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욕실에서 마주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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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욕실에서 마주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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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욕실에서 마주친 남자
2022.04.29.
태하가 자석에 이끌린 것처럼 이쪽으로 몸을 기울여 왔다.
입술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10센티미터, 5센티미터…….
시현이 떨리는 마음으로 눈을 감으려는 순간, 철컥 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현의 안전벨트를 풀어 주고, 태하는 바르게 자세를 고쳐 앉고는 말했다.
“이따가 회사에서 봐.”
*
시현이 차에서 내린 후, 태하는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반복했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강시현이 아침에 제 넥타이를 매주고, 볼에 뽀뽀도 해주다니.
그에게는 마치 꿈만 같은 일이었다. 아니, 꿈 그 이상이었다. 오랫동안 짝사랑해 왔어도 이런 상상까지는 감히 해본 적이 없었다.
너무 행복해서 미쳐 버릴 것 같은데, 괴로움도 그에 비례했다.
[차비.]
어쩌자고 그렇게 귀여운 짓을 하는지.
어쩌라고 그렇게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건지.
하마터면 그대로 이성을 잃고 입술을 확 훔쳐 버릴 뻔했다.
손등에 입 맞춘 걸로도 그토록 질색을 하면서 얼른 손을 잡아 빼던 여자가, 그랬다면 얼마나 화를 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그녀와 함께 있는 매 순간이 그에게는 위기와도 같았다.
행복함과 괴로움 사이에서, 남자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떨리는 입술 사이로 깊은 숨을 내뱉었다.
*
“진도 좀 나가고 있나? 본부장님이랑.”
미주의 물음에 시현은 하마터면 커피를 뿜을 뻔했다.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미주를 향해 눈을 흘겼다.
“말 좀 조심해줄래?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설마 여태 그대로인 건 아니지? 저번에 키스했다고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시현은 잠시 갈등했다. 이걸 말을 해야 돼, 말아야 돼?
그러나 한번 말하기가 어렵지 두 번은 쉬웠다. 결국 시현은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손잡고 영화 보고 데이트했어.”
“그리고?”
“그게 다야.”
“다라니? 그럼 데이트 끝나고 각자 그냥 집에 가서 꿀잠 잤단 말이야?”
시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미주는 김이 팍 샜다는 표정을 했다.
“뭐야, 왜 전진은 못 할망정 후진을 하는 거야?”
어지간히 답답했는지 미주는 핀잔까지 주었다.
“시현 씨가 잘못했네. 누나답게 좀 리드를 해줬어야지.”
“했거든?”
시현은 얼굴이 빨개져서 반박했다.
커피 마시고 갈래, 도 했다. 넥타이도 매줬다. 볼에다 뽀뽀까지 하면서 신호를 줬는데도 꿈쩍도 않는 걸 더 이상 어떻게 하란 말인가.
“이만하면 나도 노력할 만큼 한 거 아니야?”
“그러네. 듣고 보니까 시현 씨는 할 만큼 했네.”
미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물여섯 살이면 한창 피가 끓을 나인데, 왜 그러지?”
“그렇지? 이상한 거 맞지?”
그렇지 않아도 불안했던 마음이, 미주의 반응에 안 좋은 쪽으로 무게가 실리기 시작했다.
“혹시 내가 여자로 안 보이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시현은 힘겹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너무 어릴 때부터 봤잖아. 그러니까 혹시 나를 좋아한다는 게 엄마나 큰누나 같은, 그런 의미가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이 들어.”
“음, 그럴 수도 있겠네.”
제 입으로 먼저 말해놓은 주제에, 미주가 심각한 얼굴로 맞장구를 치는 바람에 시현은 그만 가슴이 철렁했다. 진짜 그런 건가?
“그럼 어떡하지?”
갑자기 불안감이 확 엄습해 왔다.
이제 와서 태하가 ‘미안하다, 생각해보니 여자로서 좋아한 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나오면 어떡하지.
나는 벌써 네가 이렇게 좋아져 버렸는데. 머릿속에 온통 네 생각밖에 없는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자 이윽고 미주가 입을 열었다.
“그냥 눈 딱 감고 덮쳐 보든가.”
“뭐?”
“일단 한번 하고 나면 엄마나 큰누나처럼은 안 보일 거 아냐?”
방법은 과격하지만 듣고 보니 맞는 말 같기도 했다. 하지만, 어떻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어. 옆집 사니까 기회야 얼마든지 있을 거 아냐?”
미주가 격려하듯 시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해봐.”
*
“조언 고마워, 미주 씨.”
시현이 뭔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휴게실을 나가고 나서, 미주는 뒤늦게 배꼽을 잡았다.
“아, 진짜 귀여워 죽겠네!”
서른세 살이나 먹고 저렇게 귀여울 일인가. 윤태하 본부장이 왜 죽고 못 사는지 알 것 같다.
