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얘가 어딜 봐서 남자로 보이니?2022.03.15.
- 오늘 청첩장 모임 하기로 했잖아, 다섯 시에!
시현은 잠이 확 달아나서 벌떡 일어났다. 맞다, 청첩장 모임! 대학 시절 친구들 네 명을 모아서 식사를 대접하면서 청첩장을 나눠 주기로 약속했는데, 그걸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 결혼은 이미 파토가 났다는 거지. 시현은 어쩔 줄을 몰랐다. 파혼 후에 할 일 리스트까지 만들어서 체크했는데도 어쩐지 뭐가 빠진 기분이더라니! 황급히 시계를 보자 이미 다섯 시에서 오 분이 지나 있었다.
- 목소리만 들어도 알겠다. 너 낮잠 잤지?
주은이 깔깔대고 웃었다.
- 정신 차리고 빨리 택시 타고 와, 근처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손바닥에 식은땀이 다 배었다. 이미 다 와서 기다리고 있다는데, 이건 안 갈 수도 없게 되었다.
“진짜 미안하다, 조금만 앉아 있어. 내가 얼른 갈게.”
전화를 끊고 나서 시현은 발을 동동 굴렀다. 뭐부터 해야 하지? 일단 빠르게 세수를 하고 대충 옷을 꿰어 입고, 화장은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어차피 파혼했다고 말하러 가는데 꾸미고 가 봐야 무슨 소용일까. 회사에서야 초라하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신경 썼지만, 서로 알 거 모를 거 다 아는 친구들 앞에서까지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머릿속은 복잡하고 마음은 급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뛰어들려다가, 마찬가지로 뛰어나오는 사람에게 부딪쳐 하마터면 넘어질 뻔 했다. 다름 아닌 태하였다.
“많이 기다렸지? 가자.”
서둘러 달려온 기색이 역력해서 이 와중에도 웃음이 났다. 조금 서운했던 마음마저 깨끗이 다 날아갔다.
“진짜 미안한데 태하야, 나 지금 급한 일이 생겨서 빨리 어디 좀 가봐야 돼.”
“어딘데?”
시현은 조금 망설이다 대답했다.
“그게…… 청첩장 모임.”
“뭐?”
“대학교 때 친구들이랑 만나서 밥 사면서 청첩장 나눠주기로 했는데, 취소하는 걸 깜빡 잊어버렸어. 지금 다들 모여서 기다리고 있대.”
태하가 한숨을 내쉬고 도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가자. 데려다줄게.”
“괜찮아, 택시 타면 돼.”
“됐으니까 빨리 와.”
다행히 약속 장소가 멀지는 않았지만 도착하니 벌써 다섯 시 반이었다. 태하가 카페 앞에 차를 세워주자마자 시현은 급하게 뛰어내렸다.
“고마워, 태하야. 이따가 집에서 보자!”
시현이 카페에 나타나자 기다리고 있던 주은을 비롯한 친구들이 반가워했다.
“진짜 오랜만이다, 강시현!”
“얼, 신부관리 받나 본데? 화장도 안 했는데 아주 그냥 피부에서 막 광채가 나셔.”
“뭐 하다 이렇게 늦은 거야. 예비 신랑이랑 있다가 왔어?”
앞다투어 한마디씩 하는 친구들을 향해, 시현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미안하다 얘들아. 나 결혼 안 하게 됐어.”
순간 다들 움찔했다. 모두가 ‘지금 내가 뭘 들었나’ 하는 표정으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됐어. 벌써 한 2주 됐는데, 이것저것 예약 취소하고 정리하고 하느라 하도 정신이 없어서 너희한테 알리는 걸 깜빡했어. 미안.”
“대체 어쩌다가 그렇게 됐는데?”
시현은 잠시 고뇌했다. 회사 동료들이야 친해도 깊이 캐묻지는 않으니까 성격 차이라고 대충 눙치고 넘어갈 수 있었지만, 친구들은 어림도 없다. 지금은 사회에 나와서 살기 바쁘다 보니 연락도 많이 뜸해졌지만, 대학 때만 해도 수강신청 다 맞춰서 전공은 물론 교양까지 같이 듣던 과 동기들이었다. 이달 용돈이 얼마 남았는지, 지난 학기 학점이 얼마였는지 소수점까지 서로 다 알던 사이다. 결국 시현은 한마디로 고백했다.
