대답했다.
“미안한 짓을 했어. 그 친구한텐.”
“나도 아직 몇 번 못 봤지만 예인이 괜찮은 애던데, 한번 잘 만나 보지 그랬어.”
제 입으로 말해놓고 시현은 스스로도 놀랐다. 정말 마음에 없는 말이구나, 이거.
“그게 마음대로 안 되네.”
태하가 중얼거렸다.
“당신이 나 싫다고, 꺼지라고 하니까 나도 그렇게 해주고 싶은데. 그게 내 마음대로 안 돼.”
시현은 고요히 제 마음에 집중했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은, 분명히 안도감과 기쁨이었다.
“난 아무래도 당신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
“지금 당장 어떻게 하자고 말 안 해. 그냥, 나는 안 된다는 말만 하지 말아줘.”
기회를 달라는 말이었다. 시현은 낮에 수연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 청년이 바로 시현이 짝이야, 틀림없이.]
수연이 그렇게 확신에 차서 얘기하는 건 처음 보았다. 그러니까 혹시 그 말이 맞지 않을까…….
‘아니, 그것도 핑계잖아.’
시현은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려 애썼다. 거절하기 싫은 건 나다. 사실은 남자로 안 보이는 게 아니라, 남자로 보일까 봐 무서운 거니까. 이제는 밀어내는 것도 점점 힘에 부친다. 그냥 한 번쯤 못 이긴 척, 끌려가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시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정작 제 안의 문제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일일이 말하고 다니기 입 아프니까 부디 저 대신 많이많이 좀 퍼뜨려주세요!]
아무렇지 않은 척 생글거리고는 있지만, 사람들이 뒤에서 뭐라고 수군거릴까 생각하면 역시 괴로웠다. 여기서 태하와 엮이기까지 하면 사람들이 과연 뭐라고 생각할까. 뭐라고들 떠들어댈까. 동료들은? 친구들은? 작은아버지 가족은? 우진과 그 부모는? 순식간에 머릿속 실타래가 엉망으로 뒤엉켰다. 그러면서도 가슴은 태하에게 끌리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즉 머리와 가슴이 완전히 따로 놀고 있었다. 비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시현은 슬그머니 도망갈 길을 마련해두었다.
“만약에 끝까지 내가 널 좋아하지 못하면 어떻게 할 건데?”
“노력할게, 내가.”
“그래도 안 되면 어떡하느냐고 묻는 거잖아.”
“절대 원망하지 않을게.”
태하는 매달리듯 시현을 바라보았다.
“그냥, 나한테 한 번만 기회를 줘. 난 그거면 돼.”
시현은 한숨을 짓고 물었다.
“회사에서는 티 안 낼 수 있겠어?”
순간 넓은 어깨가 눈에 보이게 움찔했다. 태하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바람에 또다시 마음 한구석이 아파 왔다. 고백하면서도 어차피 또 차일 거라 생각했구나.
“지금, 뭐라고…….”
“그러니까,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않을 수 있냐고.”
“안 볼게!”
지금 쳐다보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닌데, 태하는 황급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절대로 안 쳐다볼게. 아니, 말도 안 걸게.”
“말도 안 걸면 일은 어떻게 할 건데?”
시현은 쿡쿡 웃었다. 말해놓고 나니 조금은 후련하기도 했다. 그래. 내가 가지는 못하더라도, 나한테 오지도 말라고 밀어내는 건 좀 그만해볼까. 웃는 시현을, 태하가 곁눈질로 슬쩍 쳐다보았다.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마침 불꽃놀이가 시작되어, 시현은 손뼉을 쳤다.
“태하야, 저기 좀 봐!”
색색의 불꽃이 밤하늘을 수놓는 내내, 그렇게 둘이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한 시현은 갑자기 훌쩍 키가 큰 미주를 보고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뭐야, 왜 갑자기 공중에 떠 있어?”
내려다보니 미주가 웬일로 평소에 못 보던 높은 구두를 신고 있었다. 굽이 거의 송곳에 가깝게 뾰족한 스틸레토 힐이었다.
“어때, 나 좀 섹시해?”
한쪽 다리를 쭉 펴서 각선미를 자랑해 보이는 미주에게서, 시현은 얼른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가까이 오지 마. 밟혔다간 발가락 부러지겠다.”
“그치? 밟히면 깁스해야 할 거 같지?”
어째서인지 미주는 까르르 웃으며 좋아했다. 사건이 터진 것은 그로부터 채 십 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아악!”
복도에서 끔찍한 비명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