[혹시 내가 여자로 안 보이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시현이 한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바람에, 아까 미주는 하마터면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했다.
제삼자의 눈으로 봤을 때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윤태하 본부장은 하루 종일 뭔가 핑계를 대서 자꾸만 원앱팀 사무실에 오지 못해 안달을 했다.
[디자인 수정은 다 됐습니까?]
와서는 다른 사람들한테 이것저것 묻는 척하면서 눈으로는 계속해서 시현의 자리 쪽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결국은 안 되겠는지 시현에게 다가가서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는 것이었다.
[강시현 대리님, 수고 많습니다.]
[아 네, 본부장님. 안녕하세요.]
시현은 또 시현대로, 티를 안 낸답시고 얼굴도 안 쳐다본 채로 대꾸를 했다.
곁에서 보기에는 그게 더 부자연스러웠다. 아니, 본부장이 와서 인사를 하는데 어느 대리가 감히 앉은 채로 모니터 쳐다보면서 대꾸를 한단 말이지?
하여튼 틀림없이 윤태하 본부장은 시현에게 푹 빠져 있었다. 어떻게든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 말 한마디라도 더 붙이고 싶어서 안달을 했다.
[음, 그럴 수도 있겠네.]
그런데도 짐짓 모른 척 맞장구를 쳐서 시현의 불안감을 부채질한 건, 사실은 등 떠밀어준 거였다.
둘이 진도 팍팍 뽑아서 빠르게 결혼식장 들어가라!
*
시현이 뜻밖의 전화를 받은 것은 그날 퇴근 무렵이었다. 미국에서 걸려 온 화상전화였다.
“레온 아저씨?”
휴대폰 화면 속 얼굴을 보고 시현은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태하가 군대 가고 나서 처음이니까, 대략 6년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이제는 그도 사십 대 중반이 되었을 텐데, 여전히 젊고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어쩌면 아저씨는 하나도 안 변하셨어요?”
- 우리 시현이는 많이 변했네.
레온이 딱 한마디 하자마자 시현은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세상에, 아저씨!”
눈 감고 들으면 얼핏 한국사람 같다더니, 태하가 한 말이 사실이었다.
감탄하느라 정작 레온의 말을 이해하는 것이 느려져서, 시현은 한 박자 늦게 씁쓸해졌다. 그런가, 내가 그렇게 많이 변했나. 태하와 사귀게 된 이후로 나이에 유난히 민감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에이, 저도 이제 나이가 있는걸요.’
그렇게 대답하려는데 레온이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 어쩌면 이렇게 예뻐졌어? 사랑하는 여자는 예뻐진다는 말이 사실인가 보다.
시현은 민망해서 어쩔 줄 몰랐다. 벌써 태하한테 다 들으신 거구나.
이럴 땐 뭐라고 해야 할까. 양심도 없이 아드님이랑 사귀어서 죄송하다고 사과해야 하나?
그러나 레온은 시현이 민망해하는 것을 알아차린 듯, 금세 화제를 돌렸다.
- 사실은 시현이한테 부탁이 있어서 연락했는데.
“네, 아저씨. 말씀하세요.”
- 내가 서울에 있는 호텔을 하나 인수하게 됐거든.
“아, 네. 태하한테 들었어요. 그래서 거기 레스토랑에서 식사도 했고요. 엄청 맛있던데요?”
- 이번엔 하룻밤 자면서 좀 봐줬으면 좋겠어서 말이야.
“제가요?”
- 그래. 서비스가 어떤지, 룸 컨디션이 어떤지 좀 체크해줬으면 좋겠어. 물론 숙박은 무료고, 아침식사도 제공할 테니까. 어때, 도와줄래?
“당연하죠. 얼마든지 해드릴게요.”
- 괜찮으면 태하랑 같이 가도 좋고.
“아뇨! 저희 아직 그런 사이 아니에요!”
당황한 나머지 말해 놓고 시현은 뒤늦게 제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따지고 보면 이제 남자친구의 아버지인 셈인데, 할 말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레온은 재미있다는 듯이 눈을 빛냈다.
- 저런, 우리 태하 불쌍해서 어쩌나?
“네?”
- 생각해봐. 이렇게 예쁜 시현이가 곁에 있는데 지금쯤 얼마나 애가 타겠어?
시현은 조금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별로 그런 것 같지 않은걸요.”
레온이 의아한 듯이 물었다.
- 왜 그렇게 생각하지?
차마 태하가 키스조차 하려 들지 않는다는 말은 할 수 없어서, 시현은 돌려서 이야기했다.
“……잘 모르겠어요. 틀림없이 저를 좋아하는 거 같은데도, 가끔씩은 자신이 없어져요.”
그런 시현을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다, 레온은 입을 열었다.
- 처음에 태하 찾았을 때, 진지하게 설득했었어. 나와 함께 미국에 가자고. 내 사업도 다 물려줄 거고, 무엇보다 미국인이 되면 군대 안 가도 되니까 좋지 않으냐고 말이야.
