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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이래도 내가 남자로 안 보여? (49/181)

#49. 이래도 내가 남자로 안 보여?2022.03.18.

16551949965748.jpg“너희는 얘가 어딜 봐서 남자로 보이니? 이렇게 귀여운데.”

볼이 찌익, 늘어난 채로 태하는 묵묵히 시현을 내려다보았다.

16551949965757.jpg“…….”

망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지만 이미 물러날 곳은 없었다.

16551949965748.jpg“우리 태하 배고프겠다. 얼른 집에 가자!”

장승같이 서 있는 태하의 손목을 잡아끌고 시현은 차로 향했다. 운전석 문을 열고 강제로 태하를 밀어 넣다시피 하고, 얼른 옆자리에 올라탔다.

16551949965748.jpg“얘들아, 그럼 또 보자! 연락할게!”

차가 출발했다. 친구들이 멀어질 때까지 창밖으로 손을 흔들고 나서야, 시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태하를 쳐다보았다.

16551949965748.jpg“저기, 태하야…….”

말하다 말고 시현은 입을 다물었다. 핸들을 잡은 옆얼굴이 완전히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차 안의 공기가 숨이 막힐 듯이 무겁게 느껴져서, 시현은 새삼 자신이 저지른 일의 중대함을 깨달았다. 다섯 시간이나 기다려준 사람한테, 친한 친구들 앞에서 볼 꼬집으며 오구오구 애기 취급을 했다. 그것도 나를 좋아하는 거 뻔히 알면서. 이건 아무리 너그러운 태하라도 화가 나는 게 맞았다.

16551949965748.jpg“정말 미안해. 방금은 상황이…….”

16551949965757.jpg“됐어.”

태하가 내뱉듯 말했다.

16551949965757.jpg“어차피 남자로 안 보는 거 알고 있었으니까.”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비록 무뚝뚝하지만 저에게만은 늘 쉬운 사람이었던 태하의 차디찬 반응에 시현은 어쩔 줄을 몰랐다.

16551949965748.jpg“아니, 내가 지금 쟤네랑 장장 다섯 시간 동안 그것들 욕하고 나왔단 말이야. 근데 하필 지금 오해당하는 건 너도 좀 그렇잖아. 응?”

필사적으로 변명했지만 단단히 마음이 상했는지, 태하는 시현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집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서는 말 한마디 없이 팔짱을 낀 채 앞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내리지 않고 뭐 하느냐는 듯이. 이건 맨입으로는 안 되겠다. 시현은 큰마음을 먹고 중얼거렸다.

16551949965748.jpg“너, 이번 한 번만이다.”

시현은 눈을 질끈 감고 태하에게로 입술을 가져갔다. 볼에 살짝 뽀뽀할 셈이었다. 쪽, 하고 나면 화난 마음도 스르르 풀리지 않을까. 태하는 나를 좋아하니까. 뭐 그런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그런데 정작 입술에 닿은 것은 매끄러운 피부가 아닌, 촉촉하고 부드러운 무엇이었다. 닿는 순간 바로 알았다. 왜냐하면 전에도 한 번 닿아본 적이 있으니까! 그러나 전에는 단순히 잠깐 닿았다가 떨어졌던 그것이, 이번에는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떨어지기는커녕, 그대로 파고드는 것처럼 깊이 입 맞추며 몸을 껴안아 왔다.

16551949965748.jpg“……!”

놀라서 눈을 뜨자 바로 눈앞에 긴 속눈썹이 보이는 바람에 시현은 기겁을 해서 도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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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야가 차단되자 감각 하나하나가 날이 선 듯 뚜렷해졌다. 제 허리를 껴안은 단단한 팔. 델 것같이 뜨거운 입술. 얼굴을 간질이는 향기로운 숨결. 숨 쉴 틈조차 주지 않는 폭풍 같은 입맞춤에 그냥 얼어붙어 있는데 딸각, 하고 안전벨트를 푸는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태하가 이쪽으로 몸을 바짝 밀어붙여 왔다. 그 바람에 시현은 완전히 창문 쪽으로 내몰렸다.

16551949965757.jpg“숨 쉬어.”

짧게 속삭이고 나서, 태하는 다시 입을 맞췄다. 그제야 숨이 가쁜 것을 느끼고 입을 벌리자 공기 대신에 다른 것이 기다렸다는 듯이 밀려들어왔다. 화가 난 남자는 말이 아니라 입술로 말하고 있었다. 당신이 밉다고, 미운데 너무 좋다고. 그래서 화가 난다고. 그러면서도 유리창에 밀어붙여진 시현이 자칫 아플까, 자기 손으로 뒷머리를 단단히 감싸주고 있는 것을 느끼고 한층 더 숨이 가빠졌다. 어떻게 숨을 쉬는지도 잊어버려서 시현은 그만 무서워졌다. 잠깐만, 하듯 밀어내 보았지만 단단하고 넓은 가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꼭 껴안으며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마치 한 점 남김없이 다 빼앗아가고 싶다는 듯이. 차 안이 금세 열기로 가득해졌다. 정신이 가물가물해질 때쯤에야 겨우 입술이 떨어졌다.

