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 훈훈한 광경 (46/181)

#46. 훈훈한 광경2022.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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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1949426255.jpg“아악!”

복도에서 끔찍한 비명이 들려왔다.

16551949426261.jpg“뭐야? 무슨 일이야?”

시현은 얼른 일어나서 달려갔다. 다른 사람들도 깜짝 놀라서 앞다투어 복도로 달려 나갔다. 가 보니 보라가 복도 한복판에 주저앉은 채 고통스러워하고 있고, 스틸레토 힐을 신은 미주가 곁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16551949426267.jpg“어머 어떡해! 보라 씨, 괜찮아?”

발을 살펴보려는 미주의 손을 사납게 쳐내고, 보라는 통증에 일그러진 얼굴로 고함을 쳤다.

16551949426255.jpg“일부러 밟았잖아!”

이미 보라의 본성을 알고 있는 시현만 빼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란 표정들을 했다. 그야 보라가 늘 성격 좋게 생글생글 웃는 것만 봤으니까.

16551949426267.jpg“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왜 그런 짓을 하겠어?”

미주는 상처받은 얼굴로 금세 눈물을 글썽였다. 그런 미주를, 보라가 죽일 것 같은 눈으로 노려보았다. 늘 씩씩하고 활기찬 미주가 눈물까지 보이자 여기저기서 동정의 여론이 일었다.

16551949426278.jpg“보라 씨 좀 너무하네. 이 대리가 왜 일부러 그랬겠어?”

16551949426278.jpg“아무리 아파도 상사한테 반말은 좀 아닌 거 아냐?”

16551949426278.jpg“보라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좀 그렇다.”

주로 여사원들이 나서서 미주 편을 들었다. 정작 다친 보라는 뒷전이고, 미주를 빙 둘러싸고 위로하는 것이었다.

16551949426278.jpg“미주 씨, 울지 마. 괜찮아.”

16551949426267.jpg“아니에요, 흑. 발을 밟은 제 잘못이죠. 그래도 저는 잘해준다고 잘해줬는데, 흑흑……!”

얼굴을 감싸고 흐느껴 울던 미주가, 문득 손가락 사이로 시현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시현은 보았다. 미주가 한쪽 눈을 찡긋하는 것을. * 부상이 꽤 심각한지 보라는 일어나지도 못했다. 결국 그대로 구급차를 불러 병원으로 실려 가는 것까지 보고 나서, 시현은 미주를 끌고 빈 회의실로 향했다.

16551949426261.jpg“어떻게 알았어?”

앞뒤 다 자르고 물은 말에, 미주가 의기양양하게 대꾸했다.

16551949426267.jpg“그럼 이 이미주 님의 눈을 속일 수 있을 줄 알았어?”

방금 전까지 보라 씨 미안해, 하면서 흐느껴 울었던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 제일 친한 동료지만 조금은 무서울 정도였다.

16551949426261.jpg“다른 사람들한테는 말하지 마. 부탁할게.”

16551949426267.jpg“안 해. 생각 같아서는 확 까발려서 아주 대대적으로 개망신을 주고 싶은데 참고 있잖아.”

미주가 한숨을 쉬었다.

16551949426267.jpg“내가 이런데, 시현 씨 심정은 오죽하겠어?”

시현은 대답 대신 씁쓸하게 웃었다. 미주의 말대로였다. 나라고 왜 망신을 주고 싶지 않을까. 생각 같아서는 이보라가 한 짓을 줄줄이 써서 회사 정문에 대자보라도 붙이고 싶다. 하지만 결국 제 얼굴에 먹칠하는 꼴이었다.

16551949426278.jpg‘어머 세상에, 강시현 대리 너무 안됐다.’

16551949426278.jpg‘이보라 그거 아주 여우같은 년이었네?’

보라도 욕을 먹겠지만, 결국 자신도 친한 후배한테 약혼자를 빼앗긴 천하에 불쌍한 여자가 돼버리겠지. 그러느니 차라리 입 다물고 있는 편이 나았다.

16551949426267.jpg“우리 이따 저녁에 술이나 먹자, 시현 씨. 오늘은 내가 특별히 같이 마셔줄게.”

시현은 고개를 저었다.

16551949426261.jpg“고맙지만 미안. 술은 끊기로 했어.”

16551949426267.jpg“웬일로?”

16551949426261.jpg“그냥. 파혼하고 나니까 차라리 마음이 편한 거 있지?”

웃는 시현을, 미주가 신기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마 지금쯤 시현이 매일 밤 술독에 빠져 살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나 보다.

16551949466341.jpg“여기들 있었네요.”

갑자기 회의실 문이 확 열리는 바람에 둘은 화들짝 놀랐다. 윤태하 본부장이 한껏 못마땅한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16551949466341.jpg“한참 찾았습니다. 근무시간에 무슨 잡담들이 그리 많습니까?”

둘은 수업시간에 잡담 하다 선생님한테 걸린 고등학생처럼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16551949466349.jpg“죄송합니다, 본부장님.”

다음 화살은 정확히 시현을 향해 날아왔다.