“태하가 싫다고 했었죠.”
- 그래. 이유를 물었더니 태하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모르겠어요.”
- Because she is here. (그녀가 여기 있으니까요.)
레온이 조용히 말했다.
- 그게 누구라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대번에 알았지. 왜냐하면 그전부터 이미 눈치는 채고 있었거든. 시현이를 볼 때는 눈빛부터가 달랐으니까.
시현은 태하가 자신을 볼 때의 눈빛을 떠올렸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고, 세상에 어쩌면 이렇게 예쁜 것이 있을까, 하듯 지그시 바라보는 그 눈빛.
살면서 누구도 그녀를 그런 눈으로 바라봐 준 사람은 없었다. 결혼 직전까지 갔던 약혼자에게서도 그런 눈빛은 본 적이 없다.
- 혹시 시현이는 자기를 바라볼 때 태하 눈빛이 어떤지 알고 있을까?
“네. 알 것 같아요.”
- 그때도 그랬어. 그땐 아직 태하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는데도 말이야. 친아버지인 나를 볼 때하고도 너무 달라서, 조금은 질투도 났어.
레온이 웃었다.
- 그러니까 아마, 조심스러워하고 있는 걸 거야. 시현이가 너무 소중해서, 자칫 실수하면 놓쳐 버릴까 봐.
“정말 그럴까요?”
레온이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시현은 거짓말처럼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태하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그의 아버지가 하는 말이니까.
“아저씨, 한국에는 언제 오세요?”
- 곧 가야지. 정리할 게 많아서 생각보다 늦어지고 있어.
“정리요?”
- 자세한 건 한국에 가서 얘기해줄게.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하고 레온은 윙크를 해 보였다.
*
‘있잖아, 레온 아저씨가 호텔에 하루 묵으면서 좀 봐달라고 하시던데. 괜찮으면 같이 갈래?’
시현은 마음속으로 대사를 달달 외우고 나서야 본부장 사무실로 향했다. 들어오는 시현을 본 태하가 얼른 일어나서 달려왔다.
“웬일로 내 사무실에 먼저 와줬어?”
그제도 보고 어제도 보고 오늘 아침에도 본 얼굴인데, 그렇게나 반가울까.
기쁜 표정이 역력해서 시현은 용기가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래, 레온 아저씨 말이 맞을 거야. 눈빛만 봐도 나를 좋아하는 게 이렇게 뻔히 보이는데.
‘이렇게 된 거, 미주 씨 말대로 눈 딱 감고 가보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시현은 말을 꺼냈다.
“저기, 태하야. 오늘 저녁에 뭐 해?”
그러나 돌아온 것은 김빠지는 대답이었다.
“내 회사에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할 것 같아. 어쩌면 오늘 밤엔 집에 못 들어갈 수도 있고.”
“아, 그렇구나. 잘 다녀와, 너무 무리하지 말고.”
시현은 실망하는 한편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무턱대고 같이 호텔 갈래, 하고 말했으면 엄청 민망할 뻔했다.
“그런데 그건 왜?”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저녁에 맛있는 거라도 먹으러 갈까 했지.”
태하는 미안한 듯이 말했다.
“오늘 밤만 혼자 있어. 내일 아침에 일찍 집에 갈 테니까, 같이 아침 먹자.”
자기가 더 서운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시현은 차마 서운한 티도 내지 못했다.
*
결국 호텔에는 시현 혼자 묵게 되었다. 하룻밤 숙박을 위해 가볍게 챙긴 짐을 가지고 체크인하면서, 시현은 약간 시무룩해져 있었다.
‘왜 하필 오늘 일이 생기고 그러는 거야.’
어느덧 태하를 원망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시현은 제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바보야, 일이 있는 걸 그럼 어쩌라고?’
시현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렇게 된 거, 호캉스 왔다고 생각하고 즐겁게 푹 쉬고 가야지!
“와아.”
객실 문을 연 순간 감탄부터 나왔다. 침대가 아니라 넓은 거실과 소파가 보였기 때문에.
‘이게 말로만 듣던 스위트룸이라는 건가 보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시현은 객실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한층 더 넓고 화려했다. 대리석으로 된 테이블과 높은 천장에 설치된 세련된 디자인의 샹들리에가 손님을 환영하듯 반짝거렸다.
‘대체 여긴 하룻밤에 얼마짜리 방이야?’
응접실과 파우더룸 따위를 돌아보고 침실로 향하는데, 문득 욕실 안에서 물소리가 들려와서 시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가 물을 틀어놨나?’
수도꼭지는 잠가야지, 하고 생각하고 욕실 문을 여는 순간 안에서 더운 김이 확 새어나왔다.
당황하는 순간, 커다란 스파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는 남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태하였다.
“……!”
시현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