16551949965757.jpg“이래도 내가 남자로 안 보여?”

원망스러운 듯이 바라보는 갈색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심장이 비명을 질렀다. 시현은 도망치다시피 차에서 내렸다. 그대로 엘리베이터도 못 타고 계단으로 뛰어 올라와서, 집에 들어오자마자 문을 잠그고 침대에 뛰어들어 이불을 뒤집어썼다.

16551949965748.jpg“하아, 하아…….”

방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시현이 떨리는 손으로 제 입술을 가렸다. * 미주의 스틸레토 힐에 밟혀 병원에 실려 갔던 보라는 발등 뼈 골절 진단을 받았다. 다행히 수술은 면했지만 당분간은 깁스를 해야 한다는 소견이었다. 5월 초, 벌써 낮에는 여름 뺨치게 뜨거웠다. 앞으로 점점 더워질 일만 남은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눈앞이 캄캄해졌다. 게다가 보라는 패션에도 무척 신경을 썼다. 여신이라는 별명은 거저 얻은 게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 깁스를 하고 목발까지 짚으니 스타일이 이만저만 구겨지는 게 아니었다. 이래저래 이를 갈며 보라는 며칠 만에 회사에 출근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출근하자마자 떡하니 복도에서 미주를 마주쳤다.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며 걷는 보라를 보고 미주가 보란 듯이 풋, 하고 웃었다. 보라는 이를 악물고 미주의 팔을 붙잡아 끌었다. 미주는 얘 좀 봐라, 하는 표정으로 순순히 끌려왔다. 빈 회의실에 미주를 밀어 넣고, 보라는 다짜고짜 다그쳤다.

16551949982631.jpg“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16551949982635.jpg“그거야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지 않나?”

미주가 비웃듯이 대꾸했다.

16551949982631.jpg“내가 당신 남자 뺏었어?”

16551949982635.jpg“너 아까부터 선배한테 말이 되게 짧다?”

16551949982631.jpg“길게 할 기분이 아니거든.”

강시현 그년이 저와 친한 이미주에게 다 일러바친 게 틀림없다고 보라는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16551949982631.jpg“뺏긴 년이 멍청한 거지. 그러게 누가 자기 남자 간수 하나 똑바로 못 하래?”

그래서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16551949982631.jpg“여자가 오죽 매력이 없으면 남자가 신혼집까지 다른 여자를 끌어들였겠어? 창피한 줄도 모르고 떠벌리고 다니긴.”

미주는 방금 들은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반쯤 입을 벌리고 보라를 쳐다보았다.

16551949982635.jpg“뭘 했다고?”

보라는 움찔했다. 뭐야, 강시현한테 다 들은 줄 알았는데?

16551949982635.jpg“목걸이 받은 게 다가 아니란 말이야? 시현 씨 신혼집까지 갔었다고? 정말이야?”

다그치는 미주에게, 보라가 마주 대들었다.

16551949982631.jpg“다 들어놓고 왜 시치미야? 강시현이 일러바쳐서 내 발 이렇게 만들어놓은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16551949982635.jpg“시현 씨가 너 같은 줄 아니?”

세상에, 시현 씨 불쌍해서 어쩜 좋아. 혼자 가슴을 치던 미주가 보라를 노려보았다.

16551949982635.jpg“너 정신 똑바로 차려. 남한테 못 할 짓 하면 그거 살면서 다 돌아와. 대체 무슨 천벌을 받으려고 그런 짓을……!”

16551949982631.jpg“꼰대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그러니까 그 나이 처먹고 여태 남자가 없지.”

16551949982635.jpg“뭐야?”

미주가 기가 막혀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는데, 그때 마침 회의실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보라와 같은 개발팀의 성 과장이었다. 즉 미주가 원앱팀으로 가기 전까지는 미주와도 같은 팀 상사였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성 과장이 놀라서 두 여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16551949996168.jpg“왜 그래? 무슨 일이야? 어?”

지난번에는 저 여우같은 이미주가 먼저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선수를 빼앗겼다. 이번에는 질 수 없다고 생각한 보라는 당장 눈물을 보였다.

16551949982631.jpg“아무것도 아니에요, 흑.”

성 과장은 당장에 미주를 노려보았다.

16551949996168.jpg“이 대리, 보라 씨 야단쳤어?”

미주가 펄쩍 뛰었다.