“바람났어, 그 인간이.”
한참 침묵이 흐른 끝에, 주은이 남은 커피를 단숨에 마셔버리고 말했다.
“얘들아, 일어나자. 이건 술 먹어야 된다.”
* 그렇게 해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하려던 모임은, 바로 옆에 있는 고깃집으로 급 장소가 변경되고 말았다. 지글지글, 맛있는 소리를 내며 솥뚜껑 위에 삼겹살과 함께 김치가 익어갔다. 그러나 모두들 음식에는 관심이 없고 소주병만 줄줄이 비어갔다. 얘기 자체가 술을 부르는 얘기였다.
“세상에, 신혼집 침대 위에서 그러고 있었단 말이야?”
“그렇다니까. 아주 둘이 착 달라붙어 있더라.”
고자질하듯 일러바치고 한 잔.
“걸리고 나서 뭐래? 싹싹 빌어?”
“빌긴? 첨엔 이게 무슨 짓이냐고 지가 소리치면서 내 휴대폰 빼앗아가서 부수더라.”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한 잔.
“그래서 증거는? 완전히 없어진 거야?”
“그럴 것 같아서 찍자마자 미리 다른 데 전송해놨지. 그 소리 하니까 그제야 무릎 꿇더라고.”
의기양양하게 한 잔.
“그지 같은 새끼!”
“우리한테 전화 안 하고 뭐 했냐?”
“그러게, 우리가 달려가서 그 기집애 머리를 죄 쥐어뜯어 놨을 텐데!”
욕을 퍼붓고 입 씻느라 또 한 잔.
“잘됐다, 야. 그런 거지 같은 인간인 거, 결혼 전에 알아서 얼마나 다행이야?”
“그러게. 조상님이 도왔다, 강시현.”
비록 어디 가서 자랑할 만한 얘기는 아니지만, 친구들이 실컷 욕해주는 걸 들으니 한편으론 속이 다 시원했다. 태하나 수연은 욕을 하는 타입이 아니고, 미주는 입보다는 몸으로 실천하는 길을 택했으니까.
“속상해하지 마, 시현아. 내가 좋은 남자 소개해줄게.”
“됐어. 이제 남자 소리만 들어도 지긋지긋하다.”
시현은 손을 마구 내저었다. 어쩌다 보니 태하와 미묘한 사이가 돼버리긴 했지만, 그 외의 남자를 만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말만 들어도 끔찍하다. 어쩌다 보니 오늘 나온 친구들 넷이 모두 미혼인데, 그중 두 명은 아예 연애조차 거부하는 철저한 비혼주의자였다.
“이렇게 된 거, 그냥 연애 같은 거 때려치우고 우리끼리 재밌게 놀러나 다니면서 살자.”
“배신 때리기 없기다?”
친구들은 신이 나서 시현을 끌어들였다. 아니, 그렇다고 영원히 솔로로 살 생각은 없는데…… 하고 생각했지만, 마침 소주잔이 부딪치는 바람에 시현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냥 그런 걸로 해두지 뭐.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의 수다는 밤 열 시를 훌쩍 넘어서야 겨우 끝이 났다. 2차 가자고 조르는 친구들을, 시현은 겨우 말렸다.
“나 사실 요즘 술 안 마셔. 오늘은 너희 만나서 오랜만에 마신 거야.”
우진과의 경험을 통해서, 술이 해결해주는 일은 세상에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도 원래 주량보다 훨씬 적게 마셨다. 딱 기분 좋을 정도까지만.
“자, 오늘은 내가 쏜다!”
시현이 외치며 계산대로 향하자 친구들이 양쪽에서 팔을 붙잡고 말렸다.
“네가 왜 쏴? 넣어둬, 넣어둬.”
“오늘 나 때문에 모인 건데 당연히 내가 내야지.”
“무슨 소리야. 파혼한 것도 억울한데 왜 술값까지 내냐?”
결국 시현은 친구들에게 밀려 지갑조차 꺼내보지 못 했다.
“가자, 무적의 솔로부대!”