16551949466341.jpg“강시현 대리님, 사용성개선 계획안 오늘까지 달라고 했던 거 아직입니까?”

16551949426261.jpg“죄송합니다. 하고 있는데…….”

태하가 들으라는 듯이 커다랗게 한숨을 쉬었다.

16551949466341.jpg“따라오세요.”

얼음장 같은 말투가, 그 뒤에 벌어질 일을 예고하고 있었다. 팔려 가는 송아지 같은 눈망울을 하고 본부장의 뒤를 따라가는 시현을, 미주가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본부장님도 해도 너무하시지, 파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저렇게 사람을 볶아치실까? *

16551949466341.jpg“뭐 하고 섰습니까? 빨리 안 들어오고.”

16551949426261.jpg“네, 본부장님.”

비서 앞에서까지 퉁명스럽던 태하는 사무실에 들어가서 문을 닫자마자 돌변했다. 태하는 소파에 시현을 앉히더니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왔다.

16551949466341.jpg“아침에 늦잠 자서 아무것도 못 먹었잖아.”

작은 플라스틱 도시락 안에 동글동글 예쁘게 생긴 주먹밥이 여러 개 들어 있었다. 시현은 한숨을 쉬었다. 아침에 태하가 와서 밥 먹으라고 깨웠는데 나 그냥 더 잘래, 하고 귀 막고 버텼더니 결국은 이 모양이다.

16551949426261.jpg“어차피 이따 점심 먹을 건데 뭐.”

16551949466341.jpg“아직 점심 멀었잖아.”

16551949426261.jpg“커피나 한 잔 마시면 돼.”

16551949466341.jpg“빈속에 커피 마시면 속 망가져. 이거 먹고 마셔.”

정성이 가상해서 시현은 주먹밥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아침부터 저 커다란 손으로 이걸 뭉치고 있었을 생각을 하면 웃음이 나왔다.

16551949426261.jpg“오, 맛있는데?”

주먹밥을 먹는 시현을, 태하는 맞은편에 앉아 턱을 괴고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데, 눈빛에서 마음이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좋아하는 사람의 눈빛이라는 건 저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시현은 우진의 마음이 궁금했었다. 저 사람이 정말 날 좋아하긴 하는 걸까. 그런데 태하에게는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눈만 봐도 알겠다. 너무 빤히 쳐다보니 좀 민망해서 시현은 일부러 말을 돌렸다.

16551949426261.jpg“아까 봤지? 걔 실려 가는 거.”

이름도 입에 담기 싫어서 ‘걔’라고 말해도 태하는 잘 알아듣고 대답했다.

16551949466341.jpg“살면서 본 것 중에 제일 훈훈한 광경이던데.”

16551949426261.jpg“그거, 미주 씨가 일부러 그런 거야.”

16551949466341.jpg“음?”

시현은 사정을 설명해주었다.

16551949426261.jpg“저번엔 걔 발 걸어서 뜨거운 커피도 엎어줬대.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눈치도 빠르지 뭐야.”

태하는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16551949466341.jpg“그랬단 말이지……?”

주먹밥을 다 먹고 나서 시현은 몸을 일으켰다.

16551949426261.jpg“맛있게 잘 먹었어. 나 자리 너무 오래 비웠다, 이만 가볼게.”

나가려는 시현을 태하가 붙잡고 물었다.

16551949466341.jpg“이따 저녁엔 뭐 먹고 싶어?”

슈트를 완벽하게 차려입은 남자에게서 마치 엄마 같은 질문이 나오니 조금 우스웠다.

16551949426261.jpg“얻어먹는 주제에 뭘. 뭐든지 먹여만 줘도 황송하지.”

16551949466341.jpg“예전에 좋아했던 음식들은 기억하고 있는데, 혹시 새로 좋아하게 된 게 있다든가 하면 말해. 만들어볼 테니까.”

마치 주문하면 다 해줄 것처럼 말해서, 시현은 생각난 김에 물었다.

16551949426261.jpg“너 요리 언제 그렇게 배웠니?”

16551949466341.jpg“군대에서 양식이랑 한식 조리사 땄어. 국가기술검정이란 게 있어서.”

세상에, 군대에서까지 바쁘게 살았구나. 한참 입을 다물지 못하던 시현은 문득 짚이는 것이 있었다.

16551949426261.jpg“설마 나 밥 해주려고 딴 건 아니지?”

16551949466341.jpg“그럼 뭐 하러 땄겠어?”

갑자기 태하가 심술궂은 표정을 했다.

16551949466341.jpg“그런데 제대하고 달려가 보니까 집 앞에서 웬 놈하고 껴안고 뽀뽀하고 있더군.”

16551949426261.jpg“어머!”

시현은 얼굴을 붉혔다. 그때쯤이면 우진과 사귄 지 얼마 안 됐을 때니까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겠다.

16551949426261.jpg“그래서 나랑 연락 끊고 잠수 탔던 거야?”

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16551949466341.jpg“그때는 다른 방법이 없었어. 그렇게 행복해 보이는데 차마 방해할 수도 없고. 내 눈으로 보자니 미치겠고.”