16551949982635.jpg“어머, 아니에요! 제가 야단칠 일이 뭐가 있다고.”

16551949996168.jpg“그럼 보라 씨가 갑자기 왜 우는데?”

16551949982635.jpg“그거야 제가 아나요? 본인한테 물어보시든지요.”

별 더러운 것도 다 본다는 듯 위아래로 보라를 훑어보고 나서, 미주는 먼저 회의실을 나가 버렸다. 성 과장은 흐느껴 우는 보라를 달래느라 바빴다.

16551949996168.jpg“울지 마, 보라 씨. 왜 그래?”

16551949982631.jpg“이미주 대리님이 저 미워하시나 봐요. 저번에도 일부러 제 발 밟아서 다치게 하셨거든요.”

보라는 훌쩍거리며 은근히 아양을 섞어 일러바쳤다.

16551949996168.jpg“에이, 일부러 그랬을 리가 있나? 아무리 그래도 미주 대리가 그럴 사람은 아닌데.”

16551949982631.jpg“정말이에요!”

보라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매달리듯 성 과장을 쳐다보았다.

16551949982631.jpg“이 대리님이 워낙 발이 넓으시잖아요. 저 앞으로 어떻게 회사 다녀야 할지 모르겠어요.”

마치 비 맞은 강아지 같은 눈망울에, 성 과장의 심장은 그만 화살을 직격으로 얻어맞고 말았다. 울면서 자신에게 의지하는 이 연약하고 가련한 미인을 지켜 주고 싶은 정의감이 마구 불타올랐다.

16551949982631.jpg“대체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걸까요?”

16551949996168.jpg“이게 다 보라 씨가 예뻐서 그래. 알잖아? 노처녀 히스테리. 자기보다 예쁘고 어린 여자 꼴을 못 보는 거라고.”

보라를 달래고 나서, 성 과장은 큰소리를 탕탕 쳤다.

16551949996168.jpg“울지 마, 보라 씨.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앞으로 보라 씨 못 건드리게, 내가 아주 단단히 혼을 내줄 테니까 아무 걱정 마.”

16551949982631.jpg“흑, 과장님……!”

보라는 더 크게 울음을 터뜨리는 척, 성 과장의 가슴에 기대듯 얼굴을 묻었다. 성 과장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어쩔 줄을 몰랐다.

16551949996168.jpg“울지 마, 뚝. 어유, 우리 보라 씨 착하다.”

참고로 성 과장은 멀쩡히 애가 있는 유부남이었다. * 미주는 새삼 시현이 안쓰러워서 어쩔 줄 몰랐다. 시현은 약혼자가 바람을 피웠다고도, 물론 그 상대가 보라라는 것도 말한 적이 없었다. 매일 회사에서 보라 얼굴을 마주치면서, 지금쯤 저 속이 얼마나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을까! 신혼집에서 바람을 피웠다는 얘기까지 듣자 제 속이 다 뒤집어졌다. 생각 같아서는 온 회사에 다 퍼뜨려서 망신을 주고 싶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시현이 입을 다물고 있는데 자신이 어쩔 수 있는 노릇도 아니었다. 화를 애써 가라앉히며 일하고 있는 미주에게 날벼락이 떨어진 것은 그날 오후의 일이었다. 성 과장이 갑자기 미주를 불러내서는 트집을 잡아 펄펄 뛰는 것이었다.

16551949996168.jpg“아니, 아무리 디자이너라지만 스토리보드에 오타나 오류가 있으면 알아서 직접 좀 바꿨어야지. 장사 하루 이틀 해? 이벤트 팝업 날짜, 작년 거 그대로 노출됐잖아!”

듣자마자 미주는 눈치챘다. 아, 이보라 짓이구나! 물론 명분은 일을 잘못했다는 것이니 따질 수도 없어서, 미주는 일단 고개를 숙였다.

16551949982635.jpg“죄송합니다, 과장님.”

원앱팀에 차출된 이후로 개발팀 일은 그쪽에 있는 UI디자이너가 하고 있는데, 이건 작년에 미주가 직접 했던 작업이니까 수정만 좀 해 달라고 부탁해 와서 그냥 해 준 일이었다. 즉 엄밀히 따지자면 제 일도 아니므로, 그야말로 생트집이나 다름없었다.

16551949982635.jpg“당장 수정하겠습니다.”

미주가 고개 숙여 사과해도 성 과장은 조금도 누그러질 기세가 아니었다.

16551949996168.jpg“벌써 이벤트 참여 고객들한테 CS 들어왔는데 어쩔 거야? 응?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삿대질까지 하며 고함을 지르는데, 누군가가 사이에 끼어들었다.

16551949965757.jpg“무슨 일입니까?”

미주를 등 뒤에 숨기듯 가로막고 서서 묻는 사람은 바로 윤태하 본부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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