친구들과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하고 식당에서 나왔을 때였다. 건너편 전봇대 아래에 눈에 익은 대형 검정 세단이 서 있었다. 태하 차랑 비슷하네, 하고 생각하며 택시를 부르려는데, 바로 그 차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뒤늦게 발견하고 시현은 술기운이 반쯤 날아가 버렸다.
“뭐야? 너 설마 여태 나 기다린 거야?”
얼른 달려가서 묻자 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술자리 끝나면 데려가려고.”
시현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까 여기 데려다준 게 다섯 시 반이었고 지금이 열 시 반인데, 그럼 장장 다섯 시간을 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거잖아.
“세상에, 허리 안 아파?”
“괜찮아. 차에서 일하느라 시간 금방 갔어.”
“저녁은?”
“아직.”
“너 바보야? 왜 밥까지 굶고 기다리고 그래, 그냥 집에 가 있지!”
안타까워서 발을 동동 구르다 말고, 시현은 문득 등이 따가운 것을 느꼈다. 두려움에 떨며 돌아보자 친구들이 모두 같은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 나만 어이없냐?”
“나도 어이없어.”
“뭐, 남자 소리만 들어도 지긋지긋해?”
“아 씨, 술값 아까워.”
마치 사기를 당한 듯한 반응이었다. 아까 솔로부대 대원이 늘었다고 좋아했던 친구 둘은 변절자라도 보듯 시현을 바라보았고, 주은은 눈을 부라리며 손가락질까지 했다.
“저거, 저거, 진짜! 글쎄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미치겠네. 시현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에, 태하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친구들에게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처음 뵙겠습니다. 윤태하라고 합니다.”
시현의 친구들을 향해, 태하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키가 훌쩍 큰 조각상 같은 남자가 다가와서 인사를 건네자 친구들은 어쩔 줄을 몰랐다. 방금 말술을 마시고 나온 주제에 갑자기 조신한 척 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 뺨에 손을 갖다 대고, 간드러진 목소리를 꾸며내고, 난리도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호호호. 저희 시현이 대학교 친구들이에요.”
“초면에 참 잘생기셨네요.”
이 와중에 당당한 것은 오로지 주은뿐이었다.
“우리 처음 보는 거 아니잖아요? 그쪽 중학교 때도 몇 번 봤고, 저번에 다른 데서도 잠깐 봤고.”
나머지 친구 셋이 어리둥절해했다.
“중학교 때라니?”
“너네 기억 안 나? 왜 시현이가 알바 해서 키우던 애. 그때도 되게 잘생겨서, 우리가 쟤 나중에 아이돌 하면 인기 터지겠다고 했었잖아.”
놀라서 태하를 다시 쳐다보는 친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 이분이 그때 걔라고?”
“대박, 그러고 보니까 맞네!”
“세상에!”
놀라서 새삼 태하의 얼굴을 바라보던 친구들이, 뒤이어 약속이나 한 것 같이 한꺼번에 시현을 돌아보았다. 그때 호텔에서 주은이 쳐다봤던 눈빛과 정확히 같은 눈빛이었다.
“우리 시현이는 다 계획이 있었…….”
내가 그 말이 나올 줄 알았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현은 외쳤다.
“아니거든?”
시현은 양손까지 내저으며 필사적으로 말했다.
“오해하지 마. 우리 절대 그런 사이 아니야!”
물론 믿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 사이도 아닌데 차에서 다섯 시간을 기다려?”
“아까 집에 가 있지 그랬냐고 한 건 뭐고?”
“헐, 설마 같이 사는 거야?”
얼마 안 남은 술기운까지 다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이건 절대로 뒤집어쓸 수 없다. 시현은 정색을 하고 외쳤다.
“너네 미쳤니? 나 파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럼 지금 이 상황은 뭐지?”
“그냥 어쩌다 우연히 이웃집에 살게 돼서 그래.”
그래도 친구들은 의혹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너희야 오랜만에 봐서 그렇지, 내 눈에는 그냥 애기야, 애기.”
순간 태하의 얼굴이 굳어졌지만 시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뻗어 그의 볼을 양손으로 꼬집었다. 입으로는 오구오구, 하는 소리까지 내면서.
“너희는 얘가 어딜 봐서 남자로 보이니? 이렇게 귀여운데.”
볼이 찌익, 늘어난 채로 태하는 묵묵히 시현을 내려다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