왜 군대 갔다가 그 길로 연락이 끊겼는지 여태 모르고 있었는데, 이제야 미스터리가 풀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군대 안에서도 내내 제 생각만 하고 있었을 태하를 생각하니 뒤늦게 심장이 찌르듯 콕콕 아파 왔다. 미안하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16551949466341.jpg“미안해.”

그 말이 엉뚱하게도 태하의 입에서 나오는 바람에 시현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16551949426261.jpg“뭐가?”

16551949466341.jpg“그때 내가 용기를 냈으면, 당신이 여태 시간 낭비 안 해도 됐을지 모르잖아.”

진지한 얼굴로 하는 말에 시현은 웃었다.

16551949426261.jpg“그게 왜 네 잘못이야. 남자 보는 눈 없는 내 잘못이지.”

게다가 그때 태하에게 고백을 받았으면 백 퍼센트 거절했을 거였다. 그때의 그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어렸고, 자신은 우진에게 푹 빠져 있었을 때니까.

16551949426261.jpg“그리고 나, 그 사람 만났던 거 후회 안 해. 그런 경험도 해 봐야 진짜 좋은 사람 만났을 때 좋은 사람인 줄 알아보지.”

16551949466341.jpg“아.”

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16551949466341.jpg“그럼 이제 드디어 나를 알아볼 때가 왔군.”

언제나처럼 웃음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얼굴로 하는 농담에, 시현은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그녀의 웃는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하가 툭 하고 중얼거렸다.

16551949466341.jpg“……고마워. 나한테 기회를 줘서.”

마음을 받아주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나도 너를 좋아한다고 말한 것도 아닌데. 단지, 이제 밀어내지만 않겠다고 했을 뿐인데. 바쁜 아침부터 묵묵히 주먹밥을 쌌을 남자는, 진지한 얼굴로 그녀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주먹밥은 벌써 다 먹었는데 왠지 새삼스레 목이 메었다.

16551949426261.jpg“팀장님이 찾으시겠다. 그럼 가 볼게.”

얼른 돌아서서 사무실을 나가는 시현의 뒷모습을, 태하가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 오후 근무 중에 팀장이 문득 시현을 불렀다.

16551949426278.jpg“어이, 강시현이. 잠깐 나 좀 보지?”

16551949426261.jpg“네, 팀장님.”

무슨 일인지 팀장은 시현을 데리고 일부러 사무실 구석까지 갔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16551949426278.jpg“내 조카 녀석이 말이야. 올해 서른세 살이거든?”

16551949426261.jpg“네.”

16551949426278.jpg“삼송전자 과장이야. 대학은 K대 나왔고, 마포에 작은 아파트도 한 채 있어.”

사람을 불러 놓고 뜬금없이 웬 조카 자랑이람. 시현은 무슨 소린지도 모르고 영혼 없이 장단을 맞췄다.

16551949426261.jpg“와, 멋있는 조카님을 두셨네요.”

16551949426278.jpg“그렇지? 강 대리가 보기에도 나쁘지 않지?”

16551949426261.jpg“어휴, 나쁘지 않긴요? 저랑 동갑인데 서울에 집도 있으시고, 너무 훌륭하죠.”

시현의 칭찬에 팀장이 흡족한 듯이 말했다.

16551949426278.jpg“성격도 무던하고, 얼굴도 내가 보기엔 남자답게 괜찮거든. 그러니까 한번 만나 보라고.”

16551949426261.jpg“예?”

마지막 말에 시현은 하마터면 펄쩍 뛸 뻔했다. 소개팅이었나!

16551949426261.jpg“아닙니다, 팀장님. 저 괜찮습니다.”

16551949426278.jpg“아 누가 뭐 당장 어쩌랬어? 그냥 젊은 사람들끼리 밥이나 한번 먹으라는 거지.”

말로는 ‘강시현이 저 화상’ 어쩌고 하면서 구박하지만, 실은 저를 아껴 주는 상사라는 건 알고 있었다. 파혼한 후로는 더 그래서, 어디 나갔다 오면 슬그머니 간식 같은 걸 시현의 책상에 놓아두기도 했다. 파혼한 지 얼마 안 된 거 뻔히 알면서 자기 조카를 소개해 줄 정도면 무척이나 시현을 좋게 봐준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까 마음만은 무척 고맙다. 하지만……. 시현은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16551949426261.jpg“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하지만 저 정말 괜찮아요, 팀장님.”

16551949426278.jpg“사양할 거 없어. 이따 저녁에 회사 앞으로 오라고 해놨으니까, 마음 편하게 만나 봐.”

눈치 없는 팀장은 심지어 불도저였다. 벌써 약속까지 잡았다는 것 아닌가.

16551949466341.jpg“누구를 만난다는 겁니까?”

등 뒤에서 불쑥 들려온 태하의 목소리에 시현은 핏속까지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16551949426278.jpg“아, 예. 실은 제 조카 놈이 장가 갈 때가 됐는데 아직 여자친구가 없어서요.”

팀장이 시현의 어깨너머를 바라보며 말했다.

16551949426278.jpg“이따 강 대리랑 만나서 밥 한번 먹으라고 